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 칸

 


'''원 추존 황제'''
'''太宗 | 태종'''
'''몽골 제국 제2대 대칸'''
'''ᠥᠭᠡᠳᠡᠢ ᠬᠠᠭᠠᠨ | 오고타이 칸'''
{{{#!wiki style="margin: -5px -10px"[image]
'''묘호'''
'''태종(太宗)'''
'''시호'''
영문황제(英文皇帝)
'''칸호'''[1]
오고타이 칸
窩闊台汗(와활태한)
ᠥᠭᠡᠳᠡᠢ ᠬᠠᠭᠠᠨ
''''''
보르지긴(Боржигин)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
오고타이(Өгэдэй)
窩闊台(와활태)
ᠥᠭᠡᠳᠡᠢ
'''생몰 기간'''
1186년 ~ 1241년 12월 11일 (55세)
'''재위 기간'''
1229년 9월 13일 ~ 1241년 12월 11일[2] (12년)
1. 소개
2. 이름 표기
3. 생애
3.1. 내치에서의 실패
4. 기타
5. 가계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몽골 제국 제2대 대.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영문황제(英文皇帝). 휘는 오고타이(窩闊台).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

2. 이름 표기


오고타이 칸의 이름 표기에 대해서는 '''특정 언어의 말소리를 다른 언어의 표기로 옮길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작용해서, 그 결과 이름이 문헌에 따라 표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몽골어 /Ө/를 'ㅗ', 또는 'ㅜ'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3]
원래 한국에서는 ''''오고타이''''라는 표기가 더 많이 쓰였고 오늘날 관련 서적 등에서도 이 표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로는 그나마 원래 발음에 가장 가까운 '우구데이'로 수정되어 가는 추세다. 2010년대 이후 발간된 관련 서적에서는 '우구데이'로 표기되어 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단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여전히 오고타이로 표기하고 있기에, 표준국어사전이 수정되기 전까지는 본문에선 오고타이라고 표기한다.

3. 생애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을 계승해서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서쪽 끝[4]과 남쪽 끝에 도달했다. 물론 중국, 이란, 중앙 아시아도 박살내고 다녔다. 원나라가 건국된 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반면 을 매우 좋아해서 건강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술 좋아하는 것도 내력인지 그의 아들 중에서 술 때문에 아비보다 일찍 죽은 자식도 있었다. 한 투르크인이 무슬림을 싫어하여 꿈에서 칭기즈 칸이 나타나 무슬림을 다 죽이라고 명했다고 오고타이에게 얘기했는데 오고타이는 그에게 '''우리 아빠는 몽골어밖에 못 하는데[5] 너한테 어떻게 얘기하니?'''라는 말로 침묵시켰고, 후에 중국인들이 인형극을 가지고 무슬림을 까려고 하자 '''무슬림 중에 중국인 노예 데리고 있는 애들은 있어도 중국인 중에 무슬림 노예가 있는 애들은 없더라. 그러니까 작작 좀 하지?'''[6]라는 말로 침묵시켰다. 하지만 버로우시킬 뿐 죽인 인물은 없었다.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는 중앙아시아보다는 중국 정벌에 힘쓴 시대이니만큼 중국인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무슬림들을 끌어들여야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볼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다른 몽골족 지도자들보다 온화한 건 사실이다.
보통은 칭기즈 칸이 셋째인 오고타이를 칸으로 임명하자 다 따랐다고 하지만 원조비사에서는 주치의 핏줄이 문제가 돼서 둘째인 차가타이와 대립하게 되자 그나마 조정자가 될 수 있는 셋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한다.[7] 칭기즈 칸은 1227년서하 원정 중 사망했고, 칭기즈 칸의 첫째 아들 주치는 그전에 죽었다. 칭기즈 칸 사후 2년간 막내 동생이 섭정을 했지만 1229년 쿠릴타이에서 대칸에 올랐다. 둘째 형 차가타이는 오고타이 칸을 지지했다.
말자 상속제 때문에 주치와 차가타이에게는 승계권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김호동, “칭기스 칸의 자제분봉(子弟分封)에 대한 재검토 -『집사(集史)』〈천호일람(千戶一覽)〉의 분석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9(2004)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오고타이 칸 시절 중요한 전장 중에 한 곳은 중동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이 자근자근 밟아놨던 호라즘 왕조의 왕자 잘랄 웃 딘이 중동 지역에 돌아와 깽판을 치고 다니자 오고타이 칸은 몽골군을 보내 중동 지역을 공략하게 한다. 이 군세는 잘랄 웃 딘을 쓸어내고 캅카스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든다.
1230년 무렵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 전선에 집중한다. 산서성에서 툴루이와 합동작전으로 금군의 주력을 쓸어버린 뒤[8] 금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포위한다.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자 오고타이 칸은 전선을 떠났고 이후 몽골군은 남송의 지원을 받아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켰다.[9] 이후 남송이 개기자 1235년부터 남송을 침공하여 이후 40여 년에 걸쳐져 벌어질 남송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요동 지방의 거란족 반란군들을 진압하던 와중에 불똥이 튀어 1231년 고려를 침공한다(여몽전쟁 참조).
남송과의 전쟁이 막 시작되는 무렵인 1236년 유럽 쪽에도 바투가 이끄는 원정군을 보냈다. 캅카스 지역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강타한 바투의 원정군은 동유럽에 나타났다. 1241년 헝가리와 폴란드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에게 남은 유럽 지역을 정복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빈 앞까지 진출했으나 오고타이가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되돌아갔다. 몽골의 전통에는 황제가 죽으면 황족이 모두 모여 그 다음 후계자를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였다. [10]유럽 입장에선 그야말로 '''유럽의 구원자'''인 셈. 폴란드와 헝가리 다음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인도 방면에도 군대를 보냈지만 일부 지역을 속국으로 두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1]

