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olbgcolor=#00001b>'''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image]
[1]
<colcolor=#fff>본명
리구리아어
'''크리슈토파 쿠룽부''' (Christoffa Corombo[2])[중세]
'''크리스토파 쿵부''' (Cristòffa Cómbo[3])[현대]
이탈리아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
'''크리스토발 콜론''' (Cristóbal Colón)
라틴어
'''크리스토포루스 콜룸부스''' (Christophorus Columbus)
출생
1450년 10월 31일,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506년 5월 20일 (55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
국적
[image] 제노바 공화국
신장
183cm
직업
항해사, 탐험가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배우자
필리파 모니스 페레스트렐로
서명
[image]
1. 소개
2. 신항로 개척 과정
2.1.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2.2.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3. '신대륙' 도착, 원주민 탄압 및 학살
4. 몰락과 죽음
5. 콜럼버스의 교환
6. 영향
7. 기타
8. 창작물
8.1. 영화
8.2.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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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항해사, 콩키스타도르.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4]. 또 '''유럽인 중에서조차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 '''아메리카로 인식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 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의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유럽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에 관한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 ''디오스코로 테오필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1862, 캔버스에 유화'' '''
아메리카에 상륙하는 콜럼버스 일행을 그린 기록화.
주위에 그를 경외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발가벗은 채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학살자였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68 혁명 등의 대두로 사회 정의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추락했다. 더불어 연구가 이루어질수록 콜럼버스의 탐험이 비과학적이고 막무가내로 이루어졌고 그저 운좋게 신대륙에 닿은 사실이 확인되면서 평가는 더 추락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행적은 불분명해서 태어난 연도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1450년 생으로 보통 많이 알려졌지만, 1447년 생이라는 주장도 많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지역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면서,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그래서 이탈리아어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로는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이다, 유럽인들 기준으로는 영웅 중의 영웅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라서 그런지 유럽 언어로는 이 인물을 표기할 때에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식이 아닌 자국어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여간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 소개가 되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공식 표기법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콜럼버스에서 파생된 Columbia의 공식 표기법은 '''컬럼비아'''다. 영어 발음에 의해 외래어 표기법으로 정확히 표기하자면, Columbus도 컬럼버스라고 표기해야 되겠지만, 관용을 존중해 '''콜럼버스'''가 표준 표기가 되었다. 하지만 Columbia의 표준 표기는 '''컬럼비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컬럼버스라고 하고, 콜럼비아라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으며 자주 틀리는 외래어의 하나. 심지어 콜롬버스라고 하기도 한다.

2. 신항로 개척 과정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버스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5]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지구는 둥글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바퀴 돌아서 중국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라 거리 계산이 터무니없이 어긋났고 콜럼버스의 요구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6]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인적으로 후원해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이사벨 1세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대로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 지원했다'라는 설보다는 다른 설이 좀 더 설득력 있다. 레콘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르크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옆나라 포르투갈이 항해왕 엔리케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7] 따라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꺼라 내다보았고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탐험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다만 여왕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후원했던 탐험이라 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뿐이었고 동시에 지중해 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큰 손해를 입었다.

2.1.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가?



콜럼버스가 도달한 시점에 아메리카 대륙은 무주지가 아니고 이미 원주민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10,000여 년 이전에 건너간 원주민들이야말로 첫 발견자들이라고 할수 있다.[8]
유럽인 기준으로도 콜럼버스는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자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사람들은 콜롬버스 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빈란드로 유명한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 유적의 존재로 아메리카 발견이 이미 입증되었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현 캐나다 동부)에 갔다거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 사이에서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며 , 바스크인들이 어업,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지역에 정착하기도 했고 심지어 콜럼버스조차도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이름모를(일지일부가 소실되었다) 이에로 섬 출신의 사람이 카나리아 제도 서쪽에서 육지를 보았다고 진술했고 같은 일지에 1484년에 있었던 일을 인용하면서 마데이라 섬의 주민이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육지를 언급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일지에 쓰고 있다.[9]

2.2.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였는가?



