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첸 전투
1. 개요
'''30년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영웅들의 회전'''
'''신성로마제국군(구교)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장군 VS 스웨덴 왕국군(신교)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이 맞붙은 전투. 1632년 11월 16일 독일의 뤼첸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의 승자는 스웨덴이었으나 국왕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여 이득을 얻지 못한다. 패배한 신성로마제국은 유능한 발렌슈타인을 숙청하고 더 무능한 지휘관들이 출전하게 되었음에도, 이후의 전쟁에선 더 약해진 스웨덴 군을 상대로 우세를 차지하게 되는등, 전투의 승패보다는 이름을 떨치던 두 영웅들이 맞붙어 나란히 사망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세대교체라는 의미가 더 큰 전투였다.
2. 전투의 배경
30년 전쟁은 팔츠-보헤미안 전쟁(1차),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왕과 독일 신교 용병동맹(2차)가 종결된 이후, 독일과 유럽의 신교 세력들은 독일지방에서 신교의 거듭되는 패전으로 이를 갈고 있었지만, 구교동맹의 압도적인 군사력 때문에 이 전쟁이 주는 이권에는 군침만 흘리고 있었다.
이 무렵, 북유럽의 또다른 야심가였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독일을 침략할 준비를 마쳤다. 구스타브 2세가 덴마크 및 독일 용병동맹이 풍족했던 2차 전쟁을 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스웨덴 내부의 사정 이외에도 경쟁자인 덴마크와 공적을 나누지 않으려고 했다는 추측이 있다. 아무튼, 구스타브 2세는 독일 지방의 신교도 주민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던 프랑스(구교)의 지원을 얻어 포메른에 상륙, 독일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의 신교 지방이었던 마그데부르크에서는, 신성로마제국군이 벌인 대학살극으로 인하여 구스타브 2세를 환대하며 맞아들였다. 또한, 같은 루터파였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를 위시한 많은 신교도들이 가세함으로서 30년전쟁의 3차전이 시작되었다. 스웨덴 군을 이끄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브라이텐펠트에서 제국군을 격파하고, 레흐 강 전투에선 독일 가톨릭의 명장이었던 틸리 백작을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등,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스웨덴의 기세에 놀란 황제 페르디난트는 해임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장군을 다시 복직하고 스웨덴 군을 막게 한다.
복직된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 2세의 전력을 파악하고, 조직력과 충성심이 막강한 스웨덴 군과의 정면대결은 위험하다고 판단, 교묘히 피해다니면서 스웨덴 군대를 물자부족으로 고통받게 하고 독일지방과의 갈등을 부추기는 뛰어난 지연 전략을 선보인다.[1]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 2세의 병력을 갉아먹으며 역습하여 스웨덴 병사 3천명을 죽이고, 지연작전 중임에도 스웨덴 군의 퇴로를 막고 압박하는 등의 우세한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데 1632년 10월 22일 그는 파펜하임[2] 휘하의 기병대 5000명을 할레(Halle)로 보내면서 병력을 분산시켰던 작전이 구스타브 2세한테 알려진 것이다.[3]
발렌슈타인의 병력이 분산되었음을 알게 된 구스타프는 11월 5일 신속하게 행군을 하여 작센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스웨덴 군은 리파흐(Rippaach)에서 제국군 기병대와 크로아티아 군대에게 막혀서 움직이지 못했고, 결국 구스타프는 행렬을 뤼첸으로 돌려 제국군의 숙영지와 불과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진지를 차렸다. 이때는 발렌슈타인 역시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는 처지였고[4] , 아무런 피해없이 전장을 이탈하기 쉽지 않았으므로 결전을 결심한다.
3. 개전
3.1. 양쪽의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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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슈타인의 휘하에는 2만 5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병력은 라이프치히 도로의 북쪽사면에 일렬로 배치했다. 제국군의 우익은 풍차언덕이라 불리는 뤼첸 북쪽의 둔덕에 위치했다. 보병은 장비를 경량화 했으며 제대 구성도 수를 줄이고 기동성을 높였으며 보병도 경량화 된 포를 동반하도록 했다. 포병대는 3개로 구성되어 총 60여 문의 화포가 배치되었다. 기병대는 스웨덴군 용기병의 장비를 일부차용했으며 보병은 중앙에 위치하게 한 후 보병 가운데 도로를 따라 머스킷병들이 참호를 파서 매복했고 그 후방에는 4개 테르시오를 놓았고 중앙의 좌 우익에 기병대를 배치시켰다.
