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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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9월 말까지 프랑스군의 소모는 극심했다. 병력이 20만 명 선으로 감소한 상태에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런 조건에서는 곳곳에서 반격을 개시한 연합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모든 병력을 엘베 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는 도중 베르나도트가 8만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강 반대편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10월 4일에는 블뤼허의 군대가 이에 합류하여 연합군 14만이 강 반대편에 진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카를 필립 슈바르첸베르크 대공 과 베니히센 백작의 18만 병력이 동시에 작전 중이었다.
이때 즈음 해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서 방어 거점을 구축하고 연합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4만 3천의 병력을 뮈라에게 주고 남쪽의 방어를 맡겼으며 생시르에게 2개 군단으로 드레스덴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본인은 10월 7일 15만 명의 군세로 블뤼허를 습격했으나 기습 시도가 실패하여 블뤼허는 제때 퇴각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기병전력이 거덜난 후라 정찰, 추격 및 전과확대, 후방 교란 등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버티고 있던 드레스덴으로 진군했다.
10월 10일에는 뮈라가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데 이어 13일에는 네가 베르나도트의 공격 시도를 좌절시켰다. 같은 날 비트겐슈타인이 정찰을 위해 남하를 개시했고 나폴레옹은 북쪽으로부터의 공세는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 병력을 라이프치히로 집결시켰다. 14일에는 대규모 기병전이 있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프랑스 제국군과 대불동맹군의 도합 병력이 나폴레옹이 치른 전투 중 가장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살아생전 치른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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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남쪽에서는 러시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지원하기 위해 바하우로 진군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매복에 격퇴당했으며 프로이센군이 시가전을 벌였으나 프랑스군 포병대의 집중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라이프치히 북서쪽에 위치한 뫼커른에서는 요르크의 프로이센군 2만 1천 명과 마르몽의 부대가 격돌하여 격렬한 시가전을 치렀다. 몇몇 척탄병 대대와 라이프 연대 등 정예부대가 포함된 프로이센 7여단과 8여단은 3번의 돌격이 프랑스 포병의 집중사격과 결의에 찬 해병대의 반격에 모두 격퇴당하며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승기는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듯 하였으나...
'''재앙을 불러온 기병 돌격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돌격에 나선 브란덴부르크 후사르 연대 308명의 병사들은 두 개의 방진을 이룬 프랑스 보병대와 맞딱뜨렸다. 프랑스군의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몇 번의 사격을 무시하고 달려든 기병들은 '''두 개의 방진을 모두 갈아엎어 버렸다.''' 살아남은 보병들이 프랑스군 포대 쪽으로 퇴각하며 포의 사선을 가렸고(...) 보병들을 추격하던 브란덴부르크 연대는 얼씨구나 하고 곧바로 달려들어 하루 종일 보병들을 괴롭힌 포대를 작살내며 '''포대 전체를 노획'''했다. 뷔르템베르크 기병 연대가 이들의 측방을 노리고 돌격하였으나, 프로이센군 2개 울란 편대 342명 기병들에게 역으로 들아받히며 퇴각하였고, 두 프로이센 기병대는 '''뷔르템베르크군 2개 기병 연대를 작살내고 9문의 화포를 추가로 노획'''했다. 패잔병을 추격하며 일대를 무아지경으로 재달린 기병들은 해병대 1개 대대를 박살내고 추가로 방진 몇 개까지 쌈싸먹으며 돌격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쥐르가스는 1 서프로이센 용기병 연대와 리투아니아 용기병 연대, 그리고 몇 개의 향토방위군 기병 연대를 얹어서 전진시켰다. 횡대진형의 1개 대대를 측면에서 공격, 격퇴하였다. 한편, 제1, 3 해병 연대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공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메클렌부르크 후사르 연대에게 끌려다녀, 결과적으로는 사각방진을 형성한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프로이센 기병대의 세찬 돌격에 독수리기와 700명의 포로를 남기며 한큐에 무너져내렸다. 프로이센 제2 라이프 후사르 연대가 2개의 군기와 2문의 화포를 노획하였고, 향토방위대 기병들 역시 몇 개의 화포를 확보했다.
