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신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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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원전
1. 소개
2. 역사
3. 구조
4. 부속 건물
4.1. 진설청
4.2. 재실
4.3. 수복방
4.4. 의효전
4.5. 몽답정[A]
4.6. 괘궁정[A]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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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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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원전 현판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작한 어진의 봉안처 - 선원전 영상

昌德宮 新 璿源殿
창덕궁 서북쪽에 있는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들의 어진[1]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다.
이름 ‘선원(璿源)’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으로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4]
틀에서 언급했다시피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건물이 '''조선시대 창덕궁'''에서 쓰인 적은 없다.
현재는 비공개 구역이다.

2. 역사


원래의 창덕궁 선원전 역사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덕수궁에 살던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20년에 덕수궁 선원전 부지를 민간에 매각하였고, 1921년 3월에 선원전 건물을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과 옛 훈련도감의 북영 자리로 옮겨 지은 뒤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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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대보단
대보단병자호란치욕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 명나라 황제[5]에게 제사를 지내려 만든 제단이다. 일제가 대보단을 허물고 굳이 선원전을 옮겨 지은 것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한국 황실을 능멸하고 일본의 종주권을 보다 확실하게 심는 효과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건립 직후 옛 창덕궁 선원전에서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영희전에서 세조, 원종의, 그리고 천한각에서 철종, 중화전에서 고종어진을 옮겨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나중에 순종의 초상화도 모셔 총 12점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신 선원전에 있던 어진은 6.25 전쟁 때 화를 피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안타깝게도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그 중에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한다.#

3. 구조


  • 4단의 장대석을 쌓은 기단 앞에 삼태극 무늬의 소맷돌을 둔 3칸 반짜리 계단을 앞면에 3세트, 소맷돌 없는 3칸 반 짜리 계단을 양 측면에 하나씩 놓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기단 앞엔 박석을 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정면 14칸, 측면 4칸, 무려 총 56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5개의 잡상을 놓았다.
  • 바깥 면의 경우, 동, 서 양 측면과 남쪽의 툇간 부분은 전부 창방 위에 교창을 두고 띠살문으로 마감하였다. 남면은 툇간을 제외하고 전부 툇마루를 밖으로 통하게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툇마루 안쪽의 문 역시 띠살 무늬의 사분합문으로 되어있다. 또한 각 분합문 기둥 사이의 하단부에 흰 칠을 하고 파란 선을 그었다. 북면은 기단 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전돌로 마감하였다.
  • 정면(남면)의 주춧돌과 댓돌 사이에 있는 환풍구의 모양이 태극기 형태로 되어있다. 아마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처음 지은 경운궁 선원전 건물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운데 원의 무늬가 태극 대신 ‘’ 자로 되어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뒷면(북면)의 벽체 하단부에도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환풍구가 있는데 그건 평범하게(?) 사각형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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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원전 태극기 환풍구
  • 내부는, 정면 기준 앞쪽 2칸은 전부 한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바닥은 마루로 되어있다. 양 측면의 은 막혀있으며 흰 벽지를 발랐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몄다. 정면 기준 양 끝 가장자리 칸을 제외하고 가운데 12칸에 어진을 모시는 감실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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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선원전 내부
  • 감실은 마치 실제 을 모시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져있다. 감실 테두리마다 낙양각과 그 위에 사각형을 놓고 아름다운 무늬를 투각[6]하여 장식하였으며 감실 내부엔 당가[7]를 설치하고 동, 서, 북 3면에 일월오악도를 두른 뒤 가운데에 ‘’ 자가 여러 개 새겨진 용상을 놓고 그 앞에 답장[8]을 두었다. 당가 안쪽 천장에는 두 마리의 조각이 부착되어 있고 천장에 부착 된 고리어진을 걸게 하였다. 그리고 앞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감실 뒤쪽으로는 모란 그림을 부착시켰다.

    각 감실의 기둥 하단부엔 정면 툇마루의 사분합문 기둥처럼 흰 칠을 하고 파란 선을 그었으며 창방과 상인방 사이는 으로 만들어 흰 벽지를 발랐다.

