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원정
1. 개요
1812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한 사건. 나폴레옹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전쟁 배경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깨진 러시아는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명목상으론 프랑스의 대등한 동맹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어느 정도 자유주의 성향이 있었던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과 대적하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대륙 지배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구상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명목상 대등한 동맹국 대우를 해주었다. 나폴레옹은 1809년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키면서 당분간 유럽 대륙 내에는 나폴레옹에 맞설 나라가 없었다. 영국은 본토가 침공받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다른 나라들은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죽이 매우 잘 맞는 것처럼 보였고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핀란드도 넘겨주었다. 나폴레옹과 차르의 여동생인 안나 공주의 결혼 얘기가 오가는 등 두 나라 사이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하지만 1810년 러시아와의 혼인은 무산되었고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를 선택했다. 혹자는 1808년 10월 에어푸르트 회담부터 두 나라가 삐긋거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오스만 공격을 저지시켰고 바르샤바 대공국 수립으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며 차르를 화나게 했다. 폴란드 문제도 오스만 문제도 러시아와의 공조가 필요한 민감한 부분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를 무시해버렸다.
거기에 나폴레옹이 유럽 지배와 영국에 맞서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북해안과 엘베강 하구까지 발트해의 거의 모든 항구를 점령한다.이 과정에서 한자동맹 도시와 올덴부르크 공국을 합병한 것이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올덴부르크 공국은 차르의 넷째 여동생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남편 페터 프리드리히 게오르크가 법정 상속인인 나라였으며 차르의 어머니 마리아 페도로브나의 외가인 뷔르템베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된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군사정책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차르의 곁에는 황태후를 비롯하여 수많은 반 보나파르트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은 차르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한편, 나폴레옹은 해군력의 미비 때문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수 없어,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사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몇 년 전 대륙 봉쇄령을 내렸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쳐발린 지 한두 해만에 대군을 회복한 것도 영국이 은밀히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유럽지배를 확고히 하려면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지 않고선 장기적으론 불가능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
러시아도 처음에는 여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했지만 교역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당초 예상치를 초과했다. 러시아의 주 수출품목인 곡물, 삼, 목재, 수지, 송진, 칼륨, 가죽, 철의 대영국 수출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나폴레옹은 정작 러시아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한다거나 남아도는 러시아 물건을 사준다거나 또는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수출한다거나 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생필품은 이탈리아나 독일에 파는 것이 이득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엔 향수, 독주, 도자기, 보석 같은 사치품만 팔렸다.
이에 격노한 차르는 1810년 12월 프랑스 사치품에 높은 관세를 적용하고 중립국 선박에게 항구를 개방했다. 가장 심했을 때에 영국이 한 방에 상선 600척을 발트해 쪽으로 보내서 무역을 하곤 했다. 반면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고[1]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밀어붙인 대륙 봉쇄령이 실효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거기에 폴란드 문제로 1811년 양국은 충돌했는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이 러시아를 지지하길 거부하자 차르는 일단 물러서 나폴레옹과 협상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의 경제적 위기를 설명했다.[2] 그러자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에 돌입, 러시아 최신 지도를 입수하라고 명령했다.
1811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일부를 할양해달라고 요구하자 튈르리 궁전에서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쿠라킨 공작을 공개적으로 마구 비난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쿠라킨 공작을 소환해버렸다. 러시아 원정에 대해서 탈레랑, 콜랭쿠르가 모두 만류했다. 아르망 드콜랭쿠르 프랑스 대사는 중대한 실수이고 이베리아 원정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나폴레옹도 콜랭쿠르를 소환해버리는 것으로 응대했다. 콜랭쿠르는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다섯 시간 동안 차르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을 결심한 상태였다.내가 80만 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동맹국에 기댈 생각인가 본데 동맹국은 어디에 있는가?
3. 전쟁 준비
나폴레옹은 1811년 8월말부터 11월 중순까지 러시아 정벌에 대해 재고했다. 콩피에뉴-비메뢰-앙블르퇴즈-칼레-됭케르크-오스텐더-플리싱언-앤트워프-호린험-위트레흐트-암스테르담을 두루 여행한 그는 헤이그-로테르담-로-네이메헌-아른험-뒤셀도르프-본-리에주-메지에르까지 돌아본 후 생클루로 돌아왔다. 그는 대륙봉쇄령과 전쟁은 제국운영에서 필수라고 여겼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 대륙봉쇄체제의 유지를 위해 러시아를 굴복시켜 제국의 위신을 유지해야 한다.
- 러시아는 영국의 유일한 잠재적 대불동맹 파트너다.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면 겁먹은 영국도 항복한다.
- 폴란드를 강화하기 위해선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 폴란드를 강화시키고 러시아를 약화시켜야 제국의 동부가 안정된다.