위인전에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한 줄 알고 콜럼버스의 탐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 '''대항해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지구 구형론은 이미 확고하게 퍼진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지구 구형론의 선구자' 콜럼버스 vs '바다의 서쪽엔 낭떠러지가 있어 떨어져 죽을테니 못간다'는 당대 사람들의 대결구도는 19세기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소설의 묘사일 뿐이다. 이런 잘못된 역사적 인식들을 '플랫 에러'라고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 발견된 사실이었고 콜럼버스의 시대에서 1700년도 더 전에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방법으로 지구 둘레의 계산까지 구한 기록이 있다. 측정의 오차야 어느 정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학문과 기술의 미시적인 문제이지 대략적인 지구의 크기는 알고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일화도 천동설에 대한 논쟁이었지 지구 평면설에 대한 논쟁이 아니었다. 간혹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을 동일시하여 천동설을 믿은 사람들을 지구 평면설도 같이 믿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아니다. 지구 구형론에 대해서는 중세 시대 종교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알마게스트의 주장을 토대로 하여 확고부동한 사실로 믿고 있었다.[10] 애초에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에 퇴짜를 놓은 실제 이유는 콜럼버스의 매우매우 심각하게 틀린 거리 계산법 때문이다. 직선으로만 15,000km 정도[11]를 틀렸는데, 유럽에서 아시아, 즉 일본중국까지의 거리인 19,600 km를 3,700 km로 줄여버렸다. 콜럼버스의 계산대로라면 미국이 있어야 할 위치에 인도나 지팡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신념으로 항해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완벽히 빗나간 계산[12]을 가지고 항해를 한 것이다. 때문에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시아 탐험대를 여러 번 조직해봤던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 제노바 정부 입장에서는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이 맞지도 않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대규모 투자를 해달라고 징징대는 모습이 기가 차서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1차 탐험대 선원 대부분이 제대로 모집한 선원들 말고 죄수들이었던[13] 이유도 이런 어처구니 항해를 했다가는 대서양에서 플라잉 카스테야노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정규 선원들이 항해를 거부하고 나선 결과물이었다.
콜럼버스를 반대한 사람들은 당시로서도 지금[14]으로서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콜럼버스 일당이 대서양 방향으로 가다가 인도는 고사하고 조선이나 일본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바다 위에서 말라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거나 하다못해 하와이이스터 섬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콜럼버스 선단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전멸하거나 선상반란으로 와해됐을 것이다. 후대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선단이 훨씬 더 큰 규모의 선단으로 항해를 했음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마젤란도 필리핀에서 원주민과 싸우다 죽은 뒤 수십 명의 사람들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생각한다면 콜럼버스는 운이 좋았다.
이를 두고 콜럼버스가 투자를 위해서 사기를 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차 원정대에 자신도 동행했고 언급했다시피 콜럼버스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도한 곳을 인도로 믿은 걸로 보아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구가 둥글지 않고 모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3차 항해일지 중

모든 증거가 여기가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콜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론을 살짝 수정하는데 '지구 구형론을 부인'해버린다. 정확히는 자신의 3차 항해일지에서 지구는 둥글지 않고 '''(서양)배 모양''' 형태라고 주장한다. # 당연히 이 어처구니 없는 이론은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았고,[15]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지구 구형론에 따라 아시아가 생각보다 넓었거나, 혹은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또 다른 대륙이 아닌가하는 가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마저도 콜럼버스는 틀렸고 당대 사람들은 옳았다.
콜럼버스만 신대륙에 가본 처음에는 인도에 도착했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을 사람들이 믿었지만, 몇 년 안되어서 콜럼버스의 항로를 따라서 신대륙에 가본 사람들이 여럿 나왔고, 그런 사람들 중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당당하게 그 땅을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고 자신의 책자를 통해 주장했다. 한편 콜럼버스는 계속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주장했고, 콜럼버스의 주장을 의심한 사람들에 의해 논쟁에 휩싸였다. 반면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인식하고 발표한 아메리고는, 하급 선원의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3. '신대륙' 도착, 원주민 탄압 및 학살


콜럼버스는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3일에 서쪽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리고 10월 12일에 그가 '인도'라고 믿은 신대륙(?) 본토와 가까운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상륙해서 '산살바도르 섬'으로 이름붙였다. 훗날 서인도 제도로 불릴 카리브 지역을 탐험할 때 12월 25일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기함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되어, 돌아올 때는 배가 1척 줄었다. 콜럼버스는 1차 원정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여왕에게 보고했다.
1493년에 시작한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16]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히스파니올라 섬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17]
이렇게 2차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병으로 죽거나 원주민들에 의해 죽어 있었다. 남겨진 선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후 온 탐험가들이 생활하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린다거나 금을 찾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다가 원주민들과 충돌해서 전멸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이후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에 여왕의 이름을 붙인 식민지 거점을 세운 뒤, 호전적인 부족뿐만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기가 없이 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분살을 포함한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3차 원정(1498~1500)과 4차 원정(1502~1504) 때 콜럼버스 탐험대는 점점 더 잔인해져서,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닢에 매춘부로 만들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히스파니올라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다가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전멸했다. 그러자 콜럼버스와 스페인인은 처음에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에는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흑인 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긴 마찬가지였으나, 살아남은 흑인 후손들이 원주민 및 백인과 혼혈 자손을 남겨서 아이티도미니카 공화국은 아프리카계 흑인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많다.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이 중국의 남서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 황제나[18]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나올 턱이 없었다.
참조 1, 참조 2.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이 학살을 알렸지만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백인들의 눈에 원주민이나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스페인에서 원주민들을 최소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건 콜럼버스 이후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였고 흑인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으려면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구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고,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콜럼버스처럼 몰락'''하려면 '''대단한 무능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빌 브라이슨

