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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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전라도 낙안 출신으로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구 안동 김씨. 시류를 잘 읽는 반정공신, 유능한 군사 관료, 실패한 지휘관, 차기 군왕이 경계한 권신, 청나라와 결탁한 역적까지 일생에 걸쳐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암기에 능하였다고 한다. 음서로 조정에 나아갔다가 폐모론에 반대해 쫓겨난 이후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반정공신으로 녹훈되어 중직을 역임했다. 과거에 급제한 적은 없었으나 실무 관료로 군사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어영청(御營廳)을 육성함으로써 광해군의 난정과 이괄의 난으로 무너진 조선의 군사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배에 일부 영향을 주었으며 전후에는 인조의 최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렸는데 효종에게 숙청당할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에 조선을 고발하고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 인조반정의 공신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했으며 글재주로 이름높았다고 한다. 음서로 처음 관직에 올라 광해군 때에는 병조좌랑(兵曺座廊)에 이르렀다. 보통 음서직은 지방 수령이나 돌다가 그만두는게 대부분으로 나름 요직에 해당하는 정5품 병조좌랑에 오른다는 것은 왕의 총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광해군 때는 동인의 분파인 북인의 시대로 서인인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의 당여들은 요직에 앉기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광해군 때 실세였던 김상궁(김개시)에게 뇌물을 많이 준 덕으로 분석하는 견해도 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면서 정국이 갑작스레 혼란해지자 서인 소속 당여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홍제원(弘濟院)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홍제원 밖 세검정에서 이귀, 김류, 이괄 등이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합류하여 홍제원을 치고 궁궐로 진격해 광해군과 대북파 일파를 모두 제거한 뒤 인조를 추대하고 반정을 성공시킨다. 반정 성공 후 1등공신에 책봉되어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반정 후 이귀, 김류 등의 권력 장악을 도와 그가 주로 인사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인 출신 이원익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천하고 일부 직책을 남인에게도 주게 하여 남인 일파 역시 끌어들이고 이조와 병조에는 서인을 배치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귀의 서녀가 김상궁의 총애를 받는 무수리였는데 김자점은 여기까지 손을 뻗쳤는데 한마디로 정세 판단이 약삭빠르고 운도 따랐던 인물이었다. 반정의 실질적 행동대장은 이괄이었지만 이괄도 김류, 이귀 등과 등을 지는 바람에 2등공신에서 끝날 정도로 막무가내였던 반면 김자점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있었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환도하자 김자점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 등 40여 명을 제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기자헌 등 감옥에 갇힌 북인 40명이 즉시 처형당했고 대북파와 소북파의 중진 30명 이상이 곤장을 맞다가 장살(醬殺)되었다.
3. 출세한 군사전문가
공신인 데다 실세들과 사이도 꽤 원만하여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순검사나 한성 판윤 같은 직책을 역임할 때 특유의 급하고 다혈질인 성격을 조정은 과단성 있고 강직하며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인조는 그다지 김자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조가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려고 하자, 김자점은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이 역적인데 어찌 윤의립의 딸을 들이겠느냐며 반대했다.[2] 결국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기를 포기했지만 김자점을 괘씸히 여겨 귀양보냈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다시 등용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적어도 1627년에 김자점은 특진관이자 어영대장으로서 어영청에서 어영군을 훈련시켰다. 즉, 자타공인 훈련도감 다음가는 조선 No.2 정예군이자 병자호란에서 활약하는 어영군은 김자점이 직접 선발하고 훈련시킨 병력이었던 셈.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어전회의에 이귀가 "평산, 개성부(開城府)의 백성들이 장차 살육을 당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인조에게 묻자 김자점이 그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이 어떻느냐고 진언을 올렸다. 인조는 "강화도로 데려왔다가는 장차 굶어 죽게 될 것이다." 하면서 오늘날의 급선무는 강에 있는 선박을 수습하여 경창의 쌀을 운송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순검사(巡檢事) 겸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제수되었고 1628년 숭정대부(종1품)로 승진했다. 1630년 한성부 판윤, 이후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와 겸 구관청 당상(句管廳堂上)이 되었다.
