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 발리
1. 개요
루디 발리는 프랭크 시나트라 등장 이전에 음반과 공연, 영화 출연 등으로 스타덤에 올라, 특히 젊은 여성팬들의 인기를 끈 최초의 아이돌 유형 가수였다.
악기로는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즐겨 다뤘다. 색소폰을 어깨에 낀 채, 메가폰[1] 을 입에 대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당시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잡아, 자주 패러디 되었다.
2. 생애
1901년 7월 28일, 프랑스계 이민자 혈통으로 태어난 발리는 피아노와 드럼, 색소폰 등을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따라서 고등학교 밴드에서는 드럼을 쳤고, 20대 초반 영국에 체류했을 때는 사보이 호텔에서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가로 활동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예일 대학교에 다닌 그는 졸업 후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였고('the Connecticut Yankees') 이때부터 그는 보컬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이름을 '허버트'에서 '루디'로 바꾸었는데 이는 그가 동경했던 색소폰 연주가 '루디 위데도프트 (Rudy Wiedoeft)'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의 특유의 콧노래 같은 미성은 당시 유행하던 잔잔한 발라드와 재즈 곡에 어울렸고 더불어 세련된 차림, 소년 같은 마스크로 특히 젊은 여성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1920년대 말, 그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 녹음된 유명한 곡으로는 <Deep Night> <Honey> <I'm Just A Vagabond Lover> 정도가 있다.
30년대에 들어서도 발리는 레코딩과 라디오 프로그램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세계 2차 대전 중에는 해안 경비대에서 수석 하사관으로 군악대를 이끌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도 했다.
1942년,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카사블랑카가 흥행하며 영화 내 삽입곡인 <As Time Goes By>도 다시금 인기를 끌었으나[2] 영화가 개봉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아직 새롭게 출반된 음원이 없었다. 이에 발맞춰 빅터에서는 1931년 출반했던 루디 발리의 음반을 재출반했고, 이 음반은 역주행하여 1943년 빌보드 2위를 기록했다.
이후에는 코미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색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죽음
1986년 7월 3일, 암으로 투병 중이던 루디 발리는 자택에서 TV로 자유의 여신상 복원 기념 축제를 보며 숨을 거두었다. 그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도 저곳에 있었으면. 알잖아 내가 얼마나 파티를 좋아하는지."[3]
4. 기타
[youtube]
미성의 소유자답게 목소리 변조에도 능했다. 1961년 TV 프로그램 <What's My Line?>[4] 에 출연했을 때, 여자 목소리를 내어 "Are you married to an actor?"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방청객들의 폭소와 본인의 반응이 압권.
예일대에서 철학 학위를 받았다.
쳐진 눈매로 온화해보이는 인상이지만 실제로는 꽤나 괴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NBC 아나운서 조지 앤스브로는 그의 회고록에서 "(발리는) 꽤 성깔 있고 입이 거칠었다. 그의 추잡함은 거의 항상 오케스트라를 향했다. 분노를 터뜨릴 때, 그는 비열했으며 누가 엿듣던 신경쓰지 않았다."고 썼다.
또한 그의 두번째 아내였던 페이 웹은, "발리는 폭력에 홀린, 잔인하고 주체 못할 성질인데다, 절제할 줄 모르며 신성모독을 일삼았고, 몹시 불쾌하며 격한 말투를, 특히 나에게 잘 썼다."며 통렬하게 주장했다. 그녀는 여배우 알리스 페이(Alice Faye)를 포함한 3명의 여성과의 간통 혐의로 발리를 고소했는데, 물론 발리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이에 대한 판결은 무죄였다.
왼손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