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Περικλῆς, '''B.C. 495년(추정) ~ 4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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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신이 정치에 관심없다고 해서 정치가 당신에게 관심없는 것은 아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 연설 中'''.}}}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느긋한 마음가짐과, 법률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활 속에서 형성된 용기를 지닌 채 위기 상황에 자발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우리의 방식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미래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쳐오면, 끊임없이 혹독한 훈련을 받아 온 적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용기를 발휘합니다. [...] 이 모든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저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학교라고 말씀드립니다. 또한 저는 아테네 시민이 각자 최상의 유연성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활동에 자신 스스로를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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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에 지나치게 많은 건설비가 든다는 정적들의 비판에 대한 대꾸.[2][3] '''}}}알겠다. 내일부터는 내 돈으로 공사를 진행하겠다. 대신에 완공 후 신전 앞에 '페리클레스'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도 세우겠다. 그것도 양해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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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테네의 정치인.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였던 그의 집권기에 아테네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 시기의 아테네를 흔히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지칭한다.
2. 생애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 귀족가문에서 출생한다. 그의 외가는 아테네에서 대표적인 명문 귀족 집안 중 하나로, 페리클레스 이전에도 클레이스테네스[4] 를 배출한 적이 있는 가문이었다. 귀족 출신이였던 만큼, 남부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낸 이후, 20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472년 테미스토클레스[5] 가 키몬 일파에 의해서 정계에서 축출된 직후, 축제 시즌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전공을 찬양하는 아이스퀼로스의 희극을 상연하면서[6]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후 10여 년에 걸쳐 집요하게 키몬을 괴롭히다가 마침내 461년에는 도편추방제를 통하여 키몬을 축출시키는데 성공한다.[7] 키몬이 추방된 기원전 461년부터 429년까지의 30년 넘는 세월 동안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황금기가 도래한 것이다.
2.1.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내정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대중영합적인 정책들이 페리클레스의 집권 시기 연달아 일어난다. 빈민들에게 무료 극장 입장권을 제공한데 이어서, 아테네의 주요 공직에 오르기 위한 재산 기준을 철폐하며 빈민과 서민들도 자유롭게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계기를 마련해줬다. 여기에 기존까지 아테네의 공직은 본디 무보수였지만, 페리클레스는 몇몇 공직, 특히나 배심원들에 대하여서는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두고 일부에서는 오늘날 포퓰리즘의 원조라고 깔 정도…[8]
게다가 '부모 양쪽이 아테네인이어야지만, 시민권이 발급된다.'라는 배타적인 시민권안이 채택된 것도 페리클레스의 집권기 때의 일이다. 다만 이를 두고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팽배히 엇갈리는데, 한쪽은 배타적인 특권의식의 발현이라고 무자비하게 까는 반면, 다른 한쪽은 '시민권=병역'이었던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시아 전쟁 시기 피흘려 아테네를 수호한 아테네 (주로 하층) 시민들의 지위를 격상하기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페리클레스 본인이 비아테네인이었던 아스파시아와 사랑에 빠졌기에 그녀한테서 태어난 그의 아들에게 시민권을 주려고 엄청 고생하였다.
한편으로는 외교적으로도 아테네의 위상은 정점에 달하는데, 델로스 동맹으로 그리스 전역의 패권을 꽉 쥐게 되었던 것. 이 시기에 델로스 동맹은 말이 좋아서 동맹이지, 사실상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아테네 제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상황이었다.[9]
2.2. 무너지는 절대권력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권력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아테네가 민주정을 내걸었던 이상, 페리클레스 역시 반대세력의 정치적인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10] 물론, 페리클레스 본인이야 '아테네의 아이콘'이었던 탓에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페리클레스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주변의 공격에 희생되어간다.[11]
2.3. 죽음
이러한 상황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은 격화됐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면전을 회피하고 수성전과 청야 전술을 실시하여 모든 아테네 시민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켜서 시간을 질질 끄는 장기전을 채택하였다. 이 전술 자체는 비교적 효과적이었지만…….[12]
문제는 페리클레스와 아테네 시민들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역병이 아테네 안에서 번져나가고 만다.[13][14] 그래서 수많은 아테네인들이 역병으로 사망했고[15] 페리클레스의 누이, 전처, 전처 사이의 두 아들들인 크산티포스와 파랄로스, 페리클레스 본인도 결국 이 역병에 오염되어 사망하고 만다.[16][17]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인물 치고는 다소 허무한 죽음.