4. 부속 건물



4.1. 진설청


昌德宮 新 璿源殿 陳設廳
진설청은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음식, 등을 준비하고 차려놓는 작은 건물이다. 신 선원전 구역의 진설청은 본채를 기준으로 동, 서, 서북쪽에 각각 1채 씩 총 3채가 있었다.
동, 서 진설청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으로 정면은 전부 문으로 되어있고 뒷면은 사고석과 벽돌로 하단을 쌓고 그 위에 을 두었다. 측면은, 을 둔 넓은 칸과 뒷면과 같은 모양의 좁은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서북 진설청 역시 맞배 지붕에 민도리 양식인 것은 동, 서 진설청과 같으나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으로 남쪽 측면이 전부 , 북쪽 측면은 전부 으로 되어있으며 뒷면의 경우 남쪽 방향 1칸에 문이 달려있고 그 북쪽으로 2칸은, 문선 가운데에 을 설치하고 나머지 부분을 벽으로 마감한 것이 다르다.

4.2.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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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昌德宮 新 璿源殿 齋室
제사를 준비하고 제관(祭官)이 머무르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를 두지 않고 소로 위에 바로 창방을 두었다. 합각은 벽돌로 마감했으며 용두와 취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 칸은 하단에 기둥이 있는 마루로 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2칸은 온돌방, 2칸은 대청,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문은 대청 앞, 뒷면의 툇마루 안쪽에 두었다. 바깥 면의 은 전부 정(井)자 살로 되어있으며 오른쪽 측면 가운데 칸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전부 으로 마감하였다.

4.3. 수복방


昌德宮 新 璿源殿 守僕房
제사를 준비하던 하급 관원들이 머물던 곳이다.
맞배지붕 형식으로 평방과 공포없이 창방과 서까래가 바로 만나는 구조이다. 남북축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온돌방 1칸, 대청 2칸, 온돌방 2칸이 있으며 이후로는 하단에 판문, 위에 을 둔 모양의 칸 하나와 온돌방 2칸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4.4. 의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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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효전
昌德宮 懿孝殿
신 선원전의 동남쪽에 있는 건물로 원래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에 처음 세워져 혼전으로 쓰이던[9] 문경전(文慶殿)이란 전각이었다. 1904년(광무 8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의 혼전이 되면서 의효전이 되었고, 경운궁[10] 경소전(景昭殿)으로 옮겨 지었다. 보통 혼전이 되면서 생긴 이름은 상례가 끝나면 사라지고 원래 이름대로 돌아가나 순명효황후는 순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계속 위패를 의효전에 모시면서 그대로 이름이 굳어졌다.[11] 1919년 고종승하 후 1920년 경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즉, 경복궁, 경운궁, 창덕궁 3궁이나 거친 전무후무한(...) 건물'''.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2년 뒤인 1928년 종묘에 부묘되면서 순명효황후의 위패 역시 종묘로 가게 되어 그제서야 의효전의 현판을 내렸다. 이후 잊히면서 한동안은 이름마저 ‘의'''로'''전(懿'''老'''殿)’으로 잘못 알려졌다. ‘효(孝)’가 비슷한 모양의 ‘로(老)’로 오독된 것. 2007년에 와서야 문헌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실체가 확인되었다. 의효전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벌대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정면(남면)으로 나름 넓은 월대를 두었는데 기단보다는 조금 낮고 월대 앞에 2칸 반짜리 소맷돌 없는 계단을 3세트 씩 놓고 좌, 우 양 측면에도 같은 계단을 각각 하나씩 놓았다. 정, 측면 각각 3칸 총 9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6개의 잡상을 올렸다. 창호는 전부 정(井)자 살이며 중방과 교창 없이 과 상방이 바로 붙어있다. 내부는 한 칸으로 통해 있다.

4.5. 몽답정[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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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답정
昌德宮 夢踏亭
의효전의 서쪽에 있는 정자로 이름은 ‘꿈길(夢)을 밟고(踏) 간다’는 뜻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숙종에 이 정자에 행차했다하여 몽답정이라 했다.’고 적혀있으나 《영조실록》에서는 ‘훈장(訓將) 김성응이 북영에 작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내(영조)가 대보단에서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이라 내려주었으니 이를 걸게하라’고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후 정조도 북영에 거동할 때 이 곳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초익공 양식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쌓고 취두, 용두,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앞쪽의 2열은 기둥을 세운 형태이며 뒷쪽은 경사지에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현판은 달려있지 않다. 그리고 건물 앞 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연꽃이 있어서 경치가 빼어났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총 12칸으로 동, 서, 남쪽의 툇간에는 외벽을 두지 않았고 난간을 둘렀으며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4칸은 사방에 분합문을 달아 실내 공간으로 만들었다. 실내 공간 중 서북쪽의 방 1칸을 온돌로 두었고 나머지 3칸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마루 공간들은 구분 없이 통해 있다. 그래서 북면(뒷면)에서 볼 때 다른 칸은 중방 위에 교창으로 되어 있지만, 온돌방의 중방 위는 으로 되어 있다.

