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역전
1. 개요
18세기 중엽 이루어진 유럽 외교사의 일대 혁명적인 대사건.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Reversal of Alliances'라는 숙어가 이 사건 이후 고유명사화되었다.[1] 외교혁명(diplomatic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며,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표제어로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과 7년전쟁 사이의 사건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 영국, 하노버, 오스트리아, 러시아
-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프로이센
- 영국, 하노버, 프로이센
-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오스트리아, 러시아
2. 배경
배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의 불완전한 종결에 있었다. 비록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슐레지엔 지방을 확보한 상태로 전쟁이 끝났으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갈며 복수를 천명하고 있던 상태였다. 또 참전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국내문제 및 재정악화로 일시 전쟁을 중단했을 뿐이지,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대립은 오히려 더 격화되어 유럽대륙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었다.
3. 진행
3.1. 영국과 프로이센의 동맹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지난 전쟁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하여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견제할 만한 충분한 국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고 영국 왕실의 고향이자 동군연합 상태인 하노버를 방어할 만한 파트너로 떠오르는 신흥강국 프로이센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의 파트너로서 프로이센의 국력을 키워져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을 계속 영유하는 것이 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었고 이는 오스트리아의 의사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파기는 필연적이었다. 또한 영국과 프로이센 왕실은 서로 혈연 관계였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의 어머니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가 영국 왕 조지 1세의 딸로 양국 왕가는 사촌관계였다.
사실 영국 공주 출신인 조피 도로테아는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직 왕자이던 시절 자신의 친정인 영국과의 중혼동맹을 시도한 바 있다. 프리드리히 왕자(후일의 대왕)를 조지 2세의 차녀 아멜리아 소피아와, 그리고 자신의 딸인 빌헬미네 공주를 프린스 오브 웨일스, 즉 영국의 왕세자인 프레데릭과 결혼시키려 한 것이다. 이 계획은 어머니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자녀들은 물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도 지원했던 것이지만 영국과 프로이센의 동맹을 우려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당시 아직 국력이 미약했던 프로이센에게 온갖 압력을 가하고 뇌물을 주어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포기한 바 있다.[2]
이에 따라 영국이 먼저 프로이센에게 접근, 1756년 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은 '외국군의 신성 로마 제국 영토 통과를 불허한다'[3] 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3.2. 철천지 원수의 역사적인 동맹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프로이센이라는 신흥 강국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수를 22%나 차지했던 알짜 영토 슐레지엔을 상실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슐레지엔을 뺏어간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대왕을 증오하게 되었다. 또한 동맹국 영국이 지난 전쟁에서 대륙의 전쟁에 관여해 오스트리아를 도와주기보다는 해외 식민지에서의 대 프랑스 전쟁에 주력하고 오히려 전쟁 와중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영토를 오스트리아한테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에 큰 실망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 수복을 위해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을 영국이 거부하고, 반대로 영국이 프로이센에게 먼저 접근해 동맹 조약을 체결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미련없이 영국과의 동맹을 끊어버렸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수복을 위한 새 파트너로 영국 대신 유럽 대륙 전통의 강자인 프랑스에게 접근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무장관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공작[4] 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 부르봉 왕조는 단순 적대관계가 아닌 '''철천지 원수''' 사이[5] 였다는 것이다. 즉,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였던 사이에게 오늘부터 동맹을 맺자고 한 셈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랑스의 루이 15세(실제로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정국의 실세였던 퐁파두르 부인[6] ) 역시 오스트리아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랑스 입장에선 북아메리카와 인도의 패권을 두고 숙적 영국과 저번 전쟁에서 미처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을 마저 치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중부유럽의 땅쪼가리를 두고 결판을 내려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에 덤터기로 끌려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영국과 그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동맹관계를 끊어놓을 필요성이 있었던 것.
또 이 당시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 중 강대국이라 할 만한 나라는 오직 오스트리아뿐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체결하면 프랑스 본토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완전히 없어지는 셈이었다. 스페인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압스부르고 왕조였다면 프랑스와 적대관계라 할 만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로 부르봉 가문의 보르본 왕조가 성립되면서 양국은 거의 영구적인 동맹 관계였다. 거기에 스페인이 동군연합을 겸한 나폴리 왕국과 분가가 다스리는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까지 합하면 부르봉 가문의 결속은 대단했다.
