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찰튼

 


'''바비 찰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주장'''
데니스 로
(1964~1968)

'''바비 찰튼'''
'''(1968~1973)'''

조지 그레이엄
(1973~1974)

'''바비 찰튼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골든볼 1966'''
'''FWA 올해의 선수 1965-66'''

'''베스트팀'''


<color=#373a3c> '''1967 Ballond'or'''
수상
플로리안 알베르트
2위
'''바비 찰튼'''
3위
지미 존스톤
<color=#373a3c> '''1968 Ballond'or'''
수상
조지 베스트
2위
'''바비 찰튼'''
3위
드라간 자이치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66'''

'''바비 찰튼의 기타 정보'''


'''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colbgcolor=#da020e> ''' 이름 '''
'''바비 찰튼 경'''
'''Sir Bobby Charlton, Knight Bachelor'''[1]
''' 본명 '''
로버트 찰튼[2]
Robert Charlton
''' 출생 '''
1937년 10월 11일 (87세) /
영국 노섬벌랜드 주 애싱턴
''' 가족 '''
잭 찰튼
외당숙 재키 밀번
''' 국적 '''
영국 (잉글랜드 )
''' 신장 '''
173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축구경영인
''' 소속 '''
<colbgcolor=#da020e> ''' 선수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53~1956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56~1973)'''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74~1975)
워터포드 유나이티드 (1976)
''' 감독 '''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73~1975)
위건 애슬레틱 FC (1983 / 감독대행)
''' 기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4~ / 기술이사)
''' 국가대표 '''
106경기 49골 (잉글랜드 / 1958~1970)
1. 소개
2. 생애
3. 클럽 경력
3.1. 프로 데뷔 전
3.2.1. 데뷔 후
3.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암흑기 1
3.2.3. 사상 최강의 트리오
3.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암흑기 2
4. 국가대표 경력
5. 그 이후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7. 플레이 스타일
8. 평가
9. 찰튼에 대한 말, 말, 말
10. 여담

[clearfix]

1. 소개



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3년 위건 애슬레틱 FC감독대행을 맡았고, 1984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기술이사를 맡고 있다.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을 이끈 선수이며, 당시 월드컵 최우수 선수[3]로 선정되었다. 1950년대 중후반 잉글랜드 축구 무대를 빛낸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이며, 뮌헨 비행기 참사를 겪었고 1967-68시즌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하기까지 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맨유의 초기 역사를 써냈다. 60년대 중반부터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와 함께 맨유의 전설적인 공격 트리오를 구축했으며, 각자가 발롱도르를 한 번씩 수상해본 이 세 명의 조합은 'The United Trinity'라고 불렸다.

2. 생애


1937년 10월 11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주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축구와 관련이 깊었는데[4], 정작 축구를 가르쳐준 건 할아버지와 어머니였다고.

3. 클럽 경력



3.1. 프로 데뷔 전


이스트 노섬벌랜드 스쿨이라는 지역 유소년 클럽에서 뛰던 찰튼은 1953년 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5]의 눈에 띄게 되고, 이듬해 1월 1일 15살의 나이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유소년 계약을 맺는다. 사실 프로 선수를 시킬 생각까지는 없었던 어머니의 뜻을 따라 처음에는 전기 기사 견습공 생활도 했었지만 축구가 더 재미있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3.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3.2.1. 데뷔 후


그 다음해 10월 프로 계약을 체결한 찰튼은 유스와 리저브 팀을 오가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1956년 10월 6일, 마침내 올드 트래포드에서 찰튼 애슬레틱을 상대로 한 1군 데뷔전에서 2골을 넣으며 첫 발을 내딛는다.[6] 이 시즌에 찰튼은 '''17경기 12골'''(리그 14경기 10골[7])을 기록, 훌륭한 첫 시즌을 보내며 팀의 호성적[8]에 기여했다. 이것이 이 시기에 병역을 수행하느라 주말에만 축구를 하면서 거둔 성적임을 고려하면...
큰 기대 속에 시작된 1957-58 시즌, 찰튼 역시 15경기에서 12골을 넣으며 팀을 리그 2위, 유러피언 컵 4강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리그 14경기를 남겨놓고 11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며 당시 1위 울버햄튼을 승점 6점 차이로 무섭게 추격하고 있었으나...
'''베오그라드 원정을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비행기가 뮌헨에서 연료를 보급한 후 이륙하는 데에 실패, 추락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만다.'''
찰튼은 생존한 9명의 선수 중 하나였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이전만 못한 활약을 보이며 15경기에서 4골(A매치 제외)을 넣는데 그쳤고, 팀도 이후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하며 9위로 리그를 마감하게 된다.