제국군과 대치한 스웨덴군은 대략 2만명 남짓했다. 중앙에는 닐스 브라헤와 도도 폰 크니프하우젠이 4개 보병여단을 지휘했고, 스웨덴 기병과 핀란드 기병 연합군은 우익에 배치해 구스타프 2세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좌익은 독일의 개신교 선제후 작센-바이마르 공의 베른하르트가 지휘했다. 스웨덴 군의 장비도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식 경량화 화기를 대규모 공장생산으로 균일화를 거친 상황이었다.[5]
또한, 문제의 파펜하임이 이끌었던 제국군 기병대 8.000여명은, 발렌슈타인이 전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제국군 본대와의 합류를 위하여 회군을 시작한다. 이 제국군의 기병대는 발렌슈타인과 구스타브 2세의 대결이 시작되는 오전 12시쯤에 도착하게 된다.
3.2. 전투의 시작
원래 스웨덴군은 오전 8시에 공격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8시에 짙은 안개가 끼는 바람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공격을 늦췄고, 오전 11시에 안개가 걷히자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초반에는 스웨덴 군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상당히 팽팽했는데 그 이유는 숙련된 제국군의 포병공격과 참호에 매복한 머스킷 병의 사격으로 스웨덴 군의 중앙과 좌익이 진격이 지지부진했다.
스웨덴 군 우익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그래도 우익은 머스킷 병이 매복한 참호를 점령하고 길을 건너 도로 북쪽의 포병진지까지 장악했지만, 때마침 달려온 파펜하임의 기병대가 신속히 구원해 스웨덴 군 우익에 거의 무너질뻔한 제국군 좌익의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상황을 원점으로 돌렸다.
3.3. 파펜하임의 전사
정오 무렵에 파펜하임의 기병대가 돌아온다. 파펜하임의 기병대는 발렌슈타인의 좌익이 뚫릴뻔한 위기를 막아내며 활약했으나, 문제는 파펜하임이 용맹하게 돌격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30년 전쟁의 제1차 팔츠-보헤미안 전쟁 이후, 네덜란드 군대 방식의 재빠른 머스킷 교차사격은 당시 일상적인 전술이었는데, 파펜하임은 스웨덴의 머스킷 정면으로 뛰어들어 '''가장 극적인 순간에 용맹한 모습으로 도착하자마자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한다'''.이때 파펜하임을 따랐던 기병은 '''나팔수 단 한 명 뿐이었으며''' 다른 기병들은 전부 지리멸절해 후퇴했다고 한다.
파펜하임의 어이없는 전사 때문에, 아군의 기병대가 멋지게 정시에 나타나 적을 압박했던 구원병 효과는 거꾸로 뒤집혀서 제국군의 사기는 곤두박질 친다.[6] 사서에 따라선 구스타프 2세의 죽음 이후에 파펜하임이 죽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3.4.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사
스웨덴 측에서는, 스몰란드 연대를 지휘하던 프레데릭 스텐복 대령이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된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은 스몰란드 연대를 직접 지휘하기로 했고, 스웨덴-핀란드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스몰란드 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구스타브 2세는 제국군의 중기병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곧바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문제는 구스타브 2세는 지난 러시아-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왼팔에 부상을 입었던 상황이고 그렇기에 갑옷을 입지 않았고 대신 가슴팍에 동판을 달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제국군 중기병들은 구스타프 2세를 쉽게 알아보았다. 구스타브 2세는 왼팔에 총알이 박히자 호위병들을 이끌고 도주했는데 그 과정에서 등에 총탄을 맞고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제국군의 레이피어 공격에 다시한 번 여러군데 부상을 입었고 이 때 등장한 제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7]
스웨덴의 호위병들은 낙마한 국왕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모두 저지당했다. 구스타브 2세는 사살당했으며 시신은 훼손당했다. 스웨덴군은 그의 시신은 찾아왔지만 그의 코트는 몇백년 이후에야 다시 스웨덴에 반환되었는데, 제국군이 의복을 벗겨가서 구스타브 2세는 반쯤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쟁터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의 코트를 훗날 조사해보니 레이피어에 공격 당한 부위가 10군데이며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한 건 등의 총상[8] 이라 하였다. 근데 그 코트에는 구스타브 외 다른 혈흔들이 있었고 화약도 묻어 있었다 한다.
