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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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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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로,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티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이다. 푸에르토리코와도 인접해 있다.
수도는 산토도밍고. 공용어는 스페인어. 국토면적 49,000㎢, 인구 약 1,000만 명. 주 경제원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커피와 담배, 설탕을 주로 생산한다. 니켈과 철광석, 금 등의 지하자원도 산출되고 있으며 직물과 시멘트 산업이 활발하고, 관광산업도 발달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북아메리카에서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 이어서 4번째로 부유한 국가이다.
남동쪽 카리브 해상에 '''도미니카 연방'''(Commonwealth of Dominica)이 위치하고 있다.[4][5] 명칭과는 달리 국토의 크기는 도미니카 연방이 도미니카 공화국보다 훨씬 작다.[6] 도미니카 연방의 경제 상황은 도미니카 공화국과 비슷하다. (2016년 기준) 1인당 GDP는 도미니카 연방이 도미니카 공화국보다 400달러가량 앞선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는 이래봬도 지하철이 다닌다. 이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지하철과 함께 카리브 해 지역의 둘뿐인 도시철도 시스템에 해당한다.
2. 역사
2.1. 근대 이전
원래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토착민인 타이노인이 살고 있었으나 15세기 스페인인에 의해 점령된 이후 '''아예 사라졌다'''.[7] 이에 따라 원래 50만여 명의 원주민 인구는 16세기 중반에는 수천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곧 이마저도 사라졌다. 다만 순혈이 사라진 것이고 혼혈 타이노족들은 아직 현존하고 있다.
16세기에 사탕수수 농장이 세워졌으나 에스파냐는 이곳보단 금과 은이 풍부한 남아메리카 본토에 더 관심을 가져 쩌리 처지를 면치 못했다. 18세기 이 섬의 서반부는 프랑스인들에게 점령되었지만 동부는 여전히 별 볼 일 없었다.
2.2. 근현대
1805년 독립한 아이티가 이곳을 쳐들어왔고 1809년 다시 에스파냐의 식민 치하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1821년 다시 독립했지만 바로 아이티가 이 곳을 침략해 지배하였다. 이후 22년간의 아이티 지배를 받고 1844년 독립하였다.
1930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대통령이 50번 바뀌고 쿠데타가 30번 일어나는 대혼란이 일어났으며 1869년, 도미니카 대통령 부에나벤추라 바에즈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거액의 부채를 지고 있는 도미니카를 미국이 합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또한 도미니카 합병론에 동조하였으나, 미 상원에서 찬반 28표로 당시 상원의석 74석 중 합방에 필요한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여 도미니카 병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미국이 1916년부터 24년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2.2.1. 트루히요 집권기 (1930~1961)
1930년 흑백혼혈 출신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1891~1961)가 집권했다.
트루히요는 독재정책을 펴 정적을 고문, 살해했고 강력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또한 경제를 발전시키기도 했으나 그와 그의 가족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를 지배해 쇠고기 수입업, 시멘트, 초콜릿, 담배, 커피, 우유, 쌀, 소금, 목재 등을 모두 차지하였고 수도 산토도밍고 시를 트루히요 시(Ciudad Trujillo)로, 최고봉 두아르테 봉을 트루히요 봉으로 개칭했다.
다만 환경보호라는 측면에서 트루히요는 꽤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적극적인 산림보호 정책을 취했기 때문. 오늘날에도 위성사진을 통해 산림파괴가 극심한 아이티와의 국경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정책의 동기는 자신이 산림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자국민들의 산림 벌채를 막은 것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득이 되었다.
1937년엔 아이티인 수만 명을 학살해 옆나라 아이티와 심각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50년대 이후로 트루히요의 인기는 떨어졌다. 트루히요는 가신들의 부인이나 누이를 강간하고. 공공연한 비밀처럼 행해진 일들인데, 그의 권력에 공포를 느낀 가신들은 분노하면서도 반항하거나 전말을 따지고 들 수 없었다. 라파엘 트루히요는 1961년 5월 30일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정적들에게 기관총으로 암살당했다.
