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
[image]
萬東廟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1]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사적 제4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양 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 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아있다가 1999년 사적으로 지정 후 2001년 - 2004년까지 만동묘[2] 와 승삼문, 송자사[3] 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4] 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만동묘 설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 때 민정중[5] 이 청나라에서 구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전해 받은 송시열이 그 글씨를 화양동의 암벽에 새기고 1674년(현종 15년) 화양리에 운한각, 화양 서원 등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후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이 당시 이미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한 지 오래였던[6]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라고 제자인 권상하(1641년 ~ 1721년)에게 유명으로 남겼다. 권상하는 1703년(숙종 29년)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 만동묘를 창건하고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후 국왕들도 융성하게 만동묘를 대접했다. 1726년(영조 2년)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 폐단의 온상 중 하나로 지목받는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7] 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고 심지어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는 살인면허도 인정되는 그 폐단이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8][9]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심지어 젊은 시절 흥선군이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얻어맞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다.
결국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 당시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으로 신주와 편액을 옮겼다가[10] 1873년(고종 10년) 부활했으나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서원의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하여 예전과 달리 만동묘 좨주[11] 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이후 1907년에는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철폐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이후 일제강점기 1937년까지 지방 유림들이 일제 몰래 제사를 지냈으나 발각되어 1940년에 완전히 제사의 맥이 끊겼고 1942년엔 명나라에 대한 보은 명목으로 세워진 만동묘정비의 글자를 모조리 쪼아 없애고 만동묘 건물을 불태웠으며 비석은 묻어 버렸다.
전통에 쓸데없이 심히 심취한 유생들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에 일본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 게 아니냐 싶을 수도 있지만, 1937년에 일본은 중화민국과 전면전을 했고 또 조선 왕조 500년 유교 및 소중화 사상으로 유림들은 20세기가 돼서도 중국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에는 공화국이었고 황제 대신에 왠 대머리 군인이 대륙을 통치했지만, 숭중사상은 초기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고 많은 초기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의 힘을 빌려 일본과 맞서싸울 계획을 짰는데다 김구가 이끄는 임정이 중국 국민당과 깊은 관계를 맺은 한 이유가 된다. 현대 한국에서야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 그런 행위를 함 자체가 조선의 전통을 지켜나가고 나아가 독립 운동까지 도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만 해도 임병찬의 독립의군부처럼 복벽운동이라고 해서 조선 왕조를 부활시키려는 형태의 독립 운동도 엄연히 존재했다. 일본이 이런 행동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도 뜬금없지는 않았다.
이 비석은 1983년 홍수로 인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두 쪼아 없애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만동묘와 화양 서원은 2001년 - 20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 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고, 남은 건물들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친중화적이니 뭐니할 건물을 뭐하러 복원하느냐 비난도 있어서 복원 가능성이 그리 없는 듯하다.[12]
조선 후기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임과 동시에 서원이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차 요금은 경차는 2000원, 승용차 5000원, 버스 6000원으로 꽤 비싸며 만동묘까지 약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여름에는 피서객이, 가을에는 화양 계곡에 위치한 도명산을 등산하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느긋하게 관람하려는 사람들은 이 때를 피하는 것이 좋다.
화양 서원과 화양 계곡에 대해 알아보며 관람하고 싶다면 국립공원공단에서 운영하는 자연 해설과 괴산 군청에서 운영하는 화양 서원 문화 해설을 듣는 것이 좋다. 자연 해설은 화양동 주차장과 2곡 운영담 사이에 위치한 자연 학습 탐방로에서 진행하며 시간은 30분 ~ 1시간이 소요되며 미리 예약해야 하고(전화 예약 가능. 043 - 832 - 4347) 문화 해설은 화양 서원 앞 작은 센터에서 10시 ~ 5시 사이에만 오면 들을 수 있다.[13] 화양동 주차장에서 1분 거리에 자연 환경 해설사가 상주하는 국립 공원 탐방 지원 센터가 있기 때문에 자연 해설을 먼저 듣고 화양 서원으로 가서 문화 해설을 듣는 것이 좋다.
화사모라는 단체에서 4월 ~ 10월 사이 월별 둘째주와 넷째주 토요일마다 화양 서원 내에서 각종 문화 체험 행사를 개최하며, 6월과 10월에는 인문 음악 콘서트를 개최한다. 1박 2일 서원 스테이 체험은 예약 필수, 당일 행사 참가는 무료다.