그 외에도 섬을 부하 선원이 발견했는데 협박해서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거짓 보고한 적이 많다.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꽤나 사악한 짓이었다. 그는 야만인과 약속은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콜럼버스의 몇몇 부하들조차도 보다못해 "제 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지 않냐"며 반발했고 심지어 그에게 덤벼들기까지 했다.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으며 가정을 얻고 원주민들과 섞여 잘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이들 앞에서도 원주민들을 탄압했다. 1504년 1월에는 부하 일부와 원주민들이 손잡고 콜럼버스를 죽이려 들었는데 잠자다가 속옷 차림(...)으로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에게 보호를 받아 살았다. 그 꼴을 본 스페인 군인들도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이렇게 원주민을 잔인하게 대한 이유는 그의 항해가 수익성이 있음을 스페인 본국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중국이나 인도를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 그냥 허름한 산골동네나 다름없는 신대륙이었다. 신대륙의 가치는 매우 높아지며, 이곳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과 기호품이 유럽국가들의 재정근간이 되지만, 그것은 먼 후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콜럼버스가 당시 발견했던 신대륙은 그냥 멀리 떨어져있는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00%이익이 난다고 했는데 결과는 1% 이윤만 나는 셈이니,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막대한 금을 수집한다. 하지만 금은 너무나 적었고 그는 점점 더 잔인해지게 된다.

4. 몰락과 죽음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오리노코 강을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힘든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이던 이사벨 1세가 죽자마자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무수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몇 해 사이에 그야말로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실제적인 직책의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명칭'''만'''은 대대로 가지게 된다.
콜럼버스의 시신 일부가 있다고 전해지는[19]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당당하게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고 설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은 매독 연구 관련 책자 지은이에게 현지 길라잡이도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작은 벌입니다."라고 조롱했다.
[image]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대서양 건너편 산토도밍고로 이장되었고, 1795년 프랑스가 히스파뇰라 섬을 점령하자 아바나로 이장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세비야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인 '죽어도 스페인 땅 안 밟겠다, 마음대로 하셔!'를 고려하여 그의 은 현재 4명의 동상[20]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 스페인이 이러한 무리수까지 두면서 그의 시신을 운구한 이유는 비록 그의 행적에 대한 여러 논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스페인의 황금기를 개척한 공로자였기 때문이다.

5. 콜럼버스의 교환


콜럼버스와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와 유럽의 동식물, 문화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가 사망했다.[21] 왜 이렇게 양상이 달랐느냐 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치명적인 공기 전염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2] '''만약 아니었다면 유럽 사람들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똑같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미대륙의 일부 원주민 출신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악마가 전한 작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위와 같은 배경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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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아메리카
아메리카→유럽
동물
고양이, 낙타, , , 당나귀, 염소, 꿀벌, , 페릿, 거위, 토끼, 돼지, , 비둘기, 호로새, 물소
알파카, 밍크, 기니피그, 칠면조, 야마, 머스크오리, 연지벌레[23]
식물
아몬드, 사과, 살구, 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바나나, 보리, 비트, 빌베리, 비터멜론, 후추, 브로콜리, 양배추, 케일, 콜리플라워, 방울다다기양배추, 오렌지색 메론, 카람볼라, 카다멈, 당근, 시나몬, 정향, 커피, 오렌지, 레몬, 오이, 대추야자, 아마, 무화과, 마늘, 아메리카머루, 헤이즐넛, 대마초, 키위, 상추, 망고, 기장, 귀리, 오크라, 넛메그, 올리브, 양파, 복숭아, 양귀비꽃(아편), 완두콩, , , 피스타치오, 루바브, , 호밀, 대두, 사탕수수, 토란, , 순무, , 호두, 수박, 양조용 포도, , 목화, , 회전초, 녹두, 콜라나무
악키[24], 용설란, 선인장, 아마란스, 애로루트, 아보카도, 강낭콩, 검은나무딸기[25], 고추, 피망, 블루베리, 치클, 캐슈넛, 치아시드, 번련지, 체리모야, 커스타드 애플, 크랜베리, 코카나무, 카카오, 구아바, 허클베리, 해바라기, 돼지감자, 옥수수, 지카마, 카사바, 파파야, 패션프루트[26], 땅콩, 피칸, 파인애플, 감자, 호박, 퀴노아, 고무나무, 사포딜라, 딸기[27], 고구마, 담배, 토마토, 바닐라, 야생쌀[28], 마떼, 실유카, 주키니, 과라나
병균
수두, 페스트, 콜레라, 감기, 디프테리아, 인플루엔자, 한센병, 말라리아, 홍역, 성홍열, 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황열, 매종(pian, 혹은 Yaws)[29]
베젤(= 풍토성 매독), 열대성 백반피부염, 샤가스병, 매독, 필록세라
한편 해외의 일부 네티즌들은 만약에 빈란드로 떠난 바이킹들이 정착에 성공해서 지금보다 약 500년 일찍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하는 가정에 대한 대체역사적인 상상을 제기한 적도 있다. #[30]

