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
- 카드파이트!! 뱅가드의 등장 카드에 대해서는 초월룡 드래고닉 누벨바그 항목 참조.
1. 프랑스의 영화적 경향
프랑스어: La Nouvelle Vague
영어: French New Wave
1.1. 개요
5-60년대 영화사의 페이지를 장식한 경향.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이란 뜻.[1]
기존의 무성영화들이나 유성영화들을 보아온 세대들이 새롭게 시작한 저항이라는 뜻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모든 특징은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으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사상적 배경으로는 사르트르와 알베르 까뮈의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전통, 정치적 참여, 관념주의 등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존재에 관심, 자유를 빼앗는 것과의 투쟁, 인간성의 해방 등이 특징이며 이야기 구조의 느슨함과 개방성, 즉흥, 야외촬영, 저예산, 후시녹음 등등 파격적인 시도가 많았다.
1.2. 발생과 결별
누벨바그의 발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예 뒤 시네마이다. 그 이전에는 씨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누벨바그의 작가들은 이 잡지에 영화에 관한 글을 기고하던 일종의 칼럼니스트였으며, 기존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틀[2] 에 대해서 비판하는 논조의 글들을 자주 기고하였다. 즉 프랑스에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나 할리우드식 고전주의 스타일의 프랑스 영화가 범람하는 것을 매우 언짷게 보았다.
그들은 기존 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작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감을 직접적으로 투영하는 스타일에 대해 논의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직접 현장에 나가서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작가주의' 논쟁을 탄생 시킨 것을 유명, 작가주의는 누벨바그 감독들이 만드는 이론적 근거이며, 기성세대의 비판하는 도구였지만. 밑에서 말하는 영화의 여러 특징 중, 주제와 스타일만 중시했고, 작가라는 기준에만 편견을 치우칠 수 있다는 한계점을 지녔다.
일례로 '작가주의'에서는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비평을 하는데 이것은 지나친 감독 위주의 미학적 판단이 될 수 있다. 영화 써니에서는 백합적 코드가 나왔고 감독은 별 생각없이 집어넣었지만, 정작 작가주의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감독에게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후 새로운 유럽 감독들이 등장했고(로베르 브레송, 잉그마르 베르히만, 루이스 부뉘엘 등) 특이한 예술적 상상력과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감독 중심의 영화발전을 꾀했다.
이런 누벨바그 감독들은 68운동을 끝으로 결국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실험 정신과, 만들어진 작품은 뒤 세대에게 끊임없는 논란과 영향을 끼치고 있다.
1.3. 특징
간단하게 말하면,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잘 만들어진 소위 "웰-메이드" 영화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동시녹음을 통해 일부러 엉성하고 낯선 영화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누벨바그 영화들은 기존의 영화 공정과정이 가지고 있던 특징인 '사전에 미리 해놓는 준비'라는 과정을 최소화 하고 촬영 현장에서 즉각 생성되는 이미지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었다. [3]
현장에서의 영감을 중요시한 누벨바그 작가들은 컨티뉴이티의 사용을 최소화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기존의 완벽하게 짜여진 컨티뉴이티를 데꾸빠쥬(découpage)라고 구분하였다. 누벨바그 작가들은 현장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후반에 적소로 편집하는 방법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영화 이론가들이 만든 몽타주를 선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발생하였다.
- 삼각대를 쓰지않고, 핸드헬드로 촬영하기에 카메라의 초점이 흔들린다. 당시는 스테디 캠이 나오지 않았을 때다.
- 연기자가 카메라 앵글을 보면서 말한다. 동영상 속 인물이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것은 뉴스나 자료영상 외에는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야외 장면에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거나 쳐다보는 장면도 있다.
- 애드리브. 감독들은 배우들에게 시나리오에 없는 즉흥연기를 시키거나, 자신이 좋게 봤던 영화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 점프컷. 점프컷은 영상이 그대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등장인물의 위치나 행동이 한 샷에서 바뀌어지는 걸 의미한다. 원래는 그 사이에 뭔가를 삽입해야하지만, 그걸 무시했다. [4]
- 일관된 내용이 없다. 각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러쿵 저러쿵 한다.
1.4. 거장들
[image]
1932년 2월 6일생. 학생시절부터 영화를 즐겨보았던 그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고,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과 인연이 있긴 했다.)[5]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를 만들기 시작했다.(여기서 장피에르 레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누벨바그 감독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영화광으로 유명.
[image]
1930년 6월 24일생. 기존 영화 방식에 반기를 든 것도 모자라서 자기 자신의 영화조차 혁명시킨 영화 역사상 최고의 혁명가.
그의 모든 작품의 스타일이 다 달라서 '고다르 스타일이란 스타일이 없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영화가 나올 때마다 항상 새롭기에 '고다르라는 존재 자체가 누벨바그'로 평가받기도 하는 영화인.
시대를 앞선 감독이라고도 하지만, 너무 난해하고 정신없다. [6] 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영화는 '카메라'가 찍는 것이고 영화는 단순한 '현실의 재구성'이나 '이야기의 표현'이 아닌 영상기법과 음향과 편집기법이 합쳐진 하나의 독립적 예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조한 혁명가적인 영화인이다.
