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권
大成拳.
왕향재(王向齋 1886~1963)가 창시한 근대 중국무술.
왕향재는 '반보붕권 타편천하'로 유명한 곽운심(郭雲深, 1829-1900)에게 형의권을 배운 뒤 의권을 창시했다.
왕향재가 살던 마을에 곽운심이 살았는데, 왕향재의 아버지는 아들이 몸이 약하지 무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곽운심에게 무술을 배우게 하였다. 이것이 왕향재가 무술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곽운심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강한 수련은 하지 않은 지 오래라, 왕향재에게도 참장 중심으로 수련을 시켰다고 한다. 왕향재는 당시 나이가 열살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고련을 할 수도 없었고 무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스승이 그 유명한 곽운심이고, 왕향재가 이후 달성한 업적을 보면 당연히 마냥 맹한 수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향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배웠던 것이 중국무술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이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왕향재 자신은 의권(意拳)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나, 훗날 실전에서 위력을 증명하자 무술계 동료들이 중국의 무술을 집대성한 권법이란 뜻으로 대성권(大成拳)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왕향재는 '권법의 길엔 끝이 없는데 어찌 대성이 있을까?'하며 그다지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2대 왕선걸 노사가 이걸 덜컥 채용하여 대성권이란 이름이 정착했고, 그 때문에 지금도 의권/대성권이란 호칭이 혼용된다. 왕선걸 계열은 대성권이라, 요종훈 계열에서는 의권이라 많이 부른다.
흔히 넷상에서 중국무술은 실전에 약하네 아니네 입고수들의 키배가 끊이지 않는데, 대성권은 중국무술 가운데 '''실전지향'''으로 이름이 높다. 애당초 의권이 실전에서 이름을 날릴 것도 왕향재가 '무술로 친구를 사귄다'는 신문광고를 낸 뒤 찾아온 도전자를 모두 물리쳐서였으니(...) 왕향재가 배운 형의권이 당대 중국에서 숱한 무용담과 달인을 배출한 권법인데다, 왕향재 자신도 스승 곽운심에게 '내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고된 수련을 했다.
이후로도 20년 동안 중국을 떠돌며 자칭타칭 고수라는 인물을 찾아다녔다. 소림사를 방문해 형의권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심의파(心意把)의 전인 향림선사와 기예를 연구하였고, 호남성에서 해철부(解鐵夫)에게 심의육합권을, 복건성에서 방합중(方洽中)에게 백학권(白鶴拳)[1] 을 배웠다.
훗날 왕향재는 "내가 만리를 다니며 만나본 명가가 천명이 넘는데, 그중 대가라 할 사람은 '''두 사람 반(1/2)''' 뿐이다." 라고 회고했다 카더라.
1940년대에는 북경실보나 신민보 등의 신문지상에 여러 글을 발표하여 중국권술에 대한 관점과 견해 및 의권의 단련방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1947년 북경 태묘(오늘날 노동인민문화궁)에서 권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의권을 전파했다. 이후 연구회를 중단하고 중산공원에서 의권 지도에 몰두했는데, 이때부터 특유의 건신과 양생법을 참장공(站桩功)이라고 불렸다. 1950년 중화체육총회기획위원회에서 무술 팀의 팀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보정시하북성중의연구원에서 참장공을 지도했다. 이 시기에 중국권술에 대한 의료보건방면의 효용 문제에 관한 일련의 연구작업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날 의권 참장공이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1963년 7월 천진에서 별세했였으며, 유저로는 의권정궤(意拳正轨) 권도중추(拳道中枢)가 있다.
이후 대성권의 계보는 요종훈ㆍ왕선걸ㆍ왕옥방(왕향재의 딸) 등으로 이어지는데,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한다. 크게 나누면 요종훈의 의권 계열과 왕선걸의 대성권 계열이 양대 주류이다.
