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 히데오
1. 개요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 - 노모 히데오'''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
小市民はいつも挑戰者を笑う
일본의 전 메이저리거. 9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돋보인 동양인 선수중 하나로 포지션은 투수이다. LA 다저스 소속으로 신인왕,[1]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 출전하는 등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로는 선구자격인 스타 선수였다. 박찬호와 동시대에 같은 팀에서 활약해 한국팬들에게도 아주 낯익은 인물이다.
주무기는 토네이도 투구폼과 함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낙차 큰 포크볼. 타자에게 등을 보일 정도로 몸을 비트는 투구폼으로, 많은 타자들에게 치기 어려운 투수로 여겨졌다. 덕택에 미국에서 "토네이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5년 선보였던 노모의 포크볼을 90년대를 대표하는 결정구로 꼽는 사람도 있다. 그 다이나믹한 투구폼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선 부상도 잦았으며 부상 때문에 기록에 손해를 많이 봤다.
2. 선수 경력
2.1. 성장과 사회인 야구
초·중학교 때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이 때에 이미 직구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토네이도 투구폼(의 원형)을 썼었다고 한다. 약체지역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2학년 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오사카 부 지역예선에서 퍼펙트 게임 달성. 3학년 때에는 학교를 16강에 진출시켰다. 고등학교 졸업 후 긴테쓰 버팔로즈에서 입단을 원했지만 사회인 야구팀인 신일본제철 사카이에서 활동한다.[2] 그리고 신일본제철 입단 첫 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포크볼을 익혔다.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3][4] 배터리로 같이 활동했던 포수가 후루타 아츠야. 1989년에는 대륙간컵에 참가했는데, 구대성이 이 때 노모의 투구폼에 영향을 받고, 이 폼을 따라하게 되었다고. 198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참여하여 한일전 선발투수로 노모와 구대성이 대결했다. 이 경기에서 노모는 한국팀에 4안타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 경기에서 한국이 노모에게 때려낸 4안타 중 2개는 유격수 이종범이 쳐낸 것이었다..
2.2. NPB 시절(1989~1994)
2.2.1. 입단 과정
1989년 긴테쓰 버팔로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한다. 이 당시에 세웠던 ''''8구단 지명''''은 아직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 사상 최고 기록이다.[5][6] 이 때 노모를 지명하지 않은 구단은 넷. 세이부 라이온즈는 사이드암스로 투수인 시오자키 데츠야를, 주니치 드래곤즈는 강속구 투수 요다 츠요시를,[7]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사사오카 신지를 일찌감치 지명하면서 노모를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돌았다.[8]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난 요미우리가 1차로 지명 안 하면 프로에 아예 안 가겠뜸'이라고 개드립을 친 오오모리 다케시를 지명했으나....8년간 전형적인 2군 본즈의 행보를 보여주다 1998년 긴테쓰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어 이듬해 은퇴.[9]
이들 외에 노모에 밀려서 꿩대신 닭으로 다른 팀들이 지명한 선수들 중에는 볼 것 같으면..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는 1위 지명으로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를 뽑았다.
-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1위 지명으로 투수 니시무라 타츠지를 지명했는데, 이쪽은 노모에 비하면 빈약한 커리어지만 야쿠르트, 킨테츠, 다이에 등에서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통산 75승 68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2위 지명으로 스왈로즈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포수 후루타 아츠야를 지명하게 된다.
- 오릭스 브레이브스는 1위 지명으로 1989년 드래프트 당시 사회인 리그 최고의 타자로 꼽히던 사토 카즈히로를 뽑았다. 하지만 이쪽은 시대착오적인 펀치파마와 특이한 언행으로 주목받을 뿐 선수로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고, 결국 데뷔 후 4년만에 은퇴하고 '펀치 사토'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예능인으로 활약중이다(...). 그나마 2군에서 포텐은 보여준 거인의 오모리와는 다른 의미로 전설. 당시 오릭스는 암흑기를 걷던 한신과는 달리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 한신 타이거스는 1위 지명으로 암흑기 동안 선발, 구원 가리지 않고 활약한 투수 카사이 미노루를 뽑았고 하위권 지명이긴 하지만 5위로 훗날 메이저리그에서도 뛰게 되는 신조 츠요시를 지명했다.
- 닛폰햄 파이터즈는 1위 지명으로 당시 칸사이 대학 리그의 명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카이 미츠지로를 지명했는데, 이쪽은 프로 첫해 10승을 기록했지만 이후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며 통산 23승 36패의 초라한 기록만 남기고 은퇴했다. 그리고 2위 지명으로 재일교포 3세 투수 이와모토 츠토무를 지명했다. 이쪽은 선발로 그럭저럭 뛰며 통산 63승 79패를 기록했다만, 선수시절 내내 3점대 후반~6점대를 오가는 방어율을 기록하는 불안함을 보여줬다(...)