화양 서원이 위치한 화양구곡 내에는 당시 유람온 관리들이 남긴 자신과 일행들의 이름이나 우암 송시열의 글씨[14] , 명 태조 어필[15] , 선조 어필[16] , 숙종 어필[17] 등 석각이 많이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들의 어필 모으기를 즐겼는데, 이를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제자들에게 대리 구매를 시켰다. 제자들이 모아온 어필들을 당시 화양구곡[18] 내 환장암이라는 절에 모아뒀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명 태조 주원장의 어필을 새긴 석각밖에 없다.
만동묘의 계단은 매우 폭이 좁고 단이 높은데, 명나라 황제가 계신 곳을 감히 그냥 걸어올라가지 말고 기어서 올라가라는 의미가 있다.
청나라도 조선의 만동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고, 조선 사신에게 이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사신 曰, "재가한 과부가 죽은 전남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우리 조선도 명나라를 그리 대할 뿐입니다. 청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에 청나라 측도 불쾌감을 풀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달리 해석하면 "청나라 니들 우리 조선보다 먼저 망할 거다."...라는 뜻이 되는 지라, 사신이 은연 중에 패드립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1. 개요
萬東廟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1]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사적 제4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양 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 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아있다가 1999년 사적으로 지정 후 2001년 - 2004년까지 만동묘[2] 와 승삼문, 송자사[3] 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4] 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2. 역사
만동묘 설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 때 민정중[5] 이 청나라에서 구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전해 받은 송시열이 그 글씨를 화양동의 암벽에 새기고 1674년(현종 15년) 화양리에 운한각, 화양 서원 등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후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이 당시 이미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한 지 오래였던[6]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라고 제자인 권상하(1641년 ~ 1721년)에게 유명으로 남겼다. 권상하는 1703년(숙종 29년)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 만동묘를 창건하고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후 국왕들도 융성하게 만동묘를 대접했다. 1726년(영조 2년)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 폐단의 온상 중 하나로 지목받는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7] 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고 심지어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는 살인면허도 인정되는 그 폐단이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8][9]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심지어 젊은 시절 흥선군이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얻어맞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다.
결국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 당시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으로 신주와 편액을 옮겼다가[10] 1873년(고종 10년) 부활했으나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서원의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하여 예전과 달리 만동묘 좨주[11] 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이후 1907년에는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철폐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이후 일제강점기 1937년까지 지방 유림들이 일제 몰래 제사를 지냈으나 발각되어 1940년에 완전히 제사의 맥이 끊겼고 1942년엔 명나라에 대한 보은 명목으로 세워진 만동묘정비의 글자를 모조리 쪼아 없애고 만동묘 건물을 불태웠으며 비석은 묻어 버렸다.
전통에 쓸데없이 심히 심취한 유생들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에 일본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 게 아니냐 싶을 수도 있지만, 1937년에 일본은 중화민국과 전면전을 했고 또 조선 왕조 500년 유교 및 소중화 사상으로 유림들은 20세기가 돼서도 중국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에는 공화국이었고 황제 대신에 왠 대머리 군인이 대륙을 통치했지만, 숭중사상은 초기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고 많은 초기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의 힘을 빌려 일본과 맞서싸울 계획을 짰는데다 김구가 이끄는 임정이 중국 국민당과 깊은 관계를 맺은 한 이유가 된다. 현대 한국에서야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 그런 행위를 함 자체가 조선의 전통을 지켜나가고 나아가 독립 운동까지 도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만 해도 임병찬의 독립의군부처럼 복벽운동이라고 해서 조선 왕조를 부활시키려는 형태의 독립 운동도 엄연히 존재했다. 일본이 이런 행동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도 뜬금없지는 않았다.
이 비석은 1983년 홍수로 인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두 쪼아 없애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만동묘와 화양 서원은 2001년 - 20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 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고, 남은 건물들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친중화적이니 뭐니할 건물을 뭐하러 복원하느냐 비난도 있어서 복원 가능성이 그리 없는 듯하다.[12]
조선 후기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임과 동시에 서원이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3. 관광 정보
주차 요금은 경차는 2000원, 승용차 5000원, 버스 6000원으로 꽤 비싸며 만동묘까지 약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여름에는 피서객이, 가을에는 화양 계곡에 위치한 도명산을 등산하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느긋하게 관람하려는 사람들은 이 때를 피하는 것이 좋다.