이렇게, 굳건하던 프랑스군의 방어진은 여름날 아이스크림마냥 녹아내렸고, 7여단과 8여단은 기병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뫼커른에 접근하였다. 프랑스군 잔존 병력의 저항은 미미했고, 분전한 해병대 역시 천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경, 7여단과 일부 기병들이 콩팡의 20사단을 밀어냈다. 계속 치고 나간 8여단은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자 공격을 마쳤다. 해병대 일부 병력이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뫼커른에 자리잡은 프로이센 포병대에 의해 깨강정 신세가 되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프로이센군 포탄이 프랑스 포대 한가운데 떨어져 3개의 탄약차량을 날려버리기도 하였으나, 쥐베르 장군의 3개 해병 대대와 4개 지방 대대의 분전으로 마르몽군은 포위 섬멸을 피하고 외트리츠셰와 고흘리스로 물러날 수 있었다. 허나 블뤼허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고립된 소규모 방어군 무리를 깔아뭉겠다. 뫼커른 인근 숲에서 포병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 종대 하나가 튀어나왔으나 산탄 사격에 격퇴당했다. 블뤼허는 곧바로 생프리스트의 러시아 군단에게 오귀스트 마르몽의 우익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으나 때는 늦어, 마르몽군은 지는 해를 뒤로하고 파르테 강 너머로 집결했다.
블뤼허는 비테리츠셰에서 잠이 들었는데, 독수리기 2개, 대대기 2개와 50문 이상의 화포에 더해 2,000명의 포로까지 사로잡은 그의 병사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슈바첸베르크의 동맹군 사령부로 미셸 네와 오귀스트 마르몽을 상대로 한 승리의 전언을 보냈다. 뫼커른 전투에서, 21,000명과 화포 104문을 갖춘 요르크의 1군단과 20,000명에 화포 54문을 갖춘 마르몽의 6군단이 맞붙었는데, 뫼커른 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도합 41,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격돌하면서 양측 모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패배한 프랑스군은 7,000명을 잃었으며, 승리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은 도합 9,000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군은 3할을, 동맹군은 반할에 달하는 병력을 한큐에 날려먹은 셈이다.
같은 날 서쪽에서 귤라이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3군단이 라이프치히 서쪽 린데나우를 점거하기 위해 진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는 쉽게 점거하는가 싶었으나 네가 베르트랑의 군단을 수비로 돌리는 바람에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이내 물러났다. 그러나 네가 베르트랑의 예비대를 그쪽으로 돌린 바람에 나폴레옹이 남쪽 공세로 돌릴 병력이 부족해졌고 프랑스군의 남쪽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귤라이 장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략적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다. 린데나우 공략에 실패한 덕에 이후에 린데나우가 프랑스군의 퇴로가 되었고 그 퇴로를 귤라이 장군이 지키게 된 것이다.
이 날 블뤼허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자켄 장군의 러시아군이 골리스를 공격하여 바르샤바 공국군을 축출했다. 퇴각한 바르샤바군은 파펜도르프로 물러났다. 또한 블뤼허의 명령으로 러시아 제2경기병 사단이 프랑스 3기병 군단과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주고 패퇴시켰다. 상기했듯 프랑스 기병 세력은 러시아에서 이미 거덜난 터라 압도적인 연합군의 기병 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편 프랑스군에 14,000명의 증원이 이루어졌으나 연합군에는 베니히센 백작의 러시아군과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군 총 14만 5천 명이 도착했다. 물론 연합군은 본국에서 추가로 병력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병력들이 집결한 것뿐이지만 어쨌든 증원의 규모가 반증하듯이 프랑스의 동원 능력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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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틀렸어 이제 꿈도 희망도 없어.'''
프랑스군의 보급이 신통치 못했다는 점도 이미 언급했다. 이 시점에서 연합군은 포위망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보급물자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은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퇴각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프란츠 1세[1] 에게 친서를 보내 영토를 일부 할양하겠으니 휴전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럴 이유가 없었던 두 사람 모두 제안을 거부했다.
