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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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21호

'''122호'''

123호
사직단
'''창덕궁'''
창경궁



[image]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colbgcolor=#315288> '''창덕궁'''
昌德宮 | Changdeokgung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550,916㎡
'''지정연도'''
1963년 1월 1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404년(태종 4년)
'''링크'''
공식 홈페이지

[image]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colbgcolor=#aa2951> '''창덕궁'''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Ensemble du palais de Changdeokgung

'''지정번호'''
816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2], (iii)[3], (iv)[4]
}}}}}}
창덕궁 전경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正殿, 仁政殿)[5]
순조 때 그려진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당시 모습을 그렸다.
동궐도를 바탕으로 3D로 복원한 창덕궁 전경
1. 개요
1.1. 경복궁보다 광대・유구한 정궁 지위
2. 역사
3. 관람
4. 기타
5. 주요 건축
5.1. 궁문
5.2. 외조
5.2.1. 외전
5.2.2. 궐내각사[6]
5.3. 내조
5.3.1. 내전(內殿)
5.3.2. 동궁
5.4. 후원(비원)
5.4.1. 부용지 일대
5.4.2. 연경당 권역
5.4.4. 애련정 권역
5.4.5. 관람정 권역
5.4.6. 그 외
5.5. 낙선재 권역
5.6. 구 선원전 권역
5.7. 신 선원전 권역
5.8. 기타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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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 - 대한제국시대의 궁궐.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7]
1404년(태종 4년) 조선의 제3대 임금태종한양 재천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다.[8] 조선 전기에는 정궁 경복궁에 이은 제2의 궁궐 역할을 했으며,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조선 후기에는 법궁 겸 정궁(正宮)의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 못지 않게 쓰임새가 잦았던 궁궐이었고, 반대로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용하느라 창덕궁을 떠나 있었을 때도 많았다. 1868년(고종6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궁의 지위를 잃었고, 1897년 아관파천 후에는 덕수궁이 황궁이 되었으나, 1907년 순종이 이어해 다시 황궁(皇宮)이 되어 마지막 순간의 대한제국과 그 운명을 함께했던 궁궐이다.
왕가의 주거지인 창덕궁과 양반의 주거지인 양동마을, 하회마을이 모두 세계유산에 등재된 점은 특기할만 하다는 견해도 있다.[9]

1.1. 경복궁보다 광대・유구한 정궁 지위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 2가지는 경복궁의 '''2곱절'''이나 넘는 시기 동안 정궁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과, 한양 5대 고궁 중 그나마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10]
이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꼽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먼저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275년''' 간은 복구하지도 않았던 궁궐이다. 즉,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이 정궁이었던 기간은 '''150년 안팎이다.''' 창덕궁은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계속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지만, 경복궁은 조선 극초기와 고종 시기 초, 중반에만 정궁 역할을 수행했다. 민간 통념과 달리 역사성이 짧다.
창덕궁이 단순 역사성이나 정궁의 지위 유지 시기 면에서 경복궁보다 우월하다. 뿐만 아니라 '''원형 보존성'''도 이 같은 의견들을 크게 뒷받침한다. 경복궁 대부분의 전각들은 길어야 19세기, 대부분은 광복 이후에 새로 복원한 것이라 깔끔하다 못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내지만,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은 대부분 원형이기에 무겁다 못해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기염을 토했다.[11][1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에도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하였다. 즉, 조선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냈고, 거기서 사망했다.
이같은 위엄에도 대중들의 대우는 다소 박한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궁궐 덕후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궁 맛(!)을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보단 창덕궁/창경궁에 가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경복궁은 대중성이 넘사벽인지라 인파가 인산인해하지만,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이에 비해 한산한 편이라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차라리 창덕궁에 가라는 나름의 궁덕후들의 꿀팁이다.