중국무술로서는 기이하게도 '''투로(품새)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투로를 버리고 공법과 단조수만 전한다. 참장공을 기본공으로 삼아 수련하는 체계인데, 오늘날 여러 문파에서 강조하는 참장공 수련은 의권에 기원을 둔다.
또한 기본기의 명칭과 분류체계 역시 심플하다. 일례로 요종훈 계통의 주먹 기술들은 직권ㆍ횡권ㆍ찬권ㆍ제권 딱 4종이며, 이름 역시 동물 이름이나 음양오행 등등에서 따지 않고 곧게 지르니까 직(直)권, 가로로 휘두르니까 횡(橫)권이라 부르는 식이다. 조금 어렵게 들리는 기술 이름들도 한문과 중국어를 조금만 알면 알아들을 수 있다. 역학적 힘을 전/후/상/하/개/합 여섯 방향으로 정리해 육면력(六面力)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거나, 발이 팔(八)자를 이루는 보법을 정팔보라고 부르는 등, 용어에서부터 추상적으로 보일 법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이해, 분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기계적으로 이해가능한 용어들을 사용함은 근대 이후 무술 및 격투기의 공통적인 사항이며, 의권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에서 돌개차기 대신 '봉황비무각' 따위 무협지삘 나는 이름을 붙이거나, 총기 사용법 매뉴얼에 "화약의 집이 굳게 닫혔을 때에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만방에 전파할 수 있으리라."와 같은 뜬구름 잡는 비유만 적힌 상황을 상상해 보자. 제자들로서는 구르고 깨지다가 "아, 이 발차기에는 봉황이 춤추는 듯 보인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구나!", "아, 노리쇠가 전진해서 약실이 닫혀야 발사가 된다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려면 토네이도(돌개바람)처럼 빙빙 도니까 돌개차기, 약실히 폐쇄되어야 발사되니까 클로즈드 볼트라는 용어를 써야 합리적이다.
왕향재가 주장한 논리는 심플하면서도 요즘 관점에서 봐도 이치에 닿는다. 요약하자면 "핵심이 되는 이론을 붙들고 죽어라고 한 우물만 파면 고수가 된다. 쓸데없는 기술 하나 더 배우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니까 야메가 되는 거야." 라는 것.
앞서 언급했지만 왕향재는 신문지상에 글을 여럿 발표했는데, 중국무술 전반에 대해 무자비하게 디스했다.
왕향재가 상해에서 머물던 시기에 ‘서청(西青)이라는 서양인들의 청년회가 있었고, 헝가리 출신 영격(英格)이라는 사람이 권투 교련을 맡았다. 영격은 프로복서로서 라이트급 챔피온을 획득했던 인물이다. 영격은 왕향재와 시합에서 스트레이트로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왕향재가 손을 한번 튀겨내니 순식간에 바닥에 튕겨 나가 떨어졌다...는 글이 200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 잠깐 떡밥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대성권 제자들이 집필한 기록'''이라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중국 웹에 해당 복싱 선수의 이름과 사진은 공개 되어있다. 해당 사이트가 확실한지 확인이 안 되어서 직접 링크하진 않으나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한 번 바이두 등을 검색해보면 확인이 가능한데, 이에 따르면 무명의 실력 없는 선수는 아니다. 다만 최고수준이 아닌 선수조차 당시 중국 고수들이 이기지 못했기에 왕향재가 나서야 했을 정도로 중국무술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얘기는 될 듯하며, 최영의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아시아 무술은 따로 대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기록들 역시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일본 유도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의 제자인 유도6단 하타 이치로(八田一朗)[3] 이 왕향재를 찾아와 비무를 신청하였고, 손목을 거머쥐려는 찰라 몸이 공중으로 떠 올라 벽에 부딪치며 땅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유도 5단 검도 3단 사와이 켄이치(泽井建一)가 찾아와 겨루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시합에 패한 후 의권을 배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태기권(太氣拳)이란 이름으로 배운 바를 일본에 전파했다. 1970년대 사와이 켄이치는 서림출판사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 자신의 저서 <태기권-중국실전권법>에서 그가 배움을 청하게 된 경위와 의권에 대한 평가 등을 서술하였다.