이 무렵 김자점은 조총 관련 군수물자 확보를 건의하고, 요역이 제대로 면제되지 않아 군사들이 견디지 못한다며 낱낱이 신칙하자고 건의했다. 1631년 김자점은 강화도의 성지와 군량을 구관하는 직임을 맡았는데, 백성의 생활이 한창 곤궁하고 또 저축된 것이 없어서 (강화도에 옮갈 백성들) 10만여 명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며 여러 대책을 주장했다. 나주, 영광 등 고을을 강화도에 소속하여 등주, 동래와 통상하고 제주에서 채취한 미역과 각도의 어염세를 본총에 소속시키고 삼명일의 방물을 면포로 바꾸어 배 만드는 자본으로 삼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강화도 수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말한 것이다. 이중에 미역과 어염세는 인조가 다시 의논하라고 했다. 김자점은 명나라의 가도(椵島), 등주(登州) 및 내주(萊州)와 통상(通商)한 다음에야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인조는 명나라가 길을 통하지 않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박했다.
김자점은 이때 (강화도의) 목장 등을 모두 둔전으로 개간하여 경작하면 틀림없이 곡식을 많이 얻으리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말을 먹여 기르는 지역에 쉽게 경작을 허락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3] 김자점은 당장 백성 10만을 먹여 살릴 의무를 맡았으므로 개간을, 인조는 전쟁터에서 중요하게 쓰일 기병 때문에 현상 유지를 주장한 것이다. 당시 김자점은 강화도에 곡식 10만 석을 들이고자 영리를 다투어 시상과 어민이 생업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는 김자점이 강화도에 군량을 비축하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다. 인조 10년(1632)에는 산릉의 큰 역사로 백성들이 궁핍하다며 자신이 담당한 구관청의 포와 미를 내어 민력을 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또 김자점은 상방에 있으면서 여러 기물들을 정밀하게 다듬었다.
1633년 조선군 도원수(지금의 육참총장 정도) 자리에 올라 서북방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도원수 재직 중 한성부와 경기도 주변 지역에 성곽과 진, 보를 보수하였다. 과도한 격무에 시달린 김자점은 1633년 7월 상의원제조직과 구관청당상의 겸임에서 해임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조 16년(1636) 청나라 병력이 움직이려 한다는 보고에 따라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로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 작업을 하였다.
1635년에는 김자점이 몸소 돌을 져 날라 몇 개월 만에 백마산성을 수축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느 정도 가감할 필요야 있겠지만. 또한 1635년에 이르면 김자점이 의주에 설치한 둔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의주의 둔전은 1634년에 6둔이지만 35년에는 12둔이 되었고 소출 2300석을 내었다. 지난해에는 2만 석이었는데 올해는 배가 되어 3, 4만 석을 수확할 수 있었고, 의주의 둔곡의 두해의 소출이 4만 5천 석에 쓰고 남은 게 3만 6천 석이라는 것도 있다. 김자점은 의주를 포기하잔 주장에도 반대하고, 백마산성을 지켜 초입의 저지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사와는 달리 임경업과도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믿고 맡기기도 했다.
4. 병자호란
'''병자호란'''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청군의 급속한 남하를 강건너 불 구경하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고 욕을 거하게 얻어먹는다. 나만갑의 병자록과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용골산의 봉화보고에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것과 제대로 근왕하여 돕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자점은 도원수가 되어 봉화체계를 정비하였는데 한명기 교수는 '병자록' 등을 보면 김자점은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를 제때 서울로 전달하지 않았고 겨울철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판단에 기초해 청군의 움직임을 간과했다고 언급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산성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청군이 침공한 지 6일 후에야 도원수 김자점이 위세가 급한 줄 알았다는 말이다.김자점이 도원수가 되어 말하기를, "도적(徒敵)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하였다. 혹 도적이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화를 낼 뿐, 성(城)을 지킬 군사를 조금도 더하지 않았다.