2. 역사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1399년 옛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405년에 완공되었고 그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태종은 창덕궁이 완공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13] 140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14]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춰진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된 이후에도 창덕궁은 계속 증축되었다. 14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세워졌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이 완공된 후 1406년부터 태종은 비원(秘苑)이라고도 (잘못) 불리는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 데다가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 위주로 지어졌다. 때문에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外殿)은 매우 조촐하게 지어졌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3칸 규모의 작은 것이었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는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의 공사로 인정전이 5칸 규모로 재건축되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존중해서 지어져 있지만,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심지어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창덕궁의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고자 했으며, 특히 창덕궁 내에 위치한 종묘를 묘로 봤을 때 주변의 언덕은 풍수지리상 경관을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동양의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며,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과감한 창덕궁의 배치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심지어 1419년(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하였다는 명목으로 하옥시키고 상량까지 한 행각(복도로 쓰이는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곳에는 담만 쌓게 하였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사면되어 이후로도 계속 이 공사 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후에 창덕궁 역시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이다.
[image]
박자청이 설계했던 당시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1560-1561년)'''의 창덕궁이다. 당시에는 인정문이 중층이었고 좌우 행랑에 현재는 없는 중층 십자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태종은 일단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창덕궁 바로 동쪽에 수강궁(壽康宮, 현재의 창경궁)을 지어 그곳에 거처를 옮겼다. 일단 태종이 창덕궁 증축 공사를 벌였지만, 실질적인 공사 관리는 새로 주상이 된 세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만, 박자청 하옥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배후에서 태종이 항상 매의 눈으로 공사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창덕궁 공사 관리 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세종을 가까운 창덕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세종은 창덕궁보다 경복궁을 훨씬 선호했다. 세종은 태종의 승하 직후 경복궁 개축 공사를 명했고, 집권 중기 이후 경복궁을 치세의 중심지로 삼았다. 세종은 자신의 왕도 정치(의정부서사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널찍한 경복궁이 보다 적합하다고 여긴 듯하다. 특히 세종이 자신의 정치의 핵심으로 삼았던 집현전을 활용하기에 경복궁이 더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경복궁에다가 커다란 집현전 건물을 지었는데, 이는 비좁은 창덕궁의 집현전보다 훨씬 컸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가 다시한번 증개축되었다. 이후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였다. 이를 위해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의 세 배 정도로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壽康宮)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하였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15] 또한 경복궁에서 피비린내 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꺼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초기 한성을 버린 선조의 파천으로 궁이 버려지자, 경복궁 모두는 전소되었다(1592년). (주동자가 백성인지 왜구인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1593년 환궁한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죽기 3년전인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완공되었다.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고, 1년 후인 1610년에야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법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하였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조 치세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인조 25년인 1647년에야 준공되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16] 다만,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17]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인조 10년 소성대비가 연루된 저주사건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진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어버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의 정치적 사건의 다수가 창덕궁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18]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의 상당 부분이 다시 한번 전소되었다. 소실되기 전 창덕궁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소실되고 말았다.
1868년 경복궁이 (재)중건되면서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1897년부터는 덕수궁이 황궁이 되었으나, 1907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39년만에 도로 정궁이자 황궁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 이왕으로서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 짓기도 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1947년 미군정에 의해 정부에 모두 몰수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문화재청) 소유가 되었지만, 순정효황후, 영친왕, 영친왕비,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일부 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 거주하다가 마지막 인물인 영친왕비의 별세로 인해 완전히 구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돈화문(敦化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대조전(大造殿) 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의 가치도 높다.

3. 관람


  • 2010년 5월 1일자로 후원 등 일부를 제외하고 전면 자유 관람으로 바뀌었다.[19][20] 후원(금원)의 경우 정해진 시간마다 해설사를 동행하여 약 100여 명의 일정한 인원만이 입장 가능하며 관람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다. 사실상 창덕궁의 명소로 꼽히는 곳은 후원이기 때문에 창덕궁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자유 관람뿐만 아니라 해설사와 같이 들어가는 코스도 가봐야 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제한을 둬서 출입을 통제시키는 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출입이 통제된 만큼 내부 환경, 특히 자연경관의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간단한 음료수 이외의 음식물 반입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후원 내에도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단가가 높은 편(6천원에서 8천원 사이, 왔다갔다하므로 여기서 파는 음료수 등은 물가에 비해 비싸다)이므로 음료수나 물은 미리 준비해 챙겨가는 편이 좋다. 특히 여름에 매점에서 판매하는 부채의 경우 같은 물건을 바로 밑의 인사동에서 반값에 팔고 있다.[21]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인사동이나 후원 입장 전의 기념품관에서 사면 된다.
  • 후원은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후원 특별 관람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단풍철인 11월은 후원 관람의 극성수기에 해당해서 인터넷으로 예매하려면 광클은 필수다. 예약 취소분은 현장에서 판매하지만 봄가을 날씨 좋은 철에는 예매 경쟁이 치열해서 떨렁떨렁 가면 빈자리가 안 난다.
  • 돈화문에서 후원 입구까지는 거리가 생각보다 멀기 때문에 관람 공지에서도 출발 20분 전까지는 도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매 표에서는 시간을 초과하면 취소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거 없고, 예매 표만 인터넷에서 출력해가면 판매는 한다. 단 해설사는 지각자를 기다려주지 않으므로... 최소한 출발 정각 전까지는 가야 따라 들어갈 수 있다.
  • 야간관람으로는 "창덕궁 달빛기행" 이란 테마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 달 정도 티켓 사전예매 식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티켓가는 3만원이다. 한동안 특별관람으로 개방하다가 2011년 이후로 개방하지않는 낙선재의 뒷뜰(상량정 부분)도 짤막하게나마 들어갈 수 있으므로 관심이 있고 아름다운 창덕궁의 야경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하자.
  •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내국인은 한국어 이외의 코스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괜히 예약하고 헛수고하지 말자.[22]

