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첼 페이지
1. 개요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나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령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역대 최고령에 은퇴한 야구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투수.'''[2]'''"내가 100살이 되어도, 저 녀석들은 삼진으로 잡을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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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현역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따냈을 때.'''
전 니그로리그,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로 '''타고난 재능에 그 재능에 맞먹는 열정'''이 더해져 아예 온갖 설화의 주인공이 된,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이다.
물론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월터 경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지만, 이는 월터 존슨이 미국 야구의 근간인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시간이 더 많았고 상대적으로 사첼 페이지는 기록이 부실했던 독립리그나 니그로리그 등에서 뛰었던 탓에 기록보다는 민간 설화마냥 구두로 전승되는 이야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3]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적인 야구선수."라고도 불리는데, 만일, 인종차별이 없었다면 월터 경과 같은 위치에 있거나 '''그보다 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종적인 문제로 사첼 페이지가 메이저리그에 뒤늦게 등장한 것이지, 평가가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사첼 페이지의 선배 투수이자 또 다른 니그로 리그의 전설인 "사이클론 조" 조 윌리엄스를 페이지보다 위대한 선수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둘 중 누가 위대한가에 대한 설문 조사가 있었고, 윌리엄스가 페이지를 누른 바 있다. 또 둘은 단 한번 맞대결을 펼쳤는데, 황혼기를 지내고 있었던 윌리엄스가 떠오르는 슈퍼 스타 페이지를 1-0으로 제압했다.
니그로 리그, 멕시칸 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48년 42살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 선수로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최초의 흑인 투수가 되었다. 그 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활약하고 1953년 은퇴를 선언. 12년 후, 1965년에 58세의 나이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선수로 등록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선발 등판하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여 메이저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 유년 시절
1906년[4] 11명의 형제 중 7번째로 태어난 사첼 페이지는 본래 이름이 '르로이 페이지'(LeRoy Paige)였다.
정원사 일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부로 살림을 꾸려나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여행용 가방(Satchel)에 7살이었던 그를 넣어 놓고 기차를 이용한 일이 있어 그때부터 '르로이'(LeRoy)라는 이름 대신 '사첼'(Satchel)이라고 불렸으며,[5]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고향 프로 팀의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살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후 세미프로 팀에서 한 경기당 1$을 받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1926년부터 니그로리그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니그로리그와 중남미 리그 등 각종 독립 리그의 전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니그로리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0년대 니그로 리그의 여러 팀에서 활약을 하면서 그는 192cm의 어마어마한 장신으로, 긴 팔다리를 최대한 이용, 엄청난 강속구를 뿌렸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페이지는 20여년 이상 니그로 리그, 멕시칸 리그, 각종 독립 리그를 순회하며 2000경기 이상에 등판했다고 한다.[6]
그렇기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일설에는 '''승리만 2000승'''이라고도 한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니그로 리그에서는 최고의 스타이자 흥행 보증 수표인 페이지의 등판은 매년 100경기를 전후했고, 니그로 리그가 종료되면 멕시코 리그나 독립 리그 등에서 뛰면서 매년 200경기를 등판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니그로 리그의 팀에서 뛴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부르면 거절하지 않고 뛰어주고,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리그로 떠나는 형태의 상상을 초월하는 플레이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전설 가운데 1년 최고 기록은 '''141승 1패''', 혹은 '''연 평균 100승''' 등 어지간한 투수의 커리어 기록이 나온다. 때문에 2000승은 몰라도 1000승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부지기수이다. 일단 데뷔부터 은퇴까지 기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경기 수도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그가 가진 야구에 대한 순수하고도 무한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공을 던지는 그의 시대에는, '지금도 사첼 페이지는 어디선가 공을 던지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외에도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보내 놓고 9구 3탈삼진으로 이닝 종료'''[7] , '''워밍업 때 성냥갑을 홈 플레이트 삼아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 확인되지 않은 민간 신앙급 전설이 퍼져나갈 정도로 확실하게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였다고 알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해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는데,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그로 리그 선수들에 대한 근거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많이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1932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리그와 니그로 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다.