6. 영향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비록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류 최초 '발견자'도, '유럽인 최초 발견자'도 아니지만, 이것이 콜럼버스의 항해의 역사적 가치를 낮추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관계를 맺고 유럽-아메리카 교류의 물꼬를 튼 사람이 콜럼버스다.''' 위의 상륙은 모두 일회성에 그쳤지만, 그는 첫 상륙 이후로도 4번의 항해를 했다. 이를 증명하듯 한동안 유럽인 위주로 사회가 작동되던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국에는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미국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메리카 대신 콜럼버스에서 여성형 어미를 붙인 컬럼비아(Columbia)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미국 수도 워싱턴의 공식 명칭인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 D.C.)에서 쓰이고, 캐나다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비롯, 수많은 지명에서 컬럼비아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오하이오 주 내에도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콜럼버스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 콜롬비아 공화국이 이러한 지명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고, 콜럼버스의 스페인식 이름인 콜론이라는 지명도 파나마 등 여러 나라에 있다.
콜럼버스의 이 항해는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설탕 때문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가져온 설탕은 이 발견 이후 영국의 왕실부터 일반 노동자 계층까지 사용하는 최고의 사치품이 되고, 은은 그 당시 명나라가 조세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중국의 은 수요가 늘어났는데 이 때 스페인이 포토시 언덕에서 채굴한 은을 교역에 사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은 설탕과 은을 교역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군사력에 투자하여 교역로를 지키는 강한 해군을 양성할 수 있었다. 즉 콜럼버스의 잘못된 계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0월 12일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해 남북 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고, 일부 나라에서는 공휴일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라 하며 기념한다. 기념일이나, '''쉬어도 되고 안 쉬어도 되는''' 기념일로 지역에 따라 공휴일이기도 하고 그냥 기념일이기도 하다. 웬만한 직장/학교는 이 날 안 쉬는 지역에서 만약 이 날 쉬는 곳이 있으면 '우리 직장/학교는 널널합니다 ^^'라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일부 지역은 공휴일이므로 직장/학교도 다 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근현대사 인식이 알려진 이후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급속히 추락했다. 원주민에게 콜럼버스는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치웠으며, 각종 재물을 약탈해간 사람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의 탐험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몰려들어 원주민에 대한 핍박, 학살, 탄압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하와이, 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그리고 오레건에서는 콜럼버스 데이가 없는데,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관계가 없는 지역이고, 사우스다코타는 이름의 유래에서 보듯 원주민이 많은 지역이라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며, 오레건은 바로 윗동네이자 같은 북서부 경제권역을 구성하는 워싱턴 주 시애틀과 비슷한 시기에 콜럼버스 데이 기념을 중단했다. 워싱턴 주의 중심도시 시애틀은 그 어원 때문에라도 쉬지 않고, 주 전체는 아니더라도 시애틀과 그 주변 카운티에서 기념을 중단하였으며, 주 공휴일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 외에도 아이오와네바다에서도 공식적으로 그런 날이 있다는 걸 알리기는 하나, 쉬거나 기념하지는 않는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이 날을 "종족의 날(dia de la raza)"이라고 하는데,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음 만난 것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에서 공휴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 중 일부는 왜 그런 인간을 기념하느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콜럼버스가 미 대륙에 도착한 10월 12일Fiesta Nacional이라는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31] 1935년부터 국경일로 기념되기 시작했으며, 1987년 이전까지는 그 명칭이 스페인의 날(Día de la Hispanidad)이었다고 한다. 독립선언일이나 정부수립일, 혁명일을 국경일로 정한 주변 국가들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날이 되면 마드리드 시가에서는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병식이 거행된다.