- 롯데 오리온즈는 1위 지명으로 "셰이크 볼"이란 독특한 고유 변화구를 선보인 투수 코미야마 사토루를 지명했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1위 지명으로 당시 코시엔 3회 진출 경력을 가졌고 단정한 모습으로 팬들의 인기를 끌던 고교야구 타자 모토키 다이스케를 지명했으나.. 정작 본인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고 싶다며 입단을 거부하는 바람에 망했어요..[10] 그 뒤 3위 지명으로 사회인야구팀 프린스 호텔에서 활약하던 하시모토 타케히로를 지명했는데, 이쪽은 입단 후 제대로 입지를 잡지 못하다가 1994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부터[11] 비로소 포텐이 터지면서 중간계투로 맹활약했다.
당시 긴테츠가 운이 좋았던 게,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팀이었던 긴테츠는 규정 상 가장 마지막에 제비를 뽑도록 되어있었다.[13] 그리고 그 마지막 제비가 당첨 제비가 되어 긴테츠는 노모를 영입할 수 있었다.
2.2.2. 괴물, NPB를 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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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첫 데뷔인 1990년에 투수 트리플 크라운 및 최다탈삼진[14] 을 달성하며 신인왕과 MVP, 사와무라상을 싹쓸이한 일본 야구계의 귀재. 특히나 이해 수상한 사와무라상은 처음으로 퍼시픽리그 투수가 수상한 사례여서[15] 더욱 의미있었다. 이 해에 노모가 제패하지 못한 타이틀은 구원왕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탈삼진 능력이 아주 뛰어나 일본에서 4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하였고, 다승왕 또한 데뷔 이후로부터 4년 연속으로 차지해서 일본 야구계의 최고 투수로 군림하였다.
1990년, 데뷔 첫 승을 NPB 한 경기 17탈삼진으로 당시 타이 기록을 달성하며 화려하게 데뷔.
1990년,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삼진을 기록(일본 신기록),
1991년에는 자신의 기록을 6경기로 재갱신했다.(...)
1993년에도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삼진을 기록한다.
1993년에는 또 일본 프로야구 '''최단기간 1000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운다.
'''4년 연속 최다승+최다탈삼진 기록은 NPB역사상 노모 히데오, 단 한 사람뿐이다.'''
단, 직구와 포크 두가지 레퍼토리로만 타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포크만 잘 골라내면 안타는 못 쳐도 걸어서 나갈 수는 있었다. 주자가 누상에 나가면 셋포지션에서 던지기 때문에 직구의 위력이 감소, 연타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NPB시절 말기의 노모는 엄청난 혹사를 한데다 투구의 패턴이 상대팀에게 철저하게 분석되어서 굉장히 고전했고, 증가하는 투구수에 해를 거듭할수록 무리가 따랐다. 더불어 볼넷의 숫자도 갈수록 증가.
4년 연속 최다승 + 최다탈삼진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4년 연속 최다승 + 최다탈삼진 + '''최다사사구'''이다. 노모의 압도적인 구위에 가려져 간과되기 쉬운 면모.
그리고 노모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닝 소화 능력에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완투 머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 해에 '''27선발 21완투'''[16] , 두 번째 해에 '''29선발 22완투'''[17] 로 2년간 '''완투율 약 71.7%'''라는 '''근대 야구에서나 나올법한 놀라운 완투율을 보였다'''. 이후 완투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1992년 29선발 17완투, 1993년 32선발 14완투, 1994년 17선발 6완투로 완투율 약 47.4%의 여전히 월등한 완투 능력을 보였다.[18]
NPB 5년 통산 성적은, 139시합 출전(134선발) 78승 46패 1세이브 '''80완투 13완봉 완투율 약 59.7%''', 1051⅓이닝 / '''1204탈삼진''' / 588볼넷 / 방어율 3.15.
2.3. MLB 시절(199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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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NPB 시절에 두 차례의 미일 올스타전 출전을 계기로 메이저리그에 대한 동경을 품어가고 있었다. 여기다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가 한 "미국에 와라. 너라면 가능하다"라는 말은 더욱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꿈꾸게 했다.