4.6. 괘궁정[A]


昌德宮 挂弓亭
신 선원전의 서남쪽, 몽답정의 북쪽에 위치한 정자이다. 앞서 언급했듯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북영이 있었던 곳으로 을 쏘던 장소였기에 이름이 '활(弓)을 건다(挂)'는 뜻의 괘궁정이 되었다.
건립 연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기단 옆 바위에 괘궁암(挂弓岩)이란 글자가 있고 그 옆에 기유년(己酉年)이라고 새겨져있는데 순조 때 그린 《동궐도》와 헌종 때 편찬 된 《궁궐지》에 나와있지 않다는 근거로 전문가들은 기유년을 1849년(헌종 15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뒤에 소개할 일화라든지, 1769년(영조 45년) 문인 윤기가 북영을 둘러보고 몽답정에 올라 쓴 시에 괘궁정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여기서 말하는 기유년은 1729년(영조 5년)으로 여겨진다. 왜 1729년이냐면, 북영의 역사는 1679년(숙종 5년)에 시작되었는데[13] 1679년과 1769년 사이에 기유년은 1729년 딱 한 해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건립 연도로 기유년을 새긴 게 맞다면 1729년에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동궐도》와 《궁궐지》에 나오지 않은 것은 여기가 원래 궁궐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그리거나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 시기 규장각에서 근무하던 정약용이 정조의 명으로 여기서 을 쐈는데 실력이 영 좋지 않아 정조가 이 곳에 정약용을 가두고(...) 열흘 간 계속 활쏘기 연습만 시켰다고 한다. #
1칸 짜리 작은 정자로 사모지붕으로 되어있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14]을 얹어 장식하였다. 정면 앞쪽의 1열은 기둥을 세운 형태이며 뒷쪽은 경사지에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 하나 없이 트여있는 구조로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있는데 네 마리의 을 아름답게 그려넣었다. 동, 서, 남쪽 면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북쪽 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없다. 현재 현판은 달려있지 않다.

5. 여담


  • 앞서 말했듯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 신 선원전을 보려면 바로 옆에 있는 중앙중학교 운동장 동쪽(관람객 기준 왼쪽)의 철망 너머로 봐야 한다. 단, 2016년 1월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御眞)과 진전(眞殿)' 특별전을 할 때 이해를 돕기 위해 1월 한 달 간 4회에 걸쳐 잠시나마 개방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유 관람은 아니었고, 회 당 인원이 40명으로 제한 된 단체 관람 형식이었으며 사전 신청을 해야 했었다.#
  • 1998년 8월의 호우로 신 선원전의 뒷 담장 3m가 붕괴되었다. 물론 현재는 복구된 상태.#
  • 2013년 7월 29일 낮 12시 30분 경 이 곳에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포획 작전 1시간 여 만에 사살됐다. 이 멧돼지는 전날 오후 신 선원전 옆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도 출몰했었다고 한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35회 예고편

[A] A B C D 원래 창덕궁 영역이 아니었으나 현재 신 선원전 권역에 있으므로 편의상 부속 건물로 기재한다.[1] 御眞. 임금초상화.[2]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로 되어 있다.[3] 여기서 말하는 왕실 역사의 시작은, 추존되어 엄연히 조선시대 당시 법적으로 임금이었던 목조 이안사부터를 말한다.[4]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3]),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5] 초대 황제 홍무제임진왜란원군을 보낸 만력제, 그리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6] 조각 기법의 중 하나로 재료의 면을 도려내거나 깎아서 원하는 무늬를 나타내는 것.[7] 唐家. 옥좌 위에 다는 집의 모형.[8] 踏掌. 발을 올려 둘 수 있는 가구.[9] 효명세자부인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 명성황후 민씨의 혼전이었다.#[10] 지금의 덕수궁.[11] 임금의 생전에 황후,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기존에 모시던 곳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12] 조선 후기 양인 ·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조직된 혼성군.[13] 정확히는 경기 속오군[12] 중에서 건장한 군사를 뽑아 장초보(壯抄保)를 편성하여 겨울철 3개월 간 북영에서 경비서게 한 것이 시초.[14] 모양의 장식 기와. 주로 6각형, 8각형 형태의 건물(거의 대부분 정자)에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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