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 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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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신 전직 메이저리거.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부상과 저니맨 생활로 먹튀가 된 비운의 선수.
현역 시절 별명은 멕시칸 로켓.
1991년 16세의 나이로 LA 다저스와 계약, 1994년 6월 15일 데뷔했다. 데뷔 당시 박찬호를 1개월 차로 제치고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가 되었으며, 데뷔 이전 1992년에는 고국 멕시칸 리그에 임대되어 팀을 우승시켰다. 당시 박찬호, 대런 드라이포트와 영건 3인방으로 불렸다.
1995년부터 선발진에 합류해 10승에 200이닝 가까운 성적을 거두며 전성기를 열었고, 1996년에는 15승 220이닝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당시 라몬 마르티네즈와 노모 히데오가 각각 15승, 16승을 거두면서 이 둘과 묶여 다국적 트리오로 불렸다. 어쨌든 포스트시즌까지 이끌지만, 다저스는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1997년에도 레귤러 선발로 활약했는데, 이 시즌부터 박찬호가 선발진에 끼면서 다저스의 선발진에 미국인이 한 명도 없는 진풍경이 나온다. 하지만 1999년부터 슬슬 하락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MLB가 KBO 리그 못지않게 타고투저였던지라 3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2] 에 200이닝+는 어쩌면 준수한 성적이었는데, 10승을 달성하지 못했고, 세부 내용 또한 이전만 못했다. 어쨌든 이 해는 케빈 브라운-박찬호와 삼각편대를 이뤄 활약했는데, 이 삼각편대 또한 많이 알려진 편이다. 다만 당시 박찬호가 부진했던 게 흠이랄까.
그러나 시즌 막바지인 9월 말, 그는 허리에 부상을 입게 되고 이것이 그의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1999년 12월 12일, 케빈 브라운과의 1억짜리 계약 때문에 페이롤이 너무 올라 있었던 다저스는 발데스를 시카고 컵스에 트레이드시켰다. 발데스는 5월 초 복귀했는데, 꼴랑 2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죽쒔다. 그러다 2000년 7월 26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커트 실링이 트레이드되자 LA 다저스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데스를 다시 트레이드해왔다. 팬들은 작년의 삼각편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발데스는 하락세가 완연했다. 신예였던 에릭 가니에를 밀어내고 선발에 합류하긴 했는데, 승리를 한 번도 기록하지 못하고 3패만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 결국 삼각편대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발데스는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1년 250만 달러 계약을 맺고 이적했으나 부진했고, 이듬해 텍사스 레인저스와 같은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마침 텍사스에는 얼마 전 박찬호가 FA로 합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재회하더니 서로 사이좋게 먹튀가 되었고, 8월 19일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된다. 시즌 후 얻은 FA에서 다시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고, 좀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초 박찬호를 밀어내고 1선발로 등극했지만... 시즌이 끝나고 그의 평균자책점은 6점대가 되어 있었다. 팔꿈치가 문제였다.
이후 2004년 또 FA를 얻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갔다가, 거기서 마이애미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어 2005년 방출되었다.
2006년 WBC에 멕시코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2013년에는 21년 만에 멕시칸 리그로 복귀했는데, 1승 1패 ERA 10.80을 기록하고 은퇴하였다.
박찬호와 접점이 많다. 같은 1973년생 팀메이트,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같이 먹튀가 되고... 근데 박찬호 전성기 시절 발데스가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안 좋다고 한다. 한국에서 앙숙의 라이벌리로 밀던 노모 히데오보다, 어쩌면 이쪽이 앙숙의 라이벌리에 더 근접할지도. 이외에도 자기가 안 좋을 때 잘 나가던 동료들을 비난한 거 보면 그냥 소인배인듯.
한국에서는 발데스의 박찬호 비난 이전에도 노모랑 붙어다닌다고 발데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노모 따라 CF 따려는 거라니 어쩌니 하는 말이 따라다니곤 했다.
미첼 리포트에 따르면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즉 약쟁이. 재미있는 건 이거 맞은 게 2002년인데, 발데스는 그럼에도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
1. 개요
멕시코 출신 전직 메이저리거.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부상과 저니맨 생활로 먹튀가 된 비운의 선수.