프로이센군 9여단이 버려진 바하우를 점거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뢰스니히에서 몰아내고 기병이 시간을 버는 사이 보병대가 될리츠를 점거했다. 청년 근위대가 오스트리아군을 될리츠에서 몰아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는 3개 척탄병 대대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라이프치히 턱밑이라고 할 수 있는 남동쪽의 프로프스타이다에서는 일대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실리 데톨리[2] 와 클라이스트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애초에 클라이스트와 톨리는 해당 거점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강요로 마지못해 움직였다. 바실리 데톨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차르의 간섭을 받았으니 얼마나 열이 뻗쳤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바실리는 완전히 요새화된 프로프스타이다를 강습하기에 앞서 포격전을 벌였다. 전장의 화포 대부분은 연합군의 것이었지만, 상대는 자그마치 '''프랑스 근위 포병대.''' 프랑스 포병의 압도적 기량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바실리는 공격을 명한다. 프로이센 10여단과 12여단이 경보병을 앞세우고 전진하여, 프로프스타이다 외곽을 점령하는 등 선전했지만, 프랑스 보병들의 반격에 마을 밖 개활지로 밀려난 상태에서 세계 최강 포병대의 집중 사격과 함께 프로스프타이다를 돌아 양쪽에서 튀어나온 뮈라의 흉갑기병에게 들이받혀(...) 완벽히 박살나고 말았다. 러시아 후사르와 흉갑기병의 시기적절한 돌격이 이들을 사지에서 구해냈다. 프로이센 12여단은 다시금 전진했지만, 이번에는 마을에 접근해보지도 못한 채 포병 사격에 격퇴당했다. 2번의 돌격이 모두 돈좌된 프로이센군은 재보급을 위해 퇴각했다. 이어서 전진한 러시아 제2군단은, 군단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에 격퇴당한다. 마침내 보다못한 바실리가 직접 4번째 강습을 이끌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소규모 프로이센군을 곁들인 4개 보병 사단을 다이렉트로 꽂아넣은 것으로 모자라, '보로디노의 영웅'이라 불린 레이프스키 예하 2개 척탄병 사단까지 동원하여 맹공을 펼쳤다. 포병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격렬한 공격에 프랑스 수비군이 반대로 격퇴당하며 프로프스타이다의 운명도 경각에 달하는 듯 했으나, '''황제가 직접 지휘한''' 제2선임 근위 사단 예하 1근위 여단의 중위 근위대가 러시아군을 도로 쫓아내며 4번째 돌격마저 돈좌시켰다. 슈바첸베르크는 차르에게 근위대를 투입하여 맞불을 놓을 것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하면서 결국 오후 4시, 프로스프타이다에 대한 공격이 종료되었다. 이후 젊은 프랑스 병사들이 마을에서 튀어나왔지만, 동맹군의 사격에 빠르게 귀가하면서 프로스프타이다의 전투는 끝을 맺게 된다. 어둠이 내리자, 하루 종일 격전을 벌인 비알의 프랑스 6사단은 프로프스타이다를 버리고 퇴각했다.
플라토프 장군의 러시아군 중포병 부대는 파운스도르프 인근에서 작센군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랑제론은 모카우에서 부교를 띄워 파르테 강을 도강하여 북동쪽 방면에서 진군 중이던 베르나도트의 북부 방면군 6만 5천 명과 합류했다.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파운스도르프를 공격하였으나 프랑스와 작센 포병대의 산탄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병력이 참전한 영국의 콩그리브 로켓 여단이 마을에 로켓을 갈겨대자 프랑스군과 작센군이 전열을 무너뜨리며 퇴각하게 되었다.
프로프스타이다 이상 가는 혈전은 쇠네펠트에서 벌어졌는데 시가지를 뺏고 뺏기며 건물 하나와 모퉁이 하나를 두고 박터지게 싸우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서로 미친 듯이 총화를 주고 받은 끝에 여기서는 랑제론의 러시아군이 우세를 점하며 끝내 목표를 달성했으나 시가지는 이미 불바다였다. 이 때까지도 베르나도트는 망설이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남들 다 피터지게 싸우는데 자기들만 아무 것도 안한다며 공격을 강변한 스웨덴 장교들 등쌀에 밀려 결국 스웨덴 엽병들도 참전했다. 이들은 라이프치히에 직접 공격을 감행했는데 매우 잘 싸워서 전사자는 121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다들 그렇게 박터지게 싸울 무렵 '''5,400명의 작센 보병들이 갑자기 프로이센군 방향으로 미친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휘하던 프랑스인 장 레이니에 장군은 처음에는 돌격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이내 작센 보병들이 프로이센군 대열에 합류하자 배신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레이니에는 남은 작센군을 집결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뷔르템베르크의 기병들도 모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지키던 파운스도르프도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인 동맹의 이탈은 프랑스군에게 매우 뼈아픈 것이어서 안 그래도 규모에서 밀리는데 더 격차를 벌려버린 격이 되었다. 애초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병력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결국 나폴레옹은 코네비츠에 있던 병력을 시작으로 야간을 틈타 라이프치히를 거쳐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연합군이 나폴레옹의 퇴각을 눈치챈 것은 오전 7시 정도나 되어서였다. 연합군은 그들이 포위망을 형성한 동쪽, 남쪽, 북쪽으로부터 즉각적인 총공세를 개시했는데 라이프치히에 남겨진 우디노가 이끄는 후위 부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프랑스군은 서쪽으로 퇴각했는데 린데나우 방면으로 퇴각하는 것으로 엘스터 강을 건너야 했다. 문제는 이 인근에 다리는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여기서 프랑스군의 비극이 시작됐다.