사와이 켄이치가 배워 일본에서는 태기권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는데, 사와이 켄이치는 극진 공수도의 최영의 총재와 친분이 있어 두 유파는 교류가 꽤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두 유파의 수련생들이 같이 연습을 하고, 대련하는 영상도 있다.# # #
참고로, 영상에는 극진을 배웠다면 이름만 대도 알만한 마쓰이 쇼케이(문장규), 미도리 겐지 등 유명인이 많은데 태기권쪽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리어 안면타격에는 약점을 보이기도 할 정도. 극진 공수도의 분파 중 극진관의 총재 로야마 하츠오(노초웅) 관장은 사와이 켄이치에게도 사사해서 참장공이나 발력법을 채택하였다. 다만 로야마 관장의 수련 모습을 보면 일본의 태기권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의권, 특히 요승영 계열의 의권에 더 가깝다.[4]
이 영상에선 극진 쪽이 훨씬 잘한다. 안면타격 여부를 떠나서 그냥 극진 쪽이 더 잘한다.
왕향재(王向齋 1886~1963)가 창시한 근대 중국무술.
1. 유래
왕향재는 '반보붕권 타편천하'로 유명한 곽운심(郭雲深, 1829-1900)에게 형의권을 배운 뒤 의권을 창시했다.
왕향재가 살던 마을에 곽운심이 살았는데, 왕향재의 아버지는 아들이 몸이 약하지 무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곽운심에게 무술을 배우게 하였다. 이것이 왕향재가 무술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곽운심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강한 수련은 하지 않은 지 오래라, 왕향재에게도 참장 중심으로 수련을 시켰다고 한다. 왕향재는 당시 나이가 열살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고련을 할 수도 없었고 무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스승이 그 유명한 곽운심이고, 왕향재가 이후 달성한 업적을 보면 당연히 마냥 맹한 수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향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배웠던 것이 중국무술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이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왕향재 자신은 의권(意拳)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나, 훗날 실전에서 위력을 증명하자 무술계 동료들이 중국의 무술을 집대성한 권법이란 뜻으로 대성권(大成拳)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왕향재는 '권법의 길엔 끝이 없는데 어찌 대성이 있을까?'하며 그다지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2대 왕선걸 노사가 이걸 덜컥 채용하여 대성권이란 이름이 정착했고, 그 때문에 지금도 의권/대성권이란 호칭이 혼용된다. 왕선걸 계열은 대성권이라, 요종훈 계열에서는 의권이라 많이 부른다.
2. 창시자
흔히 넷상에서 중국무술은 실전에 약하네 아니네 입고수들의 키배가 끊이지 않는데, 대성권은 중국무술 가운데 '''실전지향'''으로 이름이 높다. 애당초 의권이 실전에서 이름을 날릴 것도 왕향재가 '무술로 친구를 사귄다'는 신문광고를 낸 뒤 찾아온 도전자를 모두 물리쳐서였으니(...) 왕향재가 배운 형의권이 당대 중국에서 숱한 무용담과 달인을 배출한 권법인데다, 왕향재 자신도 스승 곽운심에게 '내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고된 수련을 했다.
이후로도 20년 동안 중국을 떠돌며 자칭타칭 고수라는 인물을 찾아다녔다. 소림사를 방문해 형의권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심의파(心意把)의 전인 향림선사와 기예를 연구하였고, 호남성에서 해철부(解鐵夫)에게 심의육합권을, 복건성에서 방합중(方洽中)에게 백학권(白鶴拳)[1] 을 배웠다.
훗날 왕향재는 "내가 만리를 다니며 만나본 명가가 천명이 넘는데, 그중 대가라 할 사람은 '''두 사람 반(1/2)''' 뿐이다." 라고 회고했다 카더라.
