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린저

 


[image]
Luise Rinser
1911.4.30-2002.3.17
독일(서독)의 소설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대표적 소설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생전 페미니즘, 좌파 지식인, 나치 저항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전후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70~80년대 쯤 대한민국의 가정집 책꽂이에 한 권 씩은 꽂혀있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소설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의 작가이다.
루이제 린저를 처음 한국에 소개한 작가는 독문과 교수이자 작가였던 전혜린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가 1961년에 한국에 출판되었다.

2. 상세


히틀러 정권에 저항한 반(反)나치 여성문인으로 유명하였다. 뮌헨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뒤 1935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1939년 학교에서 나치에 가입하라는 강요에 직장을 그만두고 같은 해 작곡가 슈넬과 결혼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40년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유리반지'를 완성했고 이 소설은 헤르만 헤세가 찬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1944년 남편이 전사하고 자신은 히틀러 정권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작품 출판 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어 결국 반 나치 활동으로 투옥, 1944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전으로 1945년 석방되었다.
첫 남편 슈넬[1] 사이에서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 린저를 얻었다. TV 프로그램 감독이었던 연인 사이에서 둘째 아들 슈테판 린저(1941-1994)[2]를 혼외 출산으로 얻었다. 1944년 작가 클라우스 헤르만(1903-1972)[3]과 결혼하여 1949년까지 함께 살았다. 1954년 독일 작곡가 카를 오르프(1895-1982)와 재혼했다가 1959년 이혼하였다.
루이제 린저 자신의 자전적 색채가 짙은 소설로 평가되었던 '생의 한가운데'(1950)의 여주인공 니나는 파란만장한 생의 한가운데에서 두려움 없는 의지를 가지고 신념 속에 살아가는 이지적인 여성으로 형상화되어있다. 이 소설은 여 주인공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인 슈타인의 입장에서 니나를 그리고 있다. 여주인공 니나는 수동적이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격정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반 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고 자살 기도까지 하는 격정적인 인물이다.
1990년 말 루이제 린저와 오랜동안 교유했던 철학자이자 신부인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가 린저의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와 함께 루이제 린저 탄생 100주년인 2011년에 출판한 린저의 전기('모순 속의 삶')가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무리요 신부는 그녀를 독일의 '잔 다르크'로 그리고자 기획했으나 자료 연구를 해가면서 루이제 린저의 숨겨진 사실과 왜곡이 드러난 것이다. 1944년 나치에 체포될 때까지 열성적인 나치 교사로서 나치 찬양 시를 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유태인 교장을 비난했던 증거들이 나왔다. 나치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의 한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후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하면서 두둑한 보수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루이제 린저, 한때 나치주의자였다 무리요 신부는 루이제 린저가 보통의 나치 추종자들을 넘어서는 나치에 꽉 엮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옥중기' 등은 모두 자신을 미화한 거짓 이야기이며 나치 시절 그녀가 출판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음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작가 클라우스 헤르만의 유품(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중 유고에 따르면 루이제 린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이 나치를 추종하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기 위해 당시 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지원하는 대기업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원정치자금의 규모 등을 말해주었는데 린저는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해주었고 그 친구의 남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린저를 나치의 게슈타포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이에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던 것이다. 린저의 주장처럼 국가반역죄로 구속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1945년 4월에 석방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전후 서독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가운데 반나치 깃발의 명예를 지킨 '잔 다르크'가 나타나주기를 갈망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을 발표해 자신이 반나치 저항작가이며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심이라고 미화하기 시작하면서 첫 거짓의 단추를 채웠다는 것이다.
전후 카톨릭 좌파쪽 입장을 보이면서 1968년 반권위주의 좌파 학생운동이 서독에 퍼지고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Rote Armee Fraktion)가 프랑크푸르트 상업지구의 한 백화점을 방화하여 체포되었을 때 이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여 서독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극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양심적 지식인 이미지를 남긴 후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했다.
1970 년대에는 낙태 조항 폐지 캠페인에 힘썼다.
이란의 호메이니를 '제3세계 국가들의 빛나는 본보기'라며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한편 좌파 지식인으로서 작곡가 윤이상과 절친한 관계가 잘 알려져 있고(윤이상과의 만남을 다룬 책, '상처받은 용'(1977)를 펴냈다), 북한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여러번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서방의 친북 인사로서 북한을 마약중독, 성범죄, 자살 등 서구가 겪는 문제가 없는, '인간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곳으로 높이 평가했다.
린저는 ‘북한 기행문’(1981)에서 북한 김씨 절대왕조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위대한 지도자’,‘범죄 자체가 없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교화소는 쇠창살이 없고, 교육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교화소에서 출소할 수 있다’, 등 완전한 김일성 용비어천가를 썼다. 1986년 평양 방문 때에는 김일성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이것이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정체다
[1] 1942년에 이혼했으며 1943년 독소 전쟁에서 전사했다.[2]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졌으며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3] 전후 동독에서 작가생활을 이어갔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