나폴레옹은 퇴각하면서 그 다리에 몽포르 대령을 남겨두고 아군이 퇴각한 뒤 연합군이 접근하면 지체없이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몽포르 대령도 폭파 명령을 일개 부사관에게 넘겨버렸다. 일개 부사관이 정확한 폭파 타이밍을 알리가 있겠는가. 그는 오후 1시쯤 냅다 심지에 불을 붙였는데 이 시점에서 우디노의 부대는 아직까지도 라이프치히에서 분전중이었고 다리 인근에는 퇴각하려는 프랑스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도강하려다가 익사 내지는 혼란 속에서 죽은 인원만 수천이었는데 개중에는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도 있었다. 마크도날 원수는 목숨만 건졌을 뿐이고. 마크도날과 포니아토프스키 모두 도강을 시도했으나 마크도날은 가까스로 성공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익사했다.[3] 이 다리가 끊어짐으로 인해 수만의 프랑스군이 고립되었고 상당수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항복한 인물들 중에서는 우디노 원수도 있었다.
전후 경과와 결과는 나폴레옹의 몰락 참조
어찌됐든 나흘간 서로 박터지게 싸워댄 끝에 프랑스군 잔존병력은 침착하게 도강하여 잘 통제된 퇴각을 할 수 있었다. 라인 강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바이에른 왕국군이 하나우에서 프랑스와 맞서려 시도했지만 패배했고 프랑스군은 10월 23일 에어푸르트에 도착해 재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으며 라이프치히 전투를 거치면서 라인 동맹의 프랑스 이탈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1차대전 이전까지 벌어진 전투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양측 도합 60만 가까이의 병력이 참전했다.[4]
라이프치히 전투 당시의 프랑스군 전투서열이다.
MdE는 제국 원수(marshal d'Empire), GdD는 사단장(General d'Division), GdB는 여단장(General d'Brigade), CdB는 대대장(Chef de Batalion)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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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전
1813년 9월 말까지 프랑스군의 소모는 극심했다. 병력이 20만 명 선으로 감소한 상태에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런 조건에서는 곳곳에서 반격을 개시한 연합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모든 병력을 엘베 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는 도중 베르나도트가 8만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강 반대편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10월 4일에는 블뤼허의 군대가 이에 합류하여 연합군 14만이 강 반대편에 진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카를 필립 슈바르첸베르크 대공 과 베니히센 백작의 18만 병력이 동시에 작전 중이었다.
이때 즈음 해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서 방어 거점을 구축하고 연합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4만 3천의 병력을 뮈라에게 주고 남쪽의 방어를 맡겼으며 생시르에게 2개 군단으로 드레스덴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본인은 10월 7일 15만 명의 군세로 블뤼허를 습격했으나 기습 시도가 실패하여 블뤼허는 제때 퇴각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기병전력이 거덜난 후라 정찰, 추격 및 전과확대, 후방 교란 등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버티고 있던 드레스덴으로 진군했다.
10월 10일에는 뮈라가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데 이어 13일에는 네가 베르나도트의 공격 시도를 좌절시켰다. 같은 날 비트겐슈타인이 정찰을 위해 남하를 개시했고 나폴레옹은 북쪽으로부터의 공세는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 병력을 라이프치히로 집결시켰다. 14일에는 대규모 기병전이 있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프랑스 제국군과 대불동맹군의 도합 병력이 나폴레옹이 치른 전투 중 가장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살아생전 치른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2. 경과
2.1.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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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남쪽에서는 러시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지원하기 위해 바하우로 진군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매복에 격퇴당했으며 프로이센군이 시가전을 벌였으나 프랑스군 포병대의 집중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라이프치히 북서쪽에 위치한 뫼커른에서는 요르크의 프로이센군 2만 1천 명과 마르몽의 부대가 격돌하여 격렬한 시가전을 치렀다. 몇몇 척탄병 대대와 라이프 연대 등 정예부대가 포함된 프로이센 7여단과 8여단은 3번의 돌격이 프랑스 포병의 집중사격과 결의에 찬 해병대의 반격에 모두 격퇴당하며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승기는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듯 하였으나...