3.1. 내치에서의 실패


내치의 경우는 역참제를 시행하고 아버지 칭기스 칸이 기용했던 색목인 '마흐무드 얄라바치'[12]와 그의 아들 '마수드 벡'[13]을 기용하는 등 그럭저럭 해냈으나 실책을 범한 부분도 일부 있었다. 야율초재는 북중국 지역에 사는 한인(漢人)들의 호수(戶數)와 인구의 수를 조사한 후, 그에 합당한 법령을 세우고 세금을 거두라고 조언을 했고 그에 따라 '''한지세법(漢地稅法)'''이 생겨났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이후 그 조사한 호수와 인구를 토대로 종실과 부마, 공신들에게 북중국 대부분을 봉토로 주고 말았다.[14] 야율초재는 깜짝 놀라서 말렸지만 오고타이는 듣지 않았다. 야율초재의 기대대로 하북 지역에서는 정해진 호수와 정해진 조세 법률로 인해 막대한 재화가 흘러 나왔지만 봉토를 하사받은 종친들과 공신들의 후손, 그리고 한인 군벌들이 그 세금을 '합법적으로' 중간에서 가로채기 시작했고 이는 제국의 재정상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
또한 상인인 유정옥(劉丁玉), 세라흐, 우딘, 유쿠투마(劉忽都馬) 등이 제국의 조세 방식을 불평하며[15] 상인들이 정해진 세금을 조세를 거두는 날보다 미리 내는 대신, 미리 내면서 발생하는 손실금을 그 달 거두어 들이는 조세에서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른바 ''''조세에서의 매박(買撲)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야율초재는 '세금을 미리 내나 정해진 때 내나 제국엔 변화가 없고 반드시 내야할 금액의 세금을 미리 내고 조세를 더 거두어 들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라며 말렸다. 이때는 오고타이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 통치 11년이 되던 해에 이슬람 상인이자 징세를 담당했던 '압둘 라흐만'이라는 자가 당시 몽골 제국에서 책정한 세금보다 훨씬 많은 양인 110만 석의 세금을 미리 내고 그 대가로 조세에서 세금의 2배로 보상 받겠다고 제안하자[16] 오고타이는 솔깃해(...) 그 말을 따랐다.[17]
위의 두 가지 정책으로 인해 제국의 대다수 상인들은 세금을 미리 낸 뒤[18]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기 시작했고 종친과 공신들에게 무지막지한 양의 봉토를 내려준 탓에 '''종친과 공신의 후손들은 상인들과 손을 잡고''' 어마어마하게 돈을 긁어모은 것으로도 모자라, 포은세(包銀稅)를 제정해[19][20] 백성들에게 강제로 고리대를 안겨 더 큰 불법적인 이익을 얻어냈다.[21]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제국 말기까지 이어져 몽골인들이 세운 제국의 수명을 크게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기타