1812년 1월 13일 나폴레옹 장 라퀴에 육군장관에게 40만 명이 50일간 먹을 식량을 준비하라고 했다. 이를 위해 빵과 쌀로 만든 군용 휴대식량 2천만 개가 필요했다. 그리고 20만 명이 두 달간 먹을 밀가루와 이를 수송할 마차 6천 대, 말의 사료로 쓸 귀리 7200만 리터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보급품을 봄에 맞춰 어디서 구해 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부의 1군단, 우디노의 2군단, 네의 3군단과 근위대, 뮈라의 기병대를 합쳐 25만 명 규모로 1군을 편성하고, 15만 명으로 2군을, 16만 5천 명으로 3군을 편성해 각각 구경 보호와 증원군 제공을 명령했다. 외젠이 4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에스파냐 연대를 지휘했다. 포니아노프스키가 5군단과 폴란드 군대를, 레니에르과 7군단과 작센 군대를, 구비옹 생시르가 6군단을 지휘했다. 프랑스, 독일, 폴란드가 섞인 빅토르의 9군단과 오주로 혼성 11군단, 방담의 8군단과 베스트팔렌, 헤센 군대도 준비되었다. 거기에 제롬과 뮈라가 각각 2개의 기병부대를 더 지휘했고 나폴레옹이 직접 5만명의 청년근위대와 선임근위대를 지휘했다.
1812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차르의 특사 첸체프에게 협박 메시지를 주어 러시아로 보냈는데 경찰이 습격한 첸체프의 아파트에선 러시아 원정을 위해 준비되던 프랑스 군대에 관한 정보가 모조리 있어 프랑스의 정보가 숭숭 뚫렸음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콜랭쿠르의 타협론을 더욱 비난하며 강경하게 나갔다. 차르는 4월 27일 프랑스의 프로이센 철수, 올덴부르크 공국의 독립과 완충지대 설정을 요구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무시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 즈음에는 알렉산드르 1세조차도 전쟁에 마음을 굳힌 후였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군대를 내놓으라고 협박, 프로이센에게서 요르크의 병력 2만 명과 많은 군수품을, 오스트리아에게서 슈바르첸베르크의 병력 3만 명을 뜯어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자신들이 강압에 끌려왔다고 러시아에 비밀리에 통지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영국에 강화를 제시했다.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를 복고시키고 시칠리아도 페르디난도 왕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포르투갈과 시칠리아가 이미 영국 손아귀에 있는데 이를 조건으로 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페르난도 7세의 복위를 요구했다. 프랑스는 당연히 씹었다. 러시아의 외교전이 잇달았다. 스웨덴의 베르나도트는 신하들의 압박에 1812년 4월 러시아에게 노르웨이 정복 지원을 약속받고 러시아에 붙었고 1812년 5월 부쿠레슈티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휴전했다.
4. 병력 규모
이에 나폴레옹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꾸리게 되었다. 원정군 규모에 대해서는 45만에서 70만까지 여러 말이 난립하는데, 다수의 서적에서 취하는 클라우제비츠의 기록에 따르면[3] 총 병력은 61만 명(11개 군단)에 달했다고 한다.
1군단부터 9군단까지는 프랑스와 프랑스의 동맹국에서 차출했고 10군단은 자크 마크도날이 맡았지만 총 3만 병력에 프로이센군 2만 명이 차출되었고, 11군단은 온전히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졌으며 3만 3천의 병력에 지휘권은 슈바르첸베르크 장군에게 위임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현격한 대우 차이는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장인에 명목상은 대등한 동맹국이지만 프로이센은 그런 거 없기 때문... 60만 대군의 이동로로 사용하며 물자를 대느라고 프로이센이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 '''국경을 넘어 간 건 42만 명 정도다.''' 기록에 따라 45~50만 명 설도 있다. 스웨덴과 영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발트해에 병력을 남겨야 했고 미덥지 않은 동맹(?) 프로이센 점령용 병력도 남겨야 했기 때문.
- 나폴레옹 본대 23만 2천 명(근위대 4만 6천 포함)
- 라인 동맹 병력 13만 명. 1806년 협정에 따라 병력 13만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라인 동맹의 보호자 프랑스도 유사시 16만 병력을 제공해 준다는데 어째 이것도 호구 느낌이... 바이에른 왕국 3만, 베스트팔렌 왕국 2만 5천, 작센 왕국 2만, 뷔르템베르크 왕국 1만 2천, 바덴 대공국 8천 9백, 베르크 대공국 5천, 헤센-다름슈타트 4천, 나사우 3천 8백, 프랑크푸르트 2천 8백 등등.
- 바르샤바 공국 9만 5천 명.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성공 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부활을 약속했고 폴란드에게는 이 원정에 조국의 흥망이 걸린 문제였다. 전체 국민이 300만밖에 안되는 국가에서 국가역량을 총동원한 결과, 거의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징병되었다. 이들이 떠나고 나자 바르샤바는 유령도시가 될 정도로 텅 비어버렸다고 한다.
- 오스트리아 3만 3천 명. 벨로루시에 짱박혀 있다가 이심전심으로 러시아와 전투를 안하다가 은근슬쩍 퇴각했다.
- 프로이센 2만 명. 역시 쿠를란트에 짱박혀 있다가 프로이센 국왕이 러시아와 내통하며 마크도날의 10군단에서 이탈했다.
- 1전선군 바클라이 드톨리 12만 7천 명.
- 2전선군 표트르 바그라티온 4만 5천 명.
- 3전선군 알렉산드르 토르마소프 4만 명.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있었기에 초기전역에 투입되지 못했고 공수교대 이후 민스크를 탈환할 때 합류했다.
