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마르티네즈
1. 개요
전직 메이저리거이자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형으로 잘 알려진 선수. 등번호는 주로 48번을 달았다.
1990년대 LA 다저스 다국적 마운드의 선봉장이자 오렐 허샤이저의 뒤를 잇는 다저스의 에이스였다. 외계인의 형이라는 것 외에도 국내에서는 박찬호 루키 시절 다저스 1선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부상으로 일찍 진 비운의 투수로, 부상만 아니었어도 동생 못지 않은 대투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게다가 라몬 마르티네즈는 동생과 다르게 신장 188cm으로 신체조건이 매우 뛰어났고, 유년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지라 커리어 초반만 해도 동생보다 더 잘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외계인의 형이라는 것 때문에 다소 평가절하가 된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1990년대 다저스의 우수한 선발자원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 현역 커리어
2.1. 데뷔와 에이스 등극
어린 나이에 도미니카 공화국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었을 정도로 유년 시절부터 자질을 보였던 마르티네즈는 1984년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고, 1988년 데뷔하면서 그해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가 된다.
8월 13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 처음으로 등판한 그는 7.2이닝 1실점에 4피안타라는 뛰어난 호투를 선보였고, 29일에는 몬트리올 엑스포스 상대로 첫 승을 거뒀다. 그렇게 다저스의 5선발로 고정되었지만 정작 1988년 월드 시리즈에는 나가지 못했다.[1] 그래도 우승반지는 지급되었다.
이후 1989년 선발로 지속적인 기회를 받았고, 1990년 대폭발했다. 이해 20승을 거두고 12완투로 완투부문 1위를 기록했다. 이해 6월 4일 기록한 한 경기 18탈삼진 기록은 이 몬스터 시즌의 정수였는데, 이 당시 18K 기록은 샌디 쿠팩스와 함께 팀내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이다. 1990년 최종 성적은 234.1이닝 20승(리그 2위) 6패에 12완투('''리그 1위''') 223탈삼진(리그 2위) ERA 2.92, 승률 0.769(리그 2위)라는, 이제 3년차가 기록한 것 치고는 정말 엄청난 성적. 이를 바탕으로 올스타에도 선발되고 사이 영 상 2위에까지 노미네이트된다.
이후 1991년에도 활약하지만, 이후로 부상 때문에 격년제 에이스의 모습을 보였다. 1992년 부상으로 주춤했고 8승을 기록하는데, 안타까운 건 이 시즌 10승만 넘겼어도 8년 연속 10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 어쨌든 1993년은 절치부심해 다시 200이닝+를 넘기며 부활, 셋업맨으로 기용되던 동생과 듀오를 이루어 팀을 캐리했다. 이 시즌 둘이 먹은 이닝만 합쳐도 318.1이닝이었다. 하지만 이해를 끝으로 동생이 트레이드되었다.
어쨌든, 이 시즌 또한 충분히 1선발급 위용을 뽐낸 시즌이긴 했지만, 이 시즌부터 볼넷 비율이 크게 늘어나면서 부문 1위를 기록하였다. ERA도 1990년과 1991년에 비해서 상승한 등 약간의 위험 요소가 보이기 시작한 시즌이었다.
1994년은 10승은 달성했지만 200이닝을 넘기지 못하는 등 뭔가 모자란 성적을 찍었다가, 1995년 다시 부활한다. 이해 7월 14일, 플로리다전에서 마이크 피아자와 배터리를 이룬 그는 노히터라는 대기록을 작성한다.[2] 덕분에 사이 영 상 5위 후보가 되었지만, 이 시즌도 볼넷 1위를 기록한다.
1995년 시즌 이후 마르티네즈는 FA를 맞게 되고, 다저스와 거액의 계약을 맺으며 팀에 잔류한다.