4. 기타


  • 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권역상으로도, 행정관리상으로도 분리되어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는 3곳은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궐 東闕"(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은 판이하게 다르나,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나와있는 야트막한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地脈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23] 현재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24]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됐다.[25] 정리하자면 과거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현재는 물리상으로나, 행정관리상으로나 모두 분리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 의외로 덕수궁(경운궁), 경복궁 못지 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있다. 주요 전각들이나 내부는 서양식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에는 전구가 설치되어 있다.
  •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도시에 사는 너구리들을 관찰 카메라를 여러 대 설치해서 추적을 하는데, 양재천은 물론 창덕궁과 종묘를 연결하는 강철 다리를 야밤에 난간을 따라 보일 듯 기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너구리가 몇차례 방송되었다.
  • 창덕궁 내부에 개인 소유 2층 주택[26]이 있고 그로 인해 일부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였다고 한다. 나라의 문화재가 사유지로 팔렸다는 것도 황당한데 담장을 헐고 철문을 짓는 등의 훼손이 이루어졌음에도 법적으로 해결 할 방안이 없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15억의 매매가를 제시했으나, 건물 소유주 측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바라는 듯하다.
  • 2015년 7월, 문화재청낙선재 권역을 외국인을 위한 고가(1박에 300만 원)의 숙박시설로 개방하는 ‘궁 스테이’를 추진해 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그해 9월에 사실상 무산되었다.
  • 2018년 9월 10일에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맞이하는 초청 국빈행사가 열렸다. # 창덕궁에서 국빈 환영식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앞으로도 자주 쓰일 듯하다.

5. 주요 건축



5.1. 궁문


사진
설명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증충의 우진각지붕집이다.[27]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년(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복구를 시작해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해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본래는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법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1997년, 일제강점기에 파묻혔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돈화문 앞에 있던 월대를 복원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금호문(金虎門)'''
창덕궁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인 돈화문이 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이용되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올 때 금호문을 이용했다. 건립 이후 성종 이전까지 명칭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액호를 지었고 이때 성종이 금호라는 액호를 낙점해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단봉문(丹鳳門)'''
창덕궁의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남장문이라고 불렸으나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성종 때 개명된 것이며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남문인 단봉문에서 따왔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돈화문을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는 왕족과 그 친인척 그리고 상궁들의 전용문이었다.
'''요금문(曜金門)'''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한 궁문. 내시와 궁녀들이 병들거나 늙어 내관, 궁녀 생활을 마감하고 퇴궐시킬 때 나간 문이다. 현재는 근처에 주택들이 들어서 폐쇄된 상태며 근처 담장까지 가옥이나 상가의 담벼락으로 활용되고 있거나 문 앞에 쓰레기가 쌓이는 등의 수난을 겪고 있다.
'''경추문(景秋門)'''
금호문과 함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나 출정 명령을 받은 무관이 나오는 데에 이용되었다.

5.2. 외조



5.2.1. 외전


사진
설명
'''진선문(進善門)'''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 지붕을 하고 있으며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서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 공사 때 헐렸다가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착수 1999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숙장문(肅章門)'''
진선문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1475년(성종 6)에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 중 하나를 성종이 낙점하면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 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인정문(仁政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광해군 즉위초 증건시 재건되었으나 1744년(영조 20)에 인접한 승정원에서 화재로 또 소실,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정문을 포함한 20여 칸의 월랑이 행각으로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1년에 배수로 보수 도중 발견된 석조기단과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습인 월랑으로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상위 문서 : 대한민국의 국보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전각이며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다.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해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즉위하면서 1908년(융희 2년) 창호를 황색으로 칠하고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앞마당의 박석이 걷어지고 화초가 심어지는 등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 해방 후 1985년 국보 225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앞의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다시 설치하였다.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선정전(宣政殿)'''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단층 양식의 다포계 팔각지붕을 한 전각으로 궁궐의 전각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하고 있다. (징광루도 청기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17년 소실) 건립 당시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다.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다가 1647년(인조 25), 광해군 때 청기와를 얹어 호화롭게 지은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헐어 재건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청기와를 얹고 있는 것. 이후 편전의 기능이 희정당과 중희당으로 넘어가자 빈전, 혼전 등 왕실장례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되었고 복도각이 증설되었다. 근대화 시기에 인정전처럼 내부에 전기시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에 복도각이 헐어지는 등의 훼손을 겪다가 해방 뒤인 1985년에 보물 제814호에 지정되었고 1997년에 복도각이 복원되었다.