"의주 저편 용골산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나리라" 하여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황해도 봉산)까지만 (봉화 불빛이) 오도록 하였다.
납월(병자년 음력 12월) 초6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올렸으나, 자점이 말하였다.
"필시 사신을 맞이하는 불이다. 어찌 도적이 올 리 있으리오."
초 9일에 비로서 군관 신용을 의주로 보내에 적병을 탐지하였다. 신용이 순안(평양 서쪽)에 이르러 보니 적병이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달려와서 보고하자 자점이 크게 노하여 신용을 베려고 했는데,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서 경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 같이 하고 번신(藩臣)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가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승정원일기를 집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게 되기 전에 나온 낡은 학설들로[4] 후일 역적이 된 김자점에게 당시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기술에 불과하다. 2010년대에 병자호란 관련 연구를 한 구범진 교수는 의견이 전혀 다르다. 그는 '''청의 기록'''을 근거로 12월 8일에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했다고 본다. 거기다가 승정원일기에서도 최전방에 있는 임경업이 12월 9일에 보내어 12일에 접수된 서계가 청군을 발견했다는 첫 보고였다. 즉, 김자점이 주둔한 황주에서 12월 6일에 청군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개인기록에 불과한 산성일기와 연려실기술 모두 서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병자록은 김류 관련 기록도 그렇고 병자호란 관련해서 왜곡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직도 이런 기록을 베이스로 쓰는 사람이 많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기병의 앞에 선발대 몇 기를 보내 길잡이로 삼아 황주에 도착했다. 이들이 황주를 지나가자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했다. 조금 후에 마푸타의 300 본군이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따라오는 본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김자점은 인조가 하사한 상방검을 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참하겠다 어르며 눈앞에 있는 소부대에만 집중했다. 이완은 김응해와 함께 마푸타 군을 산골짜기로 유인하고 김자점 본군이 기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김자점에게 지휘책임을 묻는다면, 나만갑의 일방적인 왜곡에 기반한 봉화 운운이 아니라 동선역 전투를 들어야 한다. 이완 말대로 길목을 막아 후속부대를 차단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1천 기병이 황주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이완은 어제의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을 알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기습 작전을 실행하고 실패했다.
이후 황주 정방산성에 인조의 서신이 당도하자,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이때까지 김자점은 작계에 따라 동원령을 내려 정방산성을 5천 병력으로 지키는 중이었다. 적의 남하를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조선군과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없는 청 선봉대는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이에 남하한 선봉대는 몇 안 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악수를 두는 원인이 되었다.
청의 전략은 선봉대가 신속한 기동으로 적의 종심 깊숙히 침투해 조선 주력부대에 혼란을 주고, 후속 부대들이 각기 시간차를 두고 파고들어 어디가 주공이고 조공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하여 조선 조정의 상황판단 능력까지 흔드는 데 있었다. 이를 방지하려면 적의 선봉대를 최대한 잘라내야 했다.
여하튼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근왕을 지시하자 김자점은 더 이상 정방산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군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12월 23일 황주에 도착하였는데, 도르곤은 주변 주민들을 착생하여 김자점의 1만 5천(실제 5천)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르곤은 곧장 일부 병력을 떼어 추격하라 명했다.
김자점은 12월 24일 당시 토산에 영을 세우고 있었는데 도르곤과 호우거의 군대가 기습했다. 황해병사 이배원과 병사 이석달이 척후 없이 이동하다 급습당해 패퇴했고,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주산으로 급히 말을 몰았다. 이완 신도비명 등을 감안하면 일부 장교들은 수십 명씩 이끌고 산중턱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차 합류한 듯하다.