5. 전역 경과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은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 주력을 일시에 섬멸하고 빠른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는,
라고 통보했고 자신과 장군들과 궁정 신하들에게도 못을 박아 놨다. 총사령부에서 따로 나폴레옹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도 차단하고 감시했다. 쿠투조프가 후에 나폴레옹이 보낸 사절과 대화만 한 것도 크게 질책할 정도.'''러시아 국경 내에 프랑스 무장 병력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강화는 없다.'''
이곳에는 러시아의 제1서부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도 10만에 달했지만 사령관인 바클레이 데 톨리는 나폴레옹의 병력이 생각보다 엄청난 군세임을 알고 나서는 신속히 퇴각하고 나폴레옹이 의도한 결전을 피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있던 알렉산드르 1세도 후퇴하면서 데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준 뒤,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드톨리는 3만에 달하는 바그라티온의 제2서부군과의 합류를 요구했다. 드리사도 나폴레옹을 막는데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드톨리는 드리사도 버리고 계속 내륙으로 후퇴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 저항 없이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그런데 드톨리가 신속히 퇴각함으로써 나폴레옹은 강행군을 하게 되어 비전투 손실이 극심했다. 강행군이 시작된지 며칠만에 러시아에 폭우가 내려서 길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불어난 강물에 폴란드 기병대 병사들 상당수가 익사했다. 군마의 먹이인 건초와 귀리가 부족했는데, 말먹이 부족으로 농가의 지붕을 벗겨다가 말에게 먹였다가 메멜을 거친지 며칠만에 군마 2만 마리가 굶어죽거나 탈진했고 식수도 부족해서 비상용 화주는 금방 바닥이 났으며 목이 말라 노천수를 먹은 병사들은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서 '''첫 2주 만에 병력 13만 5천 명을 비전투 손실로 잃었다.'''
특히 구급약품 수송마차들은 전투부대 뒤로 쳐져서 아무런 치료도 못 받았고 일선에선 약품을 대체할 대용품조차 없었다고 한다.[4]
이런 안습한 복무 여건 속에서 탈영자 자살자가 속출하여 독일 지역 동맹군(?)들에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본국으로 편지 보내기를 금지할 정도...
나폴레옹의 본대 주력군은 스몰렌스크 전투 직전 17만 5천 명으로 감소하였다.
한편, 바클라이 드톨리는 비텝스크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하려 했지만 바그라티온의 2군이 모길레프에서 격파당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도로가 차단된 탓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2군과 스몰렌스크에서 합류했다.
사실 드톨리의 작전을 청야전술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지만, 드톨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뭔가 프랑스군에게 맞서려고 하다보면 어느새 프랑스군이 와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강하다. 특히 전쟁과 평화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청야전술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거점이 함락될 때마다 총사령부에 직접 신하를 파견해 드톨리를 질책했고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자 화가 나 드톨리를 잘라버렸고 모스크바 함락시에도 쿠투조프에게 해명을 요구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간에 어쨌든 러시아 측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5] 공세 측인 프랑스는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는데, 특히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를 겪는다.
나폴레옹의 급속한 행군은 당시 전문가들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인 프랑스 사가들 사이에서조차 무리한 공세였다는 게 중론이다.
8월에 접어들어서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스몰렌스크 전투)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잡힐만 하면 도망치는 러시아군의 전술에 몇 번이나 당하며 초조했고 화가 나 있었다. 마침 스몰렌스크는 러시아군의 서유럽 전진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일시에 장악하려 했지만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못 챙겨 와서 시간을 놓쳤다. 그 사이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 파괴를 명령했고 목조건물이 많은 스몰렌스크는 불바다가 되었다.
양측의 교전이 있긴했지만 큰 교전은 아니었고 사상자수는 2만 이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스몰렌스크를 지키내라는 명령도 못 지키고 도시를 시원하게 태워먹은 드톨리를 크게 질책하면서 청야전술에 부정적이었던 미하일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하였다. 애초에 쿠투조프를 기용하지 않은 것은 드톨리를 바지사장으로 세워놓고 일일이 전술에 간섭질을 하기 편하도록, 주전파이며 러시아 전통파를 대표하는 바그리티온 대신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출신인 드톨리를 기용한 것.
애초에 주전파인 러시아파와 드톨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모두 아우를 만한 대장감은 쿠투조프 밖에 없었다. 쿠투조프는 취임 조건으로 대놓고 통수권자인 차르보고 간섭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고, 황태자인 콘스탄틴 대공[6] 을 기용하여 명령권을 간섭치 말 것을 차르에게 직접 요구했고 차르는 화가 났지만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7]
쿠투조프는 막상 실무를 떠맡고 보니 그동안 열심히 깠던 드톨리의 전술을 채용해야 했지만, 옛 수도 절대 사수라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도 있었고 '''"한 번도 싸워보지 않고 모스크바를 내줄 순 없다."'''는 드립을 황제 앞에서 쳐놨기 때문에 모스크바 앞에서 전투를 벌일 구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그라티온 같은 주전파들의 반발이 심한데다가 군의 사기상, 계속 싸우지 않고 도망치면 지휘도 어려워지기 때문..
