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 점령

 


(독어) Ruhrbesetzung
(영어) Occupation of the Ruhr
(불어) Occupation de la Ruhr
1. 개요
2. 배경
3.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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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벨기에가 군대를 동원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한 사건. 점령 통치 기간은 1923년부터 1925년까지였다. 이는 독일의 극우화와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 배경


베르사유 조약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지불이 불가능할 정도의 과중한 전쟁배상금을 짊어졌다. 독일이 지불해야 할 액수는 무려 1320억 골트마르크였다.[1] 전후 엉망진창이었던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이런 거금을 갚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주지 않았다.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자꾸 눈감아주다가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아예 무효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일을 가혹하게 압박하고 쥐어짜야한다는 것이 프랑스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빌헬름 쿠노 독일 총리가 협상국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의심도 강했다. 따라서 즉각적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하지만 협상국의 또다른 일원이었던 영국은 강압적인 조약 이행에 반대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독일에 군사적인 제재 대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조차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푸앵카레는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할 것을 군대에 지시한다.

3. 반응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투쟁까지는 없었지만 시민 불복종 운동은 만연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도 루르의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여 이 루르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자국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석탄을 채굴했다.
이미 엉망이었던 독일의 경제는 총파업으로 인해 더욱 추락한다. 경제대공황, 디폴트, 총파업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전쟁 배상금은 계속 지불해야 했다. 돈이 없는 정부는 '''돈을 찍어서''' 갚기로 결정한다. 돈을 찍어서 화폐를 직접 지불한 것은 아니다. 그 화폐로 자국 시장에서 귀금속을 구매하여 갚은 것이다. 이는 당시 독일의 시장 경제에서 가격이 매우 경직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량의 통화가 시장에 나와도 바로 물가가 오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화폐 남발은 종국적으로는 독일에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프랑스의 점령 통치는 민주 국가가 같은 유럽 국가에 행한 것치고는 상당히 과격했다. 2년 동안 130명 가량의 독일인들이 사보타주 혐의로 프랑스군에 처형되었다. 점령 말기에는 한 프랑스 중령이 독일인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프랑스군은 이 중령의 관을 운구하면서 조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사살했다.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나중에 나치가 독일에서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는데 쓰였다.
이에 전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고 프랑스에 반대하는 여론이 커졌다. 심지어는 1차 대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의 점령에 반대했다. 영미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프랑스는 양국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4년에 도스 안이 채택된 후 프랑스는 루르에서 철수한다. 이는 프랑스가 미국이 제안한 전쟁 배상금 감축안에 동의한 것이었다. 1924년에 프랑스에서도 금융위기가 일어나서 점령을 유지할 비용이 없기도 했다. 여담으로 샐리 마크라는 한 연구가가 1978년에, 루르 지역 점령에 따른 프랑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의외로 9억 마르크 흑자였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프랑스의 점령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무력한 대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1924년에 극우파의 주도로 라인란트가 독립을 선포했고,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 일련의 반체제 운동이 증가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불안정은 심화한다.
[1] 1919년 당시 맨 처음 결정된 금액은 이것보다 훨씬 적은 226억 마르크였으나 미국에 진 전쟁 채무를 전쟁 배상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1921년 엄청나게 증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