그리하여 1756년 5월 1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양국은 서로 중립을 유지하고 어느 하나가 제3국[7] 으로부터 침공당할 경우 서로에게 군사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의 방어동맹을 체결하면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맹우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3.3. 3부인 동맹의 결성
프랑스와 방어동맹을 체결하면서 최소한 프랑스의 중립을 확보한 오스트리아는 곧이어 러시아와 스웨덴에게 접근하여 반 프로이센 연합 결성을 시도했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방어동맹[8] 을 체결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작센을 기습적으로 침공하면서 7년 전쟁이 발발했다. 프리드리히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의도적으로 작센을 기습 침공한 것이었는데 하지만 이 행동이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의 분노를 일으켜 오히려 러시아가 대대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지원해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 테레지아, 퐁파두르 부인, 옐리자베타 여제, 3명의 여자가 주도하여 결성된, 일명 3부인 동맹이 결성되었다.
전쟁이 격화되고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프랑스를 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게 할 필요성을 느껴 방어동맹을 체결한지 1년 후인 1757년 5월 1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기존의 동맹조약 내용을 개정한 새로운 내용의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전쟁 지원을 위해 13만 명의 프랑스군과 매년 1200만 리브르의 보조금을 오스트리아에게 제공한다.
- 전쟁에서 승리하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영유를 인정한다.
-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는 남부 네덜란드를 프랑스에게 양도한다. 대신 보르본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고 있는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을 얻는다. 프랑스는 새로 얻은 남부 네덜란드에 독립국을 세워 그자리에 영지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기게 된 파르마 공 필리프를 군주로 앉힌다.
- 오스트리아령이 될 슐레지엔을 제외한 나머지 프로이센은 러시아, 스웨덴, 작센 등이 분할한다.
하지만 반 프로이센 연합의 결성으로 전쟁에서 쉽게 이길줄 알았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당초 예상과 달리 프로이센은 끈덕지게 잘 버텼다. 프랑스는 대륙과 해외 식민지에서의 양면전쟁으로 전비 부담이 점점 가중되고 있었고 때문에 해외 식민지에서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1758년 동맹 조약을 일부 개정하여 해외 식민지에서의 전쟁에 집중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기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759년에 영국-프로이센 연합이 여러 차례의 대승을 거두면서 전황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에게 점차 불리해졌다.
3.4. 혼인 동맹
이 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공수동맹을 체결한 다음 양국의 동맹을 보다 더 굳건히 하기 위해 부르봉 가문과의 대대적인 결혼 동맹을 체결했다.
- 1760년 황태자인 요제프가 부르봉-파르마의 이사벨라와 결혼.
- 1765년 차남 레오폴트 왕자가 부르봉-스페인의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
- 1768년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가 부르봉-스페인의 페르난도 4세와 결혼.[9]
- 1769년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가 부르봉-파르마의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10]
- 1770년, 프랑스의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와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사실 철천지원수 관계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였지만, 발루아 왕조 및 부르봉 왕조의 왕비들 중 상당수가 합스부르크 왕조[12] 에서 나왔다.
4. 결과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양쪽 모두 손해였고, 이후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은 사이좋게 프랑스의 주권자'''들'''과 그들이 옹립한 집권자에게 갈아먹혀 버린다. 안습.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결국엔 프랑스와의 동맹은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7년 전쟁에서 서로 망테크를 타고 난 후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 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또 충돌했지만 프랑스에선 파병을 거부했다. 그 결과 동맹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게 또 한번 프로이센과 타협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터진 1790년대 초 레오폴트 2세는 영국과의 동맹을 복귀시켰다.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고작 12년이 되는 해였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나중에 수지에 맞는 장사로 돌아온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을 무렵,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는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싫어 했으므로 프-오 동맹에 가담했는데, 이 관계가 미국 독립전쟁 시기까지 살아 있었다.