3.5. 스웨덴 중앙군의 궤멸과 작센군의 반격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 상황 속에서 스웨덴 중앙군을 이끌던 닐스 브라헤 장군은 아돌프가 사전에 내린 '''선제사격 금지''' 명령을 상황에 맞게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고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었다. 스웨덴 중앙군은 제국군의 포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진격을 했고 제국군 포대는 사거리에 들어온 중앙군에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중앙군 대열이 붕괴되고 닐스 브라헤도 부상을 입는다. 이때 발렌슈타인이 기병대를 보내 기병대들이 양 옆으로 포위했고 '''스웨덴 중앙군을 포위섬멸해버린다.'''
스웨덴군은 국왕이 전사한 데 이어 중앙군이 붕괴된 상황이라 스웨덴군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작센군을 이끌던 베른하르트가 스웨덴군을 지원했고 제국군의 공세를 자그마치 7번이나 격퇴하며 스웨덴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주었고 후에 총공세에도 가담한다. 재미있는 점은, 독일 작센의 선제후 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 2세의 전사 이전에는 스웨덴 군대의 물자를 약탈(...)하며 도망치려는 계획만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사망한 국왕을 대신하여 총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낭만적으로 본다면 같은 개신교 지도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스웨덴 군이 패전할 경우 자신이 독일의 배신자로서 영향력을 숙청당할 것이 뻔한 운명이었기에, 그나마 막강한 전력을 지닌 스웨덴 군대가 남아있을 때 남의 나라 군대의 지휘권을 이양 받아서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는 설이 더 정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9]
3.6. 분노한 스웨덴군의 총공격,전세가 뒤집히다.
구스타프 2세의 전사가 알려지자, 스웨덴군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비대를 지휘하던 크니프하우젠은 냉정을 찾고 ''''왕께서는(구스타프) 부상만 입었을 뿐이지 지휘를 하고 계신다'는 거짓 정보로''' 부대를 결속시켰으며, 그동안 아껴두고 있던 예비대를 중앙에 투입해 불리하던 전세를 다시 역전시켰다. 제국군의 예비대도 스웨덴군 포대의 공격에 돈좌되었으며 독일지방의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의 선제후 베른하르트는 전사한 스웨덴 국왕 대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10]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뒤늦게 구스타프 왕의 전사소식을 확실히 알게 된 스웨덴군은 분노에 가득찼고''' 중앙부 도량을 도하하는데 성공한 데 이어 뤼첸 북쪽의 둔덕에 위치한 제국군 우익을 스웨덴 기병들이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그곳에 스웨덴 군의 깃발을 꽂는데 성공했다.
이때 포위되게 생긴 제국군은 패닉에 빠졌고 수 많은 병사들이 지휘관들을 무시하고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발렌슈타인도 제국군의 도주행렬에 부상을 입고 만다.''' 제국군의 붕괴를 지켜본 발렌슈타인은 언덕과 모든 포대를 빼앗기자 더이상의 전투는 무익하다 여겨 퇴각을 선택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제국군 대열이 붕괴되어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스웨덴군이 추격해서 섬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루종일 전투를 했기 때문에 스웨덴 병사들은 전투피로가 극에 달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고 결국 추격을 포기했다. 거기다가 스웨덴군의 피해도 사상자만 1만 2000명으로 매우 컸기에 추격 이전에 부대를 재편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4. 결과
뤼첸 전투에서 제국군은 발렌슈타인의 아들과 파펜하임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포함하여, 6000여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했다. 발렌슈타인의 기병대장 피콜로미니도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국가원수인 구스타프 2세를 전사시켜 전략적으로는 승리했다. 반면에, 스웨덴군은 지엽적인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국왕' 구스타프 2세를 잃음으로 인해 앞으로 국가를 운영할 전략 자체가 무너졌다. 결국, 개신교 연합군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지리멸렬하게 패배했으며, 프라하 조약을 통해 30년 전쟁의 3차 전쟁은 일단락 되는 양상이 된다.