'''재앙을 불러온 기병 돌격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돌격에 나선 브란덴부르크 후사르 연대 308명의 병사들은 두 개의 방진을 이룬 프랑스 보병대와 맞딱뜨렸다. 프랑스군의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몇 번의 사격을 무시하고 달려든 기병들은 '''두 개의 방진을 모두 갈아엎어 버렸다.''' 살아남은 보병들이 프랑스군 포대 쪽으로 퇴각하며 포의 사선을 가렸고(...) 보병들을 추격하던 브란덴부르크 연대는 얼씨구나 하고 곧바로 달려들어 하루 종일 보병들을 괴롭힌 포대를 작살내며 '''포대 전체를 노획'''했다. 뷔르템베르크 기병 연대가 이들의 측방을 노리고 돌격하였으나, 프로이센군 2개 울란 편대 342명 기병들에게 역으로 들아받히며 퇴각하였고, 두 프로이센 기병대는 '''뷔르템베르크군 2개 기병 연대를 작살내고 9문의 화포를 추가로 노획'''했다. 패잔병을 추격하며 일대를 무아지경으로 재달린 기병들은 해병대 1개 대대를 박살내고 추가로 방진 몇 개까지 쌈싸먹으며 돌격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쥐르가스는 1 서프로이센 용기병 연대와 리투아니아 용기병 연대, 그리고 몇 개의 향토방위군 기병 연대를 얹어서 전진시켰다. 횡대진형의 1개 대대를 측면에서 공격, 격퇴하였다. 한편, 제1, 3 해병 연대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공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메클렌부르크 후사르 연대에게 끌려다녀, 결과적으로는 사각방진을 형성한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프로이센 기병대의 세찬 돌격에 독수리기와 700명의 포로를 남기며 한큐에 무너져내렸다. 프로이센 제2 라이프 후사르 연대가 2개의 군기와 2문의 화포를 노획하였고, 향토방위대 기병들 역시 몇 개의 화포를 확보했다.
이렇게, 굳건하던 프랑스군의 방어진은 여름날 아이스크림마냥 녹아내렸고, 7여단과 8여단은 기병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뫼커른에 접근하였다. 프랑스군 잔존 병력의 저항은 미미했고, 분전한 해병대 역시 천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경, 7여단과 일부 기병들이 콩팡의 20사단을 밀어냈다. 계속 치고 나간 8여단은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자 공격을 마쳤다. 해병대 일부 병력이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뫼커른에 자리잡은 프로이센 포병대에 의해 깨강정 신세가 되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프로이센군 포탄이 프랑스 포대 한가운데 떨어져 3개의 탄약차량을 날려버리기도 하였으나, 쥐베르 장군의 3개 해병 대대와 4개 지방 대대의 분전으로 마르몽군은 포위 섬멸을 피하고 외트리츠셰와 고흘리스로 물러날 수 있었다. 허나 블뤼허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고립된 소규모 방어군 무리를 깔아뭉겠다. 뫼커른 인근 숲에서 포병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 종대 하나가 튀어나왔으나 산탄 사격에 격퇴당했다. 블뤼허는 곧바로 생프리스트의 러시아 군단에게 오귀스트 마르몽의 우익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으나 때는 늦어, 마르몽군은 지는 해를 뒤로하고 파르테 강 너머로 집결했다.
블뤼허는 비테리츠셰에서 잠이 들었는데, 독수리기 2개, 대대기 2개와 50문 이상의 화포에 더해 2,000명의 포로까지 사로잡은 그의 병사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슈바첸베르크의 동맹군 사령부로 미셸 네와 오귀스트 마르몽을 상대로 한 승리의 전언을 보냈다. 뫼커른 전투에서, 21,000명과 화포 104문을 갖춘 요르크의 1군단과 20,000명에 화포 54문을 갖춘 마르몽의 6군단이 맞붙었는데, 뫼커른 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도합 41,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격돌하면서 양측 모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패배한 프랑스군은 7,000명을 잃었으며, 승리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은 도합 9,000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군은 3할을, 동맹군은 반할에 달하는 병력을 한큐에 날려먹은 셈이다.
같은 날 서쪽에서 귤라이 장군의 오스트리아군 3군단이 라이프치히 서쪽 린데나우를 점거하기 위해 진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는 쉽게 점거하는가 싶었으나 네가 베르트랑의 군단을 수비로 돌리는 바람에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이내 물러났다. 그러나 네가 베르트랑의 예비대를 그쪽으로 돌린 바람에 나폴레옹이 남쪽 공세로 돌릴 병력이 부족해졌고 프랑스군의 남쪽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귤라이 장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략적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다. 린데나우 공략에 실패한 덕에 이후에 린데나우가 프랑스군의 퇴로가 되었고 그 퇴로를 귤라이 장군이 지키게 된 것이다.