7. 기타


20세기 학자들은 그를 학살자라고 비판했다.
아들이 둘 있었는데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디에고는 아버지의 직책을 명칭만 이었지만 손자인 루이스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32]로부터 베라과 지역[33]을 봉토로 받음으로써 1대 베라과 공작(Ducado de Veragua)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베라과 공작위를 이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상이 조상인지라 이쪽에서는 해군이나 해운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17대 공작 크리스토발 콜론 데 카르바할 이 마로토 (1925~86)는 해군 중장까지 지냈는데 ETA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현직인 18대 공작(1949~)도 해군 중장을 지냈었다.
한편 콜럼버스의 다른 아들 하나는 첫 부인 사후 내연녀와의 관계에서 나왔는데, 이사벨라 여왕의 시동으로 들어가 궁정 신하로 출세하게 된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그냥 관리로 살았다. 책벌레였던 탓에 이 사람이 가진 도서 컬렉션은 지금도 스페인에서 알아준다고 하며 콜럼버스의 전기를 최초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34]
달걀의 아래쪽 껍데기를 살짝 깨뜨린 다음 똑바로 세워, 신항로 개척이 불가능할 것이라던 사람들[35]데꿀멍시켜버린 일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달걀을 세운 것은 콜럼버스가 아닌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이탈리아의 건축가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설계를 공개했던 당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운 일화가 와전되어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1차 항해가 길어지는 와중에 나침반의 바늘이 갑자기 멋대로 움직여 선원들이 바다의 악마가 나침반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둥 동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아마 세계 최초로)지구의 자기 변화를 발견한 것이지만 콜럼버스로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북극성 또한 다른 별들처럼 움직여서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급히 둘러대서 겨우 진정시켰다.
미드 소프라노스 시즌 3에서 콜럼버스에 대해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와 옹호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갈등이 나온다. 근데 정작 이탈리아 남부 출신인 푸리오는 콜럼버스가 북부출신이라고 깐다.(...) 현대 미국인들이 콜럼버스에 대해 갖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이탈리아 해군의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전함 중 한 척에 이름이 계승되었다.

세계적인 물류기업인 DHL에서는 업계 최초로 해외발 미국행 항공 특송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자사의 기록을 홍보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테마로 재밌는 광고를 만들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기뻐했는데, '''이미 DHL 배달원이 콜럼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국에서 온 물건인데 확인해 달라고 콜럼버스에게 서명을 부탁했다. 마지막에 콜럼버스가 DHL이 전달해 준 물건이 뭔지 박스에서 꺼내보니 다름 아닌 '''모터보트 엔진'''(...). 이 CF는 원래 1998년에 호주에서 제작된 CF를 1년 뒤인 1999년 당시 DHL의 한국 대리점 역할을 했던 일양 익스프레스에서 수입하여 우리말 더빙과 자막 편집만 거쳐 그대로 방영한 것으로, 원판 CF에서는 배달원이 싱가포르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CF에서 '''배달원의 목소리 더빙'''을 맡은 성우는 '''강수진'''이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영웅시되는 모양이다. 사실 콜럼버스의 행적은 카탈루냐에 이득이 가는 결과물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흡수합병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면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를 밀어주는건 아무래도...
외계인의 지구방문(혹은 침공)이 주제로 나올때 흔히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사건을 많이 빗대어 말한다. 그 예로 스티븐 호킹은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외계인은 콜럼버스, 지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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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회담 방영당시, 패널 대부분이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으로 배웠다고 한다. 유일하게 이집트 패널 새미 라샤드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아메리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미 라샤드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항목 참고.
2020년 6월 10일에는 보스턴에 있던 동상이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관련으로 인종차별 철폐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아메리카에 백인들이 몰려오게 된 장본인격인 콜럼버스가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1개월 후인 7월 4일 미 독립기념일에도 미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8. 창작물