1940년대에는 북경실보나 신민보 등의 신문지상에 여러 글을 발표하여 중국권술에 대한 관점과 견해 및 의권의 단련방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1947년 북경 태묘(오늘날 노동인민문화궁)에서 권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의권을 전파했다. 이후 연구회를 중단하고 중산공원에서 의권 지도에 몰두했는데, 이때부터 특유의 건신과 양생법을 참장공(站桩功)이라고 불렸다. 1950년 중화체육총회기획위원회에서 무술 팀의 팀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보정시하북성중의연구원에서 참장공을 지도했다. 이 시기에 중국권술에 대한 의료보건방면의 효용 문제에 관한 일련의 연구작업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날 의권 참장공이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1963년 7월 천진에서 별세했였으며, 유저로는 의권정궤(意拳正轨) 권도중추(拳道中枢)가 있다.
이후 대성권의 계보는 요종훈ㆍ왕선걸ㆍ왕옥방(왕향재의 딸) 등으로 이어지는데,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한다. 크게 나누면 요종훈의 의권 계열과 왕선걸의 대성권 계열이 양대 주류이다.
3. 특징
중국무술로서는 기이하게도 '''투로(품새)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투로를 버리고 공법과 단조수만 전한다. 참장공을 기본공으로 삼아 수련하는 체계인데, 오늘날 여러 문파에서 강조하는 참장공 수련은 의권에 기원을 둔다.
또한 기본기의 명칭과 분류체계 역시 심플하다. 일례로 요종훈 계통의 주먹 기술들은 직권ㆍ횡권ㆍ찬권ㆍ제권 딱 4종이며, 이름 역시 동물 이름이나 음양오행 등등에서 따지 않고 곧게 지르니까 직(直)권, 가로로 휘두르니까 횡(橫)권이라 부르는 식이다. 조금 어렵게 들리는 기술 이름들도 한문과 중국어를 조금만 알면 알아들을 수 있다. 역학적 힘을 전/후/상/하/개/합 여섯 방향으로 정리해 육면력(六面力)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거나, 발이 팔(八)자를 이루는 보법을 정팔보라고 부르는 등, 용어에서부터 추상적으로 보일 법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이해, 분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기계적으로 이해가능한 용어들을 사용함은 근대 이후 무술 및 격투기의 공통적인 사항이며, 의권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에서 돌개차기 대신 '봉황비무각' 따위 무협지삘 나는 이름을 붙이거나, 총기 사용법 매뉴얼에 "화약의 집이 굳게 닫혔을 때에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만방에 전파할 수 있으리라."와 같은 뜬구름 잡는 비유만 적힌 상황을 상상해 보자. 제자들로서는 구르고 깨지다가 "아, 이 발차기에는 봉황이 춤추는 듯 보인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구나!", "아, 노리쇠가 전진해서 약실이 닫혀야 발사가 된다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려면 토네이도(돌개바람)처럼 빙빙 도니까 돌개차기, 약실히 폐쇄되어야 발사되니까 클로즈드 볼트라는 용어를 써야 합리적이다.
왕향재가 주장한 논리는 심플하면서도 요즘 관점에서 봐도 이치에 닿는다. 요약하자면 "핵심이 되는 이론을 붙들고 죽어라고 한 우물만 파면 고수가 된다. 쓸데없는 기술 하나 더 배우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니까 야메가 되는 거야." 라는 것.
앞서 언급했지만 왕향재는 신문지상에 글을 여럿 발표했는데, 중국무술 전반에 대해 무자비하게 디스했다.
초식? 요즘 그거 갖고 약을 파는 놈들이 너무 많아 탈이다.
내게 배운 사람들 가운데 남을 패고 다니는 놈이 있고 남에게 맞고 다니는 놈이 있다. 그 차이가 뭔줄 아나? 꼭 보면 기본을 무시하고 신비로운 것만 쫓아다니는 놈이 처맞고 다닌다.
