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스 보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image]
1921년

1922년

1923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로버트 밀리컨
'''이름'''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Niels Henrik David Bohr)
'''출생'''
1885년 10월 7일, 덴마크 코펜하겐
'''사망'''
1962년 11월 18일 (향년 77년 41일)
'''국적'''
덴마크 [image]
'''학력'''
가멜홀름 그래머 스쿨[1] (졸업) (-1903년)
코펜하겐 대학교 M.S.(석사) (1903-1909년)
코펜하겐 대학교 Ph.D(박사) (1909-191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직업'''
물리학자
'''배우자'''
Margrethe Nørlund
'''자녀'''
오게 닐스 보어,
에른스트 보어
'''신체'''

'''종교'''
무종교 (무신론)[2]
'''서명'''
[image]
1. 개요
2. 몇 가지 일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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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image]
닐스 보어의 개인 문장 [3]
덴마크물리학자.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수장 격이었던 인물이다.
수소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면서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가설(보어 모델)[4]을 내놓아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론을 도입했기 때문에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11년에 트리니티 칼리지로 가서 J.J 톰슨에게서 지도를 받았으나 보어의 영어가 서툴렀고 톰슨의 무관심함으로 맨체스터 대학교의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가게 된다. 여기서 당시 최신 원자 모형이었던 러더퍼드 모형에 대하여 접하게 되면서 1913년에 자신의 원자 모형을 발표하게 된다.
큰 키, 큰 머리로 눈에 띄었다는 모양이다. 사진 중에는 배우 존 트라볼타를 연상시키는 사진도 있다. 운동도 즐기는 스포츠맨 타입이나 꽤 수줍어 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26세 때의 그를 본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동료는 "소년 같다"고 평하기도. 중년 때는 후학들에게 꽤나 우러러 보였던 모양. 제자인 오토 프리슈[5]는 편지에 보어와 만났던 일화를 쓰면서 "신이 내 코트 단추를 만졌다"라고까지 했고, 파인만은 회의장에서 보어를 만났을 때를 "거물들에게도 보어는 위대한 신이었다"라고 회상했다.[6][7]
지금도 코펜하겐에는 보어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덴마크에서 유명한 과학자다보니 집도 근사한데, 덴마크 맥주회사인 칼스버그가 기부해줬다. 거기에 수십 년간의 관리비까지 그냥 지급해주어서 그의 후손들은 편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그의 아들 오게 보어도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평생 보어 연구소에서 소장 자리를 맡았다. 오게의 아들도 물리학자이다.
그가 원자의 구조 외에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모든 국가에게 개방정책 및 공동 관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원자력의 폐쇄적 이용에 따른 핵무기 무한 경쟁시대를 우려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인들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예견대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는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처칠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지금 정치를 하는 건가, 과학을 하는 건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여부는 정치적인 문제인데 보어가 과학적 입장만 고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과학이 아니고 정치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107번 원소 '보륨'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2. 몇 가지 일화들


