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1. 카를 5세의 사생아, 돈 후안
Don Juan de Austria (John of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만 31세)
[image]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해전 당시 만 24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1] 의 사생아로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이다. 다만, 펠리페 2세와는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나고 펠리페 2세의 장남인 돈 카를로스보다도 2살 어리다.
1546년 카를 5세가 평생 숙원이었던 개신도들의 박멸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 위해 5만의 스페인 대군을 이끌고 16년 만에 독일에 왔을 때(슈말칼덴 전쟁, 1546년~1547년) 독일 현지에서 만난 미모의 여인 바바라 블롬베르크(Barbara Blomberg)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독일인인 어머니와 떨어져 스페인에서 살았다. 유년기의 이름은 헤로니모(또는 헤로민).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카를 5세와도 생전에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와 신성 로마 황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은거하고 지내던 만년 시절이었으므로, 후안의 나이 10세쯤이었다.
성장한 이후에는 어땠는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어도 처음에는 이복형 펠리페 2세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펠리페 2세가 후안에게 매우 친절했고 심지어는 사생아지만 왕족이라는 걸 알려주며 이후의 교육을 챙겨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 이후 젊은 나이에 연합군을 조율하며 큰 전공을 세우는 성과를 보이는 등 돈 카를로스를 포함하는 정식 후계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능력이 좋다는 평이 있지만 이후엔 어쨌건 왕족이라는 특성상 궁중암투 의심을 받는 여러 사건들을 겪는 와중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훗날에 만난 어머니 바바라는 그의 아버지가 카를 5세가 아니라 당시 자신이 만나던 다른 남자였다고 털어놓았다는 얘기가 있다. 외모상으로도 후안이 합스부르크 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3]
돈 카를로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펠리페 2세를 살해하려 한 음모에 휘말릴 뻔한 적도 있다. 정신 장애를 앓던 돈 카를로스는 펠리페 2세를 살해하고 플랑드르의 왕이 되겠다는 계획을 삼촌인[4] 돈 후안에게 밝히며 협조해달라고 말한 것. 그러나 이 역모는 돈 후안 본인이 펠리페 2세에게 먼저 알려서 수습할 수 있었다.
이 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향년 31세.
과거 템페스트 용병단이라는 모바일 게임의[5]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적이 있다. 다만 본명은 후안이 아닌 '프로스페로'로, 후안은 용병단장으로서 사용하는 가명이며 아버지 카를 5세는 메리 튜더로 인해 성정이 흐트러지고 나라가 피폐해지자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용병단을 조직한 것으로 묘사된다. 최후에는 카를 5세를 쓰러뜨리지만 메리 튜더는 엄청난 처세술을 보여 전쟁은 끝끝내 멈추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엔딩을 맞는다.
원래는 스페인 해군의 이지스함 알바로 데 바잔급의 6번함이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번함은 건조가 취소되고 말았다.[6]
2. 펠리페 4세의 사생아, 돈 후안 호세
John of Austria '''the Younger''' 또는 John Joseph of Austria (Don Juan José de Austria)
1629년 4월 7일 ~ 1679년 9월 17일(만 50세)
스페인의 군인 겸 정치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그의 정부, 마리아 칼데론으로부터 얻은 사생아이다. 위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그의 미들네임인 호세를 포함해 돈 후안 호세 (Don Juan José)라고 부르고 영미권에서는 John Joseph of Austria 또는 John of Austria '''the Younger'''라고 부른다.
그는 다른 유럽 군주들의 사생아들과 마찬가지로 출생 직후 수녀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이후 그는 톨레도에 있는 오카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1642년, 펠리페 4세는 공식적으로 후안이 자신의 사생아라고 인정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때까지 돈 후안 호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펠리페 4세라는 것을 몰랐으며 펠리페 4세가 자신의 사생아라고 인정한 사람은 후안이 유일하다고.
이후 그는 아버지와 스페인의 명예를 위해 군에 입대하게 되고 1647년, 나폴리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카탈루냐[7] , 네덜란드[8] , 포르투갈[9] , 덩케르크[10] 등을 떠돌며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막기 위해 애썼다. 이로 인해 그는 스페인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인기는 훗날 그가 일으킬 쿠데타의 원천이 되었다.
1665년, 그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후안의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스페인 궁정은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이자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해 권력을 잡은 섭정 마리아나 왕대비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안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11] 그러다 마리아나 왕대비의 심복이던 독일 예수회 소속의 후안 에베라르도 니타르가 후안이 가장 신뢰하는 하인 돈 호세 말라다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마리아나는 후안을 아라곤의 총독에 임명해 말라다스의 죽음에 대해 보상했으나 이는 보상이라고 하기보단 사실상 추방에 가까웠다. 이후 마리아나 왕대비는 자신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지 않고 페르난도 데 발렌수엘라라는 인물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정치를 맡겼는데 재상이 된 발렌수엘라가 전횡을 일삼자[12] 발렌수엘라에게 질려버린 귀족들이 후안에게 지지를 표했고 후안은 이를 놓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 마리아나를 톨레도로 쫓아낸 뒤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2세에게는 궁정에 나올 땐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부탁했고 모든 통치를 본인이 하게 된다. 그는 사치를 금지했고 생필품 공급을 정상화시키며 상공위원회를 창설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정권을 잡은지 3년만인 1679년에 사망했고[13] 이후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의 사후 스페인 제국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 되었으며 그의 이복동생의 사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계속 추락을 거듭하다 보르본 왕조 카를로스 3세의 치세에 들어서야 반등하게 된다.
[1]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2] 다만 정식 왕족으로는 인정 받지 못했고 스페인의 대귀족 집단인 Grandee에 소속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3] 물론 합스부르크 혈통이라고 무조건 주걱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마리아 테레지아만 해도 주걱턱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은 친척 간의 결혼 때문에 형성된 것이므로 완전 외부의 유전정보를 가진 바바라가 섞이면서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4] 삼촌이긴 하나 돈 카를로스가 돈 후안보다 두 살이 많았고 비슷한 나이대였던 탓에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5]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형 RPG이다.[6] 같이 취소된 5번함은 뒤늦게 건조를 재개해, 2000년대 후반에 취역했다. 5번함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7] 당시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 국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에게 칭신을 한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입장에선 당시 최악의 라이벌이던 프랑스에게 카탈루냐마저 빼앗긴다면 자연 국경인 피레네 산맥을 내어주는 꼴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카탈루냐를 사수해야만 했다.[8] 1656년부터 1659년까지 현재의 벨기에인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했다.[9]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10] 프랑스와의 전쟁.[11] 후안과 마리아나는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안좋았는데 카를로스 2세가 이복형인 후안의 능력에 감탄하여 국왕 자문을 맡겼으나 마리아나가 반대하여 취소된 적도 있을 정도였다.[12] 발렌수엘라는 마리아나의 대비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기 위해 일부러 궁전에 파티를 자주 열어 국고를 낭비했고 자기 마음대로 정부위원회의 위원 2명을 파면시킨데다 나중에는 아예 정부위원회를 해산시켜 버릴 정도로 권력을 남용했다.[13] 많은 이들이 마리아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꾸민 독살 사건으로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