1994시즌에는 부상 후유증으로 잠시 부진했는데, 시즌이 끝나고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메이저 리그 진출을 시도하였고, 결국 다음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다저스 입단 당시의 등번호는 16번.[19][20] 이때 노모는 계약금 200만 달러에 겨우 '''1년 10만 9,000달러'''라는 연봉 계약을 받고 메이저로 넘어갔는데, 이듬해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활약으로 이는 아시아 역대 최고의 고효율 투수 계약으로 평가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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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는 메이저 데뷔 첫 해인 1995시즌 28경기 13승 6패 ERA 2.54, 236K, fWAR 5.2, bWAR 4.7이라는 엄청난 활약으로 NL 신인왕과 탈삼진왕을 동시 석권했다.[22] 1경기당 평균 탈삼진(K/9) 역시 11.1개를 기록,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샌디 쿠팩스의 다저스 팀 역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23]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완봉승, 피안타율 부문에서도 리그 1위,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올스타전 선발투수 등판까지하며 메이저리그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다.[24] 이러한 놀라운 활약으로 루키인데도 불과하고 사이영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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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노모의 역동적인 투구폼은 '토네이도'라고 불리며 미국에서 이른바 ''''토네이도 신드롬''''을 일으키며 미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충격이 어느정도 였냐면 '''당시 미국의 일반 어린이들도 이 투구폼을 따라했을 정도였다''' 사실상 후의 '이치로 신드롬'의 투수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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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를 강타한 노모의 토네이도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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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노모는 거기에 그치지않고 1996시즌에는 '투수들의 무덤'으로 유명한 쿠어스 필드에서 아시아 투수 최초로 노히트 노런까지 달성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26] 거기다 당시 콜로라도 로키스는 네셔널리그에서 타격 성적이 가장 좋은 팀이었다![27] 마침 노모가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시점은 1994년 선수단 파업 사태로 월드 시리즈마저 무산되는 등, 미국에서 프로야구 흥행에 먹구름이 끼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활약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2년 연속으로 사이영 투표 4위에 올랐다.
이 덕분에 야구 외의 대중 매체에도 상당히 알려지게 됐는데, 그 예로 영화 <라이어 라이어>에서 극중 짐 캐리가 아들에게 야구 글러브를 선물해주면서 아들이 '내가 노모를 할 테니 아빠는 칸세코 해요'라고 대사를 한 적이 있고[28] 유명 재즈 아티스트인 잭 셸던은 'There's No One Like Nomo' 라는 곡을 만들어 발표했을 정도이다. 메이저 리그에서도 빼어난 탈삼진 능력을 앞세워서 초반 3년간은 팀의 에이스 자리를 지켰으나, 1998 시즌부터 부진에 빠지기 시작해 결국 시즌 중에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됐고 이때부터 한 시즌에 한 번씩 팀을 바꾸는 저니맨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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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1 시즌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부활, 9이닝당 탈삼진 부문에서도 리그 1위를 찍으며 탈삼진왕 타이틀을 한번더 획득하며 양대리그 탈삼진왕이라는 업적을 달성했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해 생애 두 번째이자 MLB 역사상 4번째로 양대 리그에서 모두 노히트 노런을 성공한 투수가 되었다. [29]
2001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어 친정팀인 LA 다저스로 돌아온 노모는 2년 연속 16승과 3점대 방어율을 찍으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하면서 2004 시즌에 극도로 부진, 이후로 사실상 메이저 리그 커리어를 접었다. 이후에도 마이너 리그와 도미니카 리그에서 절치부심하며 메이저 리그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나이와 부상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8 시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3경기만에 4⅓이닝 9실점을 허용하고 방출당했다. 무엇보다 노모의 너무 역동적이었던 토네이도 투구폼이 부상으로 이어져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결국 MLB 통산 123승, 개인 통산 201승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123승이라는 이 기록은 동양인 투수 중에서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많은 승수였다. 게다가 저 승리는 '''모두 선발승'''으로 이뤄낸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은 2010년 10월 2일, 박찬호가 124승을 올리며 깨졌지만, 최다 선발승은 여전히 유효하고 다르빗슈 유나 류현진 같은 후대의 동양인 메이저 리그 선발투수들도 7~8년 이상 커리어를 쌓아야 박찬호와 노모의 기록에 도전할 수 있기에 적어도 2010년대 동안에는 깨질 가능성이 낮다.
MLB 12시즌 통산 성적은, 323경기 출전(318선발) 123승 109패(16완투 9완봉), 1976⅓이닝 / 1918탈삼진 / 908볼넷 / ERA 4.24.
3. 동양 야구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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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마사노리가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노모는 실질적인 선구자 역할을 했다.'''[30]
사실상 노모는 일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길을 열어준 선수로서, 스즈키 이치로나 마쓰자카 다이스케같은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이 그 뒤를 따랐다.[31] 저 선수들 또한 모두 노모를 존경한다.
이러한 노모의 메이저 진출은 메이저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사실 더 이상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할 의지가 본인에게 없었던 점도 크다. 원래 노모를 지명할 당시의 긴테쓰 버팔로즈의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를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덕장인 오기 아키라로 노모의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폼이나 조정법 등에 대해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다. 이는 오기 감독의 선수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스타일에서 나온 것으로 노모는 그런 오기 감독을 매우 신뢰하며 따랐다. 그러나 오기 감독이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긴테쓰 버팔로즈의 전설이자 현재까지 일본에서 '''마지막 300승 투수'''로 남아있는 스즈키 케이시가 감독으로 들어온 뒤 상황이 달라진다, 상기한대로 대투수인 스즈키 케이시는 본인의 투수로서의 철학을 노모에게 강요하여 투구폼 수정 등을 요구하였고 [32] 이를 통해 노모는 감독과의 불화로 점차 의욕을 잃게 된다.
