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스부르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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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16년부터 시작해 1700년에 끝난 스페인 왕국의 역대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의 압스부르고(Habsburgo)는 합스부르크의 스페인어식 발음이다. 스페인이 식민제국으로서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기이다.
한때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포르투갈 왕국을 지배한 왕조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어로도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표기는 Habsburgo이지만 발음은 '압스부르구'로 스페인어와는 다르다.
이후 1700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결과 현 보르본 왕조로 이어진다.
2. 시작
오늘날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시작은 1492년의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없었지만 두 가톨릭 왕국 국왕의 결혼으로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는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통합되었다.[2] 이들은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려 강력한 스페인 성장의 밑거름을 뿌렸다. 특히 1492년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함으로써 스페인은 앞선 항해기술을 활용해 중남 아메리카를 모조리 선점했고, 이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 덕분에 유럽 최대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통일 스페인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였던 '공동왕'의 후계자 후안이 어릴 때 병으로 사망하고, 당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라가 출산 중 사망했기에 이사벨 1세 사후 차녀인 후아나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면서 스페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 왕조를 계승하게 되었다.(오스트리아 항목 참고) 1516년 어머니 후아나 여왕와의 공동통치 형태로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를 시점으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실과 공식적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은 카를로스 1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물려받았고,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두 가문을 공식 분가한 뒤 펠리페 2세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3. 전성기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후 전 합스부르크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피선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명목상 선출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위를 겸직하여 전 유럽의 세력 구도를 뒤바꿔 놓으며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영토만 보면 이때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아니 스페인 전 역사를 통틀어 최고 전성기였다.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 루터의 종교 개혁과 퍼져만 가는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상,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전혀 바라지 않는 독일 제후들과의 계속된 분쟁 등으로 식민지에서의 막대한 수입을 깡그리 지출한 탓에 국고로 돌아갈 돈이 없어 파산한 경우도 있었으나, 코무네로스 봉기(Guerra de las Comunidades de Castilla) 이후 강력한 자치 도시민과 귀족들을 약화시키는 겸 카스티야 내 수많은 농토와 마을들을(lugares/aldeas) 독립 시(villa)로 자치권을 파는 내부 행정 개편 장사로 만회했다[3] . 식민지에서 뽑아온 금은이 스페인 제국에 본격적으로 재정상 보탬이 된건 그 아들 펠리페 시대쯤 돼서 수은추출법이 개발된 다음이다.
한편 상술한 행정구역 개편과 자치권 판매는 단기적으론 귀족과 부유한 도시민들을 분노케 했지만 장기적으론 왕실의 세수를 늘리고, 무엇보다 농민들에게 압스부르고 왕가가 억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와 지방 자치의 수호자인 인식되게 하여 동시대 카스티야가 유럽에서 가장 세율이 높은 편임에도 불과하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낼수 있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압스부르고 왕가는 특히 펠리페 2세 시대 종교 기관의 복지 기능을 대폭 확장하며, 문화적으로 서민들과 상류층의 종교적 일치감을 이루어내어 내부적 안정을 공고하게 다질수 있었다. 기존 지역민들이 애용하던 지역 성당들을 대대적으로 수리, 확장하는 한편 새로운 수도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농부 성 이시도로 기념 축제 같은 행사에도 국왕이 남들과 똑같이 줄서서 기다리며 기적이 발생했다는 우물에서 물을 떠먹는 등 펠리페 2세 시대에 종교행사를 매게로한 대중친화적인 서민 퍼포먼스가 많았고, 왕실 아래 다른 대귀족들에게도 비슷한 행동을 종용했다. 트렌티노 공의회이후 가톨릭권의 전체적 쇄신 노력과 더불어 펠리페 2세의 개인적으로 경검하고도 검소한 성향이 합쳐저 이루어낸 성과였다. 당대 스페인은 위그노 전쟁, 청교도 혁명, 독일어권의 종교전쟁 같은 종교 관련 대규모 내부 동란, 내전을 거의 겪지 않았다. 