이 날 블뤼허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2. 10월 17일
자켄 장군의 러시아군이 골리스를 공격하여 바르샤바 공국군을 축출했다. 퇴각한 바르샤바군은 파펜도르프로 물러났다. 또한 블뤼허의 명령으로 러시아 제2경기병 사단이 프랑스 3기병 군단과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주고 패퇴시켰다. 상기했듯 프랑스 기병 세력은 러시아에서 이미 거덜난 터라 압도적인 연합군의 기병 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편 프랑스군에 14,000명의 증원이 이루어졌으나 연합군에는 베니히센 백작의 러시아군과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군 총 14만 5천 명이 도착했다. 물론 연합군은 본국에서 추가로 병력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병력들이 집결한 것뿐이지만 어쨌든 증원의 규모가 반증하듯이 프랑스의 동원 능력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2.3. 10월 18일
[image]
'''다 틀렸어 이제 꿈도 희망도 없어.'''
프랑스군의 보급이 신통치 못했다는 점도 이미 언급했다. 이 시점에서 연합군은 포위망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보급물자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은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퇴각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프란츠 1세[1] 에게 친서를 보내 영토를 일부 할양하겠으니 휴전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럴 이유가 없었던 두 사람 모두 제안을 거부했다.
프로이센군 9여단이 버려진 바하우를 점거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뢰스니히에서 몰아내고 기병이 시간을 버는 사이 보병대가 될리츠를 점거했다. 청년 근위대가 오스트리아군을 될리츠에서 몰아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는 3개 척탄병 대대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라이프치히 턱밑이라고 할 수 있는 남동쪽의 프로프스타이다에서는 일대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실리 데톨리[2] 와 클라이스트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애초에 클라이스트와 톨리는 해당 거점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강요로 마지못해 움직였다. 바실리 데톨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차르의 간섭을 받았으니 얼마나 열이 뻗쳤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바실리는 완전히 요새화된 프로프스타이다를 강습하기에 앞서 포격전을 벌였다. 전장의 화포 대부분은 연합군의 것이었지만, 상대는 자그마치 '''프랑스 근위 포병대.''' 프랑스 포병의 압도적 기량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바실리는 공격을 명한다. 프로이센 10여단과 12여단이 경보병을 앞세우고 전진하여, 프로프스타이다 외곽을 점령하는 등 선전했지만, 프랑스 보병들의 반격에 마을 밖 개활지로 밀려난 상태에서 세계 최강 포병대의 집중 사격과 함께 프로스프타이다를 돌아 양쪽에서 튀어나온 뮈라의 흉갑기병에게 들이받혀(...) 완벽히 박살나고 말았다. 러시아 후사르와 흉갑기병의 시기적절한 돌격이 이들을 사지에서 구해냈다. 프로이센 12여단은 다시금 전진했지만, 이번에는 마을에 접근해보지도 못한 채 포병 사격에 격퇴당했다. 2번의 돌격이 모두 돈좌된 프로이센군은 재보급을 위해 퇴각했다. 이어서 전진한 러시아 제2군단은, 군단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에 격퇴당한다. 마침내 보다못한 바실리가 직접 4번째 강습을 이끌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소규모 프로이센군을 곁들인 4개 보병 사단을 다이렉트로 꽂아넣은 것으로 모자라, '보로디노의 영웅'이라 불린 레이프스키 예하 2개 척탄병 사단까지 동원하여 맹공을 펼쳤다. 포병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격렬한 공격에 프랑스 수비군이 반대로 격퇴당하며 프로프스타이다의 운명도 경각에 달하는 듯 했으나, '''황제가 직접 지휘한''' 제2선임 근위 사단 예하 1근위 여단의 중위 근위대가 러시아군을 도로 쫓아내며 4번째 돌격마저 돈좌시켰다. 슈바첸베르크는 차르에게 근위대를 투입하여 맞불을 놓을 것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하면서 결국 오후 4시, 프로스프타이다에 대한 공격이 종료되었다. 이후 젊은 프랑스 병사들이 마을에서 튀어나왔지만, 동맹군의 사격에 빠르게 귀가하면서 프로스프타이다의 전투는 끝을 맺게 된다. 어둠이 내리자, 하루 종일 격전을 벌인 비알의 프랑스 6사단은 프로프스타이다를 버리고 퇴각했다.
플라토프 장군의 러시아군 중포병 부대는 파운스도르프 인근에서 작센군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랑제론은 모카우에서 부교를 띄워 파르테 강을 도강하여 북동쪽 방면에서 진군 중이던 베르나도트의 북부 방면군 6만 5천 명과 합류했다.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파운스도르프를 공격하였으나 프랑스와 작센 포병대의 산탄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병력이 참전한 영국의 콩그리브 로켓 여단이 마을에 로켓을 갈겨대자 프랑스군과 작센군이 전열을 무너뜨리며 퇴각하게 되었다.