2.2.2. 트루히요 사후 (1962~2000)
이후 군부와 미국 영사의 중재 하에 국가평의회가 구성되어 총선 때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을 임시 통치하였다. 1962년에는 1924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중도 좌파 성향의 후안 보슈(Juan Bosch)가 제43대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이양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1963년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인해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군부는 민간인 3두 체제 정권을 수립하여 19개월 간 도미니카 공화국을 간접 통치하였다. 군부의 지배 하에서도 정계 불안은 지속되었다. 민간인 3두 체제 정권은 1965년 보슈의 지지자들에 의해 전복되었으며, 이에 따라 보슈의 지지자들과 군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 내전이 발발하였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 4만 2천 명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주둔하고 미주기구(OAS) 평화군까지 개입하고 나서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사회 질서가 회복되었다. 임시정부는 엑토르 라파엘 가르시아(Héctor Rafael García)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966년 총선 때까지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맡게 하였다.
1966년 기독교 사회개혁당(PRSC)의 호아킨 발라게르(Joaquín Balaguer)가 보쉬를 누르고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라파엘 트루히요 독재 정권 하에서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엑토르 트루히요와 같은 괴뢰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독재 정권의 붕괴와 함께 들어선 국가평의회에 의해 실각한 뒤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괴뢰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이력은 임기 내내 행정부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했다. 또한 강권 통치로 인한 인권 침해 논란과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 개입, 무분별한 사법살인, 빈부 격차의 확산 등은 발라게르 행정부의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의 보수주의 정권은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와 막대한 원조를 바탕으로 ‘도미니카의 기적’이라 불리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실현시켰다. 광산 개발을 위한 외국 자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되 외국 자본에 대한 구조적 종속을 개선하고 농축산업 부문의 변화를 창출했으며 도로와 학교 등 다양한 사회 인프라를 확충함으로써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를 안정시켰다.
친환경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녹지 보호 정책을 펼쳐 강과 해안의 습지대를 보호 구역으로 설정하고 국립공원을 확대하는 등 환경 보호에 힘쓰기도 하였다. 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이 자랑하는 녹지의 대부분은 발라게르의 노력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라게르는 3선 연임을 통해 12년간 집권했으며 1986년 다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총 24년에 걸쳐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하였다. 그는 2002년 숨을 거두었으며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치세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78년 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PRD)의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Antonio Guzmán Fernández)가 승리하여 발라게르의 장기 집권을 무너뜨리고 제4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는 도미니카 공화국 역사에서 민정 간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전임 발라게르에 비해 온건한 혁신 정책을 펼치면서 공공 교통 환경 개선에 공을 들이고 군부 인사들과 직접 접촉하여 군부가 정계에 미치는 위협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들은 그의 취임과 함께 이어진 장기간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1979년에 불어닥친 허리케인 '데이비드'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페르난데스 행정부의 몫으로 돌려졌다. 페르난데스는 한 달여의 임기를 남긴 1982년 7월 4일 집무실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다음 임기는 부통령인 하코보 마흘루타(Jacobo Majluta)의 권한 대행을 거쳐 대통령 선거 당선자인 살바도르 호르헤 블랑코(Salvador Jorge Blanco)로 이어졌다.
제48대 대통령인 블랑코는 전임 페르난데스와 같은 도미니카 혁명당에 당적을 두고 있었다. 페르난데스 행정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이전부터 숱한 정치적 음모론을 낳았는데, 이는 페르난데스의 돌연한 자살을 기점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블랑코 행정부는 이러한 정략적 음해와 계속된 경제적 공황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임기가 끝난 뒤 밝혀진 군부와의 불법적 밀월 관계와 그로 인한 블랑코의 투옥은, 비록 후일 최종 무죄 판결이 내려지긴 하였으나 도미니카 혁명당의 부패한 인상을 심화시켜 많은 국민들을 반 혁명당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1986년 선거에서 국민들은 까마득한 전임자인 발라게르를 대통령으로 재선출함으로써 10년 가까이 이어진 혁명당 정권의 실정을 심판했다. 그는 이전 임기에서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되 보다 온건한 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공권력의 인권 침해 행태는 여전했으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호전됨에 따라 이후 치러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994년 선거에서는 그의 장기 집권에 불만을 품은 반대 세력의 저항과 거대한 부정선거 시비에 직면하여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그는 제정당, 사회 단체간 민주주의를 위한 협약(Pacto por la Democracia)에 따라 자신의 임기를 2년으로 단축시키고 연임을 배제하는 헌법 개정안을 수용하여 마지막 대통령직을 지내게 되었다.