화양 서원과 화양 계곡에 대해 알아보며 관람하고 싶다면 국립공원공단에서 운영하는 자연 해설과 괴산 군청에서 운영하는 화양 서원 문화 해설을 듣는 것이 좋다. 자연 해설은 화양동 주차장과 2곡 운영담 사이에 위치한 자연 학습 탐방로에서 진행하며 시간은 30분 ~ 1시간이 소요되며 미리 예약해야 하고(전화 예약 가능. 043 - 832 - 4347) 문화 해설은 화양 서원 앞 작은 센터에서 10시 ~ 5시 사이에만 오면 들을 수 있다.[13] 화양동 주차장에서 1분 거리에 자연 환경 해설사가 상주하는 국립 공원 탐방 지원 센터가 있기 때문에 자연 해설을 먼저 듣고 화양 서원으로 가서 문화 해설을 듣는 것이 좋다.
화사모라는 단체에서 4월 ~ 10월 사이 월별 둘째주와 넷째주 토요일마다 화양 서원 내에서 각종 문화 체험 행사를 개최하며, 6월과 10월에는 인문 음악 콘서트를 개최한다. 1박 2일 서원 스테이 체험은 예약 필수, 당일 행사 참가는 무료다.
4. 기타
화양 서원이 위치한 화양구곡 내에는 당시 유람온 관리들이 남긴 자신과 일행들의 이름이나 우암 송시열의 글씨[14] , 명 태조 어필[15] , 선조 어필[16] , 숙종 어필[17] 등 석각이 많이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들의 어필 모으기를 즐겼는데, 이를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제자들에게 대리 구매를 시켰다. 제자들이 모아온 어필들을 당시 화양구곡[18] 내 환장암이라는 절에 모아뒀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명 태조 주원장의 어필을 새긴 석각밖에 없다.
만동묘의 계단은 매우 폭이 좁고 단이 높은데, 명나라 황제가 계신 곳을 감히 그냥 걸어올라가지 말고 기어서 올라가라는 의미가 있다.
청나라도 조선의 만동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고, 조선 사신에게 이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사신 曰, "재가한 과부가 죽은 전남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우리 조선도 명나라를 그리 대할 뿐입니다. 청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에 청나라 측도 불쾌감을 풀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달리 해석하면 "청나라 니들 우리 조선보다 먼저 망할 거다."...라는 뜻이 되는 지라, 사신이 은연 중에 패드립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5. 관련 문서
[1]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도 청주목 청천면 화양동.[2] 명 신종과 의종 두명의 위패를 모시게 복원되어야 했지만 복원 미스로 3위의 위패를 모시게 만들어놨다.[3] 우암 송시열의 사당[4] 황하의 물이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조선)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축약하자면 소중화사상.[5]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둘째 큰 아버지[6] 대략 50여년 후[7]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인근 수령들과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당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중심지나 다름이 없었으니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8] 승지는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수석 비서관 정도 된다. 품계가 정3품인데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정1품 삼정승보다 높게 표현한 이유는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문고리 권력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우부승지에 대응되는 민정수석비서관은 그 권력이 정말로 높은데 이 권력을 남용한 사례로 우병우가 있다.[9] 단 중국의 십상시 같이 정책 보좌, 자문 등을 할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국정에 끼어드는 것과 다르다. 정승보다 품계가 낮을지라도 승지는 국왕의 곁에서 정책 자문 및 보좌를 수행하는 직책이다. 다만 직책상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일하고 있기에 문고리라고 개그로 부르는것.[10] 이쪽은 국가에서 명나라 홍무제, 만력제, 숭정제를 제사 지내는 곳으로 1704년(숙종 30년) 창덕궁 금원 옆에 설치되었다. 국가 입장에선 충분히 제사지내는 장소가 겹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는데, 대보단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제례가 중단되었다.[11] 祭酒이지만 '''제주라 읽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 祭酒를 제주로 읽을 때는 제사에 쓰이는 술만을 일컬으며 여기서 좨주는 벼슬 이름이다.[12] 무엇보다 백성들을 수탈하던 만동묘의 악명이 강해 복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 탓도 크다.[13] 해설사들이 휴무인 날도 있을 수 있음. 괴산군 문화 관광과에서 예약가능.[14] 4곡 금사담 암벽에 위치[15] 충효절의, 4곡 금사담 암격에 위치[16] 만절필동, 5곡 첨성대 밑 암벽[17] 비례부동, 5곡 밑 계곡의 암벽에 위치[18] 현 명칭은 화양 계곡이나 당시 명칭은 화양동 or 화양구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