결국 노모는 부상을 처음으로 200이닝을 소화하지 못한 1994시즌을 뒤로 하고 팀과의 교섭도 결렬, 자유계약신분이 아닌 임의탈퇴 신분상태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하게 된다.[33]
후일 당시 팀동료였던 가네무라 요시아키(金村義明)[34] 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노모의 심경을 적고 있는데 노모는 "저는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감독 밑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것 뿐입니다." 라고 밝혔다. 즉 노모의 진출은 단순한 도전정신으로 보기 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메이저리그는 일본프로야구 조차도 그야말로 넘볼 수 없는 벽이나 다름 없었는데, 때문에 노모의 진출에 대해 일본의 매스컴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특히 노모와의 불화로 원인을 제공한 스즈키 케이시 감독은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인생 최대의 마스터베이션이라는 혹평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스즈키 케이시는 긴테쓰를 재임기간 동안 최약체 팀으로 추락시키면서 1995년 해임된 후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노모의 눈부신 활약에 따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노모 열풍이 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박찬호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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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박찬호의 라이벌로 많이 취급을 받았다. 한일관계의 특수성에, 3년이나 같은 팀에서 한솥 밥을 먹은데다가, 노모의 1차 하락세가 박찬호의 전성기와 묘하게 맞물려서 더욱 그렇게 여겨졌다. 2010년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두고 한일 양국의 스포츠 팬들이 신경전을 벌인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필 등번호도 16과 61로 뒤집으면 똑같다. '''박찬호나 노모 히데오나 동양인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라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두 선수는 각국 야구계의 레전드라고 추앙받을 수 있다.'''
그래도 굳이 비교를 하자면 통산 성적이나 커리어는 1승 차이나는 다승을 제외한 방어율, FIP, WHIP, K/9, K/BB등 대다수의 주요 비율 지표에서 노모가 우위이며 탈삼진, FWAR, BWAR 등의 다수의 누적 지표에서도 노모가 앞선다. 거기다 한번도 타이틀을 딴적이 없는 박찬호와 달리 노모는 신인왕에 2번의 '''탈삼진 1위'''로 리그 공식 투수 타이틀도 쥐어보았으며 노히트 노런에 각종 투수 지표 부분에서도 1위를 해봤다. 거기다 사이영표가 한표도 없는 박찬호에 비해 사이영 투표에서도 족적을 남겼을 정도로 누적과 임팩트 부문에서 모두 노모가 더 위로 평가 받는다.
거기다 한국에서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일본에서 5년 간 1000이닝을 던진 후 만 27세(한국나이 29세)에[35]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모든 승을 선발승으로 따낸 노모와, 아마시절에 스카웃된 뒤 메이저 팜에서 키워져 만 21세에 데뷔한 박찬호의 출발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36] 박찬호는 불같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했고 노모는 포크볼을 주무기로 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선수 모두 삼진 잡는 기계였다는 공통점까지 있다.[37] 다만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노모는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90마일대로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수직무브먼트가 굉장히 뛰어났다. 거기에 결정구인 낙차 큰 포크볼이 패스트볼의 구위를 뒷받침하면서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탈삼진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결론적으로 두 선수의 통산 커리어는 한국에서 조차도 노모가 박찬호보다 위라고 평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늦은 나이라는 큰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과하고 기본 투수 비율 지표는 물론이고 WAR과 조정 스탯 등 세이버메트릭스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도 노모가 앞서며, 누적 조차 단 1승등을 제외하면[38] 탈삼진 등의 클래식 누적 지표 부문에서도 노모가 앞서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아무 타이틀도 없는 박찬호에 비해 노모는 신인왕과 탈삼진왕, 노히트 노런 등 각종 메이저리그 수상과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사이영표도 받아본적 없는 박찬호에 비해 노모는 사이영 투표에서 상당을 족적을 남겼다는 점도 있다.