《칭기즈 칸 유럽을 깨우다》의 저자 잭 웨더포드는 오고타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의 술주정뱅이적인 면을 더 강조했다.
원조비사의 마지막은 오고타이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는데 자신이 잘한 것으로 군사 활동과 역참을 놓은 것, 물이 부족한 곳에 우물을 판 일등을 꼽고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술에 빠진 것'''[22] 등을 언급했다.
야율초재의 명언은 이 오고타이와의 대화 중 나온 거라고 한다.
몽골 울란바토르수흐바타르 광장에서는 칭기즈 칸, 쿠빌라이 칸과 함께 동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5. 가계


  • 정궁황후(正宮皇后) : 패랄합진 대황후(孛剌合眞 大皇后)
    • 5남: 합실 대왕(合失 大王)
  • 황후(皇后): 앙회 2황후(昻恢 二皇后)
  • 황후(皇后): 홀첩니 3황후 걸리길사씨(忽帖尼 三皇后 乞里吉思氏)
    • 차남: 활단 태자(闊端 太子)
  • 황후(皇后): 불명
  • 황후(皇后): 불명
  • 황비(皇妃): 토랍기나 비자(土拉起那 妃子)
  • 황후(皇后): 소자황후 내마진씨(昭慈皇后 乃馬眞氏)
    • 장남: 정종 귀유(定宗 貴由), 몽골 제국의 3대 대칸
  • 황비(皇妃): 업리길납 비자(業里吉納 妃子)
    • 7남: 멸리 대왕(滅里 大王)
  • 황비(皇妃): 불명
    • 3남: 활출 태자(闊出 太子)
    • 4남: 찹랄찰아 왕(哈剌察兒 王)
    • 6남: 합단 대왕(合丹 大王)
    • 장녀: 노국공주 사아합한(魯國公主 唆兒哈罕), 납합(納合)에게 하가(下嫁)

6. 대중매체에서


[image]
[image]
'''징기스칸 4 일러스트'''
'''파워업키트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 시나리오 1에선 얼굴도 좀 순딩이[23]에 능력도 정치력이 높긴 하지만(정치 88, 전투 64, 지모 69)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대칸이 될 남자치곤 좀 심심했는데 파워 업키트에 추가된 시나리오 3(늑대들의 포효)에선 대칸으로 시작해서 얼굴부터 상당히 간지나게 변한 데다가 능력치도 올라가서(정치 88, 전투 71, 지모 76) 과연 2대 칸다운 위엄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시나리오 3에선 몽골제국이 이미 시작부터 최강이라서 도시 하나를 의학의 도시로 만들고[24] 오고타이를 넣은 뒤, 초기 장수들을 잘 활용하면 1대에 유라시아를 통일할 수 있다. 능력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정치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게임에서는 도시의 영주 및 수도에서 왕비와 함께 자식 농사용으로 쓰게 된다.
아버지 칭기즈 칸이 다 커서도 그 자신의 어머니이자 오고타이의 할머니인 호에룬에게 벌벌 떤 것처럼 오고타이도 자신의 형인 차가타이를 두려워해서 취중에도 그가 나타나면 두려워했다고 한다. 대칸이니 성질 더러운 귀위크 같았으면 무슨 술수를 썼을 테지만 오고타이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차가타이가 자신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벌을 받으려 하자 형제끼리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고 차가타이를 달랬다. 근데 차가타이는 기어코 스스로 벌을 받았지만...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2.4 기마 군주 DLC 이전에는 부모 및 다른 형제들과 함께 구현되어 있긴 했으나 중국과 외몽골 지역이 구현되지 않은 탓인지 칭기즈 칸 사후로 연도를 돌려 보면 차가타이가 다스리는 히바 왕국의 가신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기마 군주 DLC에서 카라코룸이나 돈황까지 맵이 확장됨에 따라, 이후로는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구현됐고 옥룡 DLC부터는 1234~1241년에 원나라 황제로 중국에 있다.[25]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13세기 몽골을 배경으로 한 슈토헬은 마지막 권 말미에 칭기즈 칸의 막내인 톨루이가 2년 동안 왕좌를 맡고 있다가 자신의 등에 새겨진 "서하의 노예"라는 글자를 노출하고 '''둘째 형'''에게 왕위를 양도했다는 간략한 언급으로만 나온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톨루이는 실제 역사의 톨루이가 아니라 이 녀석.

