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조약
Westfälischer Friede(베스트팔렌의 조약) | Peace of Westphalia(웨스트팔리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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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국제법의 핵심 규칙들이 15세기와 16세기 내내 발전 되어왔다. 그런 국제법 규칙들의 완성은 1648년에 이루어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영토국가를 근대 국가체제의 초석으로 놓았다.'''
- 한스 모겐소, <국제관계론>
'''1648년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는 확실한 지점은 아니지만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변동을 상징한다.'''
- 파리드 자카리아, <자유의 미래>
1. 개요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1] 와 뮌스터(Münster)[2] 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 이는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국제 협약'''으로 평가되며, 이 조약의 영향으로 민족과 종교, 문화적 구별이 뒤섞인 전근대적 국가관이 허물어지고 외교 주권을 가진 '국민 국가(國民國家, nation state)'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 이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종결되었다.
국제회의였으므로 영어로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이라고 한다. 웨스트팔리아(Westphalia)는 베스트팔렌 지역을 영어식으로 부른 말로, 영어권 문헌을 직역한 사료에서 '웨스트팔리아 협상', '웨스트팔리아 평화 회의' 등의 구문이 나왔을 경우 이를 '베스트팔렌 조약'과 다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같은 말이다.
2. 배경
161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2세[3] 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한 후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자 개신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30년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었으나 독일 영토에 야심을 품고 있던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이 순차적으로 참전하면서 30년에 걸친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다. 결국 유럽 국가들은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648년 개신교 대표들과 가톨릭 대표들이 베스트팔렌 오스나브뤼크에서 만나 이 조약을 체결했다.
3. 체결
이 회담에는 유럽의 16개 나라와 66개의 제국령에서 135명에 달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조약 체결에 참여한 주요 대표는 다음과 같다.
- 황제 측
-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폰 트라우트만스도르프
- 스페인: 3대 페냐란다 공작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 앙투안 브룅
- 그 밖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여러 제후들의 대표자들
- 반황제 측
- 프랑스 왕국: 롱게빌 공작 앙리 2세
- 스웨덴: 요한 옥센셰르나
- 네덜란드: 아드리안 포브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이사크 폴마르
- 그 밖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여러 제후들의 대표자들
- 중재자 역
- 교황청: 파비오 키지
- 베네치아 공화국: 알비세 콘타리니
- 기타
- 스위스: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
왜 한곳에서 한꺼번에 처리를 하지 않고 두 군데에서 따로 체결되었냐면 스웨덴이 프랑스에 상석을 주고 그 밑에 들어가는 형태로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는 점, 또한 양측이 공식적으로 연합하지 않고 각기 별개 주체로서 황제 측 진영과 싸웠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하필 그 도시였나 하면 뮌스터는 가톨릭교도가 대다수인 반면 오스나브뤼크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가 각각 절반씩을 차지해서였다. 또한 이 두 도시는 전쟁에 직접 휩쓸리지 않아 대표단이 머무를 수 있을 만큼 식량 사정도 좋았다.
다만 이 회담은 정말 오래 끌었다. 회담에 참석하는 대표들의 좌석 순서를 결정하고 의전을 규정하며 용어의 정의를 정하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고,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와 전쟁을 했는지"는 1년이 지나고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게다가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전투에서 승리한 쪽이 계속 요구조건을 올리기 일쑤였다. 스웨덴과 프랑스가 결정적인 우세를 확립한 1646년 이후에야 비로소 회담이 급격하게 진전, 체결을 맞이하게 된다.
4. 결과 및 내용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알자스의 준트가우 지방을 차지했다. 메츠, 툴, 베르됭 3개의 주교령 지역은 1552년 샹보르 조약으로 프랑스가 점유하기 시작했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의 영유권이 공인되었다.1. 프랑스는 알자스의 중남부 지방을 획득하며, 메스, 투르, 베르됭 주교령[4]
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2. 스웨덴은 포메라니아 서쪽 지역과 브레멘 주교의 영지 등을 얻는다.
3. 브란덴부르크는 포메라니아 동쪽 지역을 얻는다.
4. 바이에른, 작센 역시 영토를 조금씩 획득한다.
5.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
6. 1555년 이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내용을 재차 확인하며 칼뱅파에게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
7. 독일의 제후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갖는다.
