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시나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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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술은 인류의 그림자이며, 프랭크 시나트라는 웅장하고 강력한 그림자를 그리며 일생을 보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대중음악 역사상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자 '''20세기 대중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동시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음악,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모두 정점에 오른 20세기 모든 연예 매체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위대함은 그의 경력에서 잘 드러난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장장 반 세기인 50여년간 미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로서 위상을 유지했다.[1]'''“프랭크 시나트라는 미국의 가수이자 영화 배우로서 오랜 경력과 매우 공공적인 개인 생활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퍼포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보통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미국 가수로서 환영받는다. (중략)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그는 단순한 아이콘의 지위를 초월하여 미국 문화의 가장 인정받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이며 가수로서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스탠더드 팝의 중흥기를 이끈 상징이자 영미권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국민가수[2] ,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배우로서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클래식 배우들의 역사에 있어서도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또 그는 뛰어난 보컬과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3] 로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위대한 가수, 음악가 중 한 명이자 불멸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시나트라를 대표하는 호칭으로는 ‘Ol' Blue Eyes’[4] , ‘The Chairman of the Board(회장님)'[5] , 'Sultan of Swoon' (졸도유발의 황제), 좀더 널리 알려진 호칭은 '''‘The Voice.’'''가 있다.[6]
또한, 1940년대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프랭크 시나트라가 누렸던 엄청난 인기를 묘사하기 위해 '여학생들의 우상'(the idol of the bobby soxers)[7] 이라는 표현을 언론이 썼는데, 이는 대중문화계에서 청소년들의 스타라는 의미로 idol이란 단어가 사용된 첫 사례가 된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청소년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지지와 인기를 얻는 스타들을 10대들의 우상이란 뜻에서 'teen idol'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1970년대에 일본에 들어가 '아이도루(アイドル)'라는 단어로 불리며 일본 대중문화 특유의 귀여운 느낌의 청춘 연예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1990년대 중후반경엔 이 용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입되어 '아이돌'이라는, 한국화된 신종 외래어 내지 일종의 콩글리쉬 단어로 확고하게 자리잡으며 널리 쓰이게 된다. 즉 현재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유명한 단어가 되어버린 '아이돌'이라는 용어가 그 기원을 따지면 프랭크 시나트라의 젊은 시절 별명인 'the idol of the bobby soxers'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생애
2.1. 가족 관계
가족관계로 딸 낸시 시나트라, 아들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 막내딸 크리스티나 시나트라가 있다. 그의 딸 낸시 시나트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설립한 리프리즈 레코드에 데뷔하여 007 시리즈의 주제가[8] 를 부르는 등 인기를 누렸고 아버지 주연의 Tony Rome 1967의 주제곡을 불렀으며 위기의 남자 (Marriage on the rocks 1965)에서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아들 시나트라 주니어도 가수,성우,연기자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다 2016년 사망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는 소프라노스에선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패밀리가이에서 성우로 나오기도 했다.
3. 정치 활동
그의 정치 성향은 그의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나트라의 어머니는 민주당 지역 여자위원이 되었고,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는 언젠가 호보큰 시장 선거에 출마하려고 계획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 정치 활동과 성향에 영향을 받은 프랭크 시나트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엄청나게 존경했고 시나트라는 “그는 나의 영웅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루스벨트의 대통령직을 지지하는 편지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후, 시나트라는 백악관에서 루즈벨트를 만나도록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그는 민주당의 유권자 등록 운동의 일부가 되기로 동의했고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자금에 직접 7500달러를 기부했으며, 민주당 소속 간부로부터 "루스벨트는 미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전국 방송을 하고 카네기 홀에서 연설했으며 선거 일주일 전인 1944년 10월 2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연설했다. 시나트라의 전기작가 조 캐롤 실버스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시나트라는 열렬한 리버럴이었고, 그는 항상 미국 부통령 헨리 A. 월리스의 말을 인용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는 인종차별에 관해 거리낌없이 말했고, 특히 초기부터 흑인과 이탈리아인들을 지원했다. 1945년 11월, 시나트라는 새로운 교장선생의 "흑인 지원" 정책에 반대하는 프로벨 고등학교 백인 학생들의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 인디애나주 게리 시장의 초대를 받았다. 시나트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그의 발언으로 시장을 격분시켰고 그는 이 문제를 나치즘의 인종 정책과 비교했으며 이 학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쟁에 연루된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의 말은 진보적인 출판물들에 의해 찬사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가 공산당원이라고 색깔론을 펼치며 비난했고 이에 시나트라는 “나는 공산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한다. 이때부터 FBI는 시나트라가 공산주의자인지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의 경력 동안 모든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그는 존 F. 케네디와 가장 가까웠다. 시나트라는 종종 케네디를 할리우드와 라스베이거스에 초대했고, 함께 파티를 즐겼다. 케네디는 시나트라와 함께 그들의 로맨스에 대한 가십을 듣는 것을 즐겼다. 1960년, 시나트라와 그의 친구들이자 렛 팩의 맴버들인 피터 로포드,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미국 전역에서 케네디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케네디는 시나트라의 노래를 선거운동에서 노래로 사용한다.듣기 1961년 1월, 시나트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저녁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취임식 갈라를 직접 조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시나트라의 영향력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로 언론은 대중음악과 쇼 비즈니스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이 시기를 꼽는다. 