현역 시절 별명은 멕시칸 로켓.
2. 현역 커리어
2.1. LA 다저스에서의 전성기
1991년 16세의 나이로 LA 다저스와 계약, 1994년 6월 15일 데뷔했다. 데뷔 당시 박찬호를 1개월 차로 제치고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어린 선수가 되었으며, 데뷔 이전 1992년에는 고국 멕시칸 리그에 임대되어 팀을 우승시켰다. 당시 박찬호, 대런 드라이포트와 영건 3인방으로 불렸다.
1995년부터 선발진에 합류해 10승에 200이닝 가까운 성적을 거두며 전성기를 열었고, 1996년에는 15승 220이닝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당시 라몬 마르티네즈와 노모 히데오가 각각 15승, 16승을 거두면서 이 둘과 묶여 다국적 트리오로 불렸다. 어쨌든 포스트시즌까지 이끌지만, 다저스는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1997년에도 레귤러 선발로 활약했는데, 이 시즌부터 박찬호가 선발진에 끼면서 다저스의 선발진에 미국인이 한 명도 없는 진풍경이 나온다. 하지만 1999년부터 슬슬 하락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MLB가 KBO 리그 못지않게 타고투저였던지라 3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2] 에 200이닝+는 어쩌면 준수한 성적이었는데, 10승을 달성하지 못했고, 세부 내용 또한 이전만 못했다. 어쨌든 이 해는 케빈 브라운-박찬호와 삼각편대를 이뤄 활약했는데, 이 삼각편대 또한 많이 알려진 편이다. 다만 당시 박찬호가 부진했던 게 흠이랄까.
그러나 시즌 막바지인 9월 말, 그는 허리에 부상을 입게 되고 이것이 그의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2.2. 저니맨 생활과 먹튀
1999년 12월 12일, 케빈 브라운과의 1억짜리 계약 때문에 페이롤이 너무 올라 있었던 다저스는 발데스를 시카고 컵스에 트레이드시켰다. 발데스는 5월 초 복귀했는데, 꼴랑 2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죽쒔다. 그러다 2000년 7월 26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커트 실링이 트레이드되자 LA 다저스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데스를 다시 트레이드해왔다. 팬들은 작년의 삼각편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발데스는 하락세가 완연했다. 신예였던 에릭 가니에를 밀어내고 선발에 합류하긴 했는데, 승리를 한 번도 기록하지 못하고 3패만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 결국 삼각편대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발데스는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1년 250만 달러 계약을 맺고 이적했으나 부진했고, 이듬해 텍사스 레인저스와 같은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마침 텍사스에는 얼마 전 박찬호가 FA로 합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재회하더니 서로 사이좋게 먹튀가 되었고, 8월 19일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된다. 시즌 후 얻은 FA에서 다시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고, 좀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초 박찬호를 밀어내고 1선발로 등극했지만... 시즌이 끝나고 그의 평균자책점은 6점대가 되어 있었다. 팔꿈치가 문제였다.
이후 2004년 또 FA를 얻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갔다가, 거기서 마이애미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어 2005년 방출되었다.
2006년 WBC에 멕시코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2013년에는 21년 만에 멕시칸 리그로 복귀했는데, 1승 1패 ERA 10.80을 기록하고 은퇴하였다.
3. 기타
박찬호와 접점이 많다. 같은 1973년생 팀메이트,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같이 먹튀가 되고... 근데 박찬호 전성기 시절 발데스가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안 좋다고 한다. 한국에서 앙숙의 라이벌리로 밀던 노모 히데오보다, 어쩌면 이쪽이 앙숙의 라이벌리에 더 근접할지도. 이외에도 자기가 안 좋을 때 잘 나가던 동료들을 비난한 거 보면 그냥 소인배인듯.
한국에서는 발데스의 박찬호 비난 이전에도 노모랑 붙어다닌다고 발데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노모 따라 CF 따려는 거라니 어쩌니 하는 말이 따라다니곤 했다.
미첼 리포트에 따르면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즉 약쟁이. 재미있는 건 이거 맞은 게 2002년인데, 발데스는 그럼에도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