보로디노에서 우주방어를 치고있던 러시아군을 나폴레옹이 까부쉈다(?)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보르디노는 쿠투조프가 선택한 곳은 아니었다. 쿠투조프는 멀리 있어서 보르디노 전투에 참여하지 못 했고,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전날 열심히 지형을 답사하다가 감기에 걸려 후방에서 명령만 내렸다고.
레프 톨스토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로디노 전투는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군이 스몰렌스크-모스크바 사이 160여 km 중에 방어에 더 적합한 지형을 내팽겨치고 보로디노에서 붙은 점, 전투에서 가장 극심한 격전지인 러시아군 좌익의 보루공사를 고작 하루에서 사흘 정도밖에 하지 않은 점, 좌익에 진을 친 이점을 이용 하려면 프랑스군의 좌익과 러시아군 우익이 맞붙는 칼라차 강에서 프랑스군의 도강을 저지했어야 하는데 이미 따라잡혀서 아무 간섭 없이 도강한 점 등을 미루어 볼때 나폴레옹의 추격에 러시아군이 보로디노에서 따라잡혔고 보로디노에서 전투가 이뤄졌다는 설을 펴고 있다.
아무튼 현재까지 설로는 보로디노에서 양군의 병력은 대포의 화력까지 얼추 비슷했다고 전해지고[8] 새벽부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보아르네가 러시아 우익에 유도 공격을 하는 척 하면서 러시아군의 좌익 바그라티온을 프랑스군 우익 포니아토프스키가 기병을 이끌어 우회하고, 중군의 다부가 바그라티온을 협공하면서 시작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러시아 보병대에 저지당했고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버텨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러시아군의 병력배치가 잘못되어 좌익에 병력이 적었고 집중공격을 받자 우익의 드톨리가 구원을 하러 오자 개활지에서 프랑스군 좌익 외젠 드보아르네에게 측면을 노출 당했고, 이 때문에 시작도 전에 배치 실수로 진 전투라고 평가 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 되었고 양군은 너나 할것 없이 탈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근위대 투입을 거부했고[9]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싸움이 되어갔다...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채 소강상태에서 더 피해가 큰 러시아군이 후퇴함으로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난다. 전투 피해는 러시아군 사상자 6만, 프랑스군 5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러시아군에서는 바그라티온을 비롯하여 적어도 장군급 6명이 전사했고(바그라티온은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에 사망했지만) 프랑스군에선 다부가 말에 떨어져 중상을 입고 실려갔으며 장군 11명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양군은 인명 피해 뿐만 아니라 기병 손실이 매우 컸는데, 프랑스군의 작센 기병여단 전멸을 포함, 3만 5천 필 이상의 군마를 잃었다고 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러시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대해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서 "러시아 보병은 요새이며 오로지 포격으로만 파괴할 수 있었다." 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여기서 러시아군의 미스가 생기는데 쿠투조프는 전선에서 떨어져서 보고를 받는 입장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내버린것. 그 결과 황실 주최 감사기도회가 열린 건 덤. 이후 러시아는 '''전투 5일 후'''에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6. 모스크바 점령
나폴레옹은 보르디노 전투 7일 후인 9월 15일, 유유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5일 후에야 후퇴 명령을 내린 탓에 모스크바 시에는 러시아군 부상자 1만 명이 치료를 받다가 도망도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원정 때처럼 마음껏 정복자 행세를 했다. 이집트에서 나환자 병원에 찾아간 것처럼 모스크바에서 고아원 양로원을 방문해서 기부를 했고[10] 정교회 사제들에겐 평소처럼 교회를 열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고, 포고문으로 약탈을 금지하고 모스크바에서 흩어진 상인과 수공인들에게 공정한 통상과 안전을 보장하며 평소처럼 경제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문했다.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계산으론 모스크바엔 대군을 먹여살릴 반 년치 정도의 식량이 확보되어 있고 이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월동하며 항복 사절을 기다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
'''그러나''' 9월 14일-18일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 원인으로 프랑스 측에선 러시아인들의 야만적인 애국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1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낸 편지에서 비난하길 방화는 당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직접 임명된 전시 모스크바 총독 로소톱친 백작의 소행이며, 이는 프랑스가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자백을 받은 사실이라는 것. 그런데 방화범을 몽땅 처형하고 나서도 아직 방화범이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화재 진압을 제대로 못했는지 다음날 또 큰 화재가 터져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워먹고 한때 나폴레옹이 머문 크렘린 근방까지 번져서 잠시 성밖으로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는 프랑스군의 약탈 때문에 벌어진 화재였다고 주장하는데 현재는 의도적 방화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11]
나폴레옹의 관대한 정복자 코스프레도 별로 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안 병력들은 위대한 군대에서 당나라 군대 폭도떼가 되어가고 있었다.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출신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 생각이 들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고관대작들의 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술 퍼먹고 멱살잡고 싸웠으며 주민들도 학대하고 총질은 기본이었다. 유서 깊은 교회들도 약탈당했기 때문에 점령군은 사제들에게 사탄 취급을 받았다.[12] 나폴레옹이 크렘린 경호에 방해가 된다며 성 바실리 성당을 두고 "저 모스크를 빨리 때려 부숴라"라고 명령한 게 소문이 다 퍼졌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극장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상영할 것을 지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배우들이 통째로 약탈(?) 당했기 때문. 나폴레옹 말도 안 들어 쳐먹는데 장교 말은 들을 리가 없고 약탈 금지령 역시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장교들은 물론이고 헌병대까지 약탈병들에게 공공연히 살해당했다. 이런 풍조는 근위대 병력에게까지 번져 근무 서는 걸 거부하고 약탈하기가 일쑤였다. 크렘린에서 나폴레옹 침실 앞 복도까지 약탈 당할 정도.