많은 유명한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이 행사는 민주당을 위해 많은 돈을 모금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시나트라가 민주당과 삐걱거리기 시작한 움직임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팜 스프링스를 방문했을 때, 시나트라가 아닌 공화당원 빙 크로스비의 집에 머물렀을 때였다. 케네디는 원래 부활절 연휴 동안 시나트라의 집에 머물 계획이었으나, 시나트라가 조직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 때문에 크로스비와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다. 허나 시나트라는 대통령의 방문에 대비해 자신의 집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헬기장을 갖추고 40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게스트하우스를 짓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한 상황에서 뒤통수를 맞은 셈이라, 이에 화가 나서 깊은 굴욕을 느꼈고 큰 해머로 헬리포트의 콘크리트를 부수었다고 한다. 그는 이 결정에 대해 피터 로포드와 로버트 케네디를 비난했고, 피터 로포드는 다른 렛 팩 멤버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고 후속 영화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그러나 시나트라는 여전히 케네디를 좋아했고 케네디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정치적 굴욕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여전히 슬퍼했다. 케네디가 사망하고 시나트라는 팜 스프링스에 가서는 사실상 사라졌다. 심지어 딸 낸시도 그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국가가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동안, 3일 동안, 시나트라는 혼자 슬퍼하며, 그의 침실에 갇혀 있었다.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암살되기 며칠 전 프랭크 시나트라가 출연한 영화 ‘Suddenly’[9] 를 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시나트라는 그것을 유통에서 철수시켰고, 1980년대 말에야 다시 유통되었다. 그 후에 시나트라는 린든 B. 존슨과 그의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한다. 특히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에 대항한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 후보를 지지하면서 여전한 민주당원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1970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재선을 지지하면서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징조가 나타난다. 그러나 시나트라는 여전히 등록된 민주당원으로 남아있었고[10] , 레이건에게 성향을 중립적으로 변화시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단, 당적만 안바꿨을 뿐 이때부터 공화당 지지자로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72년 7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을 평생 지지했지만, 시나트라는 그가 민주당과 그의 후보인 조지 맥거번의 좌파적 관점을 지지할 수 없다고 발표했고, 따라서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닉슨의 재선을 지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그는 60년대 초, 케네디 대통령이 그의 저서 평화 전략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을 옹호했기 때문에 닉슨의 정책에 끌렸다. 수년간 시나트나는 유엔이 중국의 문제에 대해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한 공화당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와 그의 부인이 시나트라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며 굉장히 친해지게 된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딸들이 시나트라의 결정에 반발하자 시나트라는 “나이가 들수록 더 보수적이 된다”라고 말을 한다.[11] 닉슨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시나트라는 백악관을 여러 번 방문했고 공연까지 한다. 그러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닉슨이 몰락할 지경에 이르자 그의 딸들은 닉슨에 대해 시나트라에게 묻곤 했는데, 그는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때문에 감옥에 간 변호사 찰스 콜슨, 그리고 애그뉴 부통령에게도 우호적이었다.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나트라는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했고 레이건의 선거 운동에 4백만 달러를 기부한다. 그는 북동부 지역에서 25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금하는 초기 모금 캠페인을 후원했다. 시나트라는 레이건과 함께 유세를 하며 “레이건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사람입니다. 지금 너무 엉망진창이 됐으니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레이건의 승리는 시나트라에게 1960년대 초 케네디 이후 백악관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갖게 했다. 시나트라는 20년 전 케네디 대통령에게 했던 것처럼 레이건의 대통령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후에 시나트라는 레이건 정부의 대통령 예술인문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84년, 시나트라는 호보큰의 고향으로 돌아와 1984년 대선을 위한 선거 유세 중이었던 레이건 대통령을 데려오기도 했다. 레이건은 시나트라를 공화당 국가 위원회의 기금조성 대사로 임명했다.
시나트라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였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인, 유대계 미국인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이자 운동가였다. 시나트라를 평생 연구한 산토피에트로에 따르면, 시나트라는 "유대인들을 평생동안 지지한 지지자"였다. 시나트라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할리우드 시위와 제작에 참여했고,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그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인 이스라엘 본즈, 그리고 사이먼 위센탈 센터를 위해 적극적으로 모금했고 그의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이종 문화 센터를 이스라엘에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그의 이스라엘 지지로 인해 그의 음반과 영화는 아랍 연맹과 레바논에 의해 금지되었다. 카이로에 있는 아랍 연맹의 이스라엘 보이콧 사무국은 시나트라의 이스라엘 지지에 대해 언급하며 1962년 10월 시나트라의 음반과 영화에 대한 금지를 발표했다. 아랍연맹은 성명에서 시나트라가 "이스라엘 채권의 분배에 참여하고 이스라엘에 보낼 자금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결론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의 서명으로, 이 금지는 무효화되었다. 2014년 NBC뉴스는 시나트라의 시오니스트적 성향으로 인해 시나트라의 음반이 금지되었다는 내용을 발표했고 CD가 베이루트에 있는 레바논 사무실에 전시되었다고 보도했다. 시나트라의 금지 음반은 또한 이 단체의 웹사이트인 가상 검열관에도 게시되어 있다.
시나트라는 어렸을 때 유대인들과 친해졌다. 그의 유대인 이웃인 고든 부인은 그의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 있을 때 종종 시나트라를 돌봤다 그녀는 친절하게 그에게 커피 케이크와 사과를 대접했다. 시나트라는 고든 부인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시나트라는 어린시절부터 인종 편견을 경멸했고 그것을 들으면 즉각 중단하라고 말했다. 시나트라는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가 나를 더럽고 작은 기니라고 불렀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었어요. 그의 머리를 부러트렸죠...누군가 우리 주변에서 유대인의 대해 불평하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어요."라고 말했다. 한번은 기자가 파티에서 누군가를 "유대인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시나트라는 기자를 때려눕혔다. 또 일부 골프 클럽들이 유대인들의 가입을 금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기에서 탈퇴했고 그는 유대인이 다수인 클럽에 가입했다.
