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
'''Συμμαχία της Δήλ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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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을 대비할 목적으로 아테네의 주도하에 체결된 고대 그리스 폴리스 간의 연합체. 델로스 동맹이라는 명칭은 동맹국들의 공식적인 회합장소가 델로스 섬(Δήλος)에 존재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아테네의 압도적 우위에 의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아테네 제국'''이라는 표현으로도 불린다. 단적으로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마자 회합장소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버렸다.
2. 역사
2.1. 배경
-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항목 참고.
기원전 490년부터 약 20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에서 번번이 패하였고 기원전 479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의 침공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2.2. 형성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이후, 그리스는 반격에 나섰고 소아시아 일대 그리스계 도시들의 반란을 후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디까지 반란을 후원해야하는지를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갈등이 거세지기 시작한다. 육군이 주력이었던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이 해전 이후 판을 키우는 것을 [1]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반대로 해군이 주력이었던 아테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도시 역시 동포들이다.'라면서 계속해서 반란을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비잔틴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헤게모니 싸움은 폭발했고, 스파르타는 기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구성국들과 함께 반 페르시아 동맹에서 탈퇴한다.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입국들의 탈퇴 직후였던 기원전 478년 친 아테네 계열의 도시국가[2] 들이 델로스 섬에서 회담을 가졌고 동맹이 체결된다. 체결 당시 델로스 동맹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그리스 동포들을 해방시킨다.
2. 다시 있을지 모를 페르시아의 침략을 방지한다.
3. 페르시아 전쟁 과정에서 받은 피해를 페르시아에게서 보상받는다.
2.3. 운영
명목상으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권리를 나누어갖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동등하게 표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의중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었다.[3]
어쨌든 초기에는 창설 목표를 충실히 이행해서 소아시아 일대의 페르시아 세력을 깨끗이 소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점차 변질되기 시작되어서 급기야 가입할 의사가 없는 도시국가까지 강제로 가입시키는 한편 탈퇴까지도 금지시켜버린다. [4] 여기에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이후로는 아테네의 독단성이 더욱 강해져서 아예 델로스에 자리잡았던 동맹 본부와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버리는 한편, 델로스 동맹 국가들의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델로스 동맹의 연합해군까지도 멋대로 운용하면서 아테네에 대한 동맹국들의 반감은 점점 거세지기 시작한다.[5]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고[6] 이탈리아 남부에까지 델로스 동맹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자 이는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구성국들의 우려를 자아냈다.[7] 결국 기원전 431년 두 거대 동맹간의 전면전이 발발하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자살'이라고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30년 가까운 전쟁끝에 기원전 404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에 따라 델로스 동맹은 강제로 해체되게 된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헤게모니 역시 테베에게 금방 무너졌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동맹은 재건된다. 하지만 아테네의 위상은 더이상 예전같지 않았고, 델로스 동맹의 주도권을 놓고 기원전 357년 구성국들간의 내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원전 338년에는 아예 그리스 전역이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면서 델로스 동맹은 영구적으로 해체된다.
[1] 물론 단순히 아테네가 커지는게 배가 아파서 반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 연합군 육군에서 스파르타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는데, 스파르타 특유의 소수정예식 군대 운영이나 빈번히 일어났던 농노(헬토르)들의 반란을 감안하면 소아시아 원정에까지 참여하는 것은 스파르타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2] 주로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먹고살던 이오니아, 에게 해, 소아시아 일대의 폴리스들이 다수였다.[3] 이는 라이벌 격이던 펠로폰네소스 동맹 역시도 마찬가지이다.[4] 실제로 타소스라는 도시국가가 멋대로 탈퇴해버리자 아테네의 주도하에 델로스 연합군이 타소스를 공격해서 모든 것을 파괴, 약탈하는 한편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례도 있었다.[5] 정확히 서술하자면 구성국들의 빈민이나 중산층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흠모해서 델로스 동맹에 남아있을 것을 원했고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은 과두정을 심정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탈퇴하길 원했다고 한다.[6] 이 시기 아테네의 외교정책은 20세기 초중반 서구 열강들의 외교정책에 모티브를 준 것으로도 유명하며(노골적으로 식민지로 만들고 착취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고 해당 지역의 정부가 아테네에 우호적이지 않은 스탠스를 취하면 당장 전복됐다.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초반 이집트나 이란의 경우를 떠올리면 된다.), 아예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을 정도이다.[7] 이탈리아 남부에서 밀을 주로 수입했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동맹 구성국들 역시 이탈리아 남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지역과 달리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의 시민들이 이주해서 건설한 도시들이 꽤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파르타 시민들이 이주해서 건설한 타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