순간의 미감을 추구하는 푼크툼(반대 개념은 '스투디움'이라 한다.)을 강조하는 걸 추구하려 했다고 그의 영화를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영화를 문학, 미술, 음악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이해하고 강하게 추구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과 구별되는 '영화만의 속성'을 찾아서 표현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렇다고 고다르가 서사적 흐름을 중시하는 연출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획일적인 스타일을 반대한 것일 뿐이고, 그 획일적이지 않은 방식 중에서 그는 문학적 서사 구조를 탈피하여 영상과 음향을 중시하는,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될 수 있는 영화만의 스타일을 골라서 만든 것뿐이다. 서사적 흐름이 중요한 영화라 해도 그 속에서의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미학(촬영, 편집, 음향 기법)을 시도하거나 완성한 경우에는 항상 훌륭한 영화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런 독창적인 시도를 해온 선배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심은 항상 표현했다. 평론가 시절에도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좋아했고,(그가 살던 마을에 가 보려고 일본 여행을 간 적도 있다.) 그리피스나 무르나우, 르누아르,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영화사에 남을 예술적 시도를 했던 위대한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항상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사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만의 기법을 통한 영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고다르는 단지 과거에 관객들이 좋아했던 영화들의 방식(쉽게 말하자면, 문학적인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그래서 다른 예술 장르에 대한 종속이라 생각한 제작방식)을 더 발전시키거나 바꾸려는 시도 없이 후세 영화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복해서 쓰기만 하는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벨 바그 사조 이후에 여전히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전통의 연출을 추구하는 후세 감독들조차도 영화 속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연출, 촬영, 편집 기법들을 공부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영화에 차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가 만들어 낸 흐름이 모든 걸 바꾸지는 못했지만 강한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누벨바그에서의 절대적 위치때문에 각 영화관련 언론이나 단체에서 영화 사상 가장 중요한 감독들의 목록을 만들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벨바그 작가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으며,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작품 또한 <네 멋대로 해라>, <미치광이 피에로>등 고다르의 작품들.
[image]
1930년 6월 24일생. <미남 세르주>가 최초의 누벨바그 영화로 꼽힌다. 누벨바그 영화 중에서 가장 장르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으로 유명하다. 스릴러 물도 많이 만들었으며, 히치콕에 대한 존경심으로 유명하다. <도살자>나 1995년 영화 <의식>, 2000년 <초콜릿 고마워>, 2003년 <악의 꽃> 후반기 3부작이 유명하다.2010년 9월 15일에 별세했다.
[image]
1928년 3월 1일생. 누벨바그 작가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 심지어는 장 뤽 고다르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극적인 구성이 많이 생략된다. 네오 리얼리즘에 가까운 양상을 지니며,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의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경향이 있다.
2016년 1월 29일에 별세했다.
[image]
1920년 3월 21일생.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감독.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입장에서 발생하는 찌질한 사건들을 자주 다룬다. 덕분에 한국의 홍상수 감독이 로메르의 후계자로 꼽히기도 했었다.[7]
<봄 이야기> 같은 대표작이 있다.
2010년 1월 11일에 별세했다.
2. 프랑스의 밴드
커버 밴드로 2003년 데뷔 후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 이름대로 뉴 웨이브/포스트 펑크의 명곡들을 주로 커버하였고 이 밴드가 커버한 This is not a love song 등은 한국에서 MBC 드라마 소울메이트나 CF에 삽입되어 인기를 끌어 원 가수인 PIL 버전보다 더 유명해졌다.
[1] 음악 장르 뉴웨이브와는 별 연관관계가 없다. 여기서의 웨이브는 제3의 물결에서의 '물결'에 가까운 의미이다.[2] 간단하게 말해서 영화가 너무 관습적이라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가 시스템에 의거한 기술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하였다. [3] 이 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것이 영화의 이미지 연결을 미리 구성하고 촬영시에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 놓는 컨티뉴이티의 존재여부이다.[4] 이 특징이 누벨바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미리 정해진 동선이 없기 때문에 같은 컷에서도 몇번이고 새로운 연기가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을 직선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정해진 것보다 훨씬 좋은 이미지가 생기길 원한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는 하나의 컷을 몇번의 테이크로 반복 촬영한 뒤 OK 사인이 난 테이크를 취하는 반면, 누벨바그 영화는 그 많은 테이크들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들만 다시 잘라낸 뒤에 재봉합하는 과정을 취한다는 것.[5] 아들 수준의 가까운 관계였다. 이런 관계는 나중에 트뤼포가 장 피에르 레오의 양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의 영화사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 피에르 레오는 후술될 400번의 구타의 주연 배우이며 지속적으로 트뤼포 영화에서 페르소나 수준으로 많이 출연한 배우이다.[6] 한마디로 줄이면 '소설처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닌, '''카메라와 영화 장비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상의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적인 이야기'''를 느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다. 처음부터 전통적인 영화 사조인 문학(소설, 희곡)적 서사(내러티브)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감각적 표현이나 영상과 음향의 충돌(혹은 조명과의 충돌, 영상끼리의 충돌)에서의 미학을 추구한 감독이라서 고다르 영화는 영화의 줄거리나 전체적 내용을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영화 사이사이의 미학적 감각 혹은 철학적 메시지를 느끼려고 하는 방식이 오히려 훨씬 강한 예술적 경험을 주기 때문에 서사적 이해나 설명을 중점적으로 보고 그 위주로만 찾으려는 태도는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의 영화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될 수 없지만 강한 느낌과 메시지들의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러운 조합일 수는 있다.[7] 실제로 홍상수는 스스로 에릭 로메르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직간접적으로 공공연하게 표현한 적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두 감독은 그 외에 많은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이 비교는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그 방향성은 약간 달라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 에릭 로메르와 닮은 것은 프랑스 영화판에서도 인정하고 있어서 칸 영화제에 홍상수의 작품이 초대되어 좋은 반응을 얻는 등 김기덕 못지 않게 프랑스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감독중 하나가 홍상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