8.1. 영화


적어도 세 편의 영화화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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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걸작은 프레드릭 마치가 주연한 1949년 영화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940년대 말 영화치고는 남미 원주민들의 학살 등의 이야기도 중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흥행은 그리 안 좋았는데 20만~30만 파운드로 만들어 12만 1천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992년, 그의 미국 대륙 서구권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영화가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 The Discovery)가 먼저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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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 아이스 온리부터 살인 면허까지 다섯 편의 007 시리즈를 연출한 존 글렌(1932~ )이 감독을 맡고, 그리스계 프랑스 배우인 조르주 코라파스가 콜럼버스로 나오고 인디아나 존스가 될 '''뻔'''했던 톰 셀렉(그는 이걸로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이 페르난도 왕, 레이첼 워드가 이사벨라 1세 여왕으로 나오고 말론 브란도가 종교재판관 토르케마다 추기경으로 나왔다. 그밖에 캐서린 제타존스가 콜럼버스의 두번째 아내로, 베니치오 델 토로도 나왔으며 슈퍼맨 시리즈를 제작했던 살카인드 부자가 제작을 맡았다. 워너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은 이 영화는 1992년 8월 21일에 미국에서 개봉했는데 45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전세계에서 8500만 달러를 벌어 흥행은 실패했으나 같은 시기 개봉한 경쟁작인 1492 콜럼버스보단 약간 더 흥행은 했다... 한국에서는 개봉도 못하고 비디오로만 먼저 나왔으며 나중에 공중파로 더빙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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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는 당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 공동 제작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콜럼버스 역)와 시고니 위버(이사벨라 여왕 역)가 출연한 《1492 콜럼버스》(원제: 1492 Conquest of paradise)이다. 1992년 10월 9일에 북미 개봉을 했는데 고증오류도 적지 않지만[36]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학대 등의 어두운 측면도 다루어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꽤 볼만한 작품. 다만 영화 내에서 콜럼버스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호의적이고 역사와 안 맞는[37]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주의할 점이다. 47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으나 전세계 흥행 다 합쳐서도 7천만 달러를 겨우 넘겨 본전치기조차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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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영웅인가? 약탈자인가? 라는 문구를 달고 199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했으나 서울관객 33,700여명에 그쳐 한국에서도 망했다. 여하튼 1992년작 두 영화 모두 흥행은 실패하고 지금은 잊혀졌다.
다만 반젤리스가 작곡한 OST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음악은 전쟁 장면 등의 비장한 영상의 배경 음악으로 많이 쓰인다. 또 의외로 거대한 건축물 등을 보도할 때의 배경 음악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가끔 몇몇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에서 바다나 큰 강 등에 송전탑이 줄줄히 늘어선 송전선로나 큰 철탑 등을 건설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 위용을 보여주는 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배경음악이 바로 이 음악이다. 그래서 큰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나오면 자연스레 이 음악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비소프트의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어쌔신 크리드에선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 이후 행적이 등장한다. 스페인 암살단의 암살자 아귈라가 선악과를 손에 얻고 난 후 신대륙으로 출항할 준비를 하던 그를 찾아와 선악과를 숨겨달라 부탁하며 무덤까지 가져가달라 한다. 에지오의 도움을 받은 이후 암살단의 협력자가 된 콜럼버스는 이를 받아들여 숨긴 뒤 자신이 죽을때 무덤으로 같이 가져간다.