[8] 1930년 메이저리그 올스타들을 상대로 22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완봉승을 거둔 것과 뒷날 1948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나이 40 중반인데도 150km이상의 직구를 뿌린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9] 실제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강속구 투수 중 하나였던 밥 펠러는 "내 직구는 사첼 페이지의 직구에 비하면 체인지업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혀를 내둘렀고 당대 제일의 투수였던 명예의 전당 헌액자 디지 딘은 "내가 페이지와 함께 뛰면 '''7월 초에는 리그 우승을 확정하고''' 남은 세 달은 낚시나 다녀도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그의 기량은 많은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저 믿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나서 40대에서야 데뷔했던 메이저리그에서 세운 기록과 메이저리그에서 유명세를 떨친 스타들이 일관되게 그를 최고라고 인정한 증언들만 바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비공인 기록. 아니 뭣 보다, 자기자랑을 하기 굉장히 싫어하는 조 디마지오가 저러고 다닐 정도면 말 다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4.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종분리가 만연한 당시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리그 입성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는다.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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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클리블랜드 구단주 빌 빅(Bill Veeck)[10] 은 물러설 수 없었다. 40이 넘어서도 145km 이상의 강속구를 뿌릴 수 있는 실력일 뿐만 아니라, 이미 니그로 리그에서의 족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던 페이지는 존재 자체로 흥행 보증수표 역할도 가능했던 것. 이후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AL 첫 번째 흑인 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 1948년 7월 7일 42세 생일이 되는 날 클리블랜드에 입단, 메이저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 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투수가 되었으며, 이틀 후 최고령 신인 투수 기록을 새로 세우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11]
전성기가 한참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6승 1패 방어율 2.47을 기록한 첫 해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 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 그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클리블랜드가 그 해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면서, 사첼 페이지와 래리 도비는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흑인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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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독립 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 메이저리거로 복귀한다. 이것은 모두 사첼 페이지를 메이저 리그로 끌어들인 빌 빅의 행보와 연결된다. 빌 빅이 떠나면서 사첼 페이지도 팀을 떠났고, 빌 빅이 세인트루이스로 복귀하면서 사첼 페이지를 부른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페이지가 브라운스를 떠난 이유도 빌 빅이 팀을 매각하고 떠났기 때문. 즉, 나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인간 관계로 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한 것이다. 기량은 여전하여 1952년 페이지는 45세의 나이로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1952년 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냈을 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52년과 53년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던 페이지는, 1953년 시즌 종료 후 빌 빅이 브라운스를 매각하고 팀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개편되자 팀을 떠났다.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페이지는 빌 빅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트리플A 팀 운영권을 가지게 되자 빌 빅을 따라 1955년 8월 필라델피아 산하 트리플A 팀인 마이애미 말린스[12] 에 입단했다. 페이지는 1956년부터 3시즌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후, 빌 빅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로 자리를 옮기며 팀을 떠났다. 이후 196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트리플A 팀인 포틀랜드 비버스[13] 에 입단, 딱 5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팀을 떠났고, 한동안 페이지의 소식은 없었다. 그대로 페이지는 은퇴한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4년이 더 지난 1965년, 연금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이 모자라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찰리 핀리[14] 는 딱 한 경기를 위해 59세의 페이지를 영입하기로 한다. 페이지는 9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 전에 선발 등판하며 '''12년'''만에 메이저리그 무대에 돌아왔고, 이 환갑을 바라보던 노인은 보스턴의 타선을 '''3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유일한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 타자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페이지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은퇴를 하게 된다.
페이지는 이후 연금법이 또 개정되면서 또 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최소 62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연금법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는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5. 은퇴 이후
그가 기록한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5시즌 동안 28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29. 은퇴 이후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투수 코치로 2년간 활약했다.