한편, 제국군의 사령관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운명 역시 기구했는데 구스타프라는 강력한 적이 사라진 이상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는 이 야심만만한 장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결국 발렌슈타인은 황제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11]
남겨진 스웨덴 군대는 황제의 측근으로 편성한 신참 지휘관들한테도 패배하는 약체 군대로 추락한다. 애초에 신교 동맹이란 것이 현실적으로는 동질감도 전혀 없는 이권동맹인데다, 외국에서 국가원수가 사망한 스웨덴 군의 약체화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같은 가톨릭 동맹임에도 독일제국의 통합을 원치 않았던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참전으로 인하여 30년 전쟁은 더 이어진다. 결국, 30년 전쟁의 결과는 신교도들을 돕기 위해 참전한 프랑스의 압박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다.[12]
[1] 스웨덴 자체가 인구수와 경제력이 낮은 유럽의 변경이었고, 제국군이 계속 스웨덴을 따라다니면서 싸움은 회피하는 지구전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스웨덴 군의 물자와 인내심은 그대로 고갈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앞서 참전한 덴마크도 독일 개신교 주민들과의 경제갈등 때문에 현지주민들을 약탈하다 자멸했던 전적이 있다.[2] 독일 가톨릭 동맹의 명장이었던 틸리 백작의 부하 중의 한명으로, 신사적인 틸리 백작과는 달리 성격이 난폭하고 학살을 벌이는등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3] 당시 구스타브 2세는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요청으로 독일지방의 너무 깊은 곳까지 진격했다가, 발렌슈타인의 지연전에 휘말려 물자를 낭비하며 허송세월 하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군수물자를 전부 낭비하기 전에 한판이라도 싸워보고 싶어 안달나 있었던 원정군대한테 수비군이 병력을 분산시켰다는 정보가 가버린 것.)[4] 결전을 계속 회피하며 지연전을 펼치는 발렌슈타인의 태도에 많은 귀족들이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실제로 평화조약을 추진과 맞물려서 그가 내통하고 있단 소문이 퍼지는 중이었다.[5] 특히 이를 지휘한 구스타브 2세는 스웨덴의 명군으로 일컫어지며, 그의 군제개혁은 세계대전을 거쳐서 현대의 군사편제로도 내려올 정도로 의미있는 개혁이었다.[6]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의 기병대를 이끌고 온 간달프가 해결사로서 멋지게 등장하는 장면에서, 돌격하자마자 일반병사의 화살에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이때의 충격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기병들의 돌격 실패와 지휘관 사망이 흔한 일이었다.[7] 그 제국군은 구스타브에게 누군지 묻자 구스타브는 본인이 스웨덴의 왕이라 하였고, 이에 고통을 덜어주겠다며 머리에 총을 쏴서 그를 사살했다 한다.[8] 이 때문에 아군에게 배신당해 뒤에서 총을 맞은 것이라는 소문이 당시 상당히 떠돌았다.[9] 애초에 이 전쟁의 주요 지도자들끼리는 틈만 나면 동맹군대를 서로 약탈하고 뒤통수 치는등,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 적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애초에 각자 자유도시의 징세권이나 확고한 통일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한 독일지방의 땅따먹기를 노리고 모인 야심가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0] 이미 제국군의 공세를 막느라 작센군의 피해도 큰 상황이었고 베른하르트는 초기에는 공세를 주저했다. 그런데 이때 크니프하우젠이 전쟁지휘권 양도를 조건으로 설득했고 베른하르트는 이에 태도를 돌변해 적극적인 공세에 가담했다.[11] 거기다가 구교 세력은 다른 지휘관들이 대부분 죽은 상황에서 발렌슈타인 혼자만 살아남은 사실을 두고 발렌슈타인이 다른 지휘관들을 배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12] 하지만 이는 신교의 승리라기 보다는, 독일의 통합을 원치 않아서 독일 지방을 종교별로 분열시키고 싶었던 프랑스의 계획이 성공한 결과에 가깝다.(...) 신교들은 대부분이 신흥국가라서 독일을 뜯어먹으러 왔음에도 스웨덴처럼 죄다 전략적인 패배를 되풀이했고, 30년 전쟁의 진정한 승패를 가른 프랑스와 스페인은 막강한 가톨릭 국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