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제 마이트너

 

'''Lise Meitner'''
[image]
'''본명'''
Elise "Lise" Meitner
엘리제 "리제" 마이트너
'''출생'''
1878년 11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68년 10월 27일, 영국 케임브리지 요양소
'''국적'''
오스트리아스웨덴
'''학력'''
빈 대학교
'''소속'''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베를린 대학교
스톡홀름 대학교
'''수상'''
막스플랑크 메달(1949)
1. 개요
2. 업적
3. 마이트너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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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스웨덴[1] 물리학자.

2. 업적


β선의 스펙트럼, 방사성되튐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중성자로 충격을 준 우라늄에서 바륨을 얻자 이를 핵분열이라 명명했다. 오토 한과 공동연구하며 그 구조와 존재가능성, 수치를 계산해내어 핵분열 연구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생전에 동료 연구자에게 배신당하고 연구에 대한 공헌까지 부정당한 일 때문에, 거의 같은 처지에 있던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함께 과학계의 남성중심적 처사에 희생당한 여성 과학자의 예로 자주 거론된다.

3. 마이트너의 일생


변호사인 아버지가 마이트너의 재능을 존중해 준 덕분에 계속 공부할 수 있었지만, 상급 학교 진학 차별 때문에 김나지움에 진학하지 못하고 검정고시에 해당하는 고교 졸업 자격시험을 치러야 했다. 1901년(23살) 빈 대학교에 입학, 1905년 논문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최우등으로 통과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네 번째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에 오타로 11월 7일이라 기록되고, 그 후 '퀴리 부인과 생일이 똑같은 여성 과학자' 로 알려지면서 영영 원래 생일을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자 오토 한(1879~1968)과 공동 연구를 시작했지만, 연구소장은 청소부를 제외한 여성의 연구소 출입을 금했다. 별도 출입구가 있는 지하실 목공소에 실험실을 꾸며야 했다.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연이어 내자 연구소장은 비로소 여성 화장실을 설치하고 연구소 출입도 허가했다. 1913년부터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서 연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간호사로 일했으며, 1918년 91번 원소 프로탁티늄을 발견하고 1924년 원자선이 방출될 때 베타선이 감마선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을 증명했다. 1924-25년에는 프로트악티늄에 관한 연구로 오토 한과 함께 노벨화학상 후보로 추천됐다.
1926년에야 정교수가 아닌 ‘별정직’ 여성 교수가 됐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33년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1935년 초에 핵분열로 나아갈 수 있는 실험을 시작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38년 스웨덴으로 떠나 노벨 연구소에서 일했지만 제대로 연구할만한 여건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이트너와 한, 슈트라스만 등은 서신교환을 통해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 성과를 냈다. 화학자였던 한과 슈트라스만이 화학적 실험을 하고 물리학자인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가 물리학적인 근거와 이론을 보충하는 식.
1938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스톡흘름의 교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독일에서 온 한 편지를 받게 된다. 한과 슈트라스만이 보낸 것이었는데 우라늄에 중성자를 쐈더니 바륨란타넘이 생성되었고 이것 좀 물리학적으로 규명해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고 난 후 휴가고 뭐고 없어졌다. 다음 날 새벽부터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이 실험결과와 수치를 두고 토론을 했으며 '우라늄의 원자핵이 중성자를 얻어 질량이 비슷한 바륨과 란타넘의 원자핵으로 분열한 것이며, 그러한 분열 조각에서 방사선이 나온다'는 답장을 했다. 프리슈는 바로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스승인 닐스 보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이트너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1938년 12월 22일 한과 슈트라스만은 추가적인 화학실험을 통한 논문을 썼고 1939년 1월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그 실험을 물리학적으로 규명한 논문을 냈는데 여기서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945년 오토 한은 우라늄 핵분열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프리슈는 늦게 참여했다 쳐도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까지 제외된 것은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오토 한은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은 후부터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의 공로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발언들을 했는데, 특히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난 뒤에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것을 두고 "마이트너가 떠나고 나서야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그녀는 방해가 됐었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서 그녀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줬다. 한때, 같은 동료로서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던 사이였음에도. 그녀는 친구에게 "내가 오토에게 지워져야 하는 과거가 된 것이 너무나 슬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1962년 괴팅겐 대학에서 도로테아 슐뢰처(독일 최초의 여성박사) 메달을, 1966년 미국 원자에너지청에서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았다. 핵분열 연구를 함께 했었던 한, 슈트라스만과 함께 수상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다. “새로 열린 에너지원이 단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되면 좋겠다. 나는 원자폭탄 제작이 성공하지 않기를 희망했지만, 성공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자꾸 생겼다. 내 두려움은 들어맞았다.” 마이트너는 90세 생일을 약 3주 앞두고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나 영국 남부의 교회묘지에 묻혔다. 비슷한 연배였던 오토 한은 3달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92년, 독일 다름슈타트 중이온연구소에서 합성되고 증명된 109번째 원소가 마이트너륨으로 명명됐다.
[1] 오랜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지만, 안슐루스 당시 유대인이란 이유로 망명하고 전후 1949년에 스웨덴 국적을 취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