많은 동시대의 사람들처럼, 시나트라도 이스라엘의 건설을 지지했다. 1947년 9월, 유대 국가를 만들 예정인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의 비준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 시나트라르는 2만 명의 지지자를 끌어들인 할리우드 보울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 집회에서 공연했다. 또 시나트라는 1948년 3월 이스라엘의 준군사조직인 하가나를 대표하여 뉴욕시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하가나는 미국의 금지 조치 때문에 팔레스타인에게 무기를 밀반입하기 위한 기지를 뉴욕에 설립했다. 하가나는 코파카바나 나이트클럽과 같은 건물에 있는 14번 호텔에 본부를 두고 연방 요원들에 의해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있었다. 하가나 대표 테디 콜렉은 코파카바나 바에서 시나트라를 보고 비밀 공작을 위해 그의 도움을 신청했고 시나트라는 도움을 준다. 1962년, 시나트라는 어린이를 위한 다국적 세계 투어의 일환으로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전 세계의 어린이 자선 단체들을 위해 1백만 달러 이상을 모금한 이 투어는 일본, 홍콩,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이스라엘에 머물렀다. 이스라엘에서 시나트라는 6개 도시에서 7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시나트라는 텔아비브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노래를 불렀고 이스라엘 방위군 퍼레이드 동안 상석에 앉아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모세 다얀 장군 옆에 앉았다. 그는 또한 텔노프 공군기지에서 군대를 위해 공연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지지하도록 촉구" 연설을 했다. 또 시나트라는 유대인을 위해 상당한 자금을 모았다. 1967년 6월 6일 전쟁이 끝난 후, 잭 엘 워너가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서 시나트라누 이스라엘에 총 250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1972년 시나트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채권 공약을 통해 650만 달러를 모금했고, 1975년에 그는 "부모님의 이웃인 호보큰의 고든 부인"을 기리며 이스라엘 본즈에 25만 달러를 개인적으로 기부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학생 센터를 위해 1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1976년 할리우드 기금 모금자, 1977년 시카고에서 열린 커플 환영회당 1만 달러, 이스라엘 1인당 5천 달러를 포함하여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상당한 돈을 모금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나트라는 중동에서의 다양한 분쟁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전날 밤,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상한 행동을 비난하도록 그를 재촉한 전보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그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그의 부인의 모금행사에 지원하기 위해 그레이트 피라미드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는 사다트를 "모든 아랍 국가들의 평화의 초석을 세우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사다트가 시나트라의 40주년 기념 공연에 외교관까지 파견해 그의 40주년을 축하해줄정도로 굉장히 친해진다. 또 1981년 그가 암살당했을 때 시나트라는 “평생 동안, 나는 너무 좋은 사람을 잃은 세상에 너무 많은 아침에 깨어났다. 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의 잔인한 살인이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그것은 평화를 구하는 모래 속에 우뚝 서 있는 사막의 한 사람을 잃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우는 시간에 정의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다. 어떤 벌도 내 동생을 소생시키지 못할 것이며, 사다트 부인의 고통을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글을 적었다. 또 아라파트를 위선자라고 생각하며 굉장히 싫어했고 1982년 이스라엘-레바논 분쟁 중, 시나트라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잡히고 처형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나트라는 흑인들에게 동정심을 보였고, 그들을 백인과의 똑같은 평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평생 공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노력했다. 시나트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네바다의 호텔과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의 인종차별을 해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종 그가 쇼 계약을 이행하기 전에 인종차별 사건에 대한 사과와 짐 크로법[12] 의 폐지를 요구하는데 개입했다. 1955년 라스베이거스 샌즈에서, 시나트라는 냇 킹 콜이 자신의 탈의실에서 항상 고독하게 식사를 하는 것을 봤다. 그가 직원에게 이유를 물어봤을 때, 그는 "흑인은 샌즈의 식당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나트라는 이어 만약 흑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모든 웨이터들과 웨이트리스들을 해고시키겠다고 말을 했고 그 다음날 넷 킹 콜[13] ]은 시나트라와 함께 식당에서 저녁에 함께 식사하도록 초대했다. 또 1950년대에, 시나트라는 흑인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를 위해 베버리힐스에 집을 사줬고, 그가 그곳에 사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게 했다. 시나트라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61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부가 호텔 로비에 들어섰고 보안요원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것을 목격한 시나트라와 데이비스가 경비원들에게 그들이 그의 손님이라고 말했고 그들을 호텔에 들여보냈다. 그 후 시나트라는 라스베이거스 샌즈 임원 칼 코헨에게 상황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했고, 호텔은 곧 흑인 웨이터와 버스 보이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시나트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적 시민운동을 초기부터 지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61년 1월 27일부터 시나트라는 킹 목사를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고 킹 목사를 지원한다. 킹 목사는 1963년 시나트라의 콘서트 중 하나에 참석했다. 시나트라는 거기서 뮤지컬 쇼버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항만노동자가 부르는 노래인 ‘Ol' Man River’를 불렀고 킹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앨범
5. 대표곡
'''I'll Never Smile Again''', '''Learnin' the Blues''', '''Strangers in the Night''', '''My Way''', Fly me to the Moon(1964), That's Life,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을 비롯하여 그 외 다수의 유명곡들이 있다. 원체 유명해서 어디선가 한번씩은 들어본 노래들이 많다. 캐롤송도 자주 불렀다.
유튜브에 'Can't Take My Eyes off You'라는 곡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I love you baby'라는 이름으로 업로드 되어 있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Can't take my eyes off you'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아닌 더 포 시즌스(The Four Seasons)의 리더인 프랭키 밸리(Frankie Valli)가 부른 곡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14] 국내에서는 A-ha의 보컬인 모튼 하켓이 리메이크해서 인기를 얻었다. 문제는 유튜브에도 모튼 하켓버전이 시나트라 버전으로 업로드 되어있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영화 조커에서 그의 노래 ‘That's life’와 'Send in the Clowns'를 OST로 사용하면서 그 노래가 다시 유행해졌다.
6. 평가와 영향력
'''“미국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이자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 중 한 명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시나트라는 또한 최초의 현대 팝 슈퍼스타였다. 훗날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 때에도 볼 수 있었던 광란의 반응을 대중들에게서 이끌어냈던 1940년대 초 그의 첫 단독 출연이 현대 대중문화 슈퍼스타로서의 역할을 규정했다.”'''[15]
'''“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다. 그는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새롭게 정의하여, 대중음악에 대한 친밀감, 도시의 스웨거, 그리고 자신의 노래에 지워지지 않게 자신의 정서적 취약점을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각인시킨 완벽한 예술가였다.”'''[16]
'''“프랭크 시나트라는 팝 음악의 심장이 쿵쿵 뛰게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 밥 딜런 이전에, 엘비스 프레슬리 이전에, 최초의 현대의 팝 슈퍼스타인 시나트라가 있었다. (중략) 시나트라의 강렬한 감정적 해석에서, 대중적 기준은 준동적 고백이 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시나트라에 의해 가사는 이전과 다름없이 중요했고, 다음 세대의 가수 겸 작곡가를 예고했다. 남자들은 단순히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되기를 원했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남성성의 정의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연민을 미덕으로 삼았다.”'''[17]
― 뉴욕 타임스
'''“프랭크 시나트라는 20세기의 대중음악사 가장 중요한 음악 인물로, 빙 크로스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가 이 타이틀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다. 60년간 지속된 경력에서 그는 종종 역행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매력을 유지했고 음악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1930, 40년대 스윙 시대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40, 50년대 중반에 시작된 록 시대에서 계속해서 청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1940년에 그의 첫 번째 히트곡을 냈고 1994년까지 여전히 수백만 장의 음반을 팔았다. (중략) 50년 이상 대중들의 취향이 변화하기 때문에 시나트라가 긴 시간 동안 음반 아티스트로서 성공한 것에 누구나 놀랄 것이다. 가수로서 그의 인기 그리고 그의 생산성은 압도적인 음반을 낳았다. (중략) 영화 배우로서 그리고 혼합된 평판의 셀레브리티로서, 시나트라는 그의 명성의 실제 원천인 그의 진정한 음악적 재능을 간과하기 쉬운 20세기의 아이콘이다. 예술가로서, 그는 미국의 위대한 노래를 해석하고 후손들을 위해 그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18]
― All Music
'''“프랭크 시나트라는 미국의 가수이자 영화 배우로서 오랜 경력과 매우 공공적인 개인 생활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퍼포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보통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미국 가수로서 환영받는다. (중략) 그의 예술성에는 거의 논란이 없으며, 그가 50년 넘게 공연한 1,400곡 이상의 레코딩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미국 대중가요에서 가장 중요한 보컬 작품으로 여겨진다. 시나트라는 거의 혼자 힘으로, 개인적인 표현 수단으로서 노래를 다시 정의했다. 평론가 진 레스는 "시나트라는 친밀한 대화나 개인적인 고백처럼 자연스럽고 정교한 공예품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평했다. 신화와 거만함 이면에는 본능적인 음악 천재와 완벽한 연예인이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그는 단순한 아이콘의 지위를 초월하여 미국 문화의 가장 인정받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
― 로버트 크리스트가우 (음악비평가)[19]
[20]
'''“'아이콘'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이 쓰이지만, 만약 그것이 미국의 대중문화에 있는 누군가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프랭크 시나트라이다.”'''