1971년, 니그로리그에서의 업적을 인정 받아 니그로 리그 위원회(Committee on Negro Leagues)를 통해 헌액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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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65세였던 페이지는 "현재는 물론이고 10년 뒤에 등판해도 승리할 수 있다."며 끝없는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약 11년 뒤인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실제로 나이에 무감각했으며, 나이를 핑계로 던지지 못한다고 하는 투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투구 지론은 스트라이크 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하는 투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는 나이에 대해 "나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자신의 나이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5][16]
6. 관련 문서
[1] 이에 대해서 더 나이가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도 많다. 1800년대 말 출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류이고, 심지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마지막 메이저리그 등판 경기 때 나이가 59세가 아니라 68세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2] 사첼 페이지보다 늦게 데뷔한 투수도 없거니와,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 등판 경기 시 나이가 사첼 페이지보다 많았던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3] 여기다가 조 디마지오는 페이지를 상대로 1안타를 쳤다고 자랑하고 다녔다.[4] 사첼 페이지가 1906년보다 전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확히 몇 년 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5] 이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7세 때 돈 벌이를 위해 기차역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그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여행가방나무(Satchel tree)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어렸을 때 남의 가방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6] 당장 니그로 리그 시절에도 '''약 20개 팀을 순회하면서''' 미국 전체에서 적을 두고 활약했다.[7] 이건 당시 메이저리그 기준에도 규정위반이라 신뢰하기는 어렵다. 야구는 과거부터 포수를 제외한 8명의 수비수들이 페어라인 안쪽에 있지 않으면 경기진행을 못하는게 규칙이다. 정신나간 심판이 독단으로 허가했다 해도 인정도 안 되고 모든 플레이가 다 무효가 된다. 한국 프로야구의 김기태 감독 사건(3루수를 포수 뒤에 서 있게 하다가 제지당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니그로리그에서 이벤트성으로 규정을 안 지켰을 수도 있지만.[8] 디지 딘을 비롯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슈퍼 스타들은 그를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찬양했다. 특히 평생동안 자신을 자랑하기를 꺼리던 조 디마지오가 딱 하나 유일하게 자화자찬하고 다니던 것이 자신이 페이지에게 '''4타수 1안타를 친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그와 같은 팀에 있게 되는 클리블랜드의 밥 펠러는 그를 너무 좋아해서 쫓아다녔다고. 그렉 매덕스는 사첼 페이지를 존경해서 자식의 아들과 딸에게 각각 사첼과 페이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9] 근데 이 때 베이브 루스는 나오지 않았다. 흑인하고는 같이 경기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근데, 삼진 당할까봐 못 나왔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10] 역사상 최고의 흥행사로 꼽히는 인물. 야구 토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1/8이라는 등번호로 유명한 에디 가델을 대타로 출장시킨 인물이라고 하면 알 것이다.[11] 2차대전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40대 루키 선수는 사첼 페이지 외에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디오메데스 올리보, 2009년 뉴욕 메츠의 다카하시 켄뿐이다.[12] 현재 존재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인 마이애미 말린스와는 무관한 별개의 팀이다. 말린스는 1960년 이후 몇 차례의 연고이전을 거친 후 현재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트리플A팀인 그위넷 스트라이퍼스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13] 이후 연고이전과 프랜차이즈 변경을 거쳐 현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트리플A 팀인 엘패소 치와와스가 팀을 계승중이다.[14] 코니 맥 시절 이후 암흑기에 빠진 애슬래틱스를 인수, 이후 오클랜드로의 연고이전을 성사시킨 후 1970년대 A's의 '''월드 시리즈 3연패'''로 대표되는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 낸 구단주다.[15] 역대 최고의 권투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나이먹었다. 나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이다."[16] 또한 자신의 나이와는 다른 젊은 몸과 마음의 비결에 대해 묻는 후배들에게 '늙어서 야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야구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늙어 버리는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