5.2.2. 궐내각사[28]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궐내각사는 1990년대 말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복원된 인정전 서편의 궐내각사 건물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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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이문원(摛文院)'''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본래 오위도총부가 위치한 곳으로 규장각이란 편액 때문에 규장각으로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후원에 있는 주합루만으로는 많은 분량의 서책들을 감당할 수 없자 1781년(정조 5)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여 검서청, 책고, 봉모당과 함께 내각이라 불렸다. 정조 사후 기능이 도서관으로 영락하여 이름만 존재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라는 관청 자체가 혁파된 후 빈 전각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다른 궐내각사의 전각들과 헐렸으며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검서청(檢書廳)'''
규장각 오른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규장각에 둔 관직인 검서관이 사관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일을 본 곳으로 역대 임금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면서 빈 전각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다른 내각의 전각들과 함께 훼철되었다가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되었다.
'''봉모당(奉謨堂)'''
규장각과 검서청 뒤쪽에 자리잡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역대 임금들의 어진과 유품인 보책과 인장들을 보관했다. 궐내각사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원래 부용정 뒷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던 건물이다. 1781년(정조 5) 많은 분량의 서책들과 유품들을 감당할 수 없자 따로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밀교 및 선보, 세보, 보감, 지장 등을 열무정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정조 사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덩달아 약화되었고 1857년(철종 8) 규장각 이문원의 부속 전각인 지금의 자리인 대유재로 옮겨졌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었다가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어 전모과에서 관할했고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전각을 헐어낸 뒤 일본식 전각을 세워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가 보관되었다. 해방 후 1968년 일본식 전각을 철거하고 서적은 창경궁서각으로 옮겨졌고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봉모당의 앞마당에 커다란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창덕궁의 창건 전부터 있던 유서가 깊은 나무이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강풍으로 치솟은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정도 꺾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700년 된 향나무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책고(冊庫)'''
봉모당 뒤인 금천변에 위치한 전각으로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하나의 전각이 아닌 여러 전각으로 되어 있으며 봉모당 뒤쪽과 측면에 각각 한채 그리고 앞서 언급된 봉모당 뒤편의 책고 등 3개의 전각을 구성하고 있다.
'''예문관(藝文館)'''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제찬(制撰)과 사명(詞命 : 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예문관(예조 산하)의 관사로, 국조오례에 의한 각종 궁중의식의 규율을 관장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도 있었다. 향실과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홍문관(弘文館)'''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본래 액호대로 옥당(玉堂)이라 불려야 하지만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의 관사였기에 홍문관으로도 불려진다.
'''내의원(內醫院)'''
정면 8칸, 측면 5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액호는 약방이지만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내의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궁중의 진료를 담당했다. 허나 1920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궁궐 내의 전각들이 불에 타 일제에 의해 변형되면서 동궁이었던 성정각에 내의원이 기능을 빼기고 헐렸으나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억석루(憶昔樓)'''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구 선원전 앞과 내의원 뒷행각에 속해 있으며 액호인 억석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하고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최초로 약초를 발견한 고대 중국의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9]

5.3. 내조



5.3.1. 내전(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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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熙政堂)'''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전각이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희정당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갱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경훈각(景薰閣)'''
창덕궁의 전각으로 대조전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조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지만 본래 중층 전각으로 대조전과 이어져 있었다. 1461년(세조 7)에 2층을 징광루(澄光樓), 1층은 광세전(廣世殿)이라 불렀던 기록이 있었다. 후에 광세전은 지금의 명칭인 경훈각으로 개명되었다. 역시 1917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만경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 지금과 같은 모습의 단층 전각으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선정전만이 청기와를 쓴 유일한 건물이지만, 동궐도를 보면 징광루 역시 청기와를 사용한 건축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3.2. 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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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誠正閣)'''
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ㅓ"자 형태의 단층 전각이다. 액호인 성정은 유교 경전인 대학에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의 남쪽에는 희우루, 동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당시 순종이 이곳으로 일시 피난처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정각을 빙 돌아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 자시문(資始門)이란 문 앞에 오래된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준 매화나무 에서 접쳐온 후 자랐다고 전해진다.
'''관물헌(觀物軒)'''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여기에 걸린 '집희/즙희 (緝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3세 때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중희당 터'''
성정각을 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 터가 정조 8년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동궁 중희당重熙堂이다. 정면 7칸 내지는 9칸, 측면 3칸 내지 4칸으로 추정되는 규모이며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동궁으로 쓰이기보다는 왕의 정무를 보는 편전이나 별당 용도로 많이 쓰였다. 중희당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으뜸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했으며[30], 후일 헌종, 철종, 고종까지도 활발히 사용했다. 특히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의 궁중가례절차를 중희당에서 치렀고, 기타의 궁중행사도 중희당에서 많이 개최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80년경 경복궁 화재로 중건공사를 다시 벌이는 과정에 중희당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라는 기록 이후에는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터로만 남아있다.[31] 다만 중희당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무려 정조의 친필이고, 2018년 기준으로 전시 중이니 중희당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고자하는 사람들은 찾아가보자.
'''승화루(承華樓)&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앞서 설명한 중희당의 부속건물들로 중희당의 본채는 없어졌으나 이 부속건물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동궐도에서 중희당 그림의 오른쪽 부분에 있는 건물들이다. 칠분서는 중희당에서 삼삼와/승화루로 넘어가는 연결복도였고 삼삼와는 육각정 형태의 건물이며, 승화루는 주로 도서를 소장하고 독서처로 쓰였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엔 순종의 경호 를 명목으로 이곳 승화루에 '창덕궁경찰서'를 설치하고 일제의 경찰이 상주하기도 했다.[32] 삼삼와 앞 화단에 심겨있는 홍매화 나무가 일품이다.