8. 스웨덴은 오데르 강, 엘베 강, 배저 강 지역의 지배권을 갖는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적지 않은 역사 관련 문서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가 알자스-로렌 전지역 또는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알자스의 남부 지역(준트가우)을 획득했고, 1552년 샹보르 조약으로 차지한 로렌의 3주교령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결과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의 약 40%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를 포함한 북(北) 알자스와 로렌의 3/4를 차지하는 로트링겐 공국[5] 은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이 종주권을 갖고 있었다. 알자스 전체는 1697년 대동맹 전쟁 때 얻게 되었고 로트링겐(로렌) 공국은 로트링겐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는 것을 승인하는 조건로 1735년 빈 조약에 의해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양도되었다가 그가 사망한 후 1766년에 프랑스로 합병했다.
스웨덴은 오데르 강, 엘베 강, 배저 강 지역의 지배권을 얻었다.
스위스, 네덜란드는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신성 로마제국의 제후들의 정치적 독립권이 인정되어 독일은 통치권력이 각 제후들에게 나눠진 분권적 현상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루터교회를 정식교파로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내용이 다시금 확인되었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종파였던 칼뱅파가 루터파와 동일하게 인정되어 가톨릭과 평등한 종교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5. 의의와 영향
이 조약은 근대적인 개념의 외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 관련 국가들이 참석한 외교 회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조약인 것. 또한 중부 유럽에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 질서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상호 독립적인 주권국가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외국과의 동맹 등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 조약을 근대 국제법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국제법은 꾸준히 발전했다.[6]
이 외에도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으며, 교황이 황제 위에 군림하던 중세적 질서를 그 틀까지 완벽하게 끝장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에 이르러 일반 민중의 생활규범이 종교적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를 달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 조약 이후로 종교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유럽 전체 같은 질서를 요구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세력 균형이 유럽의 외교를 결정짓는 잣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했으며, 특히 네덜란드는 이후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상업의 발달을 통해 100여년 간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는 남부 알자스 등의 영토를 얻었고,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마당에 홀로 큰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호재가 겹쳐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좀 더 넓게 보면 나폴레옹 전쟁 무렵까지)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한다. 스웨덴 역시 영토를 포함한 여러 이익을 얻어 북유럽의 패자가 되었다.
카를 5세 이래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스페인은 이 시점에서 완벽히 몰락하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은 제후들의 주권이 보장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해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분리시키는 시초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실상의 세습왕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는 이 시점에서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수 상실하게 되었고,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지역에 집중하면서 확장의 방향을 이탈리아와 동유럽으로 돌렸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를 대신하여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브란덴부르크 지역에서 이후 독일 제국의 전신이 되는, 신교 대제후이던 호엔츨레른 가의 프로이센이 새로이 부상했다. 이러한 이유들과 30년 전쟁을 통해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1/3이 쓸려나간 독일 지역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하기 전까지 이리저리 치이는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독일어권에 대한 무시는 더욱 심해졌다.
6. 기타
비정상회담에서 이 조약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동성결혼, 매춘, 대마초, 안락사 등이 합법인데 그 배경에는 이 조약으로 얻어진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네덜란드란 국가의 기본 바탕이 되었고 이 정신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1] 현재는 니더작센 주로 편입됨.[2] 현재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로 편입됨.[3] 1617년 당시 페르디난트 2세는 아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4] 이 3 주교령 지역은 1552년 샹보르 조약 이후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었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유권이 인정되었다. 이로서 프랑스는 로렌(로트링겐) 지역의 약 1/4을 차지하게 된다. 로렌 지역의 나머지 3/4을 차지하는 로트링겐 공국은 1735년 빈 조약에 의해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前 폴란드 국왕이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의 영지를 거쳐 1766년, 그의 사망 이후 프랑스로 귀속되었다.[5] 로렌 지역의 약 3/4을 차지한다. 나머지 1/4은 메츠, 툴, 베르됭 주교령 지역.[6]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국제법은 고대 로마의 만민법(Jus gentium)이다. 이는 시민법(Jus civile)와 대비되는 법으로 이민족 간의 또는 로마와 이민족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만민법은 로마의 국내법이고,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오늘날의 국제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특징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만민법을 근대 국제법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고대 로마의 만민법에 의한 법질서가 중세를 거치면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