또한 노모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오른것에 비해 박찬호는 후보에 오르는데도 실패했다는 점에서 두선수의 위상 차이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문제라면 '''언론''' . 기자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유독 국내 언론들만 노모를 폄하하는 기사를 많이 쓰거나 아예 절대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에 '''박찬호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출시된''' <메이저리그의 정복자 박찬호>라는 책. 이 책을 보면 노모 히데오를 아주 악랄한 이로 매도하면서 마구 깎아내렸는데, 결국 '''박찬호 측'''이 '''무단 판권 침해, 사진도용, 거짓 글 투성이, 노모 히데오의 명예훼손과 같은 여러 이유로 소송제기'''하면서 전량 회수되어 이젠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39]
거기에 일반 스포츠신문에서 조차 노모를 매도하는 우스개들이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이를 테면 박찬호가 인터뷰에서 노모를 칭하길 "노모는 못해, 노 모어(No More)이니까." 이같은 글이나 우스개[40] 라고 올렸다. 이런 여파 때문인지 고행석 화백이 연재하던 만화 커브에서 도모 히데오라는 일본인 선수가 구영탄과 같은 구단 선수로 나오는데 구영탄과 사이나쁘게 나온다. 다만 악랄하게 나오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 과묵하게 성실히 잘하는 타입이고 되려 다혈질 구영탄이 일본인이라고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국내 언론에서 마구 깎아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실력 자체를 왜곡하지는 못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인은 싫지만 노모는 존경한다는 의견을 다수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정작 현실에서 두 사람은 머나먼 이국의 유이한 동양인 선수라는 공통점 덕분에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좋은 동료로 서로를 대해줬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첫 승이 되는 기념구가 경기 종료 후 관중석으로 투척되자 그걸 관중석까지 쫓아올라가 찾아서 박찬호에게 전해준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노모였다. 또한 노모는 하와이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박찬호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아 참석했으며[41] 박찬호가 124승을 거두었을 때 "124승은 통과점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승리를 거두길 바란다"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박찬호도 '노모는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이자 자신이 넘기 위한 목표' 였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노모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NPB를 폭격하고 MLB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였고, 나이도 박찬호보다 다섯 살이나 위다. 노모의 구도자적이며 훌륭했던 인품까지 고려하면,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면 줬지 예민하게 굴었을 리도 없다. 한일관계라는 특수성 때문에 라이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노모는 박찬호에게 팀에 먼저 훌륭하게 녹아든 아시아권의 좋은 선배였다. 일본 매체에서도 박찬호와 노모를 엮어서 별별 얘기가 다 있었을법 한데도 아직까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노모가 어떤 선배였는지는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절친한 사이였던만큼 몇 가지의 일화가 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와 계약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박찬호가 계약했다는 걸 안 노모가 인터뷰에서 "LA에 한인식당이 많은데 박찬호에게 안내 좀 해달라고 해야겠다." 라고 하자, 그걸 안 박찬호는 "지가 뭔데 나한테 안내해달라 말라임?"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유들유들하고 젊었을 때 박찬호는 본인 입으로도 그랬지만 "좀 건방도 떨었고, 성격도 급한" 편이었다. 물론 건너가서는 잘 지냈으니 문제는 없었다.
소싯적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시절 그에게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찬호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42]
절친한 사이는 계속 유지중인지, 공주시에서 열린 박찬호 기념관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
5. 은퇴 이후
2010년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라갔다. 성적으로 봤을 때는 가능성이 낮지만, 성적만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닌 명전 특성상, '동양인 메이저리거의 선구자'로서 입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 했지만 성적이 성적인지라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미 메이저리그에 너무 늦게 넘어왔으며 이치로급 정도의 역대급 페이스를 보인것도 아니라서 투표로 입성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결국 2014년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6표(1.1%)를 얻으며 탈락했다. [43] 뭐 크리스 카펜터같은 투수도 2표 받고 광탈하는게 명전 투표다. 다만 바로 그 직후 일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는데, 이는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중 역대 최연소이며, 1994년의 '''오 사다하루''' 이후 20년만의 '''후보 1년차 헌액자'''다. 기자단 투표로 전당에 올랐는데, 이를 두고 노모는 '현역시절에 그렇게 사이가 안좋았던 기자들이 나를 뽑아주다니 놀랍다'라는 반응(…). 다만 일본의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국민영예상[44] 도 수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 경질 이후 차기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2010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임시 코치로 활동하는 등 프로야구 정식 코치활동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단 사회인 야구, 리틀야구 등 아마야구에 관심이 많고 직접 사회인 야구팀 'NOMO 베이스볼 클럽' 을 만드는 등의 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일친선소년야구대회에서 일본측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8월 10일 LA 다저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시구를 맡았고 다저스는 그날 경기에서 승리했다. 2016년부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야구 부문 운영 자문 역할도 맡는다. 당시 파드리스의 이러한 인사는 이후에 있을 오타니 쇼헤이 영입전에 대한 포석이라 여겨졌지만, 결국 오타니는 LA 에인절스에서 뛰게 되었다.
2018년 11월 24일 명구회 OB 올스타 경기에 선발 투수로 출전했는데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엄청나게 뚱뚱해진 모습이었다. 운동선수들은 은퇴하면 위장 크기는 선수시절 그대론데 운동을 안 하니 살이 찌는 선수가 많다. 그러나 그런 불룩한 배로 특유의 토네이도 폼은 여전했다.
6. 연도별 성적
7. 그 외
메이저리그 시절 스즈키 이치로에게 빈볼을 던진 적이 있다. 등에 공을 맞은 이치로는 경기 후 메이저리그에서 같은 일본인에게 빈볼을 맞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노모야동이라는 개그가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에는 '''노모'''자이크 '''야'''한'''동'''영상 이겠지만, '''노모''' 히데오가 등장하는 '''야'''구'''동'''영상. 그래서인지 불암콩콩코믹스에서 간혹 그가 등장할 때는 그의 주위가 모자이크 처리 된다.## 토네이도 투구폼 움짤을 올리며 '''노모 야동 허리돌림 쩌네 ㅎㄷㄷ''' 라는 제목으로 낚시하는 버전도 있다.