1996년 선거에서는 제3당이던 도미니카 해방당(PLD)이 약진하여 레오넬 페르난데스 레이나(Leonel Fernández Reyna)를 제50대 대통령으로 배출하였다. 이는 레이나가 선거의 승리를 위해 당의 성향을 좌파에서 중도 우파로 전환함으로써 집권당인 기독교 사회개혁당과 기득권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결과였다.
레이나 행정부는 대외적으로는 국제 무대에 적극 참여하고 대내적으로는 부정부패 척결과 직업 공무원 제도 신설, 사법제도 개혁, 기술 인프라 개발과 거시경제적·통화적 안정성의 확대 등의 폭넓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책이 소수당의 의석 한계로 인해 실현되지 못한 채 레이나의 임기는 끝이 나고 말았다.
2.2.3. 21세기
2000년 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이폴리토 메히아(Hipólito Mejía)가 제5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은행 파산 및 그에 따른 심각한 경기 침체로 얼룩졌으며 이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2004년 선거에서 메히아는 재선에 실패했고 그의 전임자인 레이나가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2006년 총선에서 도미니카 해방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으며 레이나 또한 2008년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였다. 레이나 행정부는 ‘발전과 현대화’를 국가 비전으로 설정하여 산토도밍고 광역전철 개설 등 이전 임기에 충족시키지 못한 범국가적 기술 인프라 개발에 공을 들였다. 그는 고질적인 전력 수급난과 정계의 부정부패, 범죄율 증가 등의 국민 고충을 해결하지 못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불어 닥친 세계 경제 침체 속에서도 3.5%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 것과 2010년 아이티 지진의 재건 복구 과정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이 인접 국가로서 누린 경제 호황 등이 그의 정권 유지에 있어서 상당한 호재로 작용하였다. 2010년 그는 대통령 선거 및 하원 의석 규정 등을 수정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대통령 연임 횟수 제한을 철폐하는 대신, 재임 직후 연임을 금지하는 개정안에 따라 레이나는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도미니카 해방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그대로 이어졌다.
2012년 선거에서 도미니카 해방당의 다닐로 메디나(Danilo Medina)가 레이나의 뒤를 이어 무난히 제5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 메디나 행정부는 최소한의 인프라를 통한 교육·문화 여건 개선 등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한편 2010년 치러진 총선에서 도미니카 해방당은 도미니카 혁명당에 압승을 거두고 기독교 사회개혁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개혁당의 의석이 지속적으로 줄어듦에 따라, 도미니카 공화국 정계는 도미니카 혁명당과 도미니카 해방당을 양대 축으로 하는 새로운 양당 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기독교 사회개혁당은 과거 양대 정당으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2020년 대선 및 총선에서 16년 만에 정권을 교체하게 되었다. #
3. 외교
4. 군사
도미니카 공화국군은 카리브 해에서 쿠바군 다음으로 강한 군대이다.
5. 문화
5.1. 언어
공용어는 스페인어이고 스페인어는 도미니카인들의 모국어이다.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쓰이는 스페인어도 토착화가 된 경우가 많고 일부 표현에서는 스페인 쪽의 표현과는 다른 표현도 많다. 아이티와 접하고 있어서 아이티 크레올어가 도미니카 공화국 내의 아이티인 공통체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도 프랑코포니의 참관국에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과 관계가 깊은 국가이다보니 영어도 어느정도 쓰이고 있다.
5.2. 종교
인구의 80퍼센트 정도가 기독교 신자이다. 가톨릭이 70%, 개신교가 18%, 기타 종교가 2.3%를 차지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영향으로 가톨릭 문화가 뿌리내렸으며 도시마다 오래된 대형 성당을 볼 수 있다. 가톨릭 축일이 공휴일이기도 하다. 제3세계의 종교가 다 그렇긴 하지만 원주민 문화의 영향으로 이스파니올라의 가톨릭은 토착화된 측면이 많다.
