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스토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더글라스 스토리
Robert Douglas Story'''

'''출생'''
1872년 12월 31일
[image]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 미들로디언
'''사망'''
1921년 7월 7일 (37세)
[image] 인도 라자스탄주 남동부 코타
'''국적'''
[image] 스코틀랜드
'''직업'''
언론인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한국에 오기 전 경력
2.2. 고종의 밀서를 받다
2.3.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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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인 언론인.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의 밀서를 세상에 알린 인물.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한국에 오기 전 경력


로버트 더글라스 스토리는 1872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 미들로디언에서 부친 대니얼 프레이저 스토리(Daniel Fraser Story)와 모친 제인 스커빙 데이브(Jane Skirving Dave)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 영국의 전국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스토리는 잉글랜드 북동부 노섬벌랜드에 사는 윌리엄 덴턴(William Denton)의 집에 거주했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후인 1891년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스토리는 19세로 미들로디언 본가로 돌아와서 의학대 학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1897년, 스토리는 25살의 나이로 런던에서 <요하네스버그 스탠더드 앤드 디거스 뉴스> 신문사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유명 정치가이자 기업가인 제임스 시브라이트(James Sivewright) 경이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사업과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소개하는 글을 <스코츠 폴리티컬(Scots Political)>에 실었다. 2년 뒤인 1899년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스토리는 데일리 메일 소속 전쟁 종군기자로 남아프리카 현지에서 전쟁을 취재하면서 <중재냐, 전쟁이냐(Arbitration or War)>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집필했다.
1901년 4월 런던으로 돌아온 스토리는 아내 제인 매퀸(Jane McEwen)이 제기한 이혼 소송에 휘말렸다. 제인은 그가 남아프리카 취재를 마치고 귀국할 때 레다 포드(Freda Ford)라는 여자와 동행했고, 이후 그녀와 불륜을 일삼고 자신을 차가운 욕조에 빠뜨리며 폭행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제기한 이혼은 성사되었고, 스토리의 명예는 실추되었다. 그가 그해 가을 뉴욕으로 간 데에는 세간의 이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뉴욕에 도착한 스토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예일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는 걸 취재했으며, <뉴욕 헤럴드(The New York Herald)> 특파원 자격으로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캐나다를 순방하는 과정도 취재했다. 이후 홍콩으로 건너간 그는 1903년 홍콩에서 창간된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부편집장으로 참여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토리는 데일리 익스프레스 특파원에 임명되어 영국 군함에 승선해 러일전쟁을 취재했다. 그는 전쟁이 벌어진 지 이틀 뒤인 2월 10일 중국 산동 반도의 즈푸에서 전쟁 발발 기사를 한 편 집필했고, 이어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서울이 점령되었고 한국은 공포에 떨고 있다'라는 제목의 또다른 기사를 집필했다. 두 기사는 <노던 휘그(The Northern Whig)>지에 실렸다. 그 후 스토리는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가사키에 갔고, 거기서 도쿄로 갔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서 취재를 지속했다.
그 후 스토리는 러시아군을 종군하며 중국 해안을 거쳐 만주 지역에서 10월까지 러시아군을 취재했다. 그는 종군기 <쿠로파트킨의 군사작전>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자신이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삽입했고, 전쟁 초기 두 나라의 전함 보유량을 비교하고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등, 러시아군 쪽에서 본 전쟁의 경과를 종합적으로 기술했다.
스토리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요인은 일본군 지휘관들의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능력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전투에 임하는 일본군의 '강렬한 야만성' 덕분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일본군의 전투력이 서양 군대부터 우월한 요인은 병사들의 ‘광신적인 애국심(fanatical patriotism)’인데 세계 어느 나라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2.2. 고종의 밀서를 받다


1906년 1월, 스토리는 <트리뷴>의 특파원 자격으로 베이징에서 출발해 상하이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와 고베를 들린 뒤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상하이에서 한국 궁중의 측근들을 만나 한국 정세에 관한 입장을 들었고 서울에서 고종과 바로 대면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 또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주한 미군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에드윈 V.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스토리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기차가 멈추는 역마다 일본인 고관들이 연설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서울에 올라와 고종을 대면한 스토리는 고종으로부터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고종을 감시하는 일본 정보기관이 세계에서 가장 민첩하고 수완이 좋다고 평가했다. 일본 비밀 기관원들의 감시가 밤낮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궁중과 스토리 사이에 연결을 취하는 고종의 측근들은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편지를 넣어가지고 나오곤 했고, 스토리는 이를 통해 고종과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던 1906년 1월 어느날, 스토리는 고종으로부터 붉은 옥새가 찍힌 밀서를 전달받았다.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05년 11월 17일 일본 공사 하야시와 박제순이 조약을 체결했다. 황제께선 처음부터 허락하지 않았고 수결하지도 않으셨다.

2. 황제께선 이 조약을 일본이 제멋대로 반포한 것에 반대하신다.

3. 황제께선 독립제권(獨立帝權)을 일호(一毫)도 타국에 양도할 뜻이 없으시다.

