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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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첫 번째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 현 영국의 왕세자인 찰스 왕세자의 대선배격 인물이다.
2.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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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7세 폐하(His Majesty Edward VII, by the Grace of God,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이다.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
4. 전반적인 생애
위의 문장만큼 에드워드 7세를 잘 나타내는 표현도 드물다. 물론 왕으로서의 능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존재감''' 면에서 어머니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빅토리아 여왕의 바로 뒤를 이었다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오늘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잃은 듯한 느낌이다. 신비로운 빅토리아가 죽고 평범한 뚱보 에드워드가 왕이 되었다.'''
5. 즉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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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11월 9일, 버킹엄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장남(둘째)[3] 으로 태어났다. 출생 1달 만인 같은 해 12월 8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된 것을 보면 여왕 부부가 아들을 진심으로 갈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장장 60년 동안 프린스 오브 웨일스 자리를 지키다가 60세에 왕으로 즉위해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세자로 지낸 기록을 세웠으나...이 기록은 2017년 9월 9일부로 현손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에 의해 깨졌다(…).
고대하던 아들의 탄생이라 기대치가 높아서 그랬는지 여왕 부부는 에드워드 7세를 7살 때부터 매우 엄하게 훈육했는데, 그가 여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총명한 누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4] 와 비교되면서 여왕으로부터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그에 대한 반동이었는지, 에드워드 7세는 자녀 교육을 그리 엄하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행실에 대하여 지적하러 갔던 앨버트 공이 이때의 무리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여왕은 남편의 죽음을 에드워드 7세의 탓으로 돌리고 아들을 보지 않았다. 몇십 년간 정사에도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왕세자였는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여러 여배우들과의 염문설이 파다했으며, 부모의 금슬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가장 아름다웠다는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 시씨와 유일하게 견줄 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5] 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와는 신혼 초를 제외하고는 평생 관계가 냉담했다.
부부 사이가 나빠진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7세는 위트 있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인 반면, 알렉산드라 왕비는 그다지 지적인 편은 아니었고 얌전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또 알렉산드라 왕비의 목에 있는 수술 흉터를 결혼 첫날 밤에 본 에드워드 7세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란 점,[6] 알렉산드라 왕비가 '''불감증'''(!)이었다는 점,[7] 알렉산드라 왕비가 20대부터 귀가 먹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정상적인 의사소통마저 힘들어진 점 등이 있다.
이들의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냐면, 에드워드 7세가 아내의 눈앞에서 대놓고 애인 앨리스 케펠[8] 를 침실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그가 앨리스와 산책하고 있는 걸 본 알렉산드라 왕비는 '''"돼지 한 쌍이 뜰을 산책하고 있다."'''고 폄하할 정도(…).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에드워드 7세는 심각한 비만 체형이었다.
비록 부부 사이는 신혼 초를 제외하고는 평생 냉담했지만, 알렉산드라 왕비는 3남 3녀를 낳았다.
- 장남 : 앨버트 왕자 (1864년 1월 8일 ~ 1892년 1월 14일) - 테크의 메리 공주와 약혼했다가 독감으로 사망.
- 차남 : 조지 5세 (1865년 6월 3일 ~ 1936년 1월 20일) - 영국의 국왕(재위 : 1910년 ~ 1936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자녀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 장녀 : 루이즈 공주 (1867년 2월 20일 ~ 1931년 1월 4일) - 파이프 공작(영국의 귀족 가문) 부인
- 차녀 : 빅토리아 공주 (1868년 7월 6일 ~ 1935년 12월 3일) - 독신
- 3녀 : 모드 공주[9] (1869년 11월 26일 ~ 1938년 11월 20일) -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의 왕비
- 3남 : 알렉산더 존 왕자 (1871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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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왕비와 에드워드 7세. [11]
6. 즉위 후
빅토리아 여왕이 64년간 재위하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에드워드 7세도 왕이 된 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내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위 말기에 로이드 조지(훗날 수상.)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영국 상원을 뜯어고쳤다. 즉 '''하원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 상원이 뒤집을 수 없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12]
그리고 어머니를 대신해 외국을 자주 순방한 경험과 함께 그 자신이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친분이랑 혈연관계가 있다는 점을 활용해[13]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협상을 성사시켜 독일을 견제하는데 힘을 발휘할 만큼 외교에 능통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영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 에드워드 7세를 ''''피스메이커 에드워드''''라 부르며 지지했고, 전쟁이 싫다면 '친절한 에드워드'를 찾으라는 노래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는 "뚱보 에두아르트[14] 가 일만 생기면 독일에 반대한다"며 주구장창 씹어댔다(…).