8.2.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2: 디스커버리에서 출연한다.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왔다가 로드리고 보르지아의 함정에 빠져 잡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에지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같이 스페인으로 떠난다. 에지오의 도움으로 이사벨 1세의 협력을 얻게 된 그는 항해를 준비하며 암살단의 협력자로 남는다. 이후 행적은 위 영화 항목에 서술.
에로게 영웅전희에서는 모에화되어 USA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와 세력이 인접하면 80.000골드와 자신의 영토를 교환하자는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이 때 제안에 따라 영토를 구입하거나 제안을 거절한 후 USA를 멸망시키면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대항해시대 3에서 스페인식 이름인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나온다. 다만 유저들의 흔한 상식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당대인들이 지구가 둥근 줄 몰랐고 콜럼버스만이 오직 그걸 알고 있었다는 오류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해명하기 위해 항해한 주인공 일행이 제노바에서 프랑스 서해안의 해도 2를 얻기 위해 찾아오자 자신을 박대한 포르투갈 소속 사람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쫓아내면서 국적을 바꾸라고 했으며, 주인공 일행이 쥬피톨 에르난데스에게서 받은 잉글랜드 국적 증명서를 가져오자 주인공 일행에게 해도를 건네준다.
주인공 일행이 메르카토르로부터 라몬이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듣고 신대륙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콜럼버스를 찾아가는데, 주인공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자 콜럼버스는 자신이 찾은 것은 인도라면서 화내면서 주인공 일행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전에 쫓아낸다.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에게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쁜 이유를 들은 후에는 니나의 설득으로 주인공 일행과 항해를 하면서 파리, 이스탄불, 케이프타운, 누비아 거점 등을 다녔다. 진정해도 퀘스트에서는 평형 세계의 자신과 만나게 되는데, 이쪽은 원래 세계의 자신과 달리 아직 신대륙으로의 항해에 나서지 않은 상태라 자신이 갈 곳이 인도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스킬 이름도 '인도 항로에 대한 열정'이다. 또 하나의 자신을 본 콜럼버스는 주인공 일행에게 '아무래도 영혼의 이끌림 같은 것 때문에 또 하나의 자신에게 끌리는 것 같으며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38] 이에 영감을 얻은 주인공 일행은 평형 세계의 쥬피톨과 만날 시도를 하게 된다. 세계일주 퀘스트에서 쥬피톨이 언급하길 또 한명의 평형세계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세계일주에 성공했다고 한다. 생 제르맹 백작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다른 가능성과 미래를 가진 평형세계의 또다른 자신들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평형세계의 동일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일정한 방향성은 존재한다면서 바스코 다 가마는 반드시 동쪽으로만, 콜럼버스는 반드시 서쪽으로만 간다고 한다. 즉, 다른 평형세계의 수많은 콜럼버스들 중에서도 인도에 도착한 이는 없다는 것이다. 안습...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이 그 방향성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건 세계의 섭리에 거역하는 일이고 차원의 질서와 균형에 악영향을 주는지라 바로잡아야 하며, 진정해도 퀘스트를 주는 이유도 이것이라고 하니 다른 세계의 콜럼버스가 동쪽으로 가는 것도 말그대로 천기를 거역하는 일이라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Fate/Grand Order에서는 1.5부 2막에서 라이더로 나오는데, 고증에 충실하게 가감 없는 악당으로 나오고 성능 도 나름대로 괜찮아서 호평을 받았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이벤트에 의해 2/2/6/0의 탐험가로 등장한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는 F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오버로드라서 F급 영웅 중에서는 가장 쓸만하지만 워낙 약해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여담으로 다른 F급은 '''김일성,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로 나머지 F급들은 전부 한국에서 개새끼 소리 듣는 인물들임을 생각하면 콜럼버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볼 수 있다.