이 때문에 훗날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정신승리 화법을 많이 구사한 나폴레옹조차도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면서 병사들을 타락시킨 걸 후회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맺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3번이나 항복을 권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군부와 황태제 콘스탄틴 대공, 황태후 마리아 페도로브나까지 강화를 권유했다. 알렉산드르는 전투 지휘에선 엑스맨이었으나 정치 면에선 굳건했다. 오히려 쿠투조프 진영에 나폴레옹 사절이 간 것을 알고 문전박대 안 했다고 쿠투조프에게 직접 신하를 보내 질책까지 했다.[13]
약탈은 끝을 보이지 않았고 식량이 모자라자 모스크바 밖까지 병력이 흩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생활은 종지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나폴레옹이고 장수들이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순찰 중에 어느 병사와의 대화에서 병사가 "지금이라도 신속히 후퇴해야 할겁니다. 황제 폐하"라고 말해 이를 듣고 이틀 후에 전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크렘린 궁전이라도 파괴하고 퇴각하려고 궁 밑에 폭약을 잔뜩 설치했지만 후퇴 당일 비가 내려 탑 3개와 성벽 일부분만 무너지는 정도로 피해를 면했다.
7. 위대한 군대의 위대한(?) 몰락
나폴레옹은 후퇴 날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데 군대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해 (물론 나폴레옹조차도 많이 챙기긴 했지만)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14] 골동품 미술품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 대열이 아니라 이삿짐 대열이었다. 군기가 이토록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애써 정신승리했다. 4주 간의 모스크바 생활 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고 약탈하러 나가느라 9만으로 줄어 있었다.
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일어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는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격한 것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러시아는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스몰렌스크 방면은 이미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된 후라 프랑스군은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해 남쪽 칼루가와 툴라 방향으로 퇴각하지 않은 게 나폴레옹의 실책이라는 의견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갈린다. 구체적으로 칼루가와 툴라 방향은 빌뉴스-스몰렌스크-모스크바 라인처럼 초토화를 당하지 않아서 식량이 있는데다가 툴라에는 대포 공장을 비롯해서 러시아군 기지창이 있었는데 병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일전을 벌였어야 된다는 의견과 이미 군기와 전투력이 소모된데다가 러시아군이 허수아비도 아니니 무리였다는 의견이 갈린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추격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하나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 명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 이 두 가지만 강조했다. 따라서 젊고 공명심에 부푼 젊은 장교들은 쿠투조프를 노쇠하고 겁 많은 노인네라며 마구 깠다.
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으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병력도 고생을 하며 손실이 극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나폴레옹을 잡아버렸으면 러시아는 유럽 여러나라의 견제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했어야 하는데 앞선 짐들이 너무 많아 신속은커녕 느려터지게 퇴각하느라 러시아군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를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이미 기병 병력이 극심하게 소모된 데다가[15] 지독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게다가 말이 없는 탓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버려졌다. 이는 나폴레옹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네 장군의 3군단 기병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겨우 수천으로 감소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행군 탈락, 탈주병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 되도 사는 걸 장담하기 어려웠다. 잔뜩 뿔이 나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거나,얼어 죽거나, 굶어죽거나, 병 걸려 죽거나, 운 좋게 포로로 잡히더라도 러시아군은 포로들을 먹여살릴 의도도 능력도 없었다. 관대하게 봐줘어도 포로 중에 절반 이하만 생존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는 6만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만에 불과했다.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적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었고 바짝 뒤쫓기만 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16] , 굶어 죽든가, 농가를 약탈하며 흩어지든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조공으로 바치든가의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를 묘사한 참전 생존자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 다섯 명의 프랑스 병사가 꽁꽁 언 말 다리 하나를 두고 개처럼 싸운다.
- 말 담요, 여자 치마, 반쯤 마른 짐승가죽, 넝마를 몸에 걸치고 신발 대신 양가죽, 천조각을 발에 감았다.
- 때와 연기에 시커멓게 절어 얼음 위를 행군하다 누가 지쳐 쓰러지면 그 사람이 죽기도 전에 다른 병사들에게 몸에 걸친 것들이 모두 벗겨지고 눈밭에 내버려졌다.
- 황제 근위병이 아직 죽지 않아 저항하는 자기 동료의 입은 것을 강제로 빼앗아 입는다.
- 한 무리의 병사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교회에서 이미 들어가 쉬던 다른 병사들을 총검으로 내쫒아 길가에서 얼어 죽게 만들었다.
- 동료의 사체를 깔고 앉아 무심하게 불을 쬐었다.