'''“당신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하면 프랭크는 당신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산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올라가야 하는 산입니다. (중략) 시나트라는 절대 떠나지 않았어요. 우리가 여기 머물 거라고 생각했던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결코 그렇지 않죠.”'''
'''“나를 프랭크 시나트라와 비교하는 겁니까? 농담이죠? 그와 같이 언급되는 것만으로 일종의 큰 칭찬일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나도, 그 누구도요.”'''
'''“지금으로부터 500년 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음반을 들을 것이고, 그의 영화를 볼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말할 겁니다. ‘그곳에는 오직 하나의 시나트라만이 있었다.’”'''[24]
'''“그는 텔레비전, 음반, 영화 등 모든 매체를 정복했습니다.”'''[25]
― 토니 베넷
'''“프랭크 시나트라는 나를 또 다른 행성으로 데려갔다.”'''
'''“나의 꿈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깊은 외로움에 대해 노래했고, 놀랍고 끔찍한 방법으로 그의 전 생애를 이기려고 노력하며 보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나트라는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가끔 그 목소리의 공명 안에서 그들 자신의 경험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우리의 꿈속으로 들어갔고, 우리의 고통을 밝혀주었고,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어떤 목소리보다 더 오래도록 희망했다. 그 목소리는 우리 세기의 목소리였다.”'''[28]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 최고의 대중가수.”'''[29]
― 롤링 스톤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팝 음악의 역사이다. 프레슬리와 딜런과 마찬가지로 1940년 이후 인기, 영향력, 신화적 힘이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백인 남성 가수인 시나트라는 무기한 지속될 것이다. 그는 사실상 현대 대중가요 표현법을 발명했다.”'''
― 롤링 스톤 레코드 가이드, 1983년/스티븐 홀든
'''만약 여러분이 20세기를 연예인들의 문화가 새로운 표준과 제도를 도입했던 시대로 생각한다면,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들 모두를 창조하고, 개척하고, 혁신하고, 세련되게 만들고, 숙달한 것이다. 그는 10대 시장을 알아보고 직접 그들에게 호소한 연예인 중 최초의 10대의 우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호소의 근원은 그의 노래의 에로티즘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중 남자친구와 남편이 해외에 나간 여성들의 필요에 부응했다. 그는 최초의 크로스오버 아티스트였으며, 주요 영화배우가 된 최초의 가수였다. 그리고 그는 연예계의 첫 파워 플레이어였다. 그는 자신의 음반사와 영화 제작 회사를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엘비스, 마돈나, 톰 크루즈가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다.'''
'''어떻게 그는 이 모든 것을 했을까? 그는 어떻게 성공했나? 이 사람은 분명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60년 동안,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기록했다. 그는 좋은 타이밍과 비할 데 없는 재능으로 인해 자신을 재창조하고 몇 세대에 성공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는 순전히 의지력으로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이 모든 것들이 그가 금세기 동안 모든 다른 연예인들을 능가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의 마이크와 녹음 매체에 대한 통달로 시나트라가 한 세대 전 록 가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어 왔다. 그 이전에 가수들은 큰 목소리를 내는 알 졸슨처럼 들렸다. 시나트라는 라디오를 듣는 사람과 일대일로 친밀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는 노래 해석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을 개척했다. 우리는 시나트라가 부른 노래가 비록 그가 작곡은 하지 않았지만, 시나트라 노래라고 생각한다. 시나트라 이전에, 그 가수는 그 노래에 개성 없이 봉사했다. 그는 그 노래를 뒤집고, 그의 성격과 관점에 맞춰서 사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록 가수들의 무대를 마련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개인적인 상표를 노래에 붙이는지를 보여주었다.'''
'''종종 무시되는 또 다른 세부 사항은 시나트라가 예술가로서 인종 장벽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흑백음악의 결합체이다. 사람들은 종종 엘비스가 시대에 경계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 칭찬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나트라는 그것을 먼저 했다. 우리는 40년대에 스윙이 흑인 음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했다. 흑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의해 연주되고 나중에 백인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스윙 밴드에서 시나트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올리버에 의해 준비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 엔터테인먼트 위클리[30]
'''“한 가지만 분명히 합시다. 또 다른 프랭크 시나트라는 없습니다.”'''
― 워싱턴 포스트, 2015년. 왜 프랭크 시나트라는 아직도 중요한가?
'''1. 그는 대중적인 노래를 불멸로 만들었다.'''
'''2. 그는 송라이터를 스타로 만들었다.'''
'''3. 그는 로큰롤이 있기 전에 로큰롤이었다.'''[31]
'''4. 그는 콘셉트 앨범을 개척했다.'''
'''5. 그는 셀레브리티 스쿼드를 창조했다.'''