3.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암흑기 1


사고 이후 맨유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주전급 선수 중 8명이 사망하고 2명은 그 여파로 은퇴한 상황은 명장 매트 버스비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전까지 디비전 1을 호령하던 팀은 1962-63 시즌에 FA컵을 들 때까지 근 5년간 단 하나의 우승컵도 들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찰튼 개인의 클래스는 어디 안 가서 1958-59~1962-63 5시즌 동안 198경기 90골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뻔한[9] 팀의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3.2.3. 사상 최강의 트리오


앞선 1962-63 시즌에 '''데니스 로'''를 영입하고 유스 풀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등 리빌딩에 힘쓰는 동시에 FA컵 우승과 리그 잔류라는 성과를 일구어 낸 버스비 감독은 1963-64 시즌엔 셀틱에서 데려온 미드필더 팻 크레란드와 어린 선수들, 기존 선수들을 잘 조화시켜 2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어진 시즌, 버스비는 기존 팀의 에이스들인 로, 찰튼과 함께 전 시즌 가능성을 보인 17세의 구단 유소년을 주전 공격수로 기용하는데, 이 선수가 바로 찰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을 넘어서는 레전드 '''조지 베스트'''였으니...
'''29살의 나이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때'''
자국에서 열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출전해 잉글랜드의 우승을 이끈 것 역시 이시기의 일이다. 이 대회에서 찰튼은 3골을 넣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같은 팀 수비수 바비 무어, 9골로 득점왕에 오른 에우제비우를 제치고 대회 최우수 선수(골든 볼)로 선정되었으며, 거기에 발롱도르, FWA(영국축구기자협회) 선정 올해의 잉글랜드 선수상까지 그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4시즌 간 239골을 합작한 이 전설적인 트리오[10]의 활약에 힘입어 이 시기 맨유는 2회의 리그 우승과 1회의 유러피언 컵 우승[11]을 일구어낸다.

3.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암흑기 2


1968-69 시즌, 로-찰튼-베스트 트리오는 건재했으나 새로 영입된 선수들이 먹튀질을 하며 팀은 11위로 내려앉고 만다. 시즌 종료 후 맷 버스비 감독은 사임[12]했고, 리저브 팀 감독 윌프 맥기네스[13]가 감독직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빈번히 감독이 교체되며 7위 이상으로 올라가보지 못하는 등 침체기를 겪었고, 1973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찰튼 없이 맞은 1973-74 시즌에는 디비전 2로 강등되기에 이른다.

4. 국가대표 경력


바비 찰튼은 1958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하였다. 이후 찰튼은 1962 칠레 월드컵에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출전해 아르헨티나 전에서 득점, 팀의 3-1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8강에서 대회 우승팀 브라질에 패해 탈락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최다득점 기록을 갱신한 것도 이 때의 일로, 63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31번째 골을 넣으며 종전 톰 피니와 냇 로프트하우스[14]의 기록을 갱신한다. 이후 그의 득점 행진은 이전만 못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감독이던 알프 램지가 팀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찰튼의 포지션을 측면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변경한 것 때문이었다.[15]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찰튼은 조별리그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득점을 올렸고,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4강에 올라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결승 진출에 공헌하였다.
'''찰튼 VS 베켄바워'''
결승전에서 우베 젤러프란츠 베켄바워가 버티는 서독을 상대로 제프 허스트해트트릭으로 4:2승리하였고 잉글랜드는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찰튼'''
찰튼은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8강에서 열린 서독과의 지난 결승전 리벤지 매치에서 잉글랜드는 연장까지 가는 등 분전했으나 전성기에 이른 게르트 뮐러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2-3으로 패배하고 만다. 대회 이후 찰튼은 32살의 나이로 그의 형 잭 찰튼과 함께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4년전처럼 찰튼을 1:1로 전담마크했고,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를 오직 수비에만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을 압도했다. 하지만 2:0으로 앞선상황에서 그의 체력을 안배한 알프 램지 감독이 그를 교체시키자 베켄바워의 볼전개 능력과 공격가담 능력이 빛을 보기 시작하며 2:3으로 역전패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5. 그 이후


