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동맹
Σπαρτιατική Συμμαχία(그리스어)
Peloponnesian League(영어)
1. 개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유지된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이다.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유명하다.
2. 역사
2.1. 초기
기원전 7세기 후반부에 이르면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정치력으로나 무력으로써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폴리스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코린트와 엘리스를 우방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스파르타는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을 결합하여 개별적으로 여러 도시국가와 동맹을 체결해 나간다. 이후 기원전 530년 자신들의 패권에 강력히 저항하던 테게아까지도 꺾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면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면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놓는데 성공한다.
2.2. 중기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의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전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하나로 모은 그리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거의 50년에 걸친 전쟁 동안 아테네가 그리스 해군의 중심이 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 국가들은 육군의 중심이 되어 싸웠다. 불리한 전황을 이겨내고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이후에도, 그리스 동맹군은 바다를 건너 원정을 떠나서 동부 지중해 페르시아 영역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공략하여 해방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 국가들은 곧 동맹을 탈퇴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재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남은 그리스 동맹은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으로 재편성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이후에도 원정을 계속하였는데, 이로부터 확보된 해상 무역로는 아테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강성해진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패권에 편입시켰고, 이러한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끝을 모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팽창은 과두정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 큰 위협이 되었다. 또한 스파르타의 아테네에 대한 노골적인 불안감은 반대로 아테네에게 스파르타에 대한 불신을 안겨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세력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졌고, 계속된 긴장 끝에 마침내 기원전 460년, 아테네가 코린트와 메가라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15년간의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다. 이후 10여 년간의 일시적인 평화기를 거쳐 기원전 431년, 코린트와 코르키아의 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30년 가까이 치뤄진 장기전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초반에는 아테네의 강성한 해군력 때문에 수세적 국면에 몰렸지만, 이후 아테네가 거듭된 실책을 저지르고 아테네의 유아독존식 패권에 대한 델로스 동맹의 도시국가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그들이 아테네를 배신하게 되자 전세를 역전시켰다. 마침내 스파르타는 왕년의 적국 페르시아의 금전적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근성으로 해군을 육성하더니 아테네의 해군력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개발살 냈고, 이미 무적에 가까웠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육군은 아테네 근방을 초토화시켰다. 인적, 물적, 재정적 자원을 모두 소모한 아테네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기원전 404년 굴욕적으로 스파르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전쟁의 승리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그리스의 패권을 아테네로부터 빼앗아 왔지만, 오랜 전쟁은 그리스 전역을 폐허로 만들다시피 하였고 동맹 내부에 분열의 씨앗을 남겼다.
스파르타의 헤게모니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해서,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벌어진 코린트 전쟁에서 동맹국의 이탈과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테네의 선전으로 제해권을 잃더니,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참패한 이후 다수의 구성국들이 중립을 선언하거나, 테베에 붙어버리거나, 아예 자신들만의 소규모 동맹을 만들어 버리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스파르타가 다시 동맹국을 모으면서 살아나려 했을 때,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전역을 아예 자신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에 합병시켜 버렸다.
3. 구성
동맹국 간의 의사를 조정하기 위한 협의체가 존재했다. 인구 수, 경제력 등과 상관없이 가맹국들 모두 공평하게 한 명씩의 대변자를 파견했으며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했다. 타국 혹은 다른 동맹과의 충돌이 발발했을 경우,(즉 전시이면) 모든 회원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병력의 1/3을 파견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1]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허울좋은 협의체인게, 이 협의체를 소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파르타 뿐이었으며, 협의체의 의결 사항도 스파르타한테만큼은 강제력이 없었다.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동맹으로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꽤 많은데, 일단 이 동맹 자체가 스파르타에 의해 강제적으로 구성되었던 데다가 일부 동맹 구성국끼리만 자기들 사이의 또다른 동맹을 체결하는 것도 가능했던 등 여러모로 부실한 단합력 때문. 여기에 결정적으로 이 협의체보다는 스파르타의 민회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의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주체였다. 그냥 '스파르타와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4. 이념
아테네와 대척점에 있던 동맹으로서 민주정에 반대했다. 다만 군주정에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원한 것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적절하게 섞인 혼합정이였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러한 혼합정을 통해 평등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국가적 안정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세한 것은 스파르타 항목을 참조해보자.
[1] 대신에 이런 상황이면 평시에 의무적으로 내던 막대한 액수의 가맹금은 안 지불해도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