술을 엄청나게 잘 마신다고 한다. 최희섭의 증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는 가끔 술로 후배들의 기를 죽이는 경우가 있는데 메이저리그는 어떤가.)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죠. 뉴페이스가 오면 술을 권하며 은근히 떠 보죠. 한국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거절해도 그만이죠. 근데 노모 히데오는 술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했죠. 최고의 주당이죠.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다저스 친구들이 동양인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카드 중 하나다. 그 이유는 특유의 투구폼 때문. 엄청나게 느린 인터벌로 상대도 짜증나고 본인도 짜증나는 마력을 보여준다. 물론 그 버퍼링 덕분에 상대방의 짜증 유발과 함께 타이밍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혹은 유망주 투구폼으로 노모폼을 쓰기도 한다. 인터벌이 긴것을 제작진도 의식했는지 전 투구폼 셋포지션 업데이트 이전부터 이상훈과 더불어 셋포지션이 존재했었다.
세가타 산시로 광고 시리즈의 야구 팀 육성 게임 '프로야구 팀을 만들자!' 광고 편에서 세가타 산시로가 참선 수련 하는 장소에 걸린 사진으로도 등장한 적이 있다. 은퇴한 뒤인 2008년에는 같은 시리즈의 후속작인 '프로야구 팀을 만들자! DS'의 광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짱구는 못말려 투니버스판 애니메이션 10기 '몰래 고쳐놔요' 에피소드 첫 장면에서 훈이는 타자, 짱구는 투수로 유치원에서 야구를 하는데 훈이는 스즈키 이치로를 따라하고 짱구는 노모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 동작으로 공을 던진다. 결국 유리가 만든 종이인형을 망쳐버리고... 제목 그대로 몰래 고쳐놓는 에피소드.
현역 시절 워낙 먹성이 좋기로 유명해서 선수 시절에는 엄청난 운동량 덕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45] , 은퇴 후 본인의 야구 클럽이나 행사에 출연하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살이 엄청나게 쪘다.
장남 노모 타카히로는 현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구단 통역가로 일하고 있다.
야구게임 하드볼5 에서도 나오며 LA 다저스 팀으로 소속되어 있다.
문서 최상단의 노모를 상징하는 명언인 '소시민은 도전자를 비웃는다' 는, 2008년 독립리그에서 재기를 노릴 때의 인터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정확한 출처를 찾기가 어렵다. 2003년 발행된 만화 아이실드 21 5권에서 등장인물 히루마 요이치가 정확히 똑같은 대사를 하기 때문에 따지자면 이쪽이 원조가 된다. 만화의 저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노모도 언급되기 때문에, 진짜로 저 말을 노모가 했다고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도전해 당당히 해내겠다는 포부를 담은 내용이나 언제부터인가 무리수를 저지르는 걸 말리는 사람들을 싸잡아 폄하하는 용도로도 오용되는 경우가 있다.
[1] 메이저리그에서는 '신인왕'이었지만, 이미 일본에서 최고투수로 활약하고 나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했기 때문에 사실상 중고 신인이었다.[2] 당시 포텐셜은 있으나 독특한 투구폼 때문에 외면당했다. 긴테쓰에서 투구폼을 교정하는 조건으로 입단을 제시했으나 거부.[3] 올림픽 정식정목은 아니었기에 국가별 메달집계에는 정식적으로 반영되지는 않는다.[4] 당시 결승상대는 미국팀이었는데, 조막손 투수로 유명한 짐 애보트, 로빈 벤추라 現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 등이 뛰었다. 한편, 이 시절 이종범과도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5] 노모 이후에 데뷔한 마쓰자카 다이스케나 다르빗슈 유도 4개 구단의 복수 지명밖에 못 받았다. 뭐 본인들이 가고 싶은 팀을 은밀하게 밝혀둔 탓도 있었지만. 4순위 지명인 스즈키 이치로와 이와쿠마 히사시는 논외. 항상 그렇지만 1순위 지명이 훌륭한 선수가 되는 보증수표는 아니다.[6] 8구단 지명 선수는 이듬해인 1990년 드래프트에서도 나오는데, 그 주인공은 코이케 히데오. 당시 세이부, 야쿠르트, 롯데, 긴테츠, 닛폰햄, 주니치, 히로시마, 한신이 1순위로 코이케를 지명했다. 이 중에서 교섭권을 가져간 구단은 롯데. 그런데, 코이케는 롯데가 교섭권을 가져간 것이 확인되자마자 드래프트장에서 '''"쇼크네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롯데의 입단을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행. 코이케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코이케는 드래프트 전에 이미 가고 싶은 팀(세이부, 야쿠르트, 요미우리)을 밝혔었고, 특히 롯데는 가장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롯데 구단도 이를 알고 있어서 처음에는 코이케를 지명하지 않으려 했고 이를 코이케에게 알렸다. 그런데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가 코이케의 1지명을 강행했고, 그대로 교섭권까지 따낸 것. 코이케는 2년 간 사회인 야구에서 활동하다 1992년 드래프트 때 긴테츠의 단독 1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하지만, 97년 15승(파리그 다승왕) 6패 방어율 2.96을 기록한 것 외에는 특출난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고 2005년 은퇴한다.