연려실기술이나 이완 신도비명에야 김자점이 도망가니 이완이 뒤에 남아 병사들을 수습해 저항했다고 하였고, 김자점을 제거한 효종은 지휘관이 무능한데 병사들이 다 했다고 비난했다. 근데 정작 병자호란 이후 기록을 보면 연려실기술에선 비겁하게 달아났다고 매도한 지휘관들(변사기, 정태화)을 잘 싸웠다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명길이 추천했다. 자, 그럼 김자점은 어떨까? 야사에서 달아났다는 지휘관들이 실제론 용감하게 싸웠는데 김자점은 야사 기록 그대로 혼자 산으로 달아났는가? 아니다, 그는 청군 기병에게 맞서는데 유리한 산 위로 올라가 직접 육성한 어영청 포수들을 동원해 저항하여 청나라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토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이에 2천 군사를 수습하여 남하를 개시하고 12월 30일 양평 미원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한다. 이후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양평에 도착한 직후에는 토산 전투의 피해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 강원도와 함경도의 병력이 합류해 병력은 기록에 따라 갈리긴 하나 거진 2만 가량으로 불어났지만, 청군이 병자호란에 동원한 병력이 (구범진 교수의 추산으로) 3만이 넘었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교전을 하는 도박을 벌일 순 없었다. 남도 근왕군과 연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남도 근왕군은 패하거나(쌍령), 피로스의 승리(광교산)에 머물러 끝내 김자점의 서북 근왕군과 연계하는 데 실패했다. 김자점이 양평 미원에 도착한 것이 12월 30일인데 쌍령 전투는 1월 3일, 광교산 전투는 1월 6일에 벌어졌다. 전화기와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김자점이 남쪽 근왕군까지 통솔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유도대장 심기원을 도원수로 임명해 통솔케 했다. 그런데 이 또한 도원수가 2명이 되는 악수라 지휘권이 서로 충돌했다. 중앙에 있던 심기원은 남도 근왕군과 합류도 못한 채 불과 2백 기만 거느렸다가 미원에 들어온 김자점과 만났다. 김자점은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고 주장했지만 심기원은 반대해 마찰이 벌어졌다. 둘 다 직급이 도원수라 진통이 꽤나 있었다. 겨우 정리는 되었으나 김자점은 조선의 마지막 모든 것을 쥐어 극도로 신중했고, 결국 그사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즉, 김자점이 가만히 처박혀 있어서 근왕군이 각개격파되었다는 주장은 그에게 예언능력이 있어야 했다, 또는 조선시대에 전화와 자동차를 발명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김자점이 미원에 도착한 때가 12월 30일, 하삼도 근왕군이 참패한 쌍령전투가 1월 3일. 조선시대에 이 정도 날짜, 거리 차이가 뭘 뜻하는지 모르겠는가?
조계원 묘비명에 의하면 무조건 틈만 노리진 않고 인조를 구원하고자 했다. 조계원이 김자점을 설득해 심기원에게 군사를 빌려서 인조를 구원하자고 주장하자 심기원이 김자점에게 부하 병력 500명을 빌려주었고, 김자점은 수하의 병력을 합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했으나 남한산성에 30리 못 미쳐서 화친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에 그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로 탄핵을 받자,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임경업을 두둔, 용서하게 하여 도로 임소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기를 청하고 도망병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사태 수습에 힘썼다.