5.3. 스포츠
5.3.1. 야구
최고 인기 구기 종목으로,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간단하게 Dominican Republic을 줄여 DR 혹은 D.R.이라고도 불리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선수들이 상당히 많다. 더불어 이 나라는 '''가장 큰 야구선수 수출국'''. 역대 메이저리거 선수가 2019년까지 무려 '''603'''명이나 된다. 이는 본고장 미국 다음에 세계 2위로 해외에서 압도적인 1위이다. 3위인 베네수엘라도 역대 메이저리거가 391명이라는 걸 생각하면[8] 도미니카 공화국이 가진 이 기록은 깰 나라가 없어 보인다. 2014년에는 메이저리거 '''102명'''이 도미니카 공화국 국적 선수였고 여전히 미국 선수 다음으로 이 나라 국적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많다.
이렇게 선수 수요층도 많다보니 내실도 튼튼하고 야구 실력은 세계적이기에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회사상 처음으로 8전 전승 우승하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도미니카가 우승한 게 이변"이라고 JTBC에서 보도 해설이 나왔다가 온갖 비웃음을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데 야구가 인기가 많아지고 선수층이 많아진 이유 중 하나가 씁쓸하게도 독재자 때문이었다.[9] 물론 이전에도 야구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있었지만 경제적이라든지 여러 모로 떨어져 야구선수가 벌어먹기 어려운 터라 프로 리그라든지 여러 모로 큰 활성화가 되지 않았는데 라파엘 트루히요가 권력을 잡으면서 불만을 야구로 돌리게 했다. 트루히요는 기업 및 부유층에게 야구팀을 강제적으로 창단시키게 하고 리그를 활성화하며 유소년 야구팀 창단 및 리그를 열게 하며 도미니카 야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덕분에 도미니카에서 좀 잘 산다고 하면 닥치고 야구단 창단 안 하면 매장당할 각오하라고 협박을 가했기에... 많은 지역 팀이 창단되고 야구경기장을 갖추게 된 거였다. 그가 기관총에 암살당한 후에도 야구는 그대로 자리를 잘 잡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의 야구 캠프와 겨울의 윈터리그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선수들이 와서 야구 경기를 갖고 달러를 푸는 중요한 국가 수입원이다. 심지어 이 나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조차도 메이저리거 유명 선수들을 함부로 무시 못한다고 한다.[10] LIDOM이라는 자국 프로야구 리그가 있긴 하지만 경제적으론 그냥 푼돈 벌어먹는 수준. 하지만 이 리그 수준 자체는 한국프로야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버는 돈은 KBO가 수십배에서 100배는 많다... 때문에 해외 리그 진출이 여기에서 뛰는 많은 선수들의 목표이다.
그래서 야빠들에게는 나라의 경제력이나 인지도에 비해 상당히 친숙한 나라이다. 특히 이 나라의 산페드로 데 마코리스(San Pedro de Macoris)라는 동네는 다수 메이저리거를 배출해서 미국의 메이저리그의 오덕들에게는 상당히 친숙한 지명이다. 이 동네 출신의 유명 선수로 페드로 마르티네즈, 새미 소사, 알폰소 소리아노, 한만두의 페르난도 타티스, 호세 발베르데, 한 때 삼성에서 좀 뛰었던 살로몬 토레스, 기예르모 모타, 로빈슨 카노 등이 있다.