페리클레스의 죽음으로 아테네는 거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나 페리클레스의 전략이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아테네 시민들을 비롯해서 페리클레스 다음으로 선출된 지도층들이 스파르타와 전면전을 치루자, 아니나 다를까 페리클레스의 우려대로 패배하고 말았고[18] 스파르타와 협상을 맺게 되었으며 이후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굴복하고 만다.[19]
3. 기타
- 대단한 연설가였으며 사후 그의 연설은 유럽수사학의 교과서가 된다.
- 그의 정부(情婦) 아스파시아는 매우 똑똑한 여성으로 그의 연설문을 다듬어주는 등으로 페리클레스를 지원했다.
-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도 등장. 당대 아테네의 전염병 창궐은 고증했지만, 페리클레스의 최후는 본작의 보스 캐릭터인 데이모스에게 참수당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투구를 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대두를 감추기 위해서라지만,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는 없고, 대부분 저 투구는 장군이라는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쓴 것이라고 추정.[2] 이 말 한마디에 정적들은 반박도 하지 못했고 페리클레스는 이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도편추방으로 갚아주었다.[3] 파르테논 신전의 규모를 보면 당시로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을 거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대한데 이는 아테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페리클레스가 추진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적들이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비용으로 건설할 것이라고 말하니 페리클레스가 이익보는 것이 싫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정치적 공작으로 페리클레스가 물러나도 결국에는 다른 누군가가 추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완공되면 그 공사를 추진한 사람이 더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 정적들의 말에 페리클레스가 저런 발언을 실행했다면 졸지에 정적들은 페리클레스만 좋게 만들어주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파르테논 신전에서 나오는 수익이 전부 페리클레스에게 돌아가니까. [4]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상징과도 같은 도편추방제를 만든 그 개혁가가 맞다.[5] 살라미스 해전과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를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었으나 페르시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를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하다가 추방된다.[6] 즉, 키몬에게 정치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말이다.[7] 여담이지만 키몬이 도편추방될 당시 명분이 '스파르타와 너무 친하게 놀아서 아테네의 이익을 실추시켰다'라는 것이었다. 키몬이 테미스토클레스를 추방시킬 당시 내세운 명분이 '지나치게 반스파르타적이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밌는 부분. [8] 그래도 이것이 델로스 동맹의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사실 델로스 동맹에서 아테네는 각 도시국가들의 중산층과 하층민들의 지지를 얻을 정도로 민주정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정작 스파르타와 같은 과두정을 지지한 쪽은 각 도시국가들의 귀족층이었지 델로스 동맹들이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정책에 반대했어도 정작 하층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기에 지지를 받은 것이다.[9] '델로스' 동맹인데도 안전을 핑계로 델로스 동맹 전체의 금고는 아테네로 옮겨졌으며, 심지어 델로스 동맹국의 화폐도 강제로 아테네의 화폐를 기준으로 통폐합된다. 이렇게 일방적인 움직임에 몇몇 폴리스가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무자비하게 때려잡힌다.[10] 그래도 페리클레스가 워낙 뛰어나니까 이 정도로 버틴 거다. 자신도 도편추방제로 정적들 맨날 내쫓으면서 정작 자신은 30년 동안 안 쫓겨나고 권력 유지하는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11] 측근이었던 페이디아스는 공금 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으며, 페리클레스의 애인 아스파시아는 문란한 성생활을 근거로 고발되어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12] 하지만 해운업을 주로 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성 안에 그대로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버티라고 하니 반발의 목소리가 꽤나 컸다고 한다. 