어쨌거나 누군가 책임은 져야 했고, 동선령처럼 분명히 더 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1637년 전쟁이 끝난 직후 도원수로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절도정배(絶島定配)형을 받아 충남 서산군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639년에 인조가 사면하여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5. 권력의 정점에 서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친청과 반청으로 나뉘어 격렬한 정쟁 속에 빠져있었다. 인조는 이 상황에서 조정을 정리하고 군사전문가로 계속 활용하기 위해 김자점을 다시 기용했다. 도원수로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강화 유수와 호위 대장을 역임하면서 인조의 측근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히려 도원수로서의 실패 때문에 계속 중용했을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큰 약점이 생겨버린 탓에 인조의 총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천 최명길이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17년인 1639년에 어영군을 김자점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걸 보면 여전히 실무능력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김자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조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이후 서인이 공서와 청서로 나뉘자 김류, 이시백, 원두표, 이시방, 최명길, 심기원 등을 비롯한 공서파 편에 서서 청서파를 탄압했지만 이후 공서에서도 원두표, 민광훈 등이 원당을 구성해서 나가자 원당 역시 탄압했다. 이후 김류와 손을 잡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김자점의 반대편에 있던 당시 실세인 최명길의 라인에 있던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자는 모의를 했다는 게 고변의 내용이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체적 견해는 김자점이 심기원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 무엇보다 심기원은 이괄의 난 때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흥안군을 멋대로 교수형에 처한것 때문에 인조한테 밉보여 있었던 점이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 사건으로 심기원은 가산이 몰수당하고 능지처참당해 죽는다. 심기원의 부하인 채문형과 권억도 연루되어 같이 처형된다.
임경업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서 조사를 받다가 고문으로 인해 옥사했는데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었고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임경업을 죽게 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다만 실제 정황을 보면 김자점이 임경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인조는 임경업의 해명을 듣고 '심기원이 먼저 반역을 일으키고 사후에 임경업을 끌어들이려 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며 임경업에 대한 처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신하들과 토론하던 도중 임경업이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즉 의도적인 고문사가 아니라 단순히 임경업이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옥사의 형태이다.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최명길이 물러나고 김자점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인조가 왜 김자점에게 힘을 실어줬는지 알 수 있는데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알수 없는 병으로 승하한 후, 그의 가계(원손을 죽이고)를 배제시키고 효종의 승계를 확정 짓는 전위대 노릇을 했다. 민회빈 강씨가 인조 독살 누명을 쓰고 역모 혐의를 받게 되자 앞장서서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장해 결국 관철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김자점은 자신의 뒷배를 봐주던 세력이 돌아서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영의정 김류가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반대하자 인조는 이에 분노했는데 이때 좌의정이던 김자점은 강빈 사사를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인조의 뜻에 찬동하여 김류마저도 배신을 했다. 이후 김자점은 김류를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영의정 자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후 김자점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와 혼인 시켜 인조와 더욱 밀착하여 권세를 누리게 된다.
인조가 죽기 전에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
6. 몰락과 비참한 최후
또한 그는 병자호란 이후부터 친청파의 중심으로서 그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의 무리들과 자주 만나다가 결탁하여 정치 세력을 만들었고, 이들을 통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렇게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누렸지만, 반청적인 성향을 보이던 봉림대군(효종)이 인조를 뒤이어 왕위에 오르자 김자점은 권력을 잃고 나락행 테크를 밟고 만다.[5] 인조가 승하한 지 6일 만에 대간들의 격렬한 탄핵과 더불어 효종이 '''"자점은 아바마마가 승하하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멀뚱히 있었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홍천으로 귀양을 보내버린 것.
홍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김자점은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효종이 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을 모의하고, 송시열이 쓴 장릉(長陵: 인조의 능) 지문에 청나라 연호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썼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꼰질렀다. 청나라는 조선 쪽으로 군대를 배치하고선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추궁했다. 다행히 영의정 이경석이 목숨을 걸고 이 문제를 해결하여 조선은 청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죄가 발각되자 김자점은 광양으로 다시 귀양을 떠났다.
김자점의 목표는 아마도 청이 침공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효종과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뒤에 적당한 왕족을 내세워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1651년, 진사 신호(申壕)와 해원부령 이영(李暎)이 효종에게 김자점과 그 아들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을 고변하여 결국 끝장나고 말았다. 이때 김자점은 이후 자신의 아들 김련(金鍊), 김식(金鉽), 손자 김세룡(金世龍), 김세창(金世昌) 등과 역모를 꾀하였고. 이들은 귀인 조씨의 큰 아들인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의빈인 김세룡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한다.