09 시즌 KIA 타이거즈의 아킬리노 로페즈, 펠릭스 호세 선수도 이 나라 출신이며, 그 때문에 수많은 팀들[11] 이 10시즌 도미니카 용병을 구하러 스카우트단을 파견했다(...). 2015시즌에는 LG 트윈스의 헨리 소사, 루이스 히메네스, 삼성 라이온즈의 야마이코 나바로, 한화 이글스를 거쳐 현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 에스밀 로저스, 이글스의 역대 최고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인 윌린 로사리오, 2017 시즌 한화에서 뛴 알렉시 오간도, 카를로스 비야누에바, kt wiz의 앤디 마르테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으로 KBO 리그에서 뛰었다. 그 중 나바로와 로저스는 '''같은 동네 출신이다.''' 2020년 10월 26일 kt wiz의 멜 로하스 주니어, 두산 베어스의 라울 알칸타라는 KBO에서의 활약으로 모국 대사관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한다고 한다. CNN에서 도미니카 빈민가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나무 막대기로 돌을 쳐가며 야구를 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덕분에 쿠바와 더불어 야구는 장비가 제대로 없으면 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뒤엎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선 야구 잘하면 출세하는 셈. 자메이카에서 육상 잘하면 출세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야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 신분 위조까지 거리낌없이 자행하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팬들은 자기팀의 도미니카 선수들에 대해선 나이를 거의 안 믿는다. '''나이는 약과고 아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훌리오 프랑코도 알려진 것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말이 있었다. 훌리오 프랑코는 삼성에 왔을 당시 3할2푼7리(477타수 156안타) 22홈런 110타점 79득점 12도루라는 최정상급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때 공식적인 나이가 40살이었다(...). 진짜로 실제 나이가 더 많다면 KBO 사상 최고령급 나이에 저런 성적을 냈다는 거다. 반면 아드리안 벨트레의 경우는 나이를 오히려 늘려서 문제가 됐다. 2000년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투수 파우스토 카모나는 2007년 23살 나이에 19승을 거둔 전도유망한 에이스였는데, 알고 보니 '파우스토 카모나'라는 이름과 나이 모두가 가짜였고, 실제 신상 정보는 위조된 나이보다 3살이나 많은 '로베르토 에르난데스'였다. 비슷한 야구 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그나마 행정 체계가 잘 잡혀서 나이를 속이는 사례는 도미니카에 비해 매우 적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도미니카 야구 유망주들도 유럽의 아프리카 축구 유망주들처럼 성공을 못하면 나몰라라 방치당하는 폐해가 일어나고 있단 거다. 이 나라의 많은 야구 유망주들이 미국에 가기 위하여 에이전트에게 온갖 고생하며 모은 돈을 바치는데, 개중에는 사기꾼도 많아서 문제이기도 하고, 설사 사기꾼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미국에서 스카웃되지 않으면 에이전트들이 놔두고 홀로 와버려 미국에 그냥 남겨진다고 한다. 최악의 경우 그냥 미국에서 갱이 되든지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미국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마치 유럽에서 아프리카 축구 유망주들이 이렇게 되는 일이 미국에서도 야구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미국에서 어중간히 뛰다가 실패할 거 같으면 그냥 바로 외국으로 직행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 같은 경우는 외인 보유 한도가 무제한이다보니 NPB 팀에 육성선수로 입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도미니카 물가를 감안하면 용병으로 1년만 제대로 뛰어도 거의 평생 먹고 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다 보니... 사실 도미니카 유망주들은 해외에 나가서 용병으로 거액을 받아오는 것 외에 메이저리그만 밟아도 대박을 치는 거다. 메이저리그에 43일만 콜업되어도 평생 연금이 나오는데, 그 연금의 최저 액수도 도미니카 공화국 1인당 GDP의 3배가 넘는다. 또한 딱 1년만 풀타임 메이저리그로 뛸 때 받는 연봉이 최소 5억이다. 이 돈은 도미니카 공화국 1인당 GDP의 50배가 넘는다. 즉 죽어라 야구해서 메이저리그에서 딱 1년만 풀타임으로 뛰고 은퇴해도 도미니카에서 평생 일하는 것과 똑같은 돈을 버는데다, 노년기에는 도미니카의 다른 직장인들의 몇 배나 되는 연금을 평생 받는다. 물론 메이저리거는 못 된다 쳐도 일본이나 한국, 대만 리그만 가도 초대박이고 이 4대리그보다 훨씬 떨어져도 멕시코 리그같은 곳도 자국 리그보다 벌이가 더 좋은 편이라 여기라도 오게 된다. 한국에서 제법 이름 날리고 간 펠릭스 호세만 해도 당시 도미니카에 있는 집을 찾아간 한국 기자들도 풀장이 따로 있고 개인 야구연습장까지 갖춘 2층짜리 대형 단독주택에 5대 외제 차량을 소유하고 고용한 메이드나 집사같은 사람도 10명이 넘을 정도라고 보도할 정도로 꽤 부유층이었다.
사실 야구로 제대로 리그가 자리잡히고 그만큼 경제적 수익을 거둘 나라가 별로 안 되기에 이것도 어렵긴 하지만, 도미나카 공화국에서 그래서인지 일본과 한국, 대만처럼 좀 뛰면 제대로 돈을 벌 야구 리그가 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야구계에서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도미니카 공화국을 여행하다 보면 동아시아인 관광객을 보고 일본? 한국? 대만? 이렇게 관심 가지는 이들도 종종 있다. 만약에 프로야구 쪽 일하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가면 반색하며 자기나 아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라고 달라붙기도 한다....