프로프스타이다 이상 가는 혈전은 쇠네펠트에서 벌어졌는데 시가지를 뺏고 뺏기며 건물 하나와 모퉁이 하나를 두고 박터지게 싸우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서로 미친 듯이 총화를 주고 받은 끝에 여기서는 랑제론의 러시아군이 우세를 점하며 끝내 목표를 달성했으나 시가지는 이미 불바다였다. 이 때까지도 베르나도트는 망설이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남들 다 피터지게 싸우는데 자기들만 아무 것도 안한다며 공격을 강변한 스웨덴 장교들 등쌀에 밀려 결국 스웨덴 엽병들도 참전했다. 이들은 라이프치히에 직접 공격을 감행했는데 매우 잘 싸워서 전사자는 121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2.3.1. 대망의 배신
다들 그렇게 박터지게 싸울 무렵 '''5,400명의 작센 보병들이 갑자기 프로이센군 방향으로 미친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휘하던 프랑스인 장 레이니에 장군은 처음에는 돌격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이내 작센 보병들이 프로이센군 대열에 합류하자 배신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레이니에는 남은 작센군을 집결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뷔르템베르크의 기병들도 모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지키던 파운스도르프도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인 동맹의 이탈은 프랑스군에게 매우 뼈아픈 것이어서 안 그래도 규모에서 밀리는데 더 격차를 벌려버린 격이 되었다. 애초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병력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결국 나폴레옹은 코네비츠에 있던 병력을 시작으로 야간을 틈타 라이프치히를 거쳐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2.4. 10월 19일
연합군이 나폴레옹의 퇴각을 눈치챈 것은 오전 7시 정도나 되어서였다. 연합군은 그들이 포위망을 형성한 동쪽, 남쪽, 북쪽으로부터 즉각적인 총공세를 개시했는데 라이프치히에 남겨진 우디노가 이끄는 후위 부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프랑스군은 서쪽으로 퇴각했는데 린데나우 방면으로 퇴각하는 것으로 엘스터 강을 건너야 했다. 문제는 이 인근에 다리는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여기서 프랑스군의 비극이 시작됐다.
나폴레옹은 퇴각하면서 그 다리에 몽포르 대령을 남겨두고 아군이 퇴각한 뒤 연합군이 접근하면 지체없이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몽포르 대령도 폭파 명령을 일개 부사관에게 넘겨버렸다. 일개 부사관이 정확한 폭파 타이밍을 알리가 있겠는가. 그는 오후 1시쯤 냅다 심지에 불을 붙였는데 이 시점에서 우디노의 부대는 아직까지도 라이프치히에서 분전중이었고 다리 인근에는 퇴각하려는 프랑스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도강하려다가 익사 내지는 혼란 속에서 죽은 인원만 수천이었는데 개중에는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도 있었다. 마크도날 원수는 목숨만 건졌을 뿐이고. 마크도날과 포니아토프스키 모두 도강을 시도했으나 마크도날은 가까스로 성공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익사했다.[3] 이 다리가 끊어짐으로 인해 수만의 프랑스군이 고립되었고 상당수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항복한 인물들 중에서는 우디노 원수도 있었다.
3. 결과
전후 경과와 결과는 나폴레옹의 몰락 참조
어찌됐든 나흘간 서로 박터지게 싸워댄 끝에 프랑스군 잔존병력은 침착하게 도강하여 잘 통제된 퇴각을 할 수 있었다. 라인 강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바이에른 왕국군이 하나우에서 프랑스와 맞서려 시도했지만 패배했고 프랑스군은 10월 23일 에어푸르트에 도착해 재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으며 라이프치히 전투를 거치면서 라인 동맹의 프랑스 이탈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1차대전 이전까지 벌어진 전투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양측 도합 60만 가까이의 병력이 참전했다.[4]
4. 전투서열
라이프치히 전투 당시의 프랑스군 전투서열이다.
MdE는 제국 원수(marshal d'Empire), GdD는 사단장(General d'Division), GdB는 여단장(General d'Brigade), CdB는 대대장(Chef de Batalion)을 뜻한다.
