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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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데니스 로는 스코틀랜드 국적의 전 축구선수다. 별명은 King Denis, 올드 트래포드의 보안관 등이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수상한 경험이 있는 축구선수이다. 날카로운 헤더 능력과 뛰어난 득점 감각으로 유명했다.
2. 클럽 경력
데니스 로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1989)
1956년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데니스 로는 어릴적 부터 굉장한 기대주였다. 허더스필드에서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만 20세가 되기도 전에 1부 리그에서 100경기 가까이 출전한 것이다. 그를 노리는 클럽들은 리버풀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거함들이었다.
1960년 그는 영국 선수로는 최고 이적료인 5만 5천 파운드에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1959 - 60시즌 마지막[1] 에 합류한 로는 7경기에 나서 2골을 넣었고, 맨체스터 시티는 간신히 강등을 모면한다. 다음 시즌부터는 잠재력이 폭발, 리그에서만 19골을 몰아치며 팀의 주포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맨체스터 시티는 중위권의 클럽에 불과했고 로는 이탈리아 무대에 도전한다.[2]
그의 차기 행선지는 인터 밀란, 토리노 FC 등이 거론 되었는데, 사실 로는 토리노와 사전 계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동향인인 조 베이커와 함께 스코틀랜드 콤비를 만드려는 토리노의 노력은 1시즌 만에 물거품이 된다. 그 이유인 즉슨 시즌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부렵, 로는 베이커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다. 로는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베이커는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또한 이탈리아 리그의 스타일이 수비적인 것도 로가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한 몫 했다. 로는 토리노에서 보낸 1시즌 간 총 28경기에 나서 10골을 기록했다.
훗날 그의 인터뷰中: "전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모든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곳의 사람들, 음식들, 등... 그런데 그곳의 축구는 끔찍했어요. 너무 수비적이였거든요."[3]
토리노를 떠난 로는 허더스필드 타운 시절부터 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온 맷 버스비가 감독으로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합류하였다. 맨체스터로 돌아온 그는 첫 시즌부터 리그에서만 23골을 쏘아올렸고, 바비 찰튼과 함께 무너진 팀을 재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선수가 된다. 이듬해 북아일랜드 시골에서 웬 듣도보도 못한 윙어가 합류하는데, 그가 바로 조지 베스트. 전설적인 트리오가 완성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63 - 64 시즌 준우승을 차지했고, 로 자신은 42경기 46골로 1964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커리어하이를 보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리빌딩은 성공적이었고 그 절정은 1967-68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이었다. 비록 로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승전은 병원에서 지켜봤지만 말이다. 로의 무릎 부상은 고질적인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로는 점점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1973년 토미 도허티에 의해 자유 계약 상태가 된 로는 친정팀인 맨체스터 시티와 1년 계약한다. 73-74 시즌 데니스 로는 모든 대회 총합 29경기에 나서 12골을 득점했고, 리그에서는 9골을 넣었다. 이 9골 중에는 리그 막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넣은 힐킥 결승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강등'''당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의 심경이 매우 궁금해지는 대목.[4] 그리고 그것은 로의 프로생활 마지막 골이었다고 했으나 이 골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강등당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http://en.espn.co.uk/football/sport/story/116806.html 그 경기에서 이겼든 무승부든 졌든 맨유는 그 시즌 워낙 안습한 행보를 보여서 강등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뭔가 국내에서도 서양에서도 약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 물론 이 때 많은 맨유 서포터들이 침울했던건 사실이고 데니스 로 역시 골을 넣고 기뻐하기는 커녕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2012년 데일리메일 과의 인터뷰에서 데니스 로는 '골 넣는게 직업이었던 선수가 이런 말을 하는건 우습겠지만 전 제 커리어에서 진짜 차라리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골이 하나 있었어요... 맨시티 있을 때 맨유 상대로 넣은 그 골이죠. 골을 넣은 후 기쁘기는 커녕 상심만 가득했거든요.' 라고 말한 걸 보면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
3. 국가대표
1958년부터 1974년까지 국가대표팀에서 뛰면서 55경기 30골을 기록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나서 74년 월드컵에 참가한 것이 유일한 메이저 대회 출전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62~1973)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4-65, 1966-67
- FA컵: 1962-63
- 채리티 실드: 1965, 1967
- 유러피언컵: 1967-68
4.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4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68-69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4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PFA 메리트상: 1975
- FWA 공로상: 1994
- PFA 세기의 팀 (1907~1976)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4
5. 여담
- 애버딘 FC의 서포터였다고 한다.
- 로가 은퇴한 이후 애버딘은 셀틱과 레인저스의 독주 체제를 깨고 리그 우승에 성공하고, 컵 위너스컵을 들어올렸는데, 이 때 감독이 퍼거슨...
- 로의 팬이었던 한 네덜란드인이 아들 이름을 데니스(Denis)로 지었으나, 여자이름과 비슷하다하여 Dennis 로 지었는데, 이 아들이 베르캄프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 판할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성적이 처참한 2016년 1월, 모 인터뷰에서 '지금 맨유와 당신이 뛰었던 때의 맨유가 맞붙으면 이길 것 같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고 로는 1 : 0으로 이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들은 70세가 넘었기 때문이라고...
[1] 이때는 정해진 이적 시장 기한이 없었다.[2] 이 이적의 배경에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의 클럽들이 대우를 더 잘해준 것도 있다.[3] https://www.telegraph.co.uk/sport/football/2290796/Denis-Law-I-had-a-tradition-to-uphold.html [4] 한국은 몰라도 현지팬들 사이에서 이 강등골에도 불구하고 '''트리니티 의 일원'''(베스트 찰튼 데니스 로)으로 엄청난 열정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한 마디로 맨유의 레전드중의 레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