2.2. FA 계약과 몰락
1996년 그는 부상으로 28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1991년 이후 짝수 해에는 부진했던 터라 누구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15승으로 꽤나 승운이 따랐던 덕에 특히 그렇게 여겼다. 당시 마운드 또한 신인왕 출신의 노모 히데오와 영건 이스마엘 발데스에게 집중되며 마르티네즈에게 상대적으로 기회가 돌아가지 못한 면도 있긴 했다. 이해 4월 6일, 선발로 등판했다가 타석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는데, 그를 대체하여 어느 동양인 계투가 투입, 호투하면서 그의 커리어 첫 승을 거둔다. 그 계투는 이날의 활약을 바탕으로 마르티네즈가 복귀하기 전까지 선발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아시아 메이저리거 최다승 전설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홀수해인 1997년, 마르티네즈는 이해도 부상으로 날려먹으며 짝수해 징크스를 깨는 데 성공한다. 특히 부상 때문에 기량 하락이 완연했던 시즌으로, 시즌 후반기에는 5선발로 시작한 박찬호에게 로테이션이 밀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쨌든 10승을 했다. 이어서 FA 마지막 해이던 1998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15경기에만 나오면서 10승 달성도 실패하고 만다. 결국 1998년 이후 다저스와 재계약을 하지 못했고, 이듬해까지 계약을 하지 못하다가 3월이 되어서야 동생이 뛰고 있던 보스턴 레드삭스와 극적으로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1999년에는 4경기만 나오는 데 그쳤고, 2000년에는 간만에 27경기를 나오면서 로테이션을 소화했고, 10승은 거뒀는데 ERA가 6.13이나 됐다. 이런 라몬의 몰락은 당시 역대급 성적을 쓴 동생과 비교되면서 더욱 안습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이후 다시 FA를 맞았고, LA 다저스에 복귀하지만 2001년 시즌 시작 직전에 방출당했다. 이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해 4경기밖에 나오지 못하고 은퇴했다.
[image]
레드삭스 시절, 동생 페드로와 함께 러닝을 하고 있는 라몬 마르티네즈.
2.3. 은퇴 이후
한동안 다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있었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적을 옮겼다.
3. 기타
[image]
마르티네즈 3형제. 좌측부터 라몬-페드로-헤수스 마르티네즈.
형제 셋이 있는데, 그 중 동생 두 명이 야구를 했다. 바로 아랫 동생인 71년생 페드로 마르티네즈야 뭐 메이저리그 역대급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니 말이 필요없을 것이고, 막내인 74년생 헤수스 마르티네즈는 1992년부터 LA 산하 마이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뛰어보지 못하고 2001년 은퇴했다. 두 형과는 달리 좌완 투수였다. 헤수스 마르티네즈는 2018년 3월 심장마비로 두 형보다 일찍 사망했다.
동생과의 우애는 알아주는 수준으로,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명전 입성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롤모델이 형 라몬이었다고 말했다. 비록 자신보다 커리어는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페드로에게 있어 라몬은 업계 선배이자 친형으로써 항상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 소중한 존재였다고.
마이너리거 시절, 기대받는 유망주 치고는 꽤나 고달픈 생활을 했는데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면서 꼬박꼬박 돈을 송금해주는 등 뒷바라지에 열성적이셨다고 한다. 그가 1988년 메이저리거로 데뷔하고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어머니의 고생도 끝나게 되고, 라몬의 두 동생 또한 형보다는 풍족한 상황에서 야구를 할 수 있었다.
1992년, 1995~98년 개막전 선발 투수였는데, 1995년을 빼면 어째 하나같이 부진한 시즌들이다.
주 무기는 직구와 슬러브였는데, 체인지업을 잘 던졌던 동생이 부러웠다고 한 적이 있다.
1988년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이 반지가 돌고 돌아 2005년 한국의 어느 금은방에서(!) 발견되었었다. 1990년 이사 도중 잃어버렸었다고. 아마 잃어버린 것을 어찌어찌해서 도미니카 선수가 손에 넣은 후 한국에 용병으로 올 때 가지고 왔다가 한국에서 다시 잃어버리거나 하지 않았겠냐고 추측되고 있다. 금은방 주인은 돌려주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단 금은방 주인도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적당한 대가를 치러줬으면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소식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원 주인에게 돌아갔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