'''6. 그는 라스베이거스를 쿨하게 만들었다.'''
'''7. 그는 (가수로서) 레코드 레이블을 만들었다.'''
'''8. 그는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도록 두 번 도왔다.'''
'''9. 그는 미국 음악의 통합을 도왔다.'''
'''10. 그는 가수를 중요하게 만들었다.'''[32]
― USA 투데이, 2015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세상을 바꾼 10가지 방법
'''시나트라는 그의 훌륭한 재즈식 표현과 메소드 배우의 기술과 열정에 대한 서정적인 해석, 그의 예시의 힘으로 대중 노래를 바꾸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친구 딘 마틴은 "그것은 프랭크의 세상이다, 우리는 단지 거기에 산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그는 여전히 알파메일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회장님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에 있어서는 최초의 예리하게 옷을 입은 정열적인 적극적인 활동가였다. 그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에서 N.W.A, 저스틴 비버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부시게 빛나는 길을 따라왔다.'''
'''미국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인 프랭크 시나트라는 대중가요를 예술로 승격시켰다. 아마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제외하고, 어떤 인물보다 더 심도 있게, 시나트라는 미국의 세기의 스타일과 대중문화를 바꾸었다.'''
― 디 애틀렌틱[35]
'''시나트라의 보컬은 20세기 미국에 영구적인 표시를 남겼다. 그의 버전의 미국 대중음악은 가수들과 연주자들 모두에게 확실한 기준이 되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합리적인 기준으로 미국 대중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다. (중략) 그의 인생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문화와의 무수히 많은 양상을 띠었다. 미국 사회 내의 소수 민족 집단들의 투쟁; 대중음악의 스타일적 혁명; 전자 기술의 발달과 그것이 음악의 사업에 미치는 영향; 음악과 영화, 엔터테인먼트와 좌익 간의 관계, 그리고 정치에서의 엔터테인먼트. 그의 경력은 클래식 음악, 재즈, 팝, 록의 얽힌 연결고리와 윤리와 예술 사이의 상반된 결합, 젊은이의 집단 성적 히스테리에 의해, 로맨틱한 사랑의 고통과 건조한 절망에 의해 형성되었다.'''
― 존 로크웰 (음악 평론가)[37]
7. 여담
- 유명한 바람둥이였고 한 여자와 결혼해서 오래 지낼 수 있는 성향이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는 낸시 바바토였다. 시나트라는 1930년대 후반 뉴저지 롱에서 바바토를 만났는데, 그곳에서 시나트라는 대부분의 여름을 인명구조원으로 보냈다. 그는 "러스트 캐빈"에서 간통죄로 체포된 사건을 겪은 후 그녀와 결혼하기로 동의했다. 시나트라에는 수많은 혼외 문제가 있었고, 가십 잡지는 마릴린 맥스웰, 라나 터너, 조이 랜싱 등 여성과의 불륜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실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에바 가드너와의 불륜을 했고 1951년 낸시와 이혼하고 에바 가드너와 결혼한다. 하지만 이 둘은 항상 싸웠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 커플은 공식적으로 1953년 10월 29일 MGM을 통해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별거한다. 1954년 6월에는 에바는 마타도르 루이스 미겔 돔민과 사귀었다. 시나트라는 별거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좋아했고, 그들은 평생 친구로 남았고, 그는 1976년까지 여전히 에바 가드너의 재정 문제에 도움을 줬다. 에바와의 결별 후 1958년에는 로렌 바콜과 1961년에는 댄서 줄리엣 프로우스와 사귄다. 1966년에는 여배우 미아 패로우와 결혼하였고 당시 나이차가 무려 29살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고 1968년 이혼하고, 역시 평생 친구로 남는다. 1976년 11월에는 몇년간 사귀었던 바바라 막스와 결혼했고 이 결혼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여담으로 그의 장남인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도 여러 여자 사이에서 자녀를 5명(2남 3녀) 두었다. 즉, 아버지의 바람둥이 기질이 유전된 셈이다.
-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인 My Way를 시나트라 본인은 굉장히 싫어했다. 이 곡은 프랭크를 상징하는 곡이 되었지만 정작 프랭크는 이 곡을 지겨워했고 좋아하지 않았다. 프랭크의 딸 낸시 시내트라는 2000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빠는 이 곡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싫어했죠. 딱 달라붙어서 벗지 못하는 신발같이 여겼어요”라고 말했다.
- 배우와 가수 모두 성공한 어마어마한 커리어, 슈퍼스타로서와 아티스트로서의 역대급 성공으로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유형이 나오면 ‘우리 세대의 시나트라’류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보고 그런 소리를 했고[39] , 원 디렉션 출신의 해리 스타일스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고[40] ,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은 리한나보고 이런 소리를 했다.[41]
- 그의 전 부인인 미아 패로우는 베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자신과 우디 앨런과의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아들 로난 패로우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아들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수년간 이 같은 소문이 조심스럽게 떠돌았으나, 미아가 공개적으로 그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미아는 잡지의 '프랭크 시나트라가 로난의 친부일 가능성이 있냐'라는 직설 질문에 "가능하다(Possibly)"라고 답했다. 미아 패로우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지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짧은 2년간의 결혼생활을 했지만, 이후 우디 앨런과 연애 동거했을 때와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1998년까지 연인으로 지내왔다. 현재까지 로난의 친부를 증명하기 위한 DNA 테스트는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인 낸시 시나트라는 미아는 “미아가 오래전부터 자매처럼 지냈고, 우리 엄마도 그녀를 좋아했다. 로난도 우리 가족이 된다면 축복이다."라고 반가워했다. 매체들은 로난의 맑고 푸른 눈이 우디 앨런의 갈색 눈과는 달리 시나트라 생전의 멋진 파란 눈과 닮았다는 이유를 들어 시나트라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하고 있다.
- 그는 운전자들에게 매우 관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종종 100달러를 초과하는 팁을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그들이 운전하는데 드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이다.
- 파파라치를 경멸했다. 딸 티나 시나트라는 “아버지의 집에 파파라치가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아버지와 코끝까지 마주쳤죠. 파파라치는 겁에 질려 그 사진사는 수영장에 뛰어들었고 프랭크가 그를 쫓아냈어요.”라는 일화를 이야기했다.