[7] 요다는 입단 첫해인 1990년에 최고속도 157km의 강속구를 앞세우며 31세이브를 기록하여 센트럴리그 구원 1위, 신인왕에 오르면서 노모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후 부상을 반복하면서 급격히 성적이 하락했고, 결국 통산 8승 19패 59세이브의 기록으로 2000년 한신 타이거즈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해설가와 기자, 라쿠텐 투수코치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9년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8] 시오자키와 사사오카는 각각 소속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사사오카는 통산 100승-100세이브를 기록한 카프의 레전드로 선발에만 전념했다면 200승 가까이 올렸을 거라는게 중론.[9] AKB48 팬들에게는 의외로 이 이름이 익숙하게 들릴 수 있는데 다름아닌 멤버 오오모리 미유의 아버지이기 때문. 가장 인기구단인 요미우리의 경우 1차지명이 되기만해도 꽤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보니 야구에 조금 관심이 있는 30~40대에게는 오오모리 다케시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꽤나 어필이 되었던 듯 하다. 지금도 종종 야구 관련 버라이어티 일을 맡고 있는 것도 그 인연 때문.[10] 결국 모토키는 1년 간 드래프트 재수를 한 뒤 이듬해인 1990년 바라고 바라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그 후 프로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타격력을 보여주며 뛰다가 2005년 은퇴했다. [11] 이때 맞트레이드 대상 중 한명이 다름아닌 아키야마 코지였다.[12] 해태의 이강철과 조계현, 삼성의 강기웅, 빙그레의 송진우, 청룡의 김기범과 노찬엽 등이 대표적.[13] 그 해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요미우리는 노모를 지명하지 않았으니.[14] 단, 이 당시까지 일본프로야구의 트리플 크라운의 기준은, 다승, ERA, 승률이었다. 탈삼진이 아니었음을 유의하자. 다승, ERA, 탈삼진은 미국의 기준이다. 요새는 일본도 미국기준을 따라가는 듯 하기는 하지만.[15] 1989년부터 퍼시픽리그 투수도 수상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이해엔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이토 마사키가 수상했다.[16] 게다가 완투로 기록되지 않은 한 경기는 10회 2아웃 상황에서 교체되어 승패없음으로 기록되었다. 사실상 22완투.[17] 역시 9회까지 던져 승패없음으로 기록된 2경기가 있음.[18] 노모 이후 최고의 완투 머신이라 불린 마쓰자카가 가장 절정의 완투 능력을 보여주던 일본에서의 마지막 3년간의 완투율이 약 52.7%이다[19] 본래 이 번호는 앞서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가 아마추어 시절부터 줄곧 달아온 점을 들어 먼저 요청했지만, 당시 다저스의 투수코치가 달고 있어서 61번을 대신 선택했다. 노모가 입단할 때는 본래 16번을 달던 투수코치가 다저스를 떠난 후라서 별 무리 없이 노모의 등번호가 되었다.[20] 정작 노모는 긴테츠 시절부터 달았던 11번을 원했는데, 이것도 다저스의 한 코치가 달고 있어서 포기했다. 요컨대 박찬호와 노모 둘다 메이저리그에서 달았던 등번호는 자신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두 선수를 대표하는 번호로 남게 된 것이다.[21] 타자로는 이치로의 3년 1,400만달러가 이에 비견될 기록이다.[22] 노모의 1995시즌 fWAR 5.2는 아시아인 투수 단일 시즌 fWAR 1위 기록이다.[23] NL 2위는 9.02개를 기록한 존 스몰츠로 노모와는 2개 정도가 차이가 날 정도였다. AL까지 포함하는 양대리그 전체 1위로는 12.35개를 기록한 랜디 존슨이었고, 2위가 노모였다.[24] 본래 올스타전 선발 등판은 그렉 매덕스로 예정되었는데, 매덕스가 노모에게 양보하였다.[25] 1995년에는 노모의 투구폼을 따라했다면 2001년에는 이치로의 타격폼을 따라했다.[26] 현재까지 쿠어스 필드에서 기록된 유일한 노히터이다.[27] 로키스가 쿠어스를 홈으로 쓴다고 하더라도 파크팩터에 따라 조정스탯은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는데도 불과하고 당시 안드레스 갈라라가, 단테 비솃, 비니 카스티야, 앨리스 벅스 등 30홈런 이상을 친 타자가 4명이나 있는 로키스 타선은 당시 파크팩터 등을 보정한 조정기록으로도 1위를 달리고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타격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28] 다만 극장 자막에선 노모 대신 박찬호로 현지화(?)되었다(...). 두 사람을 경쟁자로 몰아가며 은근히 노모의 부진을 바라던 당시 언론의 분위기를 반영한달까.[29] 이 노히트 노런도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에서 기록된 유일한 노히트 노런이다.[30] 물론 무라카미도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이중계약 문제로 급격히 일본으로 복귀했다보니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한 관심을 가질 시간이 부족했다.[31] 엄밀히 따지면 '''노모가 최초의 진출자는 아니다.''' 무려 '''1960년대'''에 메이저리그를 밟아본 동양인 선수가 존재하는데, 난카이 호크스의 무라카미 마사노리라는 선수로, 난카이 구단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야구유학을 보낸 1964년 후반기 갑자기 메이저리그에 승격되었고 1965년은 74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75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준수한 릴리프투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계약 문제 등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1965년을 끝으로 일본으로 복귀했으며 이후 일본야구계로 복귀해서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남겼다.