5.3.2. 농구
더불어 농구도 중미 나라에서 상당한 강호급이다. NBA 보스턴 셀틱스의 주전 센터 알 호포드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2012년 FIBA 세계농구랭킹은 25위로 35위였던 한국보다 위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2012 런던 올림픽 최종 플레이오프 예선에서 맞붙게 되었다. 한국에선 도미니카와 러시아가 한국과 같은 조가 되자 '야구라면 몰라도 농구는 아무래도 쉽다. 러시아는 힘들고 도미니카를 제물 삼아 8강은 올라가겠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는데[12] 국제농구연맹(FIBA) 홈페이지에선 한국이 가장 불리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결국 한국을 95-85로 이기고 8강에 진출해 마케도니아까지 86-76으로 이기며 4강에 진출하면서 올림픽 본선 진출하는가 했더니만 강호 리투아니아에게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고 여기서도 나이지리아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3위까지 진출하는 올림픽 본선진출을 놓친 아쉬운 4위로 마무리했다.
2014 FIBA 농구 월드컵 스페인 대회 예선이자 대륙대회인 2013 FIBA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에서 멕시코-푸에르토리코-아르헨티나에 이어 4위를 차지하며 본선에 진출해 농구월드컵 16강을 거둬들였다.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에서는 2011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게 최고성적. 2015년 대회는 6위를 차지했다.
5.3.3. 배구
여자 배구도 수준급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FIVB 세계랭킹 8위에 올라있는데 세계 랭킹 2위인 미국 다음으로 북중미에서 두번째로 강한 팀이다. 과거 쿠바가 저 위치에 있던걸 도미니카 공화국이 착실히 따라잡아 저 위치에 올라온 것. V-리그 2013-14 시즌 GS칼텍스 서울 KIXX의 우승 주역 용병 베타니아 데 라 크루스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다.
5.3.4. 축구
야구가 워낙 인기가 많고 출세 지름길이다 보니 대만과 비슷하게 축구가 야구에게 아주 외면당하는 정말 얼마 안 되는 나라이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축구 중계를 아예 하지 않아서 극소수로 거주하는 교포들이 월드컵 소식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에드워즈 에스피날(Vinicio Edwards Espinal Marte, 1982년 생)이라는 선수가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아탈란타 BC에서 1999 ~ 2004년까지 뛴 적이 있기도 하다. 도미니카 국대 축구선수로 나름 활약은 했지만, 2003년부터 세리에 하위리그팀으로 임대되어 세리에 B(2부리그), 세리에 C(3부리그), D(4부리그) 같은 하위팀들에서 활약한 걸 보면 그렇게 이름을 날린 선수도 아니었다. [13]
이러니까 국대 축구 대표팀 실력도 당연히 하위권. FIFA 월드컵이나 골드컵에서는 본선에 오른 적이 전혀 없다. 그나마 중미 지역대회인 카리브컵은 가끔 토너먼트 진출이라도 간간히 하는 등 여기에서만큼은 성적은 그럭저럭 거둬서 2013년에는 피파랭킹이 78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자세한 건 도미니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를 참고할 것.
6. 기타
남부의 작은 마을 "살리나스"(Salinas)에서는 '''게베도세스'''(Guevedoces)라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7~12살이 되는 여자아이들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남성의 생식기가 자라나는 것(...). 이 동네에서는 여자아이 90명 중 한 명 꼴로 사춘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성전환(!)이 일어난다고 한다. 성적 지향은 일반적으로 이성애. 이 희귀한 현상의 원인은 5알파-환원효소(5-alpha-Reductase)의 선천적 결핍으로, 자궁 내에서 제대로 음경이 발달하지 못한 채 태어난 뒤에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발달이 마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케이스는 고환이 존재하고 질이 없기 때문에, 평범한 여자아이들에 비해서 아주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관련기사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스트리트 파이터 V가 국민 대전 액션 게임 취급을 받고 있다는 듯 하다. 캡콤컵 2017 우승을 거머쥔 메나 RD도 이 나라 출신(메나 본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캡콤컵에서 받은 상금인 25만 달러는 도미니카 공화국 내에서 어지간한 회사원의 '''100년''' 연봉과 맞먹는다고[14] ). 이 때문인지 이 나라에서 열리는 '게임 오버(Game Over)' 격투 게임 대회는 Capcom Pro Tour에서 브라질이나 멕시코 같은 쟁쟁한 국가들의 대회들을 제치고 2019년부터 단 둘 뿐인 프리미어(1급) 대회로 격상되었다.[15]
2017년 언론자유지수는 26.76점으로 59등을 차지했다.