- 수백 명의 프랑스 병사가 빼곡히 들어찬 헛간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자, 병사들이 불타는 헛간에 모여들어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아우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녹인다.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 뒈졌음"이란 명분으로 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11월 28일,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베레지나강을 건너기 위해 나폴레옹군이 배다리를 놓자, 쿠투조프는 이때가 결정타를 먹일 때라 판단하고 배다리를 건너 나폴레옹군을 급습했다(베레지나강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조아킴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나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외젠 드보아르네에게 잔존 부대를 남기고 탈주해 버렸다(...). 12월 7일부터 9일까지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찾아왔다. 당연히 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죽었다. 외젠은 간신히 남은 부대를 이끌고 12월 14일, 러시아 영내를 완전히 벗어났다.
나폴레옹은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날씨의 희생양이다"라고 말고 실제로 러시아에 다녀온 프랑스 병사들이 "러시아의 추위는 혹독했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런 속설이 더 퍼졌을 가능성이 크다. 강추위는 12월 7일 즉 원정의 막바지에야 찾아왔고, 원정 기간의 대부분 기온은 오히려 보통 때보다 따뜻했다. 10월부터 이미 키예프, 바르샤바의 기온은 영상 10도를 웃돌았고, 탈린과 리가의 기온도 영상 7도를 기록했다. 11월 말에 꽁꽁 얼어붙은 베레지나 강을 건넜다고 하는 묘사 역시 거짓말. 가장 추위가 강했던 11월의 스몰렌스크의 기온도 영하 8도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 정도의 추위에도 취약했다. 보급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만신창이가 된 처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고작 영하 8도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가벼운' 기온이라고 할 수 없는 조건이다. 더구나 그들이 입은 옷은 여름옷이었다. 저 경우는 며칠도 아니고 몇 달 간 추위에 피로가 누적됐으니.
러시아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는데 모스크바 원정 병력은 본대 병력은 거의 전멸했고, 말 20만 마리와 대포 천여 문을 잃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괴멸했다. 나폴레옹이 물론 1808~15년 이베리아에서 25만을 잃긴 했지만 임팩트 있게 날려먹은 건 러시아 원정이 컸고 나폴레옹에게 당한 동맹국에게는 기회로 작용한 것.
다만 60만 대군 중에서 중에 앞서 국경을 건넌 건 42만이고 본대와 모스크바로 향한 병력은 35만 정도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도망친 병력은 9~12만 정도로 추산한다.(자세한 내용수정 바람) 여기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병력 4~5만여 명이 포함되고, 포로로 잡혔다 나중에 살아난 병력을 감안하면 몽땅 러시아에서 죽은 건 아니다. 물론 본대중에 80% 이상 집에 못 돌아간 건 맞다만.
겨울철이 겹치고 날씨 기후가 혹독했기 때문에 특히 비전투 손실이 양군 모두 컸는데 러시아군도 주력인 1전선군이 12~3만에서 5만까지 감소했고 결국엔 1, 2전선군을 합쳐버렸다.[18] 벨로루시에 짱박혀서 산책만 하다 돌아간 오스트리아군마저 3만 3천 명 중 2만 명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경이었다. 러시아군 총 손실은 모두 합쳐 21~25만 정도로 추산한다.
8. 기타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힐때 그나마 제대로 된 러시아 정규군에게 잡히거나 하면 정말 행운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열에서 낙오했다가 으슥한 러시아의 시골에서 분노한 현지 농부에게 잡혀 끌려간다고 하면, 말 그대로 척추가 으스러질 때까지 인간 도르래가 되어버리거나, 산 채로 불태워지거나, 사지가 찢겨진다던가 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이것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프랑스 병사들은 포로로 잡히느니 차라리 자살을 하려 했다. 패주하는 와중에 나폴레옹이 따로 사람을 보내 이런 행위를 중지하게 하라 요구했고, 나폴레옹 본인도 만약을 대비해서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다.[19]
안타깝게도 프랑스 군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가에 있던 많은 프랑스인 가정교사[20] 들도 제노포비아 때문에 같이 후퇴하다가 많이 죽었다.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독일인과 영국인들도 의사나 엔지니어로 러시아에 많이 와 있었는데, 1812년 6월부터 외국인을 상대로 한 폭행과 약탈이 급증해서 순수 러시아인에다가 귀족이어도 외국어를 쓰면 거리에서 린치당하고 외국인들은 아예 첩자 취급했기 때문에 같이 퇴각한 것.
그러나 조국전쟁 당시에나 이랬지, 전쟁 끝나고 나서는 다시 외국어와 외국 문화 애호 경향이 다시 살아나서 19세기 내내 대다수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할 줄 알아도, 러시아어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거의 5~6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외교관이 모국어를 해보라고 하면 겨우 몇 문장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전후 세대인 푸시킨과 조국전쟁을 다룬 소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조차 부모의 교육방침에 따라 어릴 적부터 프랑스어를 가까이 해야 했다.
그리고 조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표트르 대제 이래로 러시아 문화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서유럽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회생시키려는 슬라브주의가 생명을 얻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로 가서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이 데카브리스트가 되어 조국 러시아의 개혁을 꿈꾸었다.