그 결과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은 근세 이래로 유럽 대륙에 제대로 된 우방국 하나 없는 최악의 상태로 유럽에도 상당한 전력을 남긴 채 식민지 독립파 및 프랑스와 싸우게 되었다. 당시 영국을 지원한 국가들은 대부분 독일의 소국들로,동군연합인 하노버를 제외하면 모두 영국에게 용병 형태로 병력을 팔아 준 수준이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7년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느라 미국 독립전쟁에 함부로 관여하기 힘들었다. 또 7년 전쟁 후반 영국이 지원금을 대폭 줄인 것에 대해[13] 앙심을 품은 프리드리히는 무장중립동맹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에 교관과 용병을 파견하여 오히려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
결국 대륙에 신경쓰지 않고 견원지간 영국과 싸우게 되었다는 최상의 상태인 프랑스의 전력투구 앞에 영국은 마침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결국 어떻게 보면 이 동맹의 역전에서 최대 수혜자는 엉뚱하게도 영국과 전쟁을 벌여 독립한 미국인 셈이다'''.
[1] 1차 세계대전에는 연합국 소속이었던 국가가 2차 세계대전에는 추축국에 붙은 것을 동맹의 역전에 비유하기도 한다.[2] 참고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내가 될 뻔한 아멜리아 소피아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고, 빌헬미네 공주와 결혼할 뻔 한 프레데릭 공작은 작센-고타의 공녀와 결혼했으나 본인이 부친보다 일찍 요절하여 왕이 되지는 못했다. 빌헬미네 공주는 브란덴부르크-바이에른 변경백 프레데릭과 결혼했다.[3] 프로이센이나 (사실상 영국령인)하노버나 신성 로마 제국 한가운데 있으므로 필히 자국 영토를 통과할 수 밖에 없는데 자국 영토에 진입할 경우 서로 침공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의미이다.[4] 벨기에 총독으로 공적을 인정받아 등용되고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돌린 것에 대한 공적으로 1753년부터 죽기 2년 전인 1792년까지 오스트리아 재상을 역임하며 정국을 지휘했다. 후임자는 빈 체제를 주도하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공작.[5] 최소한 발루아 왕조(1328~1589) 시절부터 원수지간이었다. 특히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카를 5세(1500~1558)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1525)에는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불리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나섰다. 200년 짜리 원수랄까. 가장 유명한 사례가 루이 13세 시기의 총리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30년 전쟁에서 신교도 편을 들어 참전한 것. 가톨릭 왕조가 섭정으로 임명한 추기경이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합스부르크 왕조를 엿먹여보겠다는 일념으로 신교도 반란군 편을 든 것. 이쯤되면 견원지간이라는 말조차 온건하게 보일 지경이다.[6] 젊은 시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퐁파두르를 생선집 아가씨라고 비웃은 악연이 있다. 그 때문인지 7년전쟁 때 프랑스의 참가를 저지하려는 프로이센의 뇌물도 거절했다.[7] 이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영국 아니면 프로이센이다.[8] 프로이센이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양국 또는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할 경우 자동 참전한다는 내용인데 양국이 프로이센과 전쟁을 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갖고 곧바로 동프로이센을 폴란드의 쿠를란트-젬갈렌과 교환한다는 내용의 비밀 조항이 있었다.[9]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공주 마리아 테레사 또한 프란츠 2세의 황후가 되었다.[10] 딸 중 하나는 프란츠 2세의 황후이자 마리 루이즈의 어머니고 또 다른 딸은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리프 1세의 왕비이다.[11] 항상 편애하여 연애결혼을 허락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 공주와 너무 어렸던 아들 둘은 제외.[12]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의 왕비들은 모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출신이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국혼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루이 13세의 아내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와 루이 14세의 아내인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는 모두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지만, 합스부르크 본가가 오스트리아이기 때문에 도트리슈(오스트리아의)라는 성씨를 사용했던 것 뿐이다.[13] 왕실의 본관인 하노버를 대놓고 버리자는 총리 윌리엄 피트의 전략에 분노한 조지 3세가 피트를 자르고 영국이 직접 대륙의 정세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영국으로부터 받는 지원금이 대폭 줄어들면서 용병이 전체 군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던 프로이센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멸망 직전까지 갔으며 프리드리히 본인도 독약을 품은 채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