7. 사망과 장례
1910년 5월 6일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7세가 재위한 1901~1910년을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period)'라 부르며 엄숙주의 풍조가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와 비교해 화사하고 자기 만족적인 시대로 기억한다.[15] 유해는 1910년 5월 20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 안장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 때 유럽 전역의 친척들을 포함한 주요 국가의 왕족들이 대거 참석해 장관을 이루었는데, 당시의 참석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특이하게 일본과 청나라의 황족도 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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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모인 9개 나라의 왕과 황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왕국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8. 이야깃거리
- 사냥[18] 과 도박, 여자, 파티를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유쾌한 성격으로 당대 사교계를 이끄는 명사였다. 다만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 경마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버버리사의 트렌치 코트(바바리 코트)를 애용해서 외출할 때마다 하인에게 '내 버버리 가져와(Bring my Burburry)'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훗날 버버리 사에서는 이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마이 버버리'라는 향수를 내놓기도 했다.
-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담배를 지독하게 싫어한 혐연가였지만, 에드워드 7세는 즉위식 만찬 때 "신사 여러분, 피워도 좋소!(Gentlemen, you may smoke!)"를 외칠 정도로 애연가였다. 하루에 시가 12대, 담배 20대나 피워댄 골초. 이때문에 말년에는 기관지염과 폐질환에 걸리게 된다.
- 별명이 '배불뚝이(Tum-Tum)'인데, 이는 에드워드 7세가 하루 식사로 코스요리 정식을 10번이나 먹었을 정도로 대식가였기 때문에 왕이 될 때 허리 둘레가 48인치(…)나 되는 비만이라서 붙여진 것.[19]
- 어머니가 장수하여 오랜 왕세자 생활 끝에 간신히 왕이 된지라, 오랫동안 왕 노릇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9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왕세자였다. 그런 그가 재위기간 10년을 못 채웠으니[20] ... 얼마나 억울했으면 죽기 직전에 "난 버텨내야 해. 마지막까지 내 일을 끝내야 한다고."라고 내뱉었겠는가.[21] 심지어 1910년 사망 당일 계속해서 심장마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22] 정무를 보다가 사망했다.
- 한편 패션으로서의 세일러복 유행을 선도한 역사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위에 보이는 그림의 모습을 본 이후로 자기 자식에게 세일러복을 입히는 부모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 1908 런던 올림픽을 개회했으며, 훗날 에드워드 7세의 손자와 증손녀도 각각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들을 개회했다.
- 서브컬처중에 테디보이들이 입는 '에드워디안 수트' 또는 '에드워드 시대 수트'가 바로 이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수트를 이야기한다. 칼라가 높은 셔츠에 단추가 4개 이상 달린 긴 재킷이 특징.
- <셜록 홈즈 시리즈>의 셜록 홈즈의 사건집 중 단편 '거물급 의뢰인'의 거물 의뢰인이 에드워드 7세로 추정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귀족 가문의 한 영애가 소문이 좋지 못한 남작[23] 과 결혼하려 하자 미지의 거물 의뢰인이 대리인을 내세워 그것을 막아줄 것을 부탁하는 이야기인데, 홈즈 일행이 그 사건을 해결한 후 존 왓슨은 떠나는 대리인의 마차에서 왕실 표장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왕이 바로 에드워드 7세. 항간에는 에드워드 7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지고 완독한 책이 셜록 홈즈라는 얘기가 있다.
- 마찬가지로 파이프 담배의 연초 중 프린스 알버트라는 제품의 이름도 에드워드 7세에게서 따온 것이다. 위의 시가가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 후의 명칭에서 따왔다면 이쪽은 왕세자 시절의 명칭인 알버트 대공에서 따온 것.
- HMS 빅토리의 보존에 제일 큰 기여를 했다. 도크에서 반쯤 썩어가다가 해체될 뻔한 빅토리를 구한 것이 에드워드 7세였다.
- 전혜진의 레이디 디텍티브에서는 아버지 앨버트 공의 그림자에 비교당하는 상황에 분노하여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을 녹여버리는 대형사고를 치게된다. 하지만 리지가 에드워드 7세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말에 빅토리아 여왕과도 화해를 하지만 한번씩 어머니 마음을 속썩이는 골치덩이 아들로 지낸다.