효종이 김자점의 아들 김련과 김식을 친국(親局)하여 공모자들을 밝혀내 여러 무장들이 희생되었고, 소용[6] 조씨가 장렬왕후와 장렬왕후의 조카이자 자신의 며느리기도 한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들통나 김자점은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7] 가족들 역시 무사하지 못해 아들들과 손자 김세룡은 처형되고[8] 소용 조씨도 자진을 명령받아 목숨을 잃었으며, 조씨의 딸이자 김자점의 손주 며느리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김자점의 어머니와 아내, 첩들, 며느리들은 전부 노비로 전락했다. 김자점의 아버지 김탁의 묘소와 그의 선산에 있던 가문의 묘소들도 전부 파 헤쳐져 부관참시당하는 말로를 맞는다. 김자점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라,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파직되고 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쫓겨났다. 다만 김자점의 아들과는 별도로 김자점의 역모는 조작이라는 지적도 일부 있다. 하지만 정황이 그럴 듯한 데다 아들이 역모를 꾀했기 때문에 연좌제로 걸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 권력 추구, 궁중과 파행적인 유착 관계, 매국 행위, 역적질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간신으로 후세에 엄청난 비판을 들으며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 김구다.[9] 그나마 중국과 달리 당사자 및 16세 이상 남성만 사형에 처하는 조선의 연좌제에 따라 직계는 노비, 나머지는 그냥 서민으로 강등하는 선에서 끝났다. 물론 역적의 일가가 한성에서 살기는 불가능했으므로 김자점의 남은 일가는 황해도 해주로 이주[10] 했는데 김구가 태어날 때쯤엔 완전 몰락했다.
김자점의 죽음을 두고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이 김자점에게 '너는 내 형님의 원수니 귀양 가라.' 했다는데 헛소리다. 효종은 소현세자 부부와 친하긴 했어도 정통성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에,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형수 민회빈 강씨를 역강(역적 강씨)이라 부르고, 강씨를 입에 올리는 자는 엄벌에 처하리라 경고할 정도로 매우 강경하게 나갔다. 효종이 김자점을 제거한 이유는 김자점이 매국행위를 했고 장차 자신의 권위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였다.
7. 야사에서의 김자점
7.1. 탄생에서의 전조
김자점이 간신의 대명사인지라 김자점의 탄생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야사와 설화가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과거 김자점이 거대 지네의 저주로 태어난 인간이고, 이로 인해 성장해 가면서 흑화했다는 말이 있다. 이 내용은 문화원형백과 참고자료에도 실려 있고 역사 위키[11] 등에도 상세히 서술되어 실려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과거 삼국유사 등의 설화를 모은 학생 문고 중에도 이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위에 첨부한 문화원형백과, 역사 위키에 실린 내용을 정리해 적은 설화 내용이다.
사또에게 죽은 지네가 사또의 아들로 태어나 역적이 되어 사또의 집안을 역적의 가계로 몰락하도록 복수했다는 것이다.
7.2. 그 외 야사들
김자점의 탄생설화처럼 다른 야사들에서도 김자점은 당연히 나쁘게 묘사된다. 심기원을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 김자점이 처음 능지처참을 시행하게 하자 심기원이 김자점에게 너도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했고, 결국 김자점도 같은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이 역시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이야기.[14]
자질구레한 일화들을 모아 놓은 청성잡기에는 여관을 정비하고, 온돌을 유행하게 한 사람이 김자점이라 하였다. 청성잡기에는 이 때문에 물가가 상승하고 떌감이 많이 필요해졌다고 김자점을 비판하는 논조인데, 상업을 촉진하고 백성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한다는 측면에선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온돌이 보급되어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심각한 문제로 지적[15] 되었으니, 청성잡기도 그 부분을 비판했다. 다만 다른 대책은 이야기하지 않고 추위는 정신력으로 극복하자 부분은 아무리봐도 청성잡기 저자 성대중의 에러 (...)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가서 일본의 코타츠를 보고 좋아보인 모양인데 일본의 겨울이 한국보다 덜 추우니까 코타츠로 버틸수 있는 것이다.