현재 가장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시민권을 딸 수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10만 달러 정도를 지불하거나(이 비용은 돌려받을 수 있음), 20만 달러 이상의 부동산에 투자하면(다시 돌려받을 수 있음) 거의 즉시 아무런 제한 없이 시민권, 즉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시민권 값이 집값보다 싼 셈. 최소 거주 기간은 없다.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 여권으로는 110여개국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우리나라야 이중국적이 허용이 안되니 해당사항이 없지만, 이중국적이 허용되는 몇몇 선진국들의 부자들의 경우, 각종 절세(?)를 위해 이런 나라의 시민권을 발급받기도 한다.
7. 창작물에서의 도미니카 공화국
- GTA 4 두 번째 확장팩인 발라드 오브 게이 토니의 주인공이자 역대 GTA 시리즈 최연소 주인공[16] 인 루이스 페르난도 로페즈가 이 나라 출신이라는 설정.
- 캡콤의 프로레슬링 게임 머슬 보머 시리즈의 등장인물인 MISSING IQ 고메스도 이 나라 출신.
- 인 더 하이츠 뮤지컬 인더 하이츠에서 주인공 우스나비가 도미니카 출신이다.
- 지부티와 함께 덴마크의 회색 코끼리에 안 걸리는 나라이다.
- 분노의 질주: 더 세븐에서 브라이언 오코너의 가족들이 잠깐 은신처로 갈 때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온다.
-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의 등장인물 호세 마르티네스가 도미니카 출신이다. 직업은 마사지사이지만 실제로는 고문가로, 고문 과정에서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1] [결함있는민주주의] 6.32점[2] 흔히 물라토라고 부른다[3] 주로 아이티계[4]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나라이지만 한국명으로 둘 다 도미니카로 시작되어서 양국을 혼동하는 한국인이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도미니카 연방보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지도가 더욱 높기에 일반적으로 도미니카라고 하면 도미니카 공화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5] 도미니카 연방은 과거 영국 식민지였기에 영어를 공용어도 한다.[6] 도미니카 연방의 연방(commonwealth)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연방(federation)이 아니라 독립국가연합(Содружество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혹은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할 때의 연방이다. 한자는 똑같이 쓰긴 하는데 사실상 의미가 많이 다르다. 그리고 영연방 문서에 서술되었듯 commonwealth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하기 난해한, 많은 함축적 의미를 담은 단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연방'과 일치하는 영단어는 'federation'이나 소련의 'union'이다.[7] 참조: 제러드 다이아몬드 저 총, 균, 쇠[8]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구는 1천만을 조금 넘지만 베네수엘라의 인구는 3천만에 가깝다. 인구에 비례하면 엄청난 인원이다.[9] 물론 이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한국 프로야구와 K리그가 출범한 시기가 전두환 정권 때였단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야말로 갑자기 후다다닥 프로리그를 열면서 두 리그 모두 시작부터 문제점이 많았다.[10] 이들이 내는 세금도 경제적으로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새미 소사가 조국으로 돌아올 때 대통령 담화까지 취소할 정도였다. 언론들이 그를 취재해야 하니까. 정치인들도 얼른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때론 정계 홍보에 써먹고자 인맥을 두려고 하기에 이런 걸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11] 09시즌이 워낙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점도 있었기도 하다(...)[12] 12개 나라가 참가해 최종 1~3위까지 모두 3개 나라가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다. 우선 3개씩 4개조로 이뤄 2팀씩만 8강에 나간다.[13] 차후 국적 포기.[14] 단 이 항목 맨 위에 있는 1인당 GDP와 비교했을 때는 35년어치 연봉 정도인데, 이러한 이야기를 봤을 땐 상술된 것처럼 빈부격차가 상당한 듯.[15] 다른 하나는 푸에르토리코의 '퍼스트 어택(First Attack)'.[16] 다만 유일한 건 아니고 동년배인 차이나 타운의 황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