-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이 풍자화를 에드워드 7세의 시선에서 보면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우선 그림을 보면 에드워드 7세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자 에드워드 7세의 조카인 빌헬름 2세[24] 는 중국을 두고서 서로 경계하고 있고 , 그리고 그 옆에서 중국을 갈라먹기 위해 유심히 쳐다보는 니콜라이 2세는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 왕비의 여동생이자 에드워드 7세의 처제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7세의 둘째 누이인 앨리스 모드 메리의 4녀로 조카딸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남편이기도 하다. 즉 에드워드 7세 입장에서 저 그림을 보자면 어머니, 생질(甥姪, 누이의 아들), 이질(姨姪, 처제의 아들) 겸 질서(姪壻, 조카딸의 남편)가 서로 중국을 두고 싸우는 꼴....(...) [25]
[1]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등[2] 올라프 5세[3] 애칭은 버티.[4] 애칭은 비키.[5] 단 동양인들의 눈엔 약간 남상에다 조각처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지닌 알렉산드라 왕비보다는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가 더 예뻐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는 이목구비가 귀엽고 아기자기하며 청순가련한 인상에다 키랑 체구도 매우 아담했다.[6] 알렉산드라 왕비의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다른 여성 왕족들과 비교했을 때 과도할 정도로 많은 목걸이를 목에 감고 있는데, 바로 이 흉터 때문이다.[7] 다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불감증인 여성은 매우 흔했다. 여성의 불감증은 정말 신체적인 이유보다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나오는 억압이나 단순히 자신의 성향에 따른 심리적 요인이 더 크기 때문이다.[8]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후처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증조할머니로 에드워드 7세의 마지막 애인. [9] 현재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5세의 할머니이다.[10] 빅토리아 여왕이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1857년 ~ 1944년)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알렉산드라 왕비도 에드워드 7세와의 불화로 인해 상처받자 '''자녀들 중 1명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자녀들에게 집착한 것이다.[11] 알렉산드라 왕비의 사진들을 보면 말년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 죄다 젋고 피부가 탱탱하게 나온 사진들밖에 없는데, 말년에 찍은 사진들은 전부 엄청난 뽀샵질(…)의 결과물이다. 물론 젋었을 때는 시씨의 라이벌 취급받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12]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 사건으로 영국은 복지국가로의 첫발을 떼게 된다. 로이드 조지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자유당파 귀족들만 죽어라 키워서 다 상원으로 보내버릴 거다!!"라고 보수당과 귀족 사회를 협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3]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를 참조 바람.[14] 에드워드의 독일어식 바리에이션.[15] <엠마> 10권의 후일담 에피소드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메이드 제복부터 눈에 띄게 화사해진 것을 알 수 있다.[16] 파란색은 연합국, 빨간색은 동맹국.[17] 누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의 아들.[18] 당시 영국 왕실 표준시가 UTC+0:30이었던 것도 에드워드 7세가 사냥을 30분 더 하기 위해서였다. 에드워드 8세 이후로 다시 시간대는 원상복구되었다.[19] 다만 이런 대식 습관은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스테이크와 각종 채소를 넣고 포도주를 섞은 브라운 윈저 수프 같은 기름진 음식을 즐겼고, 여기에 양고기와 치킨과 해기스에 생크림을 얹은 딸기나 푸딩 및 토피 케이크(설탕과 버터를 끓여서 만든 케이크) 같이 달고 기름지며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을 좋아하다 보니, 50대에는 152cm의 키에 비해 76kg라는 무거운 체중을 갖게 되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상류층들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는 대식가였다. 당시 영국 상류층들은 보통 햄, 혓바닥 고기, 꿩고기, 훈제 청어, 간, 달걀, 베이컨, 귀리를 가벼운 아침 식사로 먹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의 잡지들은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소화제 광고를 많이 실었다. 출처: 위엄가득 빅토리아 여왕/ 앨런 맥도널드 글/ 클리브 고다드 그림/ 김은숙 번역/ 주니어김영사/ 158~161쪽[20] 1901년 1월 22일부터 1910년 5월 6일까지 9년 105일동안 재위했다.[21] "No, I shall not give in; I shall go on; I shall work to the end.(아니, 포기하지 않겠네. 난 버텨내야 해. 마지막까지 내 일을 해야 한다고.)" 실제 마지막 말은 위의 "아니, 포기하지 않겠네. 난 버텨내야 해. 마지막까지 내 일을 해야 한다고."라는 말을 한 후에 조지 5세가 되는 아들로부터 에드워드 7세의 경주마가 경마에서 이겼다는 말을 듣고한 말인 '그래 난 아주 기쁘다.'라고 한다.[22] 사실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말년에 궤양, 기관지염, 폐질환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23] 전처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나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고 버린 바 있다고. 결국 과거의 여인들 중 한 명에게 비참하게 응징당하는 결말을 맞는다.[24] 에드워드 7세의 누나이자 프린세스 로열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의 장남이다.[25] 일본은 그래도 유럽 왕실과 관계가 없으므로 그렇다고 치더라도 프랑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