- 프랑스 2군단-MdE 클로드 빅토르, 참모장 루이스 휴겟 샤토, 포병장 GdB 프랜시스 베르나르 드몽제넷, 공병장 브론
- 제 4 보병사단-GdD 장 루이스 두브레통, 병력 5,620명, 화포 16문
- 1여단-GdB 자크 마르틴 마들렌 페리에르
- 24 경보병연대 3개 대대
- 19 전열연대 3개 대대
- 2여단-GdB 장 안톤 브륀
- 37 전열연대 3개 대대
- 56 전열연대 3개 대대
- 사단 포병대-CdB 레이시에, 포병 190명과 포 운반원 197명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제 5 보병사단-GdD 프랜시스 마리 두푸르, 병력 4,235명, 화포 8문
- 1여단-GdB 식스투스 에스트코
- 26 경보병연대 3개 대대
- 93 전열연대 3개 대대
- 2여단-GdB 장 레베스트
- 46 전열연대 1개 대대
- 72 전열연대 1개 대대
- 사단 포병대-CdB 그로셋, 포병 174명과 포 운반원 120명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1여단-GdB 식스투스 에스트코
- 제 6 보병사단-GdD 아너레 비알, 병력 6,325명, 화포 16문
- 1여단-GdB 거이 루이스 헨리, 마르퀴스 드발로리
- 11 경보병연대 3개 대대
- 4 전열연대 3개 대대
- 2여단-GdB 미콜라즈 카제탄 브로니코프스키
- 2 전열연대 3개 대대
- 18 전열연대 3개 대대
- 사단 포병대-지휘관 불명, 포병 209명과 포 운반원 195명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1여단-GdB 거이 루이스 헨리, 마르퀴스 드발로리
- 예비 포병대-GdB 몽게넷, 포병 202명과 포 운반원 225명
- 도보포병대 (12파운드포 8문)
- 기마포병대 (6파운드포 4문, 5.7인치 곡사포 2문)
- 프랑스 제 3군단-GdD 조제프 수햄, 참모장 GdB 타라예, 포병장 GdD 조제프 클로드 마리 샤르보넬, 공병장 GdB 발라즈
- 제 8 보병사단-GdD 미셸 실베스트레 브레이어 (병력 4,235~5,500명, 화포 16문)
- 1여단-GdB 프랜시스 보니
- 22 전열연대 3개 대대
- 59 전열연대 2개 대대
- 69 전열연대 2개 대대
- 2여단-GdB 장 루이스 샤리에르
- 6 경보병연대 2개 대대
- 16 경보병연대 2개 대대
- 28 경보병연대 2개 대대
- 40 전열연대 2개 대대
- 사단 포병대-CdB 트립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6문, 5.7인치 곡사포 2문)
- 1여단-GdB 프랜시스 보니
- 제 8 보병사단-GdD 미셸 실베스트레 브레이어 (병력 4,235~5,500명, 화포 16문)
- 제 9 보병사단-GdD 안톤 길리엄 모래일랙 델마스 (병력 4,235~4,800명, 화포 12문)
- 1여단-GdB 샤를 헨리 길리엄 앤씽
- 2 임시 편성 연대 2개 대대[5]
- 136 전열연대 3개 대대
- 29 경보병연대 2개 대대
- 2여단-GdB 피에르 마탈리 드마란
- 138 전열연대 3개 대대
- 145 전열연대 3개 대대
- 사단 포병대-CdB 샤르벳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4문, 5.7인치 곡사포 2문)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4문, 5.7인치 곡사포 2문)
- 1여단-GdB 샤를 헨리 길리엄 앤씽
- 제 11 보병사단-GdD 에티엔느 피에르 실베스트레 리카르트 (병력 4,235~5,280명, 화포 12문)
- 1여단-GdB 반데든
- 9 경보병연대 3개 대대
- 50 전열연대 3개 대대
- 65 전열연대 2개 대대
- 2여단-GdB 두물린
- 142 전열연대 3개 대대
- 144 전열연대 3개 대대
- 사단 포병대-CdB 드 라뢰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4문, 5.7인치 곡사포 2문)
- 도보포병대 (6파운드포 4문, 5.7인치 곡사포 2문)
- 1여단-GdB 반데든
- 예비 포병대-지휘관 불명, 인원 불명
- 도보포병대 (화포 8문, 종류 불명)
- 도보포병대 (화포 8문, 종류 불명)
- 기마포병대 (화포 6문, 종류 불명)
- 3개 공병 중대[6]
- 경기병여단-GdB 프레드릭 아우구스트 붸르만
- 10 후사르연대 6개 편대
- 바덴 용기병연대 5개 편대
- 기마포병대 (6파운드포 3문)
[1] 혹시라도 착각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는 프란츠 2세이고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로는 프란츠 1세다.[2] 바클라이 드톨리로도 알려져 있다.[3] 포니아토프스키는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운 끝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4] 프랑스 16만, 러시아 15만, 오스트리아 12만, 프로이센 9만, 스웨덴 3만, 독일 소국 및 북이탈리아 7만[5] 경보병부대다[6] 스페인인들로 구성된 부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