창시자가 이런 사람이니 본인과 후예들이 실전에 강할 수밖에.내가권? 유래도 모르겠고[2]
논할 가치도 없다. 그런 말장난에 혹하지 말고 내가권의 정수를 좀 제대로 배워라.
4. 타문파와 교류
왕향재가 상해에서 머물던 시기에 ‘서청(西青)이라는 서양인들의 청년회가 있었고, 헝가리 출신 영격(英格)이라는 사람이 권투 교련을 맡았다. 영격은 프로복서로서 라이트급 챔피온을 획득했던 인물이다. 영격은 왕향재와 시합에서 스트레이트로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왕향재가 손을 한번 튀겨내니 순식간에 바닥에 튕겨 나가 떨어졌다...는 글이 200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 잠깐 떡밥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대성권 제자들이 집필한 기록'''이라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중국 웹에 해당 복싱 선수의 이름과 사진은 공개 되어있다. 해당 사이트가 확실한지 확인이 안 되어서 직접 링크하진 않으나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한 번 바이두 등을 검색해보면 확인이 가능한데, 이에 따르면 무명의 실력 없는 선수는 아니다. 다만 최고수준이 아닌 선수조차 당시 중국 고수들이 이기지 못했기에 왕향재가 나서야 했을 정도로 중국무술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얘기는 될 듯하며, 최영의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아시아 무술은 따로 대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기록들 역시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일본 유도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의 제자인 유도6단 하타 이치로(八田一朗)[3] 이 왕향재를 찾아와 비무를 신청하였고, 손목을 거머쥐려는 찰라 몸이 공중으로 떠 올라 벽에 부딪치며 땅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유도 5단 검도 3단 사와이 켄이치(泽井建一)가 찾아와 겨루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시합에 패한 후 의권을 배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태기권(太氣拳)이란 이름으로 배운 바를 일본에 전파했다. 1970년대 사와이 켄이치는 서림출판사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 자신의 저서 <태기권-중국실전권법>에서 그가 배움을 청하게 된 경위와 의권에 대한 평가 등을 서술하였다.
5. 태기권
사와이 켄이치가 배워 일본에서는 태기권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는데, 사와이 켄이치는 극진 공수도의 최영의 총재와 친분이 있어 두 유파는 교류가 꽤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두 유파의 수련생들이 같이 연습을 하고, 대련하는 영상도 있다.# # #
참고로, 영상에는 극진을 배웠다면 이름만 대도 알만한 마쓰이 쇼케이(문장규), 미도리 겐지 등 유명인이 많은데 태기권쪽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리어 안면타격에는 약점을 보이기도 할 정도. 극진 공수도의 분파 중 극진관의 총재 로야마 하츠오(노초웅) 관장은 사와이 켄이치에게도 사사해서 참장공이나 발력법을 채택하였다. 다만 로야마 관장의 수련 모습을 보면 일본의 태기권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의권, 특히 요승영 계열의 의권에 더 가깝다.[4]
이 영상에선 극진 쪽이 훨씬 잘한다. 안면타격 여부를 떠나서 그냥 극진 쪽이 더 잘한다.
[1] 우리나라에선 듣보잡이지만 중국 남파 권법 가운데서 유명하며, 영춘권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오키나와 가라데의 원류가 백학권으로, 두 무술에는 아예 품새까지 똑같은 게 있다. 즉 태권도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2] 왕향재는 형의권의 전인일 뿐만 아니라, 정파 팔괘장이나 양가 태극권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발언이다.[3] 생몰년은 1906-1983. 일본 최초의 체육인 출신 국회의원. 일본레슬링협회를 만드는 등 프로 레슬링계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알리와 이노키의 이종격투기 시합이 열리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일본에 삼보를 소개하고 도입하였다.[4] 이는 사실 노초웅 관장이 태기권보다는 요종훈 계열의 의권을 더 오래 배웠기 때문이다. 요종훈 노사는 요승영 노사의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