[32] 노모가 1994시즌 개막을 앞두고 어깨 통증을 호소하자 '''"지금까지는 네 부모가 준 어깨로 던졌으니, 지금부터는 너의 어깨로 던져라"'''라며 노모의 화만 돋구었다.[33] 엄밀히 말하면 편법으로 진출한 셈인데, 노모는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프로야구 사무국에 임의탈퇴를 통한 해외야구구단에 대한 원 소속구단의 선수보유권은 규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어필, 큰 잡음 없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34] 재일교포 3세 출신으로 한국이름은 일본 이름 한자과 비슷한 김의명(金義明). 통산 127홈런을 기록한 3루수이자 1989년 긴테쓰 우승 당시의 멤버. 1981년 하계 코시엔에서 4번 타자 겸 6경기 모두 완투한 에이스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유명해졌다. 후에 강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대두와 노모와 마찬가지로 스즈키 케이시와 나시다 마사타카 등의 코치진/구단 수뇌부와의 불화로 1994년 시즌오프 때 FA를 선언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으나(주니치 사상 최초로 FA로 타 구단에서 영입한 선수였다) 부상 등으로 먹튀로 전락. 결국 1996년 시즌오프 때 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이적해 1999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1998년 일본시리즈 6차전 때 병살타로 '''팀의 패배와 동시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38년 만에 구단 사상 2번째로 차지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희생양이 되었다''' 은퇴 후엔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활동 중.[35] 놀랍게도 스즈키 이치로랑 메이저리그 데뷔 나이가 같다.[36] 역으로 미국의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서는 노모, 사사키 카즈히로, 스즈키 이치로 등 일본에서 정점에 오른 뒤 비교적 늦은 나이로 메이저에 데뷔하는 선수들이 신인왕 타이틀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여론이 많아졌다. 이는 후에 마쓰이 히데키가 신인왕 수상에 실패하는데 큰 이유가 됐으며 이후 일본 선수들도 신인왕 투표에서 상당히 불이익을 받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다르빗슈 3위(war 2위), 마쓰자카 4위(war1위) 등} 그러다 2018년에 들어서 오타니 쇼헤이가 양키스의 안두하와 더불어 유력한 신인왕 후보가 되었는데 오타니가 성적이 제일 뛰어남에도 양키스쪽이 그럼 마쓰이는 왜 안줬냐는 식으로 들고 일어났고 양키스쪽 기자들도 오타니에게 투표하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오타니가 수상에 성공한다.[37]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노모와 박찬호의 통산성적 유사성 점수(Similarity Score)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38] 노모는 전부 선발승인데 반해 박찬호에 말년에 불펜으로 적립한 승리 꽤 있기 때문에 순수 선발승만 비교하면 오히려 노모쪽이 좀 앞선다.[39] 사실 이 책은 대량 회수되기도 했지만, 박찬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98~1999년에 대형할인마트에서 싼 값에 살 수도 있었다.[40] 오죽하면 딴지일보가 특집기사를 내면서 박찬호와 노모가 같이 사이좋게 서 있는 사진에 말풍선으로 이런 언론 보도를 비꼬는 기사를 내던 적까지 있다.[41] 박찬호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하객들은 30여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야구인은 공주고 동기동창 절친이었던 홍원기와 노모 히데오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박찬호가 자신의 '''비공개''' 결혼식에 초청한 단 두 사람의 야구인 중 한 사람이 노모였다는 사실과, 노모 또한 박찬호의 초대를 받고 하와이까지 날아가서 결혼식에 본인이 직접 참석했다는 사실을 통해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절친한 사이였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42] 실제로 포크볼은 야구의 여러가지 구종들 중에서도 특히 부상 위험이 높은 구종에 속한다. 노모가 포크볼의 위험성을 몰랐을 리는 만무하므로, 노모 입장에서는 이미 메이저 기준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포심을 가진 박찬호가 굳이 부상 위험이 높은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43] 실제로 이후 박찬호는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올라가지 못했다.[44] 일본 정부에서 문화계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최고권위의 상.[45] 사실 말년부터 군살이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