- 프랭크 캐프라는 시나트라가 최고의 배우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때 프랭크에게 음악 활동을 그만두고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하라고 말했고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배우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그의 1940년대 젊은 시절의 영상
- 워낙 명곡을 셀 수 없이 많이 불렀기 때문에 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커버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가장 많이 커버된 가수 2위다.[42]
- 엄청난 워커홀릭이며 다작을 했고 하루에 평균 4시간을 잤다고 한다. 생전 1200곡 이상을 녹음했고 레코딩했다. 공식적으로 반복된 곡, 비공식적으로 발매되지 않은 곡까지 합하면 2000곡이 된다. 그리고 영화, 라디오, 티비, 레코딩, 콘서트에서 부른 곡까지 합하면 32,000곡이 넘어간다. 배우까지 겸업하며 활동했는데 이 정도다. 사망하기 3년 전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공연을 했다.
- 로큰롤이 치고 올라온 1950년대에 견제를 하기 위해 거친 발언을 했다. “로큰롤은 가장 야수적이며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다. 내가 이런 음악을 듣는 것은 불행이다. 로큰롤 가수는 저능한 반복과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10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다. 이런 빗나간 방식으로 로큰롤은 지구상의 모든 구레나룻 10대 범죄자들의 군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때 말한 구레나룻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저격한 걸로 추정된다. 그런데 1960년 프랭크 시나트라는 ‘Welcome Home Elvis’라는 프로그램을 런치해 엘비스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엘비스는 록 가수답지 않게 턱시도와 정장 차림으로 출연한다. 이 자리에서 프랭크는 ‘돌아온 엘비스’에 대해 이 시대 최고의 인물, 마법의 노래 솜씨 운운하며 극찬으로 환대했다. 엘비스도 물론 “존경하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함께 하게 무대에 서 영광입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 이 이후에 시나트라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한번 더 식사에 초대 했는데 목표는 테이블에 매우 젊은 여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 마이클 잭슨과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시나트라와 퀸시 존스가 같이 스튜디오에서 앨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잭슨이 스튜디오의 방문한다. 퀸시 존스는 이때를 “그들의 세대에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두 명이 한 방에 있다.”라고 말했다.
- 미아 패로우의 전기 "What Falls Away"에 따르면, 우디 앨런이 패로의 입양 딸 순이 프리빈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시나트라는 우디 알렌의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나트라는 이혼 후에도 미아 패로우와 친하게 지냈다.
-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그의 전기영화를 찍고 싶다고 밝혔고 계획까지 했으나, 거절됐다고 한다. 스콜세지는 “어떤 것들은 가족들[43] 에게는 매우 어렵고, 나는 완전히 이해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내가 그것을 하기를 기대한다면, 그들은 어떤 것들을 억제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남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너무 복잡해. 하지만 특히 시나트라는 더 그렇다.”라고 말했다. 과거에 스콜세지는 시나트라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꾼 사람이기 때문에 대본을 쓰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고 또 시나트라를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고 그와 같은 존재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 시나트라는 여러 차례 교회에 비판적이었고 그의 초기 생애에는 범신론, 아인슈타인과 같은 신에 대한 관점이었고 1963년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나트라는 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인생에 대한 존중"을 가진 알버트 슈바이처,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977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어머니가 사망한 후 가톨릭 교회에 의지했고 개종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죽었고 카톨릭 장례식을 가졌다.
- 리 J. 콥은 매카시즘이 한창일 때 영화 산업의 공산주의자를 조사하는 하원 활동 위원회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그의 경력이 거의 파괴된 후 시나트라가 그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콥을 거의 알지 못했던 시나트라는 다른 스튜디오에서 콥을 고용하지 않을 때 그가 영화에 출연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게다가, 콥이 파산했다는 것을 알고, 건강이 나쁜 그의 병원비를 지불했고, 호화로운 아파트를 임대하기 전에 시나트라와 함께 머물게 했다. 당시 시나트라도 커리어가 슬럼프에 빠젔었던 상태라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나중에 콥은 만약 시나트라가 없었다면, 그는 그가 살아서 그 시기를 겪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평생 동안 시나트라는 우울증을 앓았는데, 그는 인터뷰에게 “나는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에 대한 과도한 용량을 가지고 있다."라고 1950년대에 한 인터뷰 진행자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고 오케스트라 공연에 자주 갔다. 오페라를 상당히 좋아했으며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팬이었다. 음악평론가 헨리 플레어샌스는 시나트라의 음반을 수집하지 않은 오페라 가수와 인터뷰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그는 몇 명의 록 아티스트들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비틀즈의 노래 "Something"을 불렀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라고 말했고, 최고의 러브송이라고 말했다. 그는 밴드 시카고의 곡 "Color My World"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 곡을 공연에 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아일랜드 록 밴드 U2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직접 만나서 그들을 껴안았다.
- 영국 히트 싱글 앨범 기네스북에 따르면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노래의 스타일리스트"이자 "첫 번째 십대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34개의 미국 골드 앨범을 달성했다. 2005년까지 그는 다른 솔로 가수들보다 미국 톱 10 LP를 더 많이 달성했고 여전히 영국 싱글과 앨범 차트 역사상 12번째로 성공적인 아티스트였다고 한다.
-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촬영 중에서 헨리 실바와 격투 장면을 촬영하다 손가락을 영구적으로 다쳤다. 그 장면에서, 시나트라는 가라데를 하다가 던져졌고, 그의 손은 단단한 나무 탁자를 통과해 그의 작은 손가락에 있는 몇 개의 뼈가 부러졌다.
- 시나트라는 스타일 감각으로 유명한 스타일 아이콘이었다. 그는 비싼 맞춤 턱시도와 줄무늬 정장을 사는데 아낌없이 썼는데, 이것이 그를 부유하고 중요하게 느끼게 했으며, 그는 공연할 때도 항상 정장을 입었고 그렇게 입는 것이 관객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보인다고 생각했다.