스페인은 또한 압스부르고 왕실이 들어올 때와 17세기 중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극심하게 달했을때 카탈루냐, 포르투갈, 남부 이탈리아의 반란을 제외하곤 큰 내전 한번 겪지 않았고, 17세기의 동시다발적 지역 분리 반란도 다시 진압했다. 당대 스페인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종교적, 국가적 안정성(?)을 자랑했던 곳은 포르투갈뿐이었다.[4] 반면 스페인 본토와 16세기 초반 압스부르고 왕조가 들어오면서 정복한 이탈리아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이런 내부 행정, 통치 체계, 사회적 개혁의 핵심적인 촉매이자 중심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종교개혁으로 도전 받은 네덜란드에선 대규모 반란과 독립 전쟁이 터졌다. 이는 당시 전투적 가톨릭 이념과 스페인 제국의 불가분적 관계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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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페인은 오늘날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알토란을 유지하면서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켜 상징적인 제동을 거는 데 성공[5] 하고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해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는 등(1580) 절정의 전성기를 달렸으나, 억압적인 통치와 전비를 감당하기 위한 가혹한 과세 정책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1581~1648)이 터졌고, 전 네덜란드가 전화에 휩싸이자 스페인의 경제력은 급속히 추락해 결국 1575년 두 번째 파산이 발생했다. 게릴라전에 능한 네덜란드인들은 잉글랜드 왕국·프랑스 왕국의 협력까지 얻어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88년 스페인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해적에 패배하면서 세 번째 파산과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스페인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후 잉글랜드, 네덜란드를 비롯해 신생 모직공업의 강자들의 등장으로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스페인 본토 경제의 붕괴조짐이 보였다.
4.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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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의 치세와 죽음(1598년) 이후로 위그노 전쟁, 30년전쟁(1618~1648) 등과 같은 유럽에서의 분쟁에 계속해서 간섭하면서 식민지의 영토와 대서양을 횡단하는 상선들이 계속해서 영국이나 네덜란드에게 약탈당한 탓에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펠리페 2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총신)들에게만 정치를 맡겨 국정은 파탄에 이른다.[6] 그중에서도 몇 없던 능력있고 출중한 관료들의 개혁 시도는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펠리페 3, 4세의 무리한 중앙집권화 시도는 결국 포르투갈이 브라간사 가문을 왕가로 추대, 독립을 선언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여기에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나폴리 왕국의 독립시도가 겹쳤고, 또한 당시는 30년전쟁의 한복판이었으므로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 왕국이 포르투갈을 지원하고 나섰다. 1643년의 로크로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의 영광도 완전히 저물기 시작했고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후 이베리아 연합은 실질적으로 붕괴하였다. 포르투갈과의 전쟁은 6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이미 스페인의 황금기는 막을 내린 뒤였다. 결국 포르투갈이 독립하면서 이베리아 연합은 해체됐고,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세우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다."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느님에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風土)를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들어주었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암흑기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우화.
17세기 중후반에는 국왕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카를로스 2세는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에서 보기 드물게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전 군주들은 총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귀족 과두제에 가까워진 스페인 왕국을 왕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고위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를 적대시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카를로스 2세의 치세는 실패로 끝났다. 거기에다 그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자손조차 남기기 못고 사망했다. 이로써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이후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넘어가지만 유럽의 두 거대 파워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이 탄생하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 각 국가는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일어났다.