5.4. 후원(비원)



5.4.1. 부용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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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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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정(芙蓉亭)'''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十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1707년(숙종 33)에 택수재라는 명칭의 정자였으나 1792년(정조 16)에 개축하면서 명칭 또한 지금의 부용정으로 고쳤으며 1795년(정조 19)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종친들과 신하들을 초청해 낚시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33][34][35]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는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합루(宙合樓)'''[36]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경훈당처럼 층마다 명칭이 달랐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정조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치세를 보필하는 장소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연회장으로 활용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주합루 앞을 둘렀다가 사라진 취병(翠屛)은 최근 재현되었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인 어수문은 취병과 함께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조선시대에 거의 사라진 건축 의장을 풍부하게 가진 귀중한 사례다. 어수문 양쪽의 소문 형태도 독특하거니와 어수문 내외부에는 정교한 조각을 둘러놓았다.
'''서향각(書香閣)'''
부용지 권역의 전각 중 하나로 주합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각종 도서, 어진과 어필 등을 말리던 포쇄소였다. 포쇄란, 좀스는 것과 습기가 스며 망실되는 것을 막고자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총독부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은 뜬금없이 누에치는 곳으로 안내가 버젓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향각 본래 기능대로 안내가 되고 있다. 다만, '친잠권민'(왕실에서 친히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권해야 한다)이라는 게판은 현재까지 걸려 있다.
'''희우정(喜雨亭)'''
주합루 뒤편에 자리잡은 정면 2칸의 작은 전각으로, 왕의 열람실이었다고 한다. 1645년(선조 23)에 초당(草堂)으로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다. 1690년(숙종 16)에 가뭄이 심하여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이라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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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석정(千石亭)'''
주합루 동북쪽 언덕 위에 있는 ㄱ자 형태의 정자로 누마루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월광풍관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순조의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학문을 닦았던 곳이었다.

5.4.2. 연경당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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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지붕이다. 1828년(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37]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사대부가를 모방했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사대부가의 상한선이 99칸인 것에 비해 연경당은 그 규모가 120칸에 달해서 일부에서는 왕자나 공주의 사저인 궁가(宮家)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대부가 형식의 전각이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합쳐져 있어 마당을 좌우로 가른 담을 기준으로 공간을 구분하며, 안채의 경우 일반적인 안채와 달리 부엌이 존재하지 않고 별채에 있다. 1865년 고종 때 새로 증축되거나 권역이 넓어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참고로 효명세자의 사후 순조가 말년에 보낸 곳이다.
'''선향재(善香齋)'''
사랑채 동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1865년에 연경당을 넓히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주로 서재나 손님을 응접하는 접대실의 역할을 했다. 경복궁의 집옥재처럼 측면을 청나라 풍 양식의 벽돌로 세웠고 마루 앞에는 서양식 차양 시설이, 지붕은 기와가 아닌 동판으로 갖춰져 있어 이국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특이한 점으로는 일반적인 건물이 남향인데 비해, 선향재는 동향이어서 습기가 많이 차고 태양열을 제대로 배출해 주지 못하므로 책을 보관하는 서재로는 말짱 꽝이었다고 한다. 이에 온돌을 통해 습기를 빼주어야 했다고.
'''농수정(濃繡亭)'''
선향재 뒤에 위치한 정자로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집형태를 하고있다. 선향재와는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용도 또한 불명이다. 1886년(고종 23) 고종황제와 왕세자 순종황제가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한 사진첩이 현전하고 있다.

5.4.3. 옥류천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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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정(逍遙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1636년(인조 14)에 탄서정(歎逝亭)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후에 오늘날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숙종·정조·순조 등의 임금들이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에 대한 시를 남겼고 청의정, 태극정과 함께 삼림삼정(三林三亭)이라 불렸다.
'''청의정(淸漪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년(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문화재청과 농촌진흥청에서 가을마다 벼베기 행사를 진행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태극정(太極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의치한 정자로 굴다리를 엮은 정, 측면 1칸의 겹처마 사각 지붕 형식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지붕 꼭대기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운영정(雲影亭)이란 명칭으로 세워졌으나 후에 오늘날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소요정, 청의정과 함께 삼림삼정이라고 불렸다.
'''취규정(聚奎亭)'''
옥류천 산마루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사방이 트인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다.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으며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취규정이란 액호로 보아 휴식과 독서를 위한 정자로 보인다.
'''취한정(翠寒亭)'''
옥류천 어귀에 자리잡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납도리로 엮은 민도리집 형태를 하고 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정조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정자다.

