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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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úl Ruiz'''
(1941. 7. 25 - 2011. 8. 19)
칠레 출신의 영화감독. 초현실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1941년 칠레 남부 푸에르토몬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100편이 넘는 희곡을 쓰는 등, 왕성하게 창작력을 발휘했다. 대학에서는 신학과 법학을 배우고 있었으나, 창작 활동을 위해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8년, <세 마리 슬픈 호랑이>로 장편 데뷔를 한다. 이후 이 영화는 196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하고, 이후 루이즈는 칠레 영화계의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그는 파트리시오 구즈만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등과 더불어 칠레의 뉴웨이브 운동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 되었으며, 점차 국제적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군사 독재 정부가 수립되자 루이즈는 유럽으로 망명하였고, 조국이 민주화되기 이전까지는 칠레 땅을 밟지 못했다.
유럽으로 망명한 루이즈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 루이즈는 거의 유럽 전역을 오가며 영화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영화를 제작했다. 이러한 다작의 경력 속에서 루이즈는 시네필들을 중심으로 점차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어가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존 말코비치 등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배우들을 기용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가 온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가던 루이즈는 2011년,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한밤중의 거리>를 유작으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국 칠레에서는 그의 사망 이후 국가 애도 기간이 있었다고 한다.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하다. IMDb 기준 무려 119편이다. 이는 루이즈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영화 제작 의뢰를 거의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도 여러 편의 작품을 찍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1] 이런 탓에 그의 필모그래피엔 TV 시리즈와 같은 작품들도 많다. <마누엘의 운명>이나 후기 대표작 <리스본의 미스터리> 등이 대표적이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연구나 비평이 까다로운 감독으로 꼽힌다. 대체로 1980년대 초중반이 예술적 전성기로 꼽히며, 유명 배우들이 참여한 1990년대 작품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편.
루이즈는 영화 이론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인 『영화 시학』을 출판했으며, 유럽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적인 스타일이나 연출을 즐겨 사용한다는 점에서 루이스 부뉴엘과 비교되기도 하며[2] , 기억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알랭 레네와 비견되기도 한다. 또한 메타픽션 등을 이용한 실험적 내러티브나 바로크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 또한 루이즈 작품의 주된 특징으로 지적된다.
취미가 상당히 독특했는데, 촬영 중 쉴 때마다 틈틈이 중세의 마녀 재판 관련 문서를 읽는다거나 유언장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루이즈 영화에서는 죽음이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직 국내에서 그다지 유명한 감독은 아니지만,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회고전이나 시네마테크 상영 등을 통해 일부 작품들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클림트>와 <블라인드 리벤지>가 국내에 개봉한 적이 있다.
루이즈 사후, 자금 문제 등으로 인해 그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두 편의 영화인 <길 잃은 드라마>와 <홀아비의 탱고>가 루이즈의 부인인 영화감독 발레리아 사르미엔토에 의해 완성되었다. 현재 전자는 공개된 상태이며, 후자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발레리아 사르미엔토는 생전 루이즈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창작 동반자였고, 본인도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만 기재했다.
'''Raúl Ruiz'''
(1941. 7. 25 - 2011. 8. 19)
1. 개요
칠레 출신의 영화감독. 초현실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2. 생애
1941년 칠레 남부 푸에르토몬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100편이 넘는 희곡을 쓰는 등, 왕성하게 창작력을 발휘했다. 대학에서는 신학과 법학을 배우고 있었으나, 창작 활동을 위해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8년, <세 마리 슬픈 호랑이>로 장편 데뷔를 한다. 이후 이 영화는 196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하고, 이후 루이즈는 칠레 영화계의 대표적인 젊은 감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그는 파트리시오 구즈만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등과 더불어 칠레의 뉴웨이브 운동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 되었으며, 점차 국제적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군사 독재 정부가 수립되자 루이즈는 유럽으로 망명하였고, 조국이 민주화되기 이전까지는 칠레 땅을 밟지 못했다.
유럽으로 망명한 루이즈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 루이즈는 거의 유럽 전역을 오가며 영화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영화를 제작했다. 이러한 다작의 경력 속에서 루이즈는 시네필들을 중심으로 점차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어가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존 말코비치 등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배우들을 기용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가 온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가던 루이즈는 2011년,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한밤중의 거리>를 유작으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국 칠레에서는 그의 사망 이후 국가 애도 기간이 있었다고 한다.
3. 기타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하다. IMDb 기준 무려 119편이다. 이는 루이즈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영화 제작 의뢰를 거의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도 여러 편의 작품을 찍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1] 이런 탓에 그의 필모그래피엔 TV 시리즈와 같은 작품들도 많다. <마누엘의 운명>이나 후기 대표작 <리스본의 미스터리> 등이 대표적이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연구나 비평이 까다로운 감독으로 꼽힌다. 대체로 1980년대 초중반이 예술적 전성기로 꼽히며, 유명 배우들이 참여한 1990년대 작품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편.
루이즈는 영화 이론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인 『영화 시학』을 출판했으며, 유럽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적인 스타일이나 연출을 즐겨 사용한다는 점에서 루이스 부뉴엘과 비교되기도 하며[2] , 기억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알랭 레네와 비견되기도 한다. 또한 메타픽션 등을 이용한 실험적 내러티브나 바로크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 또한 루이즈 작품의 주된 특징으로 지적된다.
취미가 상당히 독특했는데, 촬영 중 쉴 때마다 틈틈이 중세의 마녀 재판 관련 문서를 읽는다거나 유언장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루이즈 영화에서는 죽음이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직 국내에서 그다지 유명한 감독은 아니지만,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회고전이나 시네마테크 상영 등을 통해 일부 작품들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클림트>와 <블라인드 리벤지>가 국내에 개봉한 적이 있다.
루이즈 사후, 자금 문제 등으로 인해 그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두 편의 영화인 <길 잃은 드라마>와 <홀아비의 탱고>가 루이즈의 부인인 영화감독 발레리아 사르미엔토에 의해 완성되었다. 현재 전자는 공개된 상태이며, 후자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발레리아 사르미엔토는 생전 루이즈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창작 동반자였고, 본인도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4. 필모그래피
대표작만 기재했다.
- <세 마리 슬픈 호랑이> (1968)
-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 (1979)
- <영역> (1981)
- <고래 위에서> (1982)
- <항해사의 세 왕관> (1983)
- <해적들의 도시> (1983)
- <마누엘의 운명> (1984)[T]
- <마맘므> (1986)
- <눈먼 올빼미> (1987)
- <세 번의 삶과 한 번의 죽음> (1996)
- <되찾은 시간> (1999)
- <클림트> (2006)
- <리스본의 미스터리> (2010)[T]
-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한밤중의 거리> (2011)
[1] 참고로, 젊은 시절 루이즈의 목표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칠레 영화의 수보다 더 많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2] 루이즈는 실제로 부뉴엘의 멕시코 시절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밝힌 적 있다.[T] A B TV시리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