7. 둘러보기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임시 예종 툴루이 칸

'''2대 태종 오고타이 칸'''

3대 정종 구유크 칸
'''우구데이 칸국의 역대 칸'''
신규 책봉

'''초대 오고타이 칸'''

2대 귀위크 칸
[image]
언어별 표기
한국어
오고타이 칸
중국어
窩闊台汗
일본어
オゴデイ・カン
몽골어
ᠥᠭᠡᠳᠡᠶ ᠬᠠᠭᠠᠨ
Өгэдэй хаан
영어
Ögedei Khan
[1] 몽골식 군주 칭호[2] 칭기즈 칸은 1227년 사망했는데 즉위년이 1229년인 것은 이 2년 동안 동생 툴루이가 섭정했기 때문이다.[3] 몽골어 /Ө/는 중설 원순 중모음인데 독일어나 터키어의 전설 원순 중모음인 /ö/보다 훨씬 뒤쪽에서 발음된다. 한국어의 /ㅜ/보다 입을 좀더 벌리되 그렇다고 /ㅗ/처럼 뒷쪽에서 발음하지는 않는 소리.[4] 바투의 유럽 원정[5] 참고로, 당시 몽골 땅의 귀족이면 튀르크어는 기본이었다.[6] 노예로 안 부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아예 인간 취급을 안 해줬다는 그런 얘기다.[7]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이기는 했으나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불발된다. 차가타이는 성정이 격하고 주치와의 대립이 심했기에 칭기즈 칸은 아예 후계자 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온화한 오고타이가 후계자가 된다.[8] 이때 금나라의 마지막 명장 중 하나인 완안진화상이 충효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몽골군에 대항했다. 완안진화상은 처음에 도회곡이라는 곳에서 몽골군을 대파하는 등 맹위를 떨쳤으나 결국 툴루이의 계략에 말려서 한 곳으로 몰려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나 참패하고 몽골군에 자진 출두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당당했고 투항을 거부했다. 비록 투항을 거부했으나 그의 당당한 태도에 몽골 장수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완안진화상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전황을 뒤집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미 오랜 전쟁으로 금나라의 정예 전력인 기병 전력이 모두 소진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병 전력을 충원해줄 만주를 상실했기 때문에 한번 소진되면 다시는 복구가 불가능했다. 결국 완안진화상의 충효군은 보병 위주였고 이들 만으로는 야전에서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9] 금나라가 망하고도 곽하마라는 장군이 저항했다고 한다. 곽하마는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결국 힘이 다하자 스스로 불에 들어가서 분사한다. 곽하마는 활을 매우 잘 쐈다고 하며 서하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백 발의 화살을 쏴 적을 맞혀 몽골군 장군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10] 바투와 그의 부관들은 유럽원정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수부타이는 바투에게 다소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까지 귀환을 원했고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귀환을 선택했다고 한다. 대신 타협책으로 귀환길을 발칸반도를 경유하는 길로 잡아 약탈전을 계속 수행했다. [11] 이미 대제국이었던 몽고의 입장엣에서 큰 성공이 아니라는 뜻이며, 속국으로 두게 된 지역은 라호르 일대의 소국들로 합치면 10만제곱키로가 넘는 현 대한민국 영토에 비등한 지역을 속국으로 둘 수 있었다.[12] 무슬림으로서 트랜스옥사니아 지역 최초의 몽골 총독(다루가치)이었다.