'''농산정(籠山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이며 두벌장대의 낮은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대청 2칸, 온돌방 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에 세워졌으며 임금이 옥류천으로 거동했을 때 다과상을 올렸던 곳으로 보인다.

5.4.4. 애련정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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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기오헌(寄傲軒)'''
창덕궁 애련지의 전각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이며 대청 2칸에 우측에는 온돌방이, 좌측에는 내루(안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단청도 하지 않은 질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당시 독서 공간으로 세워졌으며 본래는 의두합(倚斗閤)이라 불렀다. [38]
'''운경거(韻磬居)'''
기오헌 동쪽에 나란히 위치한 전각으로 정,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방 1칸에 마루 반 칸으로 이루어져 있어 궐내에서 제일 작은 전각이며, 마루 밑으로 다섯개의 구멍이 나 있다. 책과 악기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습기와 좀스는 것을 막고자 환기와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애련정(愛蓮亭)'''
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2년(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본래는 연못 한가운데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세웠다고 했지만 현재는 연못가에 자리한 상태다.

5.4.5. 관람정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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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정(觀纜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지만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 관람정에 모습이 없고 1908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에 그 모습이 그려져 있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부수적인 요소로 현판의 모양이 풀잎마냥 상당히 독특하다.
'''폄우사(砭愚榭)'''
존덕정 서편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본래는 초익공계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부속 건물이 남향으로 붙어있는 ㄱ자 형태였으나 1908년 그려진 동궐도형에서는 ㅡ자형으로 그러져 있어 도중에 변형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 일대의 건물 중에서는 온돌방까지 갖춰있어 겨울에도 사용이 가능한 곳이었다. 액호인 폄우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어리석움을 깨우쳐 덕을 높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승재정(勝在亭)'''
관람지 옆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으로 익공계 사모 지붕을 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지금의 자리에 초정이란 전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에는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졌다. 정자 내에는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쓴 글귀가 남아있으며 이에는 모든 하천에 달이 뜨지만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고 그 달이 나니까 왕권은 지엄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5.4.6.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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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당(嘉靖堂)'''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대조전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에 굴도리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주위가 아늑하여 왕이 가끔 찾아와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왕실에 경사가 났을 때는 몇몇 신하와 소연(小宴)을 베풀던 곳이다. 동궐도, 동궐지, 동궐도형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전각이라 1920년대에 덕수궁에서 이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순종황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 상궁과 나인들이 이곳을 기도처로 정하고 밤낮으로 쾌차를 기원하기도 했다.
'''능허정(凌虛亭)'''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정,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고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외부와는 격리된 공간이다. 과거 "능허모설"이라 하여 능허정에서 눈 오는 저녁노을 즈음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청심정(淸心亭)'''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정, 측면 1칸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88년(숙종 14)에 천수정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청심정 앞에는 돌로 제작한 빙옥지(氷玉池)라는 이름의 장방형 연지가 있으며,[39] 정자와 마주보는 연지 위에 돌거북을 조각했다. "청심제월"이라 하여 청심정에서 보는 달과 구름(달무리)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현재 일반에 개방되지 않는다.