-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소문이 많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자비로운 성격이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고 그가 어떤 때는 상냥하고 어떤 때는 불쾌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시나트라의 친구인 케리 그랜트는 시나트라를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그는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책략 없이 단순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 >나는 그가 고통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뉴저지 호보큰을 돌아다니는 어린 이탈리아계 시나트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웃에 발을 들여놓으면 얻어맞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터프해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강인하게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음악적인 천재였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느꼈습니다. 그는 기력이 왕성했죠. 그는 지나치게 예민했고, 그것은 그가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꼈죠. 그는 스웨거적이고, 다혈질적인, 남성적인 이 방패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작은 남자였죠. 그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위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보다 겨우 반 단계 위였을 때 성장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1940년대까지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되지 않았죠. 그건 미친 짓이었죠. 마피아에 대한 그의 매력에 대해 많은 설명이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에게 강하고 훌륭해 보였고, 불행히도 그는 그들에게 반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마치 카우보이나 군인들처럼 숭배했죠. 하지만 그는 작은 남자였어요. 그는 5피트 7인치였어요.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매우 말랐고, 가벼운 손목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적인 손과 작은 발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키가 크고, 큰 재능이 있었죠. 그는 여러 면에서 정말 고통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는 끔찍한 양육을 받았어요. 그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와 포옹할 것인지 때릴 것인지 모르는 어머니가 있었죠. 그리고 그녀는 그를 때렸어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호보큰에서 술집을 운영했죠. 그들은 술집 뒤에 빌리가 있는 클럽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시나트라가 집에 벗어났을 때 그를 때려눕혔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뉴저지 해안에서, 그녀는 물속에서 시나트라의 머리를 밀어냈습니다. 파도 속으로 말이죠. 분명히 그냥 장난으로요. 그녀는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자주 집에 없었죠. 그는 그의 어머니와 매우 비슷했어요. 그녀는 병적으로 참을성이 없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불같이 격한 기질이었죠. 그래서 이 모든 조합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를 분노의 뭉치로 만들었어요. 그는 밤을 싫어했어요. 그는 어둠을 무서워했어요. 그는 잠드는 것을 두려워했죠. 그는 아침 7시나 8시경에 마침내 돌아올 때까지 항상 친구가 필요했어요. 그는 노래를 잘 부르던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의 수준은 너무 뛰어나서 노래를 잘 할 때와 노래를 잘 못 부를 때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머지 시간 동안, 그의 인생의 7/8 혹은 9/10은, 그는 단지 한 가지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왔죠. 그는 말 그대로 참을성이 없었고, 항상 몹시 불만족스러워했어요. ‘권위 있는 시나트라 연구자로 꼽히는 제임스 캐플란의 말’
- 시나트라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마피아와의 관계다.[45] 그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범죄의 삶 속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나트라의 초기 경력 때 토미 도시 밴드를 탈퇴하고 솔로 데뷔를 하려고 했는데 시나트라가 장기계약에 묶여 밴드를 나갈 수 없었다. 마피아 보스 윌리에 모레티는 그가 리베이트를 받는 것을 도왔고 토미 도시와의 계약에서 빼내어주는데 개입했다고 보도되었다. 시나트라의 전기를 쓴 켈리는 필리스 맥과이어가 마피아 샘 지안카나와 시나트라는 종종 네바다에서 함께 골프를 치고 서로를 방문하겠다고 말했고 그들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케네디의 민주당 후보 지명을 위해 웨스트 버지니아의 표가 필요했고 시나트라는 그의 아버지에 부탁을 받아 시카고 마피아 두목이었던 샘 지안카나에게 접근했고, 지안카나는 500클럽의 스키니 폴 드아마토를 파견하여 지역 보안관과 강력한 석탄 광부 연합의 12만 표를 케네디에게 전달했다. FBI는 2,403쪽 분량의 시나트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었고, 시나트라는 마피아와의 유대 관계, 그의 열렬한 뉴딜 정책 옹호, 존 F. 케네디와의 우정을 통해 FBI의 자연스러운 표적이 됐다. 그들은 1940년대부터 거의 50년 동안 시나트라를 감시했다. 그 문서들은 죽음 위협과 강탈 계획의 대상인 시나트라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FBI는 시나트라가 조직범죄 단속을 주도하고 있는 바비 케네디와 케네디 대통령 가까워지면서 그가 마피아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가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마피아 지안카나의 대화를 도청했고, 지안카나는 시나트라가 케네디와 함께 있는 것이 발견했고 이후 시나트라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들의 관계는 네바다 게임 위원회의 카지노에 대한 조사에 따라 1963년에 마침내 끝이 났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시나트라 비밀문서는 1998년 정보자유법 요청에 따라 공개됐다. 시나트라는 마피아와의 많은 연관된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벅시 시걸, 카를로 감비노, 샘 지안카나, 러키 루치아노와 같은 갱들과의 개인적 그리고 전문적인 관계를 자주 부인했다. 그는 "내가 깡패들 또는 불량배들과 친하다는 모든 보도는 잔인한 거짓말이다"라고 격렬히 선언했다.
- 시나트라의 아들인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는 어릴 때 몸값을 목적으로 유괴당한 일이 있다. 다행히 몸값을 지불 후 무사히 풀려났고, 유괴범들은 잡혀서 처벌을 받았다. 단지 시나트라가 유괴범들과 교섭할 당시 공중전화를 쓰도록 명령받았는데, 통화 도중 동전이 떨어지는 바람에 낭패를 본 일이 있다고 한다. 그 후로 그는 평생 동안 10센트 짜리 50개 묶음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가족들과 지인들에게도 10센트 50개 묶음을 주며 혹시나 또 납치 사건이 일어날까 불안해하며 살았다.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는 아버지처럼 가수로 활동했는데, 2016년 3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2세.
- 머그샷으로 유명한데 그의 머그샷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실제로 체포당한 사진이 맞다. 당시 죄명은 ‘혼인 빙자 간음죄’였다. 피해 여성이 임신을 주장했으나, 수사 과정에서 해당 무고가 밝혀져(혼인 빙자 간음이라고 했는데 피해 여성이 유부녀이므로 혼인 빙자가 성립되지 않았다) 시나트라는 무죄로 풀려났다. 1938년 11월 26일 체포 당시 찍힌 머그샷(범죄 기록 사진). 키 5.75 피트, 몸무게 125 파운드[46] 라는 정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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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웨인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웨인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촬영 중 머문 호텔 객실의 바로 아랫방에서 시나트라가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던 웨인이 몇 차례 전화로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어 직접 내려가서 시나트라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그때 웨인만한 덩치의 보디가드가 "누구도 시나트라 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라고 위협하자, 웨인이 의자로 보디가드를 가격해서 쓰러뜨렸고,[47] 그 후 호텔은 조용해졌다고 한다.