[1] 콜럼버스의 정식 초상화로 알려진 이 그림은 콜럼버스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단 당대 기록과 얼굴이 다른 셈.[2] /kriˈʃtɔffa kuˈɹuŋbu/[중세] 옛 제노바를 중심으로 한 리구리아 지역에서 쓰이던 언어.[3] /kriˈstɔffa ˈkuŋbu/[현대] 현대의 리구리아어.[4] 마찬가지로, 유럽 중심으로 만들어진 말인 '대항해시대'라는 말도 더 이상 국내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신항로 개척'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미국교과서도 'discover: 발견하다' 보다 'encounter: 만나다'으로 서술하기를 권한다.[5] 후술하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도 아리스토텔레스 덕에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 있었다.[6]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동군연합이었는데,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무래도 아라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과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는 대서양에, 아라곤은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대항해시대 이후 아라곤은 찬밥신세가 된다.[7] 당시 포르투갈은 아직 인도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첫 탐험 이후 1494년에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단이 이를 성공시킨다.[8] 이 점을 빗대어, 아담 노드웰이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1973년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콜럼버스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권리에 의거해 이탈리아의 발견, 소유를 선포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9] 출처: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종훈(역), 콜럼버스 항해록, 1492년 8월 9일 일지[10] 다만 알마게스트의 경우 이미 증명된 지구 구형론을 틀린 천동설 이론에 넣다보니 논리가 좀 이상하다.[11] 한국베네수엘라콜롬비아의 거리와 비슷하다.[12] 일설에는 아랍의 거리 계산법과 유럽의 거리 계산법을 혼동했다고 한다.[13] 여왕에게 부탁해서 이번 탐험을 다녀오면 잔형을 면제하고 석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고용했다.[14] 콜럼버스가 타고 간 산타 마리아호는 배수량 150톤(...)짜리 쪽배로 한강 유람선보다도 작은 배다. GPS 등 각종 항법장치가 발달한 현대에도 이 수준의 배를 타고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가는 것도, 콜럼버스의 항로인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15] 지구는 콜럼버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양극을 지나는 둘레가 적도 둘레보다 짧고, 그 차이마저도 굉장히 작아 구에 굉장히 가깝다. 굳이 배에 비유하자면 서양배보다는 동양배에 가깝다.[16] 1차 원정에서는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원주민들을 우호적이고 영리하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2차 원정 때부터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17] 1차 원정 때의 선박수는 여왕에게 대여받은 3척과 아는 사람에게 빌린 1척 도합 4척이 전부였다. 하지만 2차 원정 때는 17척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1차, 2차 모두 사면을 미끼로 범법자를 모집하기는 했지만 2차는 전직 군인들도 모집함으로써 원주민들을 족칠 전력을 모은다. 실제로 대포, 갑옷 등 무기를 들고 갔다.[18]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후손에게 보낼 편지를 갖고 왔었다. 왜냐하면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은 13세기 중국 원나라에 갖다 온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을 즐겨 읽었고, 그래서 아직도 중국을 쿠빌라이칸의 후손들이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19] 물론 확실한 인정을 받은 건 아니다. 되려 과학적인 조사를 거부하고 있어 의심을 많이 받는다.[20] 관을 들고 있는 앞의 두 사람은 그의 항해를 지지한 두 왕, 뒤에서 고개 숙이고 짊어지고 있는 두 왕은 항해 지원을 거절한 두 왕이다. 옷차림에 상징물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 편하다.[21] 그나마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로 피가 이어진 경우는 많으나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주민 인구가 많은 곳(볼리비아, 멕시코, 페루)도 19-20세기의 급속한 인구증가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북미나 카리브,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경우는 메소티소의 인구비율도 적어서 원주민의 피가 이어진 경우가 많지 않다.[22] 매독은 성접촉을 통해 전파된다.[23] 이 벌레에 추출해서 빨간색 염료와 천연색소로 쓰이고 있으며 고대 잉카 시절부터 사용되었다. 현재는 딸기우유 등에 첨가해서 사용하고 있다.[24] ackee. 자메이카 원산의 과일[25] 블랙베리[26] 시계초의 일종[27] 정확히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딸기의 교배친들. 유럽에도 동속이종의 야생 딸기는 존재하였다.[28] 벼 종류는 아니고, 줄의 한 종류이다.[29] 열대 피부병[30] 특히 옥수수 같은 경우를 말하자면 옥수수의 전신이 되는 식물인 테오신테는 오늘날 옥수수와는 다르게 곡식이라고 볼 부분도 거의 없고, 너무 단단한데다 작았는데 오늘날처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모양이 변한 건 1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만약에 서기 1000년에(10세기 ~ 11세기) 옥수수가 빈란드에 거쳐 유럽으로 일찍 전래되었다면 아마도 미 대륙과 다르게 테오신테와 비슷하게 원형에 가까운 보존된 모습으로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가설도 제기했다.[31]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위에서 설명했듯이 원주민 노예를 반대한 라스 카사스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원주민과 관계 없이 자국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어서 그런 듯.[32] 스페인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33] 현재 파나마의 베라과 지역. 선조의 업적을 주장하며 상당한 영토를 주장하는 콜럼버스의 후손들과 스페인 왕실간의 오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하여 일단 명목상 영토인 미정복지를 던져주고 알아서 정복하라고 작위를 내렸다. 1대 공작인 루이스 콜론은 파나마쪽으로 가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지만 원주민의 반발과 악천후 등으로 실패하고 20년만에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 봉토를 반납하는 대신 작위의 보존과 연금을 받기로 하였다. 내려진 봉토가 완벽한 정사각형이었다.[34] 리들리 스콧의 영화에는 콜럼버스는 인정도 못 받다가 이 아들의 전기로 진가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오류이다. 적어도 '''당대에는''' 연대기 작가들 중에 콜럼버스를 찬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35] 혹은 항해 성과를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사람들.[36] 예를 들자면,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 콜럼버스 자신이 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인도행 항로 얘기를 언급하는데, 실제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행 항해가 성공한 건 그로부터 6년 뒤(1498년)이다. 그리고 추가 항해를 준비하던 동안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라고 지어 소개한 책자는 이미 발표되어 있었던 시점이었으나) 이제 막 탐사를 시작한 당시의 시점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확정되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37] 원주민들에게 너그러운 유화책을 편다던가... 대신 동행한 에스파냐 귀족들이 착취와 학대를 저지르고 콜럼버스와도 충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38] 다만, 다른 세계의 자신이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반드시 도착할 거라며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서, 자신은 그 결말을 아는 지라 심란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