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 구비옹 생 시르
로랑 드구비옹 생시르[1]
Laurent de Gouvion Saint-Cyr
1764.5.13 ~ 1830.3.17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구비옹 생 시르 후작.[2]
별명은 올빼미.
이 로랑과는 '''전혀''' 관계없다.
로랑 구비옹은 툴에서 무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에 의해 어릴적에 버림받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양자로 거두어졌다. 이때 그는 생 시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러나 그림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더 이상 그림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혁명전쟁에 참여, 지원병 대대의 대대장으로 추천받았고 쿠스틴 장군의 막료가 되었다.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하거나 도망간 탓에 그는 2년만에 사단장이 되었다. 1796년에 있던 라인 전역 기간동안 그는 장 빅토르 마리 모로의 군대에서 중앙사단을 맡았으며, 모로의 군대가 패배하여 바이에른에서 라인까지 후퇴하는동안에 훌륭한 지휘를 선보였다. 1798년에는 앙드레 마세나가 이끌던 이탈리아 방면군의 지휘권을 계승했으며, 이듬해에는 장 바티스트 주르당의 좌익군을 맡아 전진했다. 주르당이 마세나에게 지휘권을 넘기자, 그는 모로의 이탈리아군에 합류했고, 노비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하는 아군을 지휘했다.
1800년에 모로가 라인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지명되자, 로랑은 그의 수석 부관으로 따라갔고, 5월 9일에 비베라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사령관과 함께 은퇴하게 되었다(...). 1801년에는 스페인으로 가서 포르투갈 침공군을 지휘했으며,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한 장교들의 명단에 이름에 올라갔다. 포르투갈과의 평화협정 조인 후, 그는 뤼시앙 보나파르트[3] 의 뒤를 이어 마드리드 대사로 스페인에 갔다. 1803년에는 이탈리아의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1805년에 그는 마세나 휘하에서 별동대를 지휘했고, 1806년에는 남 이탈리아에서의 전역에 참가했다. 그는 1807년의 전역에도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구비옹 생 시르 백작이 되었다. 1808년, 카탈루냐에서 군대를 지휘했으나 파리로부터 날아온 명령을 무시하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그는 1811년까지 불명예스럽게 근신상태에 있어야 했다.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사단장이었는데, 그는 첫번째 원수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4] 러시아 전역이 시작되자, 로랑은 대육군 부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1812년 8월 18일, 폴토스크의 승리로 인해 나폴레옹의 인가를 받아 그는 원수에 서임되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한 일련의 후퇴에서 일어난 적의 추격을 막는 가운데 큰 부상을 당했다. 로랑은 드레스덴 전투와 라이프치히 전투가 끝난 뒤 이어진 동맹군의 공세에 대항해 드레스덴에서 벌인 방어전에서 활약했는데, 결국 수적인 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11월 11일 나폴레옹이 라인으로부터 후퇴하자 그는 항복했다.
제1차 왕정복고에서는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고, 1815년에는 전쟁장관에 지명되었으나 그는 이듬해 11월에 사임했다. 1817년 6월 그는 해군 장관으로 지명되었고, 그해 9월에는 다시 전쟁장관이 되었으며, 1819년 11월이 되기까지 그는 의무를 수행했다.
그 기간동안 로랑은 수많은 개혁을 발의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그는 군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로랑은 제국의 노병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진력했으며, 참모진을 재조직, 군법 체계의 개정, 그리고 연금의 조정 등을 꾀했다. 1817년에 후작이 되었고, 남은 여생을 보내다 1830년 5월 17일 프랑스 남동부의 마을인 예르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훗날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에 붙여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