4. 일본이 공표한 조약에 따르면, 외세와 관련된 용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일본의 한국 내정 장악에 대한 가정은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

5. 황제께선 통감의 주재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황실권을 일호도 외인에 제멋대로 넘길 뜻이 없으시다.

6. 황제께선 세계의 각 대국이 5년이 넘지 않는 기간 동안 한국을 공동으로 보호해주길 원하시다.

광무10년 1월 29일.

스토리는 우선 이 밀서를 믿을 수 있는 '유럽인'에게 보여주고 두 명의 증인을 세워 편지의 사본을 만들어 안전한 곳에 밀봉해 뒀다. 그 후 인천을 거쳐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중국 산동반도 즈푸에 돌아온 그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고종의 승인을 받은 바 없다."는 요지의 기사를 런던의 <트리뷴>에 송고했다. 그리고는 즈푸 주재 영국 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Pierce Essex O’Brien-Butler)를 찾아갔다. 스토리는 버틀러에게 고종이 밀서를 보낸 사실을 알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밀서를 복사해 사본을 보관하게 했다. 만약 스토리가 원본을 잃어버릴 경우 버틀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을 베이징 주재 영국 대사 에른스트 사토우 경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버틀러는 사토우 경에게 스토리를 만났으며, 그가 고종의 '옥새'로 생각되는 인장이 날인된 문서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면서 그 문서는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이 무효이며, 조선을 5년간 열강의 보호하에 두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토리는 버틀러에게 사토우 경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사토우 경을 실제로 만났다는 기록은 없으며, 만났더라도 사토우가 별다른 개입을 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사토우는일본어 통역으로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일본에서 오래 근무한 인물로 친일적 성향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즈푸에서 타전한 기사는 <트리뷴> 1906년 2월 8일자 기사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화에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 요청>였다. 기사는 “한국의 지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며,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裁可)를 받지 않았다”라는 서두를 실었고 을사조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한 뒤 고종이 스토리에게 준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하에 게재했다.
이에 영국 주재 일본 대사관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고종이 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 관례이며, 이는 영일동맹 조약에 에드워드 7세나 일본 천황이 직접 날인하지 않고 대표자를 시켜 서명케 한 것에서 증명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 황제와 그 정부가 외국에 주재하고 있던 영사와 공사를 모두 철수시킨 것만 보더라도 황제가 조약에 동의했음을 뜻하는 증거라고 반박했다.
스토리는 2월 10일에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한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측근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스토리의 트리뷴 기사는 로이터 통신이 타전하여 동양으로 전파되어 한국, 일본, 중국 신문들이 받아서 게재했다. 서울에서는 대한매일신보 및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2월 28일자 논설란에 소개했고, 호머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스토리는 중국을 거쳐 1906년 8월 영국으로 돌아간 뒤 더 타임스의 일본 특파원 브링클리가 밀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싣자 이에 반박하고자 9월 4일 <트리뷴>에 다시 고종의 밀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는 틀림없이 고종으로부터 받았으며 진실되고 독립적인 특파원으로서의 명성을 걸고 맹세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The Future in the Orient)〉를 연재하면서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요로 체결되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12월 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사진으로 실었으며, 밀서가 궁중으로부터 나오게 된 경위와 이것을 가지고 한국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했다.
스토리의 <트리뷴> 기사와 함께 실린 고종의 밀서 사진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한매일신보》는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실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밀서에 대해 고종에게 물어봤는데 황제가 즉석에서 부인했다면서, 이 문서가 궁중 근처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고종이 수교(手交)한 것은 아닐 거라고 주장했다. 그 후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밀서는 고종이 수교한 일이 없으며, 이는 한일 양국의 친교를 저해하려는 불량배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고시문안(告示文案)’을 대한제국 정부의 <관보>에 게재하게 했다. 또한 한국 정부 외사국장(外事局長) 이건춘(李建春)으로 하여금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밀서 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정정하라"는 공문을 어니스트 베델에게 보내게 했다.
한편 스토리는 <트리뷴>에 게재했던 '동양의 장래' 시리즈 기사를 하나로 엮어 1907년 <동양의 내일(Tomorrow in the East)>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고종의 밀서를 선명한 컬러사진으로 삽입했다. 또한 호머 헐버트는 스토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자신은 워싱턴에 있었지만 고종으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았으므로 스토리에게 준 밀서는 진짜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일본이 밀서를 가짜라고 우기는 이유는 이 문서가 일본의 한국 점령이 명백한 찬탈 행위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걸 묵인했기 때문에 고종의 밀서 사건에 대해 이렇다할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이 사건은 정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2.3. 이후의 경력


스토리는 1909년 종군 특파원 생활을 접고 인도의 콜커타와 벵갈 영국 식민정부에 근무했다. 그는 1909년 1월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인도의 상황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리고 1916년부터 2년간은 인도 주둔 영국군 소령을 맡았으며,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선적 통제사로 근무했다. 그는 1920년에 선적통제사 시절의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CBE)을 수여받았다.
1921년 7월 7일, 스토리는 인도 라자스탄주 남동부 코타를 지나던 기차 안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로이터 통신>은 1921년 7월 11일 유명한 언론인이자 최근까지 벵갈 정부의 공보장관이었던 스토리 소령이 기차 안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스토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