[13] 훗날 차카타이 칸국의 카이두와 킵차크 칸국의 만그 티무르가 상호 협정을 맺었을 때 사마르칸트와 같은 정주민들이 많은 도시의 행정권을 넘겨받기도 했다.[14] 칭기스 칸의 숙부가 되는 다리타이의 후손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칭기스칸에게 돌아와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영해주(寧海州)의 봉토 10,000호, 칭기스 칸의 장자인 주치의 자손에게는 평양(平陽)의 40,000호, 칭기스 칸의 영애이자 오고타이의 누이인 조국공주(趙國公州) 에게는 고당주(高唐州)의 20,000호, 칭기스 칸의 부마인 테무다이에게는 자주(磁州)의 10,000호, 공신인 무칼리의 후손들에겐 동평로(東平路)의 40,000호를 하사하는 등 그냥 땅을 마구잡이로 퍼줬다. 심지어 이 각주 속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15]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을 현지에서 판매해야 하는데, 조세를 내기 위해 별도로 이동해야 하니 많은 불편함이 발생하는데다 조세를 거두는 때와 상단이 도착하는 시기가 잘 맞지 않아 형평성이 없다는 내용이다.[16] 이 제안은 들을 땐 그럴싸해 보이지만 어차피 2배를 뜯어가는 거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1도 도움이 안되는 얘기다.[17] 압둘 라흐만은 훗날 귀위크 칸이 즉위했을 때 처형 당했다.[18] 당시엔 유럽의 길드처럼 상인들의 모임인 '오르톡(Ortoq)'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이 집단 자체가 조세 매박에 동참했다.[19] 말 그대로 각 호(戶)마다 강제로 일정량의 은을 반드시 납부하는 제도로, 이율을 따질 수도 은을 대체할 품목을 낼 수도 없었기에 은을 구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상인들, 즉 오르톡에서 반강제적으로 융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20] 한지세법으로 인해 하북의 백성들은 이미 장정수 혹은 토지 면적에 따라 곡물을 세금으로 내고 있었다. 거기에 강제로 은까지 내라고 한 탓에 백성들의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21] 이 포은세로 인해 약 30년 동안 하북의 은이 몽골인 관료들의 주머니와 무슬림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서방으로 대거 흘러 들어갔다. 후일 쿠빌라이는 은 대신에 교초(交鈔)라 불리는 지폐를 받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도 자체가 바뀐 건 아닌지라 상인들은 은 대신 교초를 융자해 주면서 이익이란 이익은 다 챙겼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매박 상단이 원나라의 교초를 불법으로 유통하는 장면이 바로 이 제도를 악용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22] 이러한 오고타이의 알콜 중독 성향을 경계하기 위해 차가타이가 매일 1잔만 마실 것을 권하자(사실상 강요) 엄청난 크기의 술잔을 만들어 1잔만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들유들한 오고타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재밌게도 주당인 인물들이 술잔을 늘렸다는 일화는 한국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세종 시기의 윤회, 성종 시기의 손순효, 선조 시기의 정철 등이 있다.[23] '발에 채이는 클론 장수 1'처럼 생겼으나 게임 폴더에 포함된 이미지 파일을 확인하면 고유 얼굴이다. 파워업키트라면 PK 오고타이 얼굴로 에딧 없이 바꿀 수 있다.[24] 사마르칸트는 초기 의학, 학술 수치가 57,42라 의학+학술의 도시로 만들기 쉽다. 임안도 초기 의학이 51이라 의학 도시로 만들 수 있지만 바다 때문에 건설 공간이 부족해서 교역도 같이 해야 한다. [25] 게임에선 남송이 없어서 금나라 다음은 곧바로 원나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