은퇴 후 찰튼은 당시 디비전 2 소속이던 과거의 명문 프레스턴 노스엔드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아일랜드 국대 감독을 맡아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은 형과 달리 선수로서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감독으로서는 초짜에 불과했다. 1973-1974 시즌, 프레스턴은 디비전 3로 강등되고 만다[16]. 다음 시즌 37살의 나이로 선수로 복귀[17]하면서까지 팀을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팀은 중상위권에 위치하는 데에 그쳤고, 찰튼은 1975-76 시즌 초 팀의 핵심 존 버드를 뉴캐슬에 팔아치운 구단의 처사에 항의하는 뜻에서 감독직을 사임한다. 그 후 아일랜드 리그의 강호 워터포드 유나이티드에서 1년 간 뛴 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18]
이후에는 위건 애슬레틱 FC에서 이사직을 역임하다가 1983년에 잠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으며, 1984년에는 버스비가 사임한 이후 보드진에 상징적인 인물을 필요로 하던 맨유의 부름을 받아 현재까지 기술 이사직을 맡고 있다.
참고로 맨유 홈경기 중에 늘 보이는, 카메라가 항상 비춰주는 톱 햇 모자를 쓴 노신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2016년 4월 2일, 에버튼 FC와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서 올드 트래포드 구장 남쪽 스탠드의 명칭이 바비 찰튼 경 스탠드(Sir Bobby Charlton Stand)로 개명되었으며, 2017년 10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훈련장의 명칭이 바비 찰튼 경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된다. 이에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은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2020년 치매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19]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6
  • 발롱도르 2위: 1967, 1968
  • FIFA 월드컵 골든볼: 196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66, 197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WA 올해의 선수: 1965-66
  • FIFA 100: 2004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IFFHS 레전드: 2016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PFA 세기의 팀 (1907~1976)
  • FWA 공로상: 1989
  • PFA 메리트상: 1974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 UEFA 회장상: 2008
  • 잉글랜드 축구 평생 공로상: 2008#

6.3. 수훈



7. 플레이 스타일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웬만한 능력을 전부 최고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고, 스트라이커부터 중앙 미드필더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커리어는 공격수로 시작했으나 이후 다재다능함을 살려 활약하기 위해 포지션을 좀 더 밑으로 내렸고, 그 결과 은퇴 때까지 맨유와 국가대표팀에서 전천후 미드필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롱 패스 능력이 아주 뛰어났으며, 공간을 보는 시야가 넓고 상황판단이 빨라 기회창출에 능했다.
[image]
1970년 월드컵 독일전에서 보여준 수비가담
찰튼은 단순한 플레이메이커가 아니었다. 언제나 팀에서 가장 많이 뛰고, 수비력 역시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일례로 196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라이트윙 가린샤를 수비하는 데에 레이 윌슨이 버거움을 느끼자, 찰튼이 일시적으로 왼쪽 수비수처럼 뛰고 윌슨이 잠시 중앙으로 들어갔다. 해당 경기에서 왼쪽 라인에서 쉴새없이 오르내리며 자우마 산투스와 가린샤를 마크하고 뚫어내기도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수들이 해이해져 있더라도 자신만큼은 절대 고삐를 풀지 않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계속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마찬가지로 1962년 월드컵 브라질전에서, 후방을 확인하지 않고 드리블하던 브라질의 지지에게 달라붙어 곧장 볼 소유권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중원 장악력은 당대 최고였다. 팀을 위한 헌신적 자세 덕에 '그라운드의 노동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찰튼이 어린 시절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의 플레이를 보고 '''골키퍼에게서 볼을 받고, 풀백에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장의 모든 곳을 지켜보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감상평을 남긴 바 있는데, 사실 찰튼 본인도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 선수였다.[20]
찰튼은 스트라이커 포지션에도 기용되곤 했는데,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기용되더라도 한결같이 엄청난 수준의 수비 가담을 보여주었다. 찰튼의 경우에는 매우 다재다능했기에 이런 말로 한정짓기에도 무리가 있지만, 제로톱의 명맥을 이은 선수 중 하나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찰튼이 가진 또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는 양발 사용 능력이었다. 찰튼은 펠레와 함께 당대 최고의 양발잡이로 유명했으며, 양발을 가리지 않고 롱패스와 중거리 슈팅을 구사했다. 세트피스도 상황에 맞게 왼발과 오른발을 선택하여 찼다.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나니 드리블 능력 역시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찰튼은 자유자재로 스피드를 조절할 줄 아는 선수였고, 공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면서 스피드를 살려 치고 나가는 플레이에 능했다. 드리블로 만들어낸 공간에서는 대부분 크로스를 올리거나 패스를 했다.
또한 찰튼은 좋은 경기 매너와 훌륭한 스포츠맨십으로도 유명했다. 정말 열심히 뛰면서도 파울이 드문 선수였다. 그래서 현역 시절 당시, 신사적인 축구선수의 대명사였다.