러시아에서는 이후 이 전쟁을 '''1812년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이라고 부르게 된다. 줄여서 조국전쟁. 참고로 훗날 러시아는 또다른 조국전쟁을 훨씬 스케일이 커진 버전으로 치루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으로 잘 알다시피 20세기에 나치 독일이 소련에서 나폴레옹과 비슷한 꼴을 당한 그 전쟁이다. 과연 대륙의 기상. 실제로 나치 독일과 소련의 대결인 독소전쟁이 이 전쟁과 비슷한 국제 구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21]
흥미롭게도 이들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한 날은 6월 22일로 프랑스군이 침략한 날과 비슷했으며,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날도 8월 10일경으로 양쪽이 모두 같았고, 또한 둘 다 수도를 못 공략한 것도 같았다.[22] 단, 다른 점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23] 였던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위해 그 길목에 있는 거점 도시들만 점령한 반면, 히틀러는 유럽 러시아 지역을 모두 점령해서 레벤스라움을 만들려고 했기에 진군하는 지역마다 소도시든 대도시든 상관없이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물론 그 덕분에 나폴레옹보다 석 달을 더 쓰고도 모스크바의 지척에서 후퇴했지만... 한겨울인 12월 2일까지도 진격했으며, 그때 당시 모스크바에서 30km 지점인 힘키 부근에 다다랐다. 당시 힘키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던 노선표 중 하나의 종점이 '''붉은 광장'''이었고 얼어붙은 망원경으로 겨우겨우 크렘린궁의 첨탑이 보였다고 한다 .[24]
9. 미디어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사실적이고 냉철하게 쓰였다. 프빠 나폴레옹빠들이 부르짖는 떡밥들을 분쇄하며 "나폴레옹은 전술적으로 잘못한 게 없고, 매 상황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질 싸움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image]
이를 원작으로 1956년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전쟁과 평화》는 '''당시로서는''' 대작이고 소련에서 조차 환영받으며 흥행했지만 스토리가 약한게 흠, 분량상 7년에 걸친 수천 페이지의 소설을 3시간정도에 담으려니 내용연결이 안되고 생략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50먹은 헨리 폰다가 소설상 20 극 초반 주인공역에 캐스팅된게 큰 흠...
[image]
본고장 러시아(당연히 당시에는 소련)에서는 우리나라 작품을 저렇게 망쳐놓았다고 일부 불만도 있어서 제대로 만든다고 마음을 먹고 나중에 워털루를 감독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 감독이 맡아서 1966년부터 1967년까지 4부작으로 나눠 제대로 만들었다. 모두 상영시간은 431분에 달하며[25] 아직도 깨어지지 않아 영원히 깨질 거 같지 않은 영화상 최다동원 엑스트라 기네스북에 오른 '''75만 명이라는 가공할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우라돌격을 그야말로 실감나게 묘사하며 해외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830만 루블이라는 당시 가공할 제작비로 만들었는데 소련 내 흥행만으로 5800만 루블을 벌어들였고[26] 해외로 많이 수출되어 원작을 가장 잘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해당 영상 4분 15초부터 보면 된다...저 가공할 병력이 죄다 실제 사람이다. 이때의 스텝들을 활용한 서구-소련 합작 영화가 일종의 후속작 격인 워털루. 그러나 너무 길어서(총 405분, 약7시간!) 개봉은 고사하고 TV 미니시리즈로 봐야한다. 한국에서 방영할때도 미니시리즈로 방영해줬다. 문제는 미니시리즈로 하면 김이 새는 문제가 있다. 역시 대륙의 기상.
[image]
그밖에 영국에서 1972년에 모두 15시간에 이르는 20부작 드라마로 만들기도 했다.
혼블로워 시리즈의 결전! 발트해 부분도 러시아 원정을 그리고 있다. 약간 대체역사적인 상황인데 나폴레옹의 분견대가 발트해를 통해서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기습하여 러시아 황제를 잡으려고 하고 그것을 혼블로워의 원정군이 막는 스토리.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작품 <1812년 서곡>은 바로 이전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가 각각 포함되어 있다.
2012년에 러시아에서 조국전쟁 200주년 기념으로 보로디노 전투를 재현하는 대규모 리인액트 행사를 하였다.# 더해서 새로운 박물관도 개장했다.
