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 안
Dawes Plan
1차 대전 종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발생한 전쟁배상금 및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인 찰스 G. 도스가 제안한 해결책이다. 연합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 제안을 동의하면서 독일에는 중앙 은행(Reichsbank, 제국 은행)이 다시 설치됐고 독일의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한 차관 8억 마르크가 제공됐다. 그 결과 연합국과 독일, 특히나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크게 완화되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도스는 192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다만 도스 안 자체도 여전히 전쟁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1929년 영 안으로 대체된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연합국 측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당연히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난 독일이 이 정도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지만,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프랑스의 강경함 아래 연합국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금액을 고수했고, 결국 1923년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은 디폴트를 선언한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핵심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이러한 연합국의 강경한 태도는 독일인들의 분노만을 더욱 들끓게 했을 뿐이었다. 여기다가 바이마르 공화국이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면서 독일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사실상 마비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대독 강경책을 비판하던 영국과 미국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고, 국제 연맹 관할 하의 전쟁 배상금 해결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장 자리에 당시 미국의 유력한 기업인이자 정치인[1] 이었던 찰스 G. 도스를 임명한다. 5개 전승국[2] 이 파견한 10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여러 논의 끝에 ''''배상금 총액의 경감은 추후에 정하며 그 대신 앞으로 5년 동안 독일이 지불해야할 배상금을 지정하며 이를 원활히 하기 위해 미국이 차관을 제공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도스 안의 세부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손해볼 것이 없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빠르게 도스 안을 수용했으며, 연합국 역시 어쨌든 독일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기때문에 도스 안을 승인한다. 8억 마르크의 차관이 독일로 들어가면서 독일의 경제는 빠르게 안정되어갔고 이에 따라 독일은 원활히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배상금 지불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켰고 이에 따라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연합국 과 독일 사이의 국경 분쟁이 상당 부분 해결되는 외교적 성과도 이루어낸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이것 역시 한계에 달해서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끼치는 부담감은 다시금 심각해졌다.[3] 게다가 도스 안은 총 배상금 액수를 정해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929년 영 안이 채택되면서 도스 안은 폐기된다.
이때 미국 자본가들이 미국 정가에게 저 빚 좀 탕감하라고 버럭버럭 해댔는데, 그게 로비 수준을 넘어 협박 수준이었다. 그 꼴을 보던 FDR은 대통령이 되자 대기업들에게 철퇴를 후려갈긴다.
1. 개요
1차 대전 종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발생한 전쟁배상금 및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인 찰스 G. 도스가 제안한 해결책이다. 연합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 제안을 동의하면서 독일에는 중앙 은행(Reichsbank, 제국 은행)이 다시 설치됐고 독일의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한 차관 8억 마르크가 제공됐다. 그 결과 연합국과 독일, 특히나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크게 완화되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도스는 192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다만 도스 안 자체도 여전히 전쟁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1929년 영 안으로 대체된다.
2. 배경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연합국 측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당연히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난 독일이 이 정도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지만,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프랑스의 강경함 아래 연합국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금액을 고수했고, 결국 1923년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은 디폴트를 선언한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핵심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이러한 연합국의 강경한 태도는 독일인들의 분노만을 더욱 들끓게 했을 뿐이었다. 여기다가 바이마르 공화국이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면서 독일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사실상 마비 상황에 빠지게 된다.
3. 도스 안 채택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대독 강경책을 비판하던 영국과 미국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고, 국제 연맹 관할 하의 전쟁 배상금 해결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장 자리에 당시 미국의 유력한 기업인이자 정치인[1] 이었던 찰스 G. 도스를 임명한다. 5개 전승국[2] 이 파견한 10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여러 논의 끝에 ''''배상금 총액의 경감은 추후에 정하며 그 대신 앞으로 5년 동안 독일이 지불해야할 배상금을 지정하며 이를 원활히 하기 위해 미국이 차관을 제공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4. 세부 사항
도스 안의 세부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루르 공업 지대에서 프랑스 군과 벨기에 군은 철수한다.
- 제 1년째인 1924년에는 금화 10억 마르크, 제5년째인 1928년부터는 금화 25억 마르크로 지불액을 늘린다. 다만 이는 독일의 경제 회복 속도를 고려하여 조정될 수 있다.
- 독일의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미국은 8억 마르크를 차관으로 제공한다.
- 독일에 중앙은행을 재건한다. 단 이는 연합국의 감시하에 놓인다.
5. 결과
손해볼 것이 없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빠르게 도스 안을 수용했으며, 연합국 역시 어쨌든 독일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기때문에 도스 안을 승인한다. 8억 마르크의 차관이 독일로 들어가면서 독일의 경제는 빠르게 안정되어갔고 이에 따라 독일은 원활히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배상금 지불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켰고 이에 따라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연합국 과 독일 사이의 국경 분쟁이 상당 부분 해결되는 외교적 성과도 이루어낸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이것 역시 한계에 달해서 배상금이 독일 경제에 끼치는 부담감은 다시금 심각해졌다.[3] 게다가 도스 안은 총 배상금 액수를 정해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929년 영 안이 채택되면서 도스 안은 폐기된다.
이때 미국 자본가들이 미국 정가에게 저 빚 좀 탕감하라고 버럭버럭 해댔는데, 그게 로비 수준을 넘어 협박 수준이었다. 그 꼴을 보던 FDR은 대통령이 되자 대기업들에게 철퇴를 후려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