5.5. 낙선재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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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며 1846년(헌종 12)에 단청없는 사대부가 양식으로 세워졌다. 본래 헌종후궁 경빈 김씨가 거주할 전각을 만들면서 헌종 본인도 같이 기거할 사랑채격으로 함께 지어진 곳으로 헌종이 추사 김정희를 접견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는 등, 헌종의 문예생활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해방 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거주한 장소로 유명한데, 1963년 11월 22일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1970년 5월 1일, 이방자 여사가 1989년 4월 30일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순종 사후 낙선재에 머물던 순정효황후를 위해 1930년대에 낙선재 서행랑을 허물고 신관을 신축했으며, 이방자 사후 1990년대에 신관을 철거하고 원래의 서행랑을 복원했다.
'''석복헌(錫福軒)'''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속하는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낙선재 권역의 안채격으로 낙선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1846년(헌종 12)에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졌다. 헌종 사후 경빈 김씨 또한 사저로 돌아가면서 아무도 기거하지 않았으나 해방 후 순정효황후 윤씨1966년 2월 3일 숨을 거둘 때까지 기거했다.
'''수강재(壽康齋)'''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속하는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5량 구조로 되어 있는 홑처마 단층 기와집이다. 본래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으로 추정되며 1785년(정조 9)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이후 1827~1830년(순조 27~30) 사이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의 별당이었고 1846년(현종 12)에 낙선재가 세워짐에 따라 덩달아 권역에 속하면서 대왕대비 순원숙황후의 처소로 중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걸쳐 해방 후 1962년 1월 26일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덕혜옹주1989년 4월 21일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에서 기거했다.
'''상량정(上凉亭)'''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속하는 누각으로 낙선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육모정으로, 궁궐의 소규모 정자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화려한 편이다. 건립 연대는 불명이지만 1820년190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는 평원루(平遠樓)라고 불렸다. 이 상량정 곁에 있는 꽃담과 만월문이 경복궁 교태전#s-7.2자경전 꽃담과 나란히 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문을 나서면 아름드리 자란 돌배나무가 있는데, 한껏 꽃이 필 때 또한 일품이다.
'''한정당(閒靜堂)'''
상량정 동쪽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1917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외관은 전통 한옥의 별당처럼 보이지만 문은 창호지가 아닌 유리로 마감했으며 기단 바닥은 타일을 깔아놓은 점이 특징이다.
'''취운정(翠雲亭)'''
수강재 북쪽 화계 위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86년(숙종 12)에 세워져 낙선재 일대에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현재는 편액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기록을 통해 취운정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정자들과 달리 한겨울에도 이용이 가능하도록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5.6. 구 선원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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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전(璿源殿)'''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았다. 전내(殿內)는 11실(室)로 나누어져 있다. 경덕궁의 경화당을 효종 7년 (1656년)에 옮겨지어 춘휘당이라는 별당 건물로 사용하다가 어진 제도의 정비와 재정립을 시작한 숙종 때인 1695년(숙종 21)에 선원전으로 이름과 기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곳에는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어진을 모시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뒤부터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진설청(陳設廳)'''
구 선원전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주로 제사에 올릴 다과, 음식 등을 준비한 곳이다.
'''내찰당(內察堂)'''
구 선원전 우측의 있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제사 의례에 사용되었다.
'''의풍각(儀豊閣)'''
창덕궁 구 선원전에 속하는 전각 중 하나로 규장각 뒤편에 위치하며 ㄱ자 형태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왕실의 창고로 사용된 건물이며 주로 재궁[40] 등 제사용품을 보관하였다. 참고로 이곳에 마지막까지 보관되어 있던 재궁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이방자 여사의 장례 때 사용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 황태손의 장례 때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유일하게 남은 재궁의 실물이라 다른 관을 사용했다.
'''양지당(養志堂)'''
창덕궁 구 선원전에 속하는 규모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 중 하나로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전 잠시 머물었던 어재실이다. 또한 어진이나 어서를 담은 궤를 보관하던 곳이기도 하다.

'''영의사(永依舍)'''
선원전으로 가기전에 거쳐가는 건물로, 정면 칸수가 많아 횡면적이 긴 건물이다. 액호 '영의'란 "오래도록 기댄다", "의존한다"라는 뜻으로 선원전 앞에 위치하여 열성조에게 의지한다는 뜻이며, 경건히 재숙(齋宿)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5.7. 신 선원전 권역


'''신 선원전'''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칸,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1921년 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의효전(懿孝殿)'''
원래 덕수궁에 있던 정,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순종황제의 첫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의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이었으나 1920년경 창덕궁으로 이건했다. 1928년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위패가 종묘에 합사되어 의효전의 현판을 내렸는데, 이후 효(孝)가 비슷한 모양의 로(老)로 오독되면서 '의로전'으로 잘못 알려졌다가 2007년에 와서야 문헌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실체가 확인되었다. 의효전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재실(齋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5.8. 기타 권역


괘궁정과 몽답정은 현재는 신선원전 권역 내에 있는 정자들이나, 건립당시에는 창덕궁의 궁역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므로 기타 권역에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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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청(賓廳)'''
숙장문 너머 내전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잡은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익공 양식으로 지어졌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 등 고위관료 들이 왕을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회의하던 장소였다. 이후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비변사가 폐지됨에 따라 비어버린 전각이 되었고 이후 한일합방 이후로 추정된 시기에 차고로 변용되었다. 해방 후 2001년 순종황제의 어차와 순정효황후의 어차를 보관, 전시하였으나 2007년 어차들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진 후 카페로 활용되고 있어 일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몽답정(夢踏亭)'''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정자로, '꿈길을 밟고 간다'는 뜻이다. 신선원전이 세워지기 이전 북영의 부속건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돌기둥 위에 떠올려 있는 누정(樓亭) 형태이다.