8. 평가


함께 뛰었던 조지 베스트와 늘 비교되곤 하는데, 베스트가 화려한 개인기로 수비수를 농락하는 윙어 유형이었다면 찰튼은 그러한 화려함은 갖추진 못했다 하더라도 분명 우수한 테크닉과 어마어마한 킥력을 양발 모두에 장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공격수와 미드필더로서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수비가담에도 적극적이었다. 플레이스타일 상 조지 베스트가 임팩트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둘이 함께 뛰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중원의 엔진 역할을 담당했던 바비 찰튼이었으며, 꾸준함과 커리어 양면에서 모두 그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1960년대를 통틀어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남미에서 뛴 펠레가린샤를 제외하면, 찰튼보다 명백히 위라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잉글랜드로 한정한다면 그의 위치는 더욱 독보적이다. 찰튼이 세운 잉글랜드 국가대표 최다 득점(49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다 득점(249골) 기록은 50년 쯤 후에 웨인 루니가 경신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몰락하던 축구 종가에 골든볼을 수상하며 월드컵을 안기고 잉글랜드 클럽이 최초로 유럽을 제패하는 일을 해낸 그의 아성에는 누구도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선수들을 볼 때는 누적 기록, 업적뿐만 아니라 당대의 위상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런 면을 확인해 보면 60년대 내내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찰튼은 다른 잉글랜드 선수들과 꽤 차이가 있다.

9. 찰튼에 대한 말, 말, 말


'''찰튼이 나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우리를 이겼다.'''

'''그는 펠레와 더불어 자신의 세대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나는 그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그 경기 최고의 순간은 120분이 다 지나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120분동안 바비 찰튼을 감시하는 것이 그 경기에서 명령받은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와의 1:1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는 내 실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야만 했으며, 심지어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해야 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영리했으며, 아주 우아한 축구선수였다. 바비가 클로도아우두에게서 공을 가로챘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 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선수에게 강한 태클을 걸어야겠군." 하지만 그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나를 손쉽게 제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를 완전히 놓쳤고, 그에게 태클을 걸다가 미끄러져서 발목 부상을 당했다. 내가 루마니아전에서 뛰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가 정말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소속 팀은 물론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를 지향하는 누구에게나 위대한 본보기가 되는 선수이다.'''

