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Dorothy May Day''' [1]
(도로시 데이)
1897년 11월 8일~1980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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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기타


1. 생애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언제나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 1978년 세계성체대회

"그녀는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 - 노트르담 대학 레테르 훈장 수여식[2]

“나는 네명의 위대한 미국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토마스 머튼 그리고 도로시 데이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15년 미국 의회 연설시

미국의 크리스천 아나키스트, 여성운동, 진보적 가톨릭 운동, 노동운동, 반전평화운동가
1897년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재학 시절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고, 졸업 후 사회주의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간호실습생 일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 낙태를 경험하고 이에 대한 트라우마로 종교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된다. 아니키스트 포스터 배더햄과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으나,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 세례를 받길 원하자 헤어졌다고 한다. 이후 피터 모린과 함께 "가톨릭 노동 운동"이라는 노동자 신문과 "환대의 집"이라는 홈리스 시설을 모금을 통해서 운영해나갔다. 이 후 반핵, 노동운동, 반전운동, 인권운동등으로 평생동안 투옥을 반복하며, KKK등의 과격단체의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봉사와 사회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1980년 11월 29일, 한평의 주거공간도 재산도 소유하지 않은 그녀가 떠나면서 남긴 묘비명은 "Deo gracias.(하느님 감사합니다.)"...

2. 기타


  • 뉴욕 교구의 프랜시스 스펠만(1889~1967) 추기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3] 1949년 교구소속의 인부들이 파업도중 당시 주교이던 스펠만이 인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후 스펠만이 베트남에 가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는 동안, 도로시는 국내에서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도로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평화주의 선언을 위해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스펠만은 주교들에게 이 항목을 빼자고 주교들을 선동하였다고 전해진다.
  • 도로시 사후에 뉴욕 교구는 비교적 빠른 3년 후인 1983년에 시성절차를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종" 칭호를 받았다. 현재 가경자이며 시복심사절차가 진행중이다.
  • 도로시 데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로 어둠속의 천사(미국,1996년)가 있다. 모이라 켈리와 마틴 신이 주연을 맡았다.
  • 미국 대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교황의 미의회 연설시 그 이름을 언급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1] 본명이 도로시 메이 데이(노동절)이다. 생각해보면 이 분의 행적을 정리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2]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제도적인 개선의 노력이 첫번째고, 두번째로 영적인 운동을 통해서 편안한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는 뜻이다.[3] 스펠만 추기경은 냉전시대 미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