점(여관)과 온돌의 폐해: 옛날에 여행자는 원에서 묵었다. 원에는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저 땔감과 물이나 갖추고 있을 뿐이어서 양식이나 그릇, 솥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가야 했으므로 여행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김자점이 처음으로 떠도는 거지(꼭지)들을 모아 점을 설치하니, 여행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점의 이익이 너무 많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상인들의 이문이 모두 점으로 들어가니, 점이 백성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사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고, 습지나 산이 모두 민 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 보니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하였다. 나도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이 난 자가 없었으니 억지로 습관 들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를 전국에 시행하면 처음에는 비록 약간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니, 백성들이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다. 다만 점의 경우에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대체로 역신이 만든 법들이 현재 많이 시행되고 있으니, 점과 온돌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 청성잡기 4권 -
7.3. 소고기 매니아
김자점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특히 밥상에 소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고기 마니아였다. 문제는 지금과 달리 소는 농번기에는 귀중한 농기계 역할을 하고 물자운송을 하는 등 아주 귀중한 자원이기에, 고대부터 농경 국가 대부분이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조선도 마찬가지라 소를 함부로 도살하거나 쇠고기를 먹으면 처벌할 정도로 소 도축을 금하였으나, 김자점은 쇠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법을 어기고 소 도축을 자주 해서 유생들이 끊임없이 상소했다. 결국 사헌부가 김자점 집을 압수수색했더니 쇠고기가 무려 큰 상자 6개가 꽉 찰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조선시대엔 양반이고 평민이고 나라에서 소도축을 금지하든 말든 별의별 핑계를 대며 쇠고기를 탐식하곤 했다. 현대 대한민국이 조선시대 소고기 소비량을 확실히 추월한 게 90년대 중반부터이다. 김자점이 권세 높은 고관이라 더 많이 먹었을 뿐 이지 특별히 탐욕스러웠다고 볼 순 없다.
7.4. 명당을 위해 자점보를 짓다
장호원은 남쪽으로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보를 건립한다. 김자점은 아버지 김탁이 매장된 백족산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자점보(自點潽)라는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했다.
그 덕에 가뭄이 들 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 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으며,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활용된다.
8. 각종 창작물에서
인조 시대를 다룬 사극 등의 창작물에서는 '''인조 따위 억누르고 꼭두각시로 만드는 대단하고 노회한 권신'''으로 묘사되며 일종의 악역 보정이나 최종보스 보정을 받아 '나쁜 놈이지만 대단한 거물 정치가', 속된 표현으로 '간지나는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는 사실과는 대단히 동떨어졌다. 인조 재위 후기의 김자점은 '''소용 조씨와 마찬가지로 인조의 충실한 장기말에 불과했다'''. 효종이 즉위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왕이 훙했는데 눈물을 안 흘린다는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을 정도로 그의 기반은 미미했다. 얼핏 병자호란 이후 정국을 주도한 듯하지만, 인조 후반기 정치상황은 철저하게 인조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는 작업은 무리수가 많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모르고 목소리 높여 여론몰이 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 절대 대단한 권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정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를 밀어주던 왕이 없어지면,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전제 왕조 국가 특성상 독박 쓸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6] 이런 부분에서는 유자광이나 임사홍의 후배격. 거기다 나름 무게감 있게 다룬 작품들조차 어영군을 만들다시피 한 군사관료로서 그의 행적은 무시하기 일쑤다.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추노의 이경식은 김자점을 모델로 한 듯하고(다만 스탠스는 반청) 일지매에서도 등장하는데 주인공 일지매의 원수. 최강칠우에서는 '김자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역시 김자점이 모델이다. 아니, 하는 행적을 보면 사실상 이름만 바꾼 본인 맞다.(...) 어쩐 일인지 인조 시대는 정통 사극보다는 퓨전 사극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인 또는 본인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꼭 흑막이나 악역 기믹으로 등장하곤 한다.