5. 특징
5.1. 가톨릭 이데올로기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가톨릭 신앙의 강조이다. 이에 따라 개신교도와 유대인 및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사실상의 스페인 왕국 성립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에 두드러졌다. 따라서 세간에서 중근세의 종교적 광신을 언급하는 데 스페인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스페인 종교재판같은 유머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스페인 내에서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미서전쟁 등을 계기로 추락하는 자국의 위상과 유럽 세계의 근대화를 목도한 지식인으로부터 몰락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톨릭에 대한 광신에 찬' 압스부르고 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일례로 1948년에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España en su historia[7] 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가톨릭 신앙 강조는 펠리페 2세의 개인 성격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정체성이 가톨릭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 진 나라이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나라로 통일 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이 다른건 물론이오, 당장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8] . 당장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플랑드르,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재위 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란 나라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체로서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으며,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역사적 문맥에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보다 50년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시스네로스 추기경 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 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9] , 알칼라 대학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10] 스페인의 리더십을 따른 건 신앙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 또한 크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 중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은 스페인 외의 가톨릭 국가에도, 그리고 개신교 국가에서도 똑같았다.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개인들'의 신앙을 쇄신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를 쇄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상이였고, 타 종파는 묵인될 수 있을지언정 관용되지는 않았다[11] . 이 점은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같았다. 종교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네덜란드, 베네치아, 독일의 자유시처럼 흔히 '종교적 관용'의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 역시도 대동소이했는데, 네덜란드의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묵인되는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묵인이였을 뿐이지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의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건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이 금지에서 풀린건 1853년부터이다. 30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나 작센 선제후국처럼 동시대에 종교적 여건과 분리된 실리 추구 정책을 폈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처럼 종교적 관용이 그 특징인 동시대의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유럽 세계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들로, 스페인과 비교하기엔 어렵다. 개신교권의 스코틀랜드, 스웨덴, 가톨릭권의 남부 독일 등 스페인 욕할 처지가 못되는 지역은 넘쳐난다.
그리고 현대적 가치관에서 위의 국가들은 관용과 다양성의 긍정적 선례로 평가받지만, 전성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가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코사크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국력의 막대한 부분을 손실했다 [12] .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관용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되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경제적 이유로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된 것이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고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반가톨릭/반유대인 폭동은 빵값 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터졌다.
게다가 종교 개혁의 시대 당시 가톨릭 세력의 반격의 핵심이 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성직자의 교구 참석, 면벌부 판매 문제, 사제 교육의 문제 등 많은 규항 자체가 공의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키배를 벌여 규정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페인의 이단심문 희생자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곤 했는데, 이를테면 지금도 돌아다니는 "스페인 이단심문에 40만이 희생되어..." 라는 레파토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이 당대 타 유럽국가들보다 더욱 광신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스페인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154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5.1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였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13]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 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마녀재판에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으나 타 국가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라 하긴 힘들었고, 마녀재판에는 회의적이였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가장 끔찍하게 마녀를 사냥하던 지역 중 하나이다. 그리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강조하자면, 피터 마샬은 영국의 역사학자다.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피터 마샬(Peter Marshall)[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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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에서 보듯, AD 1540-1700의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826명의 사망자가[16] 유대교, 이슬람교, 루터교, 비공인 영적계시[17] , 이단은 아니지만 교회의 정식 가르침에 반하는 종교적 의견(propositon), 중혼(bigamy), 교사죄(Solicitation), 미신(Superstition) 등을 합쳐서 발생했을 뿐이다. 해당 항목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proposición은 엄밀하게 따지면 개신교나 이슬람, 유대교 같은 다른 종교, 이단과의 연결점은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쨋든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는 신앙관을 마음대로 설파했던 행위를 말한다. 이 시대 종교재판소 판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편인 가장 전형적인 예로선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가볍게 혼외정사하는건 중죄가 아니다', '뱃사람이 해외에 나가 있는데 현지처 좀 만들고 할수있다' 같은 주로 성, 가정 윤리를 다룬 내용이다.