'''괘궁정(挂弓亭)'''
정면, 측면 1칸의 정자로 '괘궁掛弓', 활을 걸어놓는다는 뜻으로, 신선원전이 세워지기 이전 북영의 군사들이 활을 쏘던 사정射亭으로 184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image] 위 사진은 드라마 이산 이후부터 조선시대 사극에서 인정전이라고 나오는 세트인데, 현재 용인대장금파크(MBC전용 드라마 세트장)에 있다. 이는 2005년 방영된 드라마 신돈에서의 만월대 회경전 세트를 현판만 바꾼 것이니 혼동하지 말자.[6] 흔히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7]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이다.[8]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한 후 경복궁에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에 자주 머물렀다.[9] 사실 웬만한 유적은 왕가나 귀족의 것이기에 한국이 유일할 것은 없다.[10] 창덕궁 후원(비원)에 예약 관람 신청을 하여 가봤다면, 가이드가 초반부터 입에 닳도록 하는 말일 것이다.[11] 창덕궁 돈화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유네스코 기념비가 나오는데 창덕궁Palace 라고 되어있다. 한국말로 창덕궁궁...?[12] 달리 말하면 창덕궁 이외의 조선의 궁궐들보다 상대적으로 창덕궁의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13] 정작 경복궁을 지은 태종의 아버지인 태조 역시 1408년에 창덕궁에서 죽었다.[14]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 내지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15] 두 궁을 다 가보면 알겠지만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인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있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판으로 깔려 있었으며 건물도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으니.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대의 황제들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해서 빡빡하게 지어진 자금성을 부담스러워해 많이 머물지 않았고 자금성 옆에 위치해 있고 넓은 호수와 정원이 갖추어져 있어 한결 여유로운 중난하이에 많이 머물렀다.[1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까지는 왕실 이미지 복구를 위한 리모델링 사업 정도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17] 인조는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인조는 인조 10년 소성대비가 연루된 저주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다.[18]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기도 하다. 뭐 고증은 엿 바꿔먹은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지만...[19] 대신 종묘가 시간제 관람으로 바뀌었다(토요일 제외).[20] 자유관람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창덕궁 전체구역을 시간제관람으로 진행했는데, 연경당과 낙선재는 번갈아 가며 관람이 진행되었다. 즉, 요일을 정해서 특정요일은 후원의 연경당을 관람하고 또 다른 특정요일은 낙선재를 관람하는 식으로 번갈아 진행되었다.[21] 정확히는 매점에서 해당 부채 정가의 2배를 받고 있다.[22] 외국인 동반 시에는 내국인 2명까지 입장 가능하다. 외국인은 한국어 코스에 입장할 수 있다.[23] 수정 전 서술에는 담장이 아예 없는 것처럼 서술되었는데, 조선시대에도 담장은 있었다. 공간인식을 현재처럼 아예 분리해서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24] 지금도 담으로 나뉘어 있긴하지만 통하는 문도 있긴 있다. 춘당지 뒷쪽으로 있는데 단, 후원과 연결되는 문들이 관리차원에서 굳게 닫혀있는 상황이다.[25] 이 일화가 눈물나는데, 순종 생전에 도시계획에 율곡로 개통을 포함하여 보고했더니 순종이 그것만큼은 정말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매우 격하게 반대하였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상황이더라도 명목상 이왕으로 있던 순종을 의식하여 반대를 무릅쓰고까지 강행하진 못하다가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붕어한 순종이 반대했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바로 다이렉트로 도로를 뚫어버렸다. 현재는 율곡로를 지하도로화해서 끊어져 있는 종묘와 창덕궁 권역을 서로 잇는 공사를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2020년 현재 시점으로써는 언제 끝날지는 요원하다. [26] 위치는 종로구 와룡동 3[27] 동궐도에는 팔작지붕으로 나와있는데, 실록에 돈화문의 지붕을 개수했다는 기록도 없고 창경궁도 팔작지붕으로 잘못 그려져 있기 때문에 단순한 화가의 실수로 추정된다[28] 흔히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29] 억석루의 현판이 1층에 달려있는데, 루樓는 2층이라 2층에 걸려있어야 할 현판이 1층에 달려있는 것은 복원오류이다.[30] 중희당의 사진자료가 바로 대리청정 당시 제작된 동궐도에서 중희당 부분이다. 넓고 크게 비중있게 그려져있는 데에는 대리청정 당시라는 이유가 유력할 것이다.[31]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자비한 궁궐철거로 같이 휘말려 헐렸을 가능성이 있다... 지못미...ㅠ[32] 지금은 승화루 앞 공간이 담장으로 막혀있고 좁지만, 옛 사진들이나 동궐도를 보면 승화루 앞 마당이 매우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33] 정조실록 42권 19년(1795 청 건륭 60년) 3월 10일 1번째 기사[34] 또한 정조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시짓기시험을 주관했는데, 제 시간에 시를 못 지으면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귀양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관료들과 공부도 하고, 술자리도 가졌다고 한다.[35] 이런 양식의 건축은 몇 년 후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도 구현되었다.[36] 주합루의 명칭은 시간(宙: 왕고래금(往古來今))과 공간(合: 상하사방(上下四方: 육합六合))을 의미한다. 시공을 아울러 역대의 서책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여겨진다.[37]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기 위한 행사[38] '의두'란 북두칠성에 의지한다는 뜻인데, 자신의 할아버지 정조가 세운 규장각을 북두칠성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이 위치한 언덕 바로 뒤에 지었다는 의도는, 자신의 할아버지 정조의 뜻에 의지해 국정을 쇄신해보겠다는 효명세자의 강력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39] 이 각자된 빙옥지 글자는 어느 왕이 썼는지는 모르나 옆에 "어필御筆"이라고 같이 새겨져 있다.[40] 梓宮, 왕실에서 미리 제작하여 준비해 두었던 장례용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