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도비
1. 개요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선수.''' 미국의 전 니그로리그 &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명예의 전당 출신 야구 선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서 뉴저지 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롱아일랜드대학에 농구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7살에 뉴와크 이글스 (니그로리그에 속해있었던 팀)의 2루수로 야구 커리어를 시작앴다. 그때가 바로 1942년. 하지만 2년동안의 선수생활후 1944년과 1945년은 해군에 입대해서 2차대전에 참전했다. 종전후인 1946년에 다시 니그로리그로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947년 7월, 바로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을 때 [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데뷔 하였다. 즉, 재키 로빈슨 다음인 두번째 의 흑인 메이저리그이고, 어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메이저리거다.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재키 로빈슨은 1946년을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인 몬트리얼 로얄스에서 풀 시즌을 뛴 후에[3] 1947년에 데뷔했지만, 래리 도비는 니그로리그에서 옮겨오자마자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
2. 빌 비크
참고로 래리 도비를 데뷔시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였던 빌 비크 (Bill Veeck)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하자면, 이사람도 다저스의 전설적인 구단주 브랜치 리키 못지않은 혁신적인 인물이었는데, 클럽하우스에서 래리 도비를 다른 선수들에게 한명씩 소개를 시킨다음에, 그중에 래리 도비와 악수하기를 거부한 3명의 선수를 곧 타팀으로 내보냈을 정도. 거기에다가 브랜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을 데려올때, 재키 로빈슨이 속해있던 흑인구단에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지만, 빌 비크는 래리 도비가 속해있던 흑인구단에 조금이나마[4] 보상을 하고 데려왔다.
이렇듯이 흑인의 인권 면에서는 브랜치 리키 못지않은 인물이었지만 브랜치 리키의 업적에 가려진 면이 강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구단주로써 해왔던 결정들은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의 어정쩡한 연합이었던 메이저리그 야구에 니그로 리그의 우수한 흑인 선수들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리그를 중서부로 확장하여 야구를 인종,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즐기는 전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여가로 만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리키 다음가는 미국 야구의 전국화에 공헌한 인물이다.
또한 1948년에는 메이저리그의 첫 흑인 투수인 사첼 페이지를 데뷔시켰다. 그리고 1948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 도비와 페이지는 첫 흑인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선수가 되었다.[5] . 브랜치 리키의 다저스가 재키 로빈슨을 영입한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것은 이거보다 몇년 후인 1955년이니,[6] 어떻게 보면 '우수한 흑인 선수들을 영입해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것'은 브랜치 리키보다 빌 비크가 훨씬 먼저 이룩했던 것.
정리하자면, 비록 브랜치 리키의 그늘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비크도 오늘날의 메이저리그가 정립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운 구단 경영자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비크는 사후 5년만인 199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메이저리그
다시 1947년의 래리 도비 이야기로 돌아와서, 재키 로빈슨이 그때 내셔날리그에서 활약하면서 온갖은 인종차별을 겪였듯이, 래리 도비도 같은시간에 어메리칸리그에서 활약하면서 똑같은 인종차별을 겪었고, 도비도 로빈슨과 같이 이런 각종 인종차별을 꿋꿋히 이겨냈다. 둘은 시즌중에 자주 전화통화로서 서로를 격려했다. 하지만 오늘날 재키 로빈슨이 유명한것과는 다르게 래리 도비는 아는사람들이 많지가 않다.
좌우간 13년 동안의 메이저리거 생활 중 7번의 올스타 출전, 2번의 어메리칸리그 홈런왕, 1번의 어메리칸리그 타점왕을 하는 등,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1948년과 1954년 2번의 월드시리즈에 출전했으며 그 중 1948년 우승하면서 사첼 페이지와 함께 최초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흑인 선수가 되었다. [7]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팀과 리그 적응, 그리고 안팎에서 오는 공격에 상당한 마음 고생을 했었다. 내셔널 리그의 재키 로빈슨과 많이 비교되는 부분.[8]
4. 은퇴 후
은퇴 후 1978년에 친정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이 되었다. 다만 당시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1차 황금기여서 서부지구 5위에 그쳤고, 결국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실패한 명선수 출신 감독이 되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의 등번호였던 14번을 영구결번화했고, 1998년에는 베테랑 투표로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에 헌역되었다.
참고로, 기자단 투표로는 명예의 전당에 가지 못했는데, 기자단 투표로 헌액된 재키 로빈슨과 비교를 해보자면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생활 10년동안에 누적 WAR 57.2를 쌓았지만 도비는 좋은 선수이기는 했지만, 13년 동안 WAR 51.1를 찍었다. 즉 로빈슨보다 선수생활을 오래 했지만 누적 WAR는 로빈슨보다 떨어지는 것. 게다가 메이저리그의 사실상 첫 흑인 선수라는 버프를 받은 로빈슨도 77.50%의 턱걸이로 호프집에 입성한 것을 보면 도비가 기자단 투표로 가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게 없다.[9]
이후 2003년 암으로 향년 79세에 숨을 거두었다.
5. 래리 도비의 날
1등만 기억하는 게 프로의 세계인지라, 재키 로빈슨은 등번호인 42번이 전구단 영구결번이 되었고, 재키 로빈슨의날 (4월 15일)도 있지만, 래리 도비는 그런 거 없다. 한때 메이저리그에 래리 도비의 날(Larry Doby Day)을 만드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산되어버렸다. 대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매년 래리 도비의 날 행사를 한다.
6. 관련 문서
[1] 니그로리그 팀.[2] 재키 로빈슨은 1947년 4월 15일 에 메이서리그에서 데뷔 하였다. [3] 이것은 다저스 구단주인 브랜치 리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였다. 일단 1년동안을 마이너리그에서, 특이 인종차별이 덜한 몬트리얼에서 뛰면서 백인 관중들이 흑인이 백인들과 함께 뛰는것에 익숙해지기 위함도 있었다[4] 이 시대의 평가는 만약 래리 도비가 백인이었다면 그의 전 구단에 몇배는 더 줬어야 했을거라지만 보상을 한 자체가 대단한거다[5] 그리고 2016년 기준으로 이것이 인디언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다.[6] 다저스는 그 동안 월드시리즈에 1947, 1948, 1952, 1953에 꾸준히 진출하기는 했다. '''네 번 다 양키스한테 진 것이''' 흠이지만. 1955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다시 만난 지긋지긋한 양키스를 꺾고 드디어 우승했다. [7] 재키 로빈슨은 1955년 우승했다.[8] 로빈슨은 쾌활한 성격으로 다저스 선수들과 잘 어울렸다.[9] 그리고 로빈슨은 신인왕, MVP 수상 등도 꽤 작용한 것도 있다. 하지만 도비는 그런 거 받은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