하긴, 따지고 보면 박씨전 같은 고전 소설 때부터 즐겁게 까여왔으니... 아예 임경업을 모함해 죽인 직후 이시백의 상소로 인조에게 사사되는 것으로 나오는 등, 수명도 단축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시백의 동생 이시방은 김자점의 측근이었고, 이시백의 경우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이 매제였다.[17] 이시백은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몇 달 간 은거했으나, 다시 정승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당파성에 구애되지 않은 그의 중립적 처신 때문이다.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에선 임경업 장군을 죽게 할 때 딱 1컷 나오는데 찢어진 눈을 한, 척 보기에도 간사한 자체로 그렸다.
고우영의 일지매에서도 일지매를 죽이려하고 나라를 청나라에 팔아치우려는 매국노로 등장. 그래도 능력은 있어서 일지매와 일대일 담판을 벌여 회유하려 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외모도 상당히 위엄 있는 모습이라 모르고 보면 이 사람이 김자점이라고 생각이 안 들 정도다.
1981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대명'''[18] 에서는 김순철이 김자점 역할이었다. 물론 대중의 인식대로 무능하게 나온다는 건 변함이 없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리숙해 보이는 얼굴을 한 뚱보 캐릭터로 묘사되었든데 이는 이 드라마에서 김자점 역을 맡은 배우 김순철의 외모를 따서 그린 것이다.
2013년 작 JTBC의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정성모가 역할을 맡았다. 배우가 배우다 보니 버프가 장난이 아닌데, 찌질함과 악독함이 바탕이 된 가운데 간지까지 갖춘 캐릭터가 되어 포스가 굉장하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가진 김자점으로 일국의 도원수가 되어 나라가 전란에 빠졌는데도 기생이나 끼고 잠이나 자면서 왕을 구원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뒤늦게 찾아갔다가 왕에게 친히 두들겨 맞은 다음 무인도로 귀양을 가[19] 거지 꼴로 하루하루 고생하는 처지가 되자 죽을 결심을 하나, 곧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낭떠러지에서 억눌려 왔던 분노를 표출함과 동시에 인조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내가 죽긴 왜 죽느냐? 내가 임금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씨는 왕씨(고려)에게서 나라를 훔쳤고, 세조는 어린 조카에게서, 중종은 연산군에게서, 지금의 너(인조)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훔친 게 아니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내가 만든 임금의 손에 죽느니 내가 살아서 임금이 된 후에 네 놈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내가 임금이다. 내가 임금이란 말이다!'라고 부르짖으며 '''역성 혁명'''을 꿈꾸며 봉산 탈춤을 추는 장면은 전율까지 일 정도. 좀 미화되는 느낌도 있지만[20] 그래도 간지 악역으로 나온다는 것이지, 절대 착한 놈은 아니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뒤, 얌전(소용 조씨)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인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등 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계획 자체는 성공해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지만, 문제는 김자점의 생각과 달리 얌전은 꼭두각시에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개털렸고, 최후는 역모를 꾀하려다 실패하여 사지가 절단된 이후에 능지처참.
2015년 MBC의 화정에서는 정성모처럼 악역 전문 배우인 조민기가 배역을 맡았다. 앞선 다른 드라마들처럼 악독한 면모는 변하지 않았을 뿐, 여기에서는 유달리 냉철하면서도 머리가 좋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며, 동시에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캐릭터다. 본래는 정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한다지만, '''정의는 늘 지기 때문에''' 지는 걸 싫어하고 이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쁜 쪽 편에 섰고 나쁜 일을 하였다.
남한산성(영화)에서는 조선군 도원수로 등장한다. 다만 실명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 누군지 모르고 넘어가는 관객도 많았을 듯.
영화 창궐의 김자준도 이 김자점을 모티브로 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