[1]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의 실질임금이 3분의 1로 감소했고, 미국이 프랑스에 붙어서 대미 수출이 10분의 1로 감소한 데다가, 네드 러드 같은 기계 파괴 노동자 폭동 때문에 영국에선 전시도 아닌데 런던에 병력 5만 명을 배치해야 했다. 이는 워털루에서의 웰링턴의 병력과 맞먹으며, 잘 싸우던 이베리아 전선에서 웰링턴의 병력에서 4개 연대 병력을 급히 차출해서 국내에 배치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해안 항구 도시들의 피해도 막심했다.[2] 당시 러시아 수출량의 30%가 영국 대상이었다. 대륙 봉쇄령 때문에 전체 무역 흑자의 30%가 증발해버린 것이다.[3] 전쟁론의 저자로 프로이센 군인이며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군 바클라이 드톨리의 진영에서 참모를 지냈다. 1830년 유고집이 러시아 원정 사료로 많이 쓰인다.[4] 러시아 원정 당시 군의관으로 활약한 도미니크장 라레(1766~1842) 기록에 따르면 붕대 대신 속옷을 감아주다가 나중엔 종이, 나중엔 지푸라기를 감아주었다고 한다.[5] 러시아군에서도 급속하고 무리한 후퇴 속도 탓에 탈영과 탈주,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여 뭉쳐 다니며 농촌을 약탈하고 다녔다.[6] 알렉산드르 1세의 2살 연하 동생. 황제가 자식이 없기에 황태자였다.[7] 하지만 훗날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콘스탄틴 대공도 파견했고 인사권과 실무 전술에까지 간섭을 했으며 참모장 베니히센을 스파이로 활용(?)하여 쿠투조프를 감시했다. 쿠투조프는 콘스탄틴 대공한테는 동문서답하고 베니히센한테는 황제께서 여기가 더 필요하시다는데 하면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등 능구렁이 같은 실력으로 차르의 간섭을 피해나갔다. 애초에 차르는 쿠투조프를 음흉한 노인네라며 싫어했기 때문에 급한 상황에 몰려서야 계책을 쓴 것이다.[8] 양측 12만에서 16만 사이[9] 여러 설이 있지만 나폴레옹은 충성심이나 전력이 미덥지 못한 동맹국이나 프랑스군의 2선급 전투병력의 손실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파리에서 2천 km나 떨어진 타국에서 근위대는 자신의 목숨줄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아꼈다는 설이 유력하다.[10] 원정에 앞서 현지 조달을 위해 다량으로 위조 지폐를 찍어서 가져갔다. 이 위조 지폐가 프랑스 점령지에 뿌려지면서 전후 러시아의 금융, 경제가 휘청거리고 안 그래도 가치가 불안정했던 러시아의 태환 화폐, 아시그나치야의 가치가 폭락해버렸다.[11] 로소톱친은 당시 방화명령을 내렸음을 부인했지만, 결국 나중에 인정했다.[12]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나폴레옹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며, 모스크바 시내에는 사악한 적그리스도인 나폴레옹을 몰아내자는 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했다고 한다.[13] 한번은 답장을 보내긴 했는데 그 내용이 뭐냐하면, '''내가 보고 싶으면 베링해까지 쫓아와 봐라'''.[14] 러시아 원정시에 위조지폐를 엄청 뿌린 탓에 은화 값이 폭락해서 은붙이는 개도 안 주워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금붙이를 챙겼던 사람들은 나중에 리투아니아로 퇴각한 후 방세를 낼 수 있어 살았고, 착한 척 안 챙겼던 사람들은 그냥 밖에서 얼어 죽었다. 방세는 무조건 하룻밤에 금화 1닢(2020년 한화로 대략 7만 5천원)이었다.[15] 보로디노 이후 뮈라에게 쿠투조프를 추격하라고 또 기병을 쓴 점도 컸다.[16] 화약의 질산칼륨 성분 때문에 소금간 대신 쳐서 먹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정도까지 가면 막장이다. 러시아 경기병대의 구호는 "적에게 말고기를 먹이자'였다.[17] 유발 하라리. '극한의 경험', 옥당, 2017, 434~7p.[18] 그 덕에 바클라이 드톨리는 자연스레(?) 경질되어 1813년 러시아군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이 삽질로 알렉산드르 1세가 경질하기 전까지 백수 신세.[19] 이 약은 훗날 나폴레옹이 망하고 엘바섬에 가기 전에 먹었는데, 그 때는 약이 너무 오래돼서 먹고도 나폴레옹이 살아나기도 했다. 뭣보다 러시아의 높으신 귀족들도 길거리에서 프랑스어 썼다고 자국 농민들한테 두들겨 맞고 다니던 시점에서 나폴레옹의 이런 요구를 러시아 정부가 들어줄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20] 귀족은 물론 상공업자들도 실용적, 그리고 문화사대주의적 이유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많이 고용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어에 서툴러서''' 프랑스어를 쓰면 거리에서 얻어맞을까봐 뒤늦게 러시아어 과외를 받거나(...) 술집에서 서로 프랑스어를 쓰면 벌금을 내기로 하는(이때 자국어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골때리게도 러시아어로 '벌금'이란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벌금'을 프랑스어로 썼을 정도(...)였다.)장면이 나온다.[21] 서유럽을 제패→북아프리카에서는 잘나가는데→영국 공격이 지지부진→러시아에 시비걸러 감→러시아의 반격 및 동계 대비와 군수 부족→털림→망함(…).[22] 사실 러시아 원정 당시의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바로 그 유명한 '''레닌그라드'''다)였다. 즉 나폴레옹은 상징적인 도시는 점령했지만, 수도는 못 공략한 것이다.[23] 참고로 모스크바는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수도였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였던 러시아 제국 때도 제2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다.(심지어 러시아 제국 시절때도 100여 년 동안 모스크바가 수도였다.)[24] #[25] 소련 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인데 예술성을 너무 중시하다 보니 4부작 5부작 이런식으로 7시간 8시간 10시간 짜리 영화가 넘쳐난다는 것이다[26] 당시 소련의 영화표 가격이 50코페이카(100코페이카=1루블)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1억 명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