청야 전술 반대파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장군 지위를 박탈당했을 정도.[13] 이 역병은 아테네 역병, 혹은 아테네 대역병이라고 불려진다. 참고 당시 아테네 역병의 증상을 묘사한 글에 따르면 아테네 역병에 걸린 환자는 머리에 고열, 눈에 통증을, 또 호흡기(코, 입)에서 출혈증상을 보이고 기침과 재채기 등의 호흡기 증상을 보이다가 통증이 가슴팍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또 환자들은 담즙 토사와 기력저하 등에 시달렸고 반복되는 구토로 인해 공복상태에서 위경련을 겪었다고 한다. 환자의 피부에 열은 없으나 붉은 기가 돌았고 검푸른 반점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하며, 환자들은 체내에 강한 열을 느껴서 얇은 옷을 입어도 뜨거워서 견디지 못했고 강한 갈증에 시달려서 심지어 물에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고. 심각한 것은 이질현상으로, 보통 이것 때문에 환자들이 죽어나가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각종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14] 현대 학계에선 당대 환자들의 시신과 집단무덤을 조사해본 결과 이를 장티푸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장티푸스 외에도 탄저병, 티푸스, 천연두 등 다양한 전염병이 이 당시 역병의 원인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혹은 한두 가지 전염병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전염병이 같이 돈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후보군만 해도 무려 30개.[15] 당시 이리로 오려던 스파르타도 아테네 쪽에서 시체 태우는 연기가 그치지 않는걸 보고 발길을 돌려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있다.[16] 이는 페리클레스도 예상치 못하게 아테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있고 당시 아테네 도시 자체가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할 정도로 큰 도시가 아니었다. 특히나 한꺼번에 많은 인구가 도시에 모이면 도시 안의 위생 상태가 엉망이 되고 전염병을 가진 개체의 사람이 병원균을 옮기면 아테네 시민들이 내부에서 전멸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인구가 외부에서 폭발적으로 유입된 후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인지, 당시대에 이 전염병을 체험하고 살아남았던 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이 역병을 외부에서 유입되어 그리스로 전파된 역병이라고 간주했다.[17] 사실, 전근대의 도시, 특히 고대~중세의 도시들은 근현대 도시에 비해서 전염병에 훨씬 취약했다. 영토를 면으로 지배할 수 있는 근대국가와는 달리, 고대~중세 국가의 영향력은 주로 점(도시나 마을)과 선(도시나 마을 등 거주지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 점과 선 바깥의 면은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근대의 도시라는 것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그 내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고, 전근대 건축기술의 한계상 성벽으로 둘러쌀 수 있는 공간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대~중세 도시의 인구 규모는 현대 도시보다 훨씬 작았지만, 거주자들의 체감 인구밀도(도시 거주자간의 사회적 거리)는 현대 도시들 이상으로 높았던(가까웠던) 것. 이는 당연히 전염병이 퍼져나가기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고, 여기에 전근대의 위생/의료수준 부족이 더해져 한번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면 도시 인구가 떼몰살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 시절엔 역병에 대한 방역 기술도 부족했고 끽해야 시체를 태우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 와중에 수로까지 오염되면 그야말로 망했어요.[18] 그래도 아테네인들은 왕년에 한가락한 국가답게 바로 스파르타에게 먹히지 않고 역병 사건 이후에도 제법 시간을 끌긴 했다. 전면전에선 확실히 패배했지만.[19] 물론, 스파르타도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로 똑같이 망하고 만다. 자세한 사항은 스파르타 참조.[20]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창궐 이후 여러 기사에서 페리클레스와 당시 아테네인들이 당해서 쓰러져나갔던 아테네 역병을 코로나 19와 함께 재조명하는 내용이 간간히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