- 잠과 관련해서 기묘한 습관이 있었다. 거의 평생을 애지중지하던 금사로 수를 놓은 실크 파자마만 입고 잤다고 하는데 이게 없으면 발광하면서 화를 냈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저 잠옷은 찰리 채플린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고 한다. 사인을 더럽게 안 해 주기로 유명했다. 항상 덩치 큰 보디가드를 옆에 두고 사인해 달라는 팬들을 떨어뜨리곤 했다고 한다.
- 마릴린 먼로와의 섹스 스캔들도 유명하다. 먼로와 잦은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프로토스 영웅 아르타니스(Artanis)는 시나트라(Sinatra)를 뒤집어서 지은 이름이다. 일종의 아나그램. 폴아웃: 뉴 베가스의 인트로 타이틀 곡인 Blue Moon을 이 양반이 불렀다.[48] 전성기의 영향력은 황금기 미국 애니메이션에서도 나타나 몇몇 작품에서 그를 의인화한 캐릭터가 나오기도 한다. (Swooner crooner, book revue, little tinker 편 참조.)
- 그는 현대적인 음악 몇 개를 커버한 적이 있다.
- 딘 마틴 쇼 (1965 ~ 1974) 에도 여러 번 출현했으며 The Sliencers 1966[49] 에서는 직접 출연하지는 않으나 사진이나 음악으로 유머스럽게 나타난다.[50]
- Meet Danny Wilson 1951나 It Happend in Brooklyn 1947을 보면 보비 삭서들에게 둘러 싸인 그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All Of Me
- 락앤롤 음악을 매우 싫어했으나 그도 역시 락앤롤 음악을 가지고 있다. Two hearts, Two Kisses 정확히는 커버곡
- 주황색을 매우 좋아했으며, 가장 행복한 색이라고도 했다.
- 시나트라는 악보를 읽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오케스트라를 지휘를 했다.
- 구운 치즈를 좋아했다.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이기도 하다.
- 시나트라는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백인 전용 클럽을 반대했으며,
- SNL에서 죠 피스포크가 자기자신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필 하트먼이 흉내내는 것은 마땅치 않아했다.
- 2008년 미국 우정청은 프랭크 시나트라 서거 10주년 기념 42센트 우표를 발행했다.#
- 시나트라는 말론 브란도를 "중얼이 (Mumbles)"라고 깠으며, 그를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배우"라고 했다.
이후, 1982년 일본 콘서트에서 Luck Be A Lady를 부르기 전 멘트에서 말론 브란도가 부른 버전은 끔찍하다고 했다.
- 시나트라는 여러번의 자살시도를 한적이 있다.
시나트라가 베게에 총을 쏜 것이다.
또, 1950년대 초, 시나트라의 커리어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한창 젊은가수인 에디 피셔를 보기위해 광적으로 흥분한 소녀들을 보고, 그는 더 이상 세상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머리를 오븐에 집어 넣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행이 운좋게도 그의 매니저가 제 시간에 그를 발견하여 구했다.
- 시나트라는 개를 무척 좋아했다. 어린시절엔 어머니가 개를 기르는 것을 거부했다, 성인이 된 후 시나트라는 많은 개를 키웠다.
- 그는 'Strangers In The Night', 'My Way'를 무척 싫어했다.
- 그는 기념물과 함께 묻혔다.
- 그는 "Chairman of The Board"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 시나트라 버전의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은 1980년 발매 이후 지금까지 뉴욕 양키스의 경기가 끝난 직후
- 그는 1971년에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었다.1971년 6월 25일 잡지
- 그는 마지막 무대인 1995년 팜 스프링스에서 있었던 비공식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The Best Is Yet To Come"을 불렀다.
- 그가 사망하기 전 적었던 유언에는 "경쟁금지 조항"이 있다.
- 그는 가수의 꿈을 꾸기 전에 Jersey Observer 신문에서 배달원으로 일했으며,
- 그는 가수가 된 후 어딜가든지 PA 시스템 (확성장치)를 가지고 다녔다.
- 시나트라는 청결에 매우 집착했다. 하루에 샤워를 12번씩 한적도 있었다.
- 그는 잠자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해가 뜰 때만 잠을 잤다.
- 시나트라의 이름을 붙인 소행성이있다. '7934 Sinatra'NASA
- 그는 커리어 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해 활동명을 "Frank Satin"으로 바꾸라는 요청을 받았다.
- 잭 다니엘스의 광팬이다. "테네시 위스키 올드넘버 7을 마실 때가 삶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라고 말했으며,
2013년, 잭 다니엘스는 그를 기리는 의미로 시나트라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 그의 첫 싱글 "From the Bottom of My Heart"는 처음에 8,000 장 미만으로 판매되어 전 세계 수집가들에게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음반이 되었다.
- 시나트라는 초기 커리어에서 몇차례 성공을 맛본 뒤 솔로로 활동해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토미 도시는 시나트라를 저주하였으며,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도 시나트라를 언론에 모욕했다.
- 그는 영화 "Robin And The 7 Hoods"를 촬영중일 때 존 F. 케네디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시나트라는 낯선이에게 거친 면도 있지만 부드러운 면도 존재했다.
또한, 의료비를 지불해주었고, 매일 병원을 찾아와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격려의 말을 전해주었다.
- 에바 가드너가 80년대에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녀의 의료비에 5만 달러를 내주었고,
- 1977년 시나트라가 Caesar 's Palace에서 공연하는 데에 어머니를 초대했지만, 어머니는 그 공연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처하는 데에 시나트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시나트라가 가톨릭 신앙을 믿게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더 높은 권력과 영성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노골적인 비평가였고 조직 종교에 회의적이었다.
- 그의 히트곡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은 작곡가를 화나게 했다.
- 존 F. 케네디를 저격해 숨지게 한 리 하비 오즈월드가 케네디 암살 전에 본 영화가 시나트라 주연의 영화 "Suddenly"를 봤다고 하자 시나트라는 영화 배포를 완전히 중단하였다. 이 배포중단 조치는 한참 뒤에 풀렸다.
- 시나트라는 작가 Kelly가 자신의 결혼, 비즈니스 및 마피아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공식적인 전기를 쓰는 것을 막기 위해 2백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그는 소송을 포기했고, Kelly의 책 "My Way"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989년 절친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가 인후암 진단을 받았다, Rat Pack 투어가 끝나자 시나트라는 데이비스에게 금시계를 선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스는 세상을 떠났고 시나트라가 선물한 금시계와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