그리고 종교재판소는 현대의 형사법 체계처럼 자체적으로 죄인을 찾아 기소하는게 아니라, 순회 재판소로서 타인의 밀고나 인근 일대 마을 사람들 모아둔 공공장소에서 가벼운 처벌, 용서를 약속한 댓가로 이루어지는 자백이 있어야만 성립했다. 원래 종교재판소의 기원이 된 유대교, 무슬림 출신 가짜 개종자 탄압은[18] 해당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몇몇 시기에만 국한되고, 나머지 희생자 대부분은 이렇게 자체 분류가 안된 '비공식 이단 (informal heresy)'에 속했다는걸 보면 종교재판소의 역할이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은 현대 국가의 정치경찰 같은 무시무시한 세뇌와 공포정치의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들끼리 서로 지역 사회의 이권이나 다툼이 생겼을때 꼬투리 잡아 밀고하는 민사재판소에 더 가까웠다는걸 보여준다. 물론 원래 종교재판소 설치와 확대를 추구한 가톨릭 공동왕, 황제 카를로스,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중구난방의 주술적, 미신적 종교행위를 없에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공식 신앙관과 예법을 강제할 기관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목적, 교권을 통한 왕권 강화적 의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종교재판관들이 왕실과 세속 정부에 그리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도 않았고,[19] 무엇보다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일반적인 스페인 마을사람들은 평생 한두번 볼까말까한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리고 종교재판소가 상징하던 당시 스페인의 국가가톨릭주의적 이념을 현대의 관점에서 '낙후된 중세의 유물' 쯤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종교재판소란 기관 자체가 상당히 '근대적'이었다. 유럽에서 거의 최초로 고문의 강도와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횟수[20] , 취조 방식과 상황에 따른 증언의 진실성, 소속 감옥의 위생과 청결 같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죄수 인권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한 법정 체계가 당시 스페인 종교재판소이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의 법대 나온 전문 관료 집단(letrado)이 대거 참여했던 조직적 성격을 반영하여 매우 체계적이고 자세한 문서화된 기록 체계를 남겨 지금까지도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의 사회상, 종교문화, 정치와 교회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 컬렉션을 남기기도 했다. 근본적인 목적이 그릇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다 때려 죽이자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정통 신앙관을 주입하여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하는 사목적 기관이었던 만큼, 여전히 교화보다 그냥 처벌을 중요시하며 극형을 종종 내리던 당대의 세속 재판소와 달리 어느정도 교화와 죄수 인권에 신경썼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면도 있었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정신나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린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뿐만 아니라 사실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와 관련된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 졌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특별한 케이스 몇몇을 유럽 전반에 대입하면 곤란하다. 되려 이 종교적 관용의 가장 큰 사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17세기 초반 이후 중앙에서 포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중앙 권력 자체가 없으니) 사회적인 차원에서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한 차별이 만연해 졌고, 시기스문드 3세의 치세 때는 이러한 중앙 권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철회해야 됐다. 유럽 전체의 정치적인 구조 자체가 중세적 느슨함에서 근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전환하던 전근대 시기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큰 여건을 거스르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교 분리란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스페인은 종교에 비관용적이었지만, 유럽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비관용적이였다는 편견은 부당하다.
5.2. 왕가의 근친혼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이 특징이었는데 근친혼이 성행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는 상대적으로 근친혼이 덜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비해 주걱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울러 수십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출현했으며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 만에 단절되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이런 혼인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게 '''오히려 근친상간으로 인한 왕실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가 됐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콩가루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가중되었다. 현대에도 합스부르크의 피가 섞인 왕가에서는 주걱턱인 사람이 많다.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스페인의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21] 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할 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주걱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안 그래도 주걱턱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근친상간을 반복하면서, 후손들에게 더욱 심한 주걱턱과 유전병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다. 게다가 카를로스 2세는 생김새도 흉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22]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대는 카를로스 2세에서 끊기게 된다. 근친혼의 극치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여러 가지 의미로) 낳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5.3. 지방 통치
지방 통치에 있어서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은 후대 왕조인 보르본 왕조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일례로 당시 스페인 왕국은 카탈루냐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줬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이 단절되고 프랑스계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자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보르본 가문의 통치가 시작된 해다. 이 말은 역으로 그전 압스부르고 왕조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비단 카탈루냐 뿐만 아니라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획득한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왕국 같은 이탈리아의 속주들과, 프랑슈콩테 같은 구 부르고뉴 공국 시절 상속한 땅들도 거의 대부분 광범위한 지역 자체가 기본적인 통치의 기조였다.
당장 왕실에게 집중적으로 착취당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의 기반이 되었던 카스티야도 1520년 왕실 자체의 정통성을 위협했던 코뮤네로 반란[23] 에 카스티야 삼부회 (cortes generales)에서 투표권을 가진 국왕 직할 자치도시 18개 중 14개가 참여했던 규모에도 불구하고[24] 주동자 몇몇만 극형에 처하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삼부회 정규 제도화 밑 조세 감찰권 강화, 지역민 자치 같은 반란군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할만큼 유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