알렉스 퍼거슨


10. 여담


  • 잉글랜드가 1966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웸블리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선수 중 유일하게 혼자 울상이 되었다. 물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환하게 웃는 무어와 뱅크스, 그리고 평소와 180도 다르게 완전히 신이 난 노비 스타일스의 모습을 보다가 펑펑 우는 찰튼을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 프로필에서 볼 수 있듯이 20대 때도 탈모가 무척이나 심했다. 웨인 루니는 상대도 안 될 정도.
  • 형인 잭 찰튼리즈 유나이티드 FC 소속의 수비수로 뛰었으며, 형 역시 리즈의 레전드로 대접받고 있다. 형제가 라이벌 구단에서 각각 레전드로 인정받는 재미있는 사례.
  • 2020년 2월 16일, 뮌헨 참사의 생존자이던 해리 그렉이 만 87세로 사망하면서 바비 찰튼이 이제 마지막 남은 선수단 생존자가 되었다.(승무원인 스튜어디스 로즈마리 체버튼도 생존자로, 2024-10-16 09:08:33 기준으로 2명이 현재 살아있다.)
월드컵에서 골을 도둑맞은 첫 번째 잉글랜드 선수이다. 1966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 상대로 3:0으로 앞서가는 골을 득점했으나 부심의 오심으로 무효 처리가 되어 결국 2:0으로 끝났다. 찰튼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골을 도둑맞은 잉글랜드 선수는 2010년 월드컵에서의 16강 독일전에서의 프랭크 램파드.[21]
  • 2020년 11월 현재 치매 판정을 받고 투병중에 있다.링크

[1] 1974년 3급 대영제국 훈장을, 1994년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2] /ˈrɒbət ˈbɒbɪ ˈtʃɑːltᵊn/[3] 1982년 이후의 골든볼과 같은 개념.[4] 형인 잭 찰튼뿐 아니라 외당숙 중 4명이 리즈, 레스터 시티 등에서 뛴 프로 선수들이었다. 찰튼 형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찰튼의 사촌 중 4명이 축구 선수였고 외삼촌 스탠리 밀번 또한 축구 선수였다. 그중 재키 밀번뉴캐슬의 레전드이자 국가대표로 월드컵에서도 활약한 수준급의 선수였다.[5] 찰튼뿐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 던컨 에드워즈를 발굴해낸 게 이 사람이다.[6] 맨유는 찰튼의 2골에 힘입어 4-2로 승리했다.[7] 여담이지만 후에 치러진 찰튼과 원정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8] 리그 우승, FA컵 준우승, 그리고 잉글랜드 팀 최초로 참가한 유러피언 컵에서는 4강에 올랐다.[9] 2위-7위-7위-15위-19위로 순위가 끝없이 하락했다.[10] 그들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964년에는 로가, 1966년에는 찰튼이, 1968년에는 베스트가 각각 발롱도르를 수상한 것만 보아도... 당시 경쟁하던 선수들이 루이스 수아레스, 아만시오,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경이롭다. 특히 찰튼은 67, 68년에는 2위에 오르기도.[11] 참사 이후 딱 10년째 되는 1967-68 시즌이었다.[12] 이듬해 잠시 감독으로 복귀하기도 했다.[13] 맨유 선수출신이며 1937년생으로 바비 찰튼과 동갑이다[14] 피니는 찰튼과 마찬가지로 3등급 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은 프레스턴 노스엔드의 레전드이고, 로프트하우스는 볼턴 원더러스 FC에서만 뛴 구단 레전드이다.[15] 지미 그리브스가 공격수 자리를 대체했고, 1964년 10월에는 찰튼의 득점 기록을 경신한다. 이후에 다시 역전되긴 하지만.[16] 사실 찰튼의 능력 부족 탓만 할 수는 없다. 그 전 몇 시즌 동안 프레스턴은 늘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었다.[17] 성적은 45경기 10득점.[18] 이후에도 남아프리카 쪽에서 뛰긴 했지만 공식적인 기록 집계가 불가능하니…[19] 형인 잭 찰튼도 2019년 림프종과 치매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2020년 세상을 떠났다.[20] 지금은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공격수에게도 수비가담이 요구되며 텐백상황에서의 역습형 공격수가 아닌 이상 수비를 하지 않으면 욕을 먹는데 저때 당시도 전술의 발전이 있긴했으나 왠만한 감독 아니면 공격수에게 수비가담 요구를 하지않았다. 오히려 저때 수비가담을 시키거나 하는 감독이나 공격수가 보기 힘든 시대였다.[21] 중거리에서 칩슛으로 노이어의 키를 넘겨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을 넘은게 확실했으나 주심이 이걸 보지 못했고 결국 흐름이 끊긴 잉글랜드는 독일에 4:1로 대패했다. 1966년 월드컵 결승에서 제프 허스트의 슛이 골라인을 넘지 않았음에도 골로 인정된거의 복수라는 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