  • 대학 물리학 수업중에 한 교수가 "기압계를 가지고 고층 빌딩의 높이를 측정하라."라는 문제를 내었다. 교수의 예상 답안은 빌딩 옥상에서의 기압과 지상에서의 기압 차를 이용해 측정하는 답이었지만, 대학생이던 보어는 "기압계에 줄을 단 다음, 기압계를 빌딩 아래로 늘어뜨려 그 줄의 길이를 잰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오지 않는 보어에 대해 교수는 화가 났고, 중재에 나선 다른 물리학 교수가 6분 안에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안을 내놓으면 정답 처리하겠다고 했다. 학생은 5분 동안 조용히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중재자는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말에 학생은 해답은 여러 개 있는데 어떤 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서두르라는 말을 들은 학생은 몇 개의 답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옥상 꼭대기에서 기압계를 떨어뜨려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을 잽니다. 건물의 높이는 $$0.5gt^2$$ 의 공식으로 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압계는 박살이 나겠지요.
다음으로 해가 떠 있다면 기압계의 높이를 측정하고 다시 그걸 땅에 세워서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높이를 잽니다. 그런 뒤 건물 그림자의 길이를 재면 단순한 비율 계산만으로 건물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훨씬 과학적으로 하고 싶다면 기압계에 짧은 줄을 묶고 진자처럼 흔듭니다. 진자 운동은 먼저 땅에서 하고 다음으로 건물 옥상에서 합니다. 높이는 진자의 주기 $$T=2{\pi}(\frac{l}{g})^{\textstyle\frac{1}{2}}$$를 사용하여 계산됩니다.
건물 외부에 비상계단이 있다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기압계를 몇 개 쌓으면 건물 높이만큼 되는지 건물벽에 대 보면서 올라갑니다. 그 숫자를 확인한 후 기압계의 길이를 곱하면 됩니다.
물론 따분하고 진부한 방식으로 하고 싶다면 기압계로 옥상의 기압과 땅 위의 기압을 측정한 다음 밀리바를 미터로 나누어도 건물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학교가 바라던 정답 ) 하지만 저희는 기존의 사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라는 훈계를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위실 문을 두드려 '새롭고 멋진 기압계를 갖고 싶으면 이걸 드릴 테니까 건물 높이를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8]||
사실 이 일화는 거짓이다. 링크 이야기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 실존 인물을 토대로 삼은 듯.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고 말하자 보어는 이렇게 답했다. "아인슈타인 씨, 신에게 그만 좀 이래라저래라 하시오(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 원래 의미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는지는 우리가 상관할 수 없다쯤이 된다. 물론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그전에도 친한 사이였다. 혹은 '과학을 논하면서 신을 들먹이지 말라' 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 그는 유대계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독일에게 점령당한 덴마크에서 곧 수용소로 잡혀갈 입장이었다[9]. 가까스로 스웨덴으로 빠져나간 다음 영국으로 도망쳤는데, 스웨덴에서 그를 데리러 온 비행기는 민간용 비행기가 아닌 민항기처럼 색을 바꾼 폭격기 모스키토였다. 보어는 덩치가 컸기 때문에 비행기 중에서도 폭탄 저장고 위치에 자리잡았고, 비상시를 대비해 낙하산과 조종사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무전기가 달린 헬멧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그는 머리가 너무 커서 그 헬멧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결국 조종사가 "고도가 높아지니 산소마스크를 쓰세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기에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산소부족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당시 조종사는 보어가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더 흠좀무한 사실은 조종사들이 만약에 구출작전이 실패하여 나치에 체포될 것 같으면 보어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산소마스크를 쓰지 못한 이유가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못들었다는 버전과 영어를 못해서라는 버전도 있다. 그러나 보어는 영국에서 러더퍼드의 제자로 있었으니 영어를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정말 못했다면 그런 중요한 임무에 통역해줄 사람을 안 태워갔을 리가 없으니 후자는 신빙성이 없다.
  • 보어는 제임스 프랑크와 막스 폰 라우에의 노벨상 메달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위의 상황에서 두 사람과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독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왕수에 녹여서는 살던 집 찬장에 놓고 덴마크를 탈출했다. 집을 뒤지던 독일군들은 왕수가 든 병은 건드리지 않았고, 종전 후 다시 환원시켜 금덩이로 만들었으며 사정을 알게 된 협회는 이를 다시 메달로 제작해줬다.
  • 1941년 9월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만난 사건은 과학사가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만남에서 오간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다, 독일의 핵무기 개발능력이 없으니 연합국의 개발도 취소해 달라 등등 다양한 설이 있다. 딱 한 가지, 이 만남 이후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가 소원해진 것만은 사실. 이전에는 형제처럼 지낼 만큼 친한 사이였다. 이 사건을 다룬 연극 코펜하겐이 있다.
  • 보어와 그의 제자들은 서부영화를 매우 좋아했었는지 연구 중 지치면 서부영화를 보면서 쉬었다고 한다. 보던 중에 그들은 영화광들이 흔히 하는 의문이 생겼다. '왜 악당이 불의의 기습을 거는데 선역이 먼저 총을 쏴 이기게 될까?' 누군가 '의식적 기습보다 무의식적 반응이 더 빠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들은 물총으로 즉시 실험에 나섰다. 선역은 보어, 악역은 당시 학생이었던 조지 가모프. 가모프가 물총으로 기습을 걸었고 결과는 보어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통해 그들은 가설이 성공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오오.
  • 보어는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이후 몇 년간 논문을 쓸 때는 보어가 말하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받아 적었다고 한다. 편지도 쓰고 또 고치고 또 고치기를 잘해 절친한 물리학자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에게 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파울리가 편지의 최종교정본이 오면 그 때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글쓰는 재능이 좀 없었던 듯. 보어가 논문을 쓰며 "문장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려워하자 물리학자 폴 디랙이 "나는 문장을 끝낼 줄 모르면 시작하지 말라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쏘아붙였다. 물론 악의가 담긴 말은 아니었고 디랙이 원래 좀 이런 사람이었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Mathematics and War에서 보면 수학을 끔찍이 못했다는 주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10], 진지하지 않은 토론 중에서 나왔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 있다.[11]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학을 못했다면 수학적 접근법, 수학적 모델을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서양의 근현대 과학자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 심취한 사람이다. 상보성 원리는 주역의 음양이론을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태극을 아예 가문의 문장으로서 채택하고는 노벨상 타러 갈 때 옷에 팔괘도까지 그려 넣어 갈 정도였다. [12]
  • 동생 하랄트 보어(Harald Bohr, 1887-1951)는 수학자로, 젊은 시절에는 축구 선수(골키퍼)로 뛰면서 1908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하랄트는 수학자로서는 꽤 명망 높은 인물이다. 어렸을 적에는 형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서 형을 많이 밟아줬던 관계로 닐스가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크고 나니 학문적 명성이 아주 비교가 안 되게 역전돼 버렸지만...

[1] 가멜홀름 라틴어 학교로 불리기도했다.[2] 종교적 믿음도 없을 뿐더러 신의 계시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종교를 싫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루터회 신자였다. [3] 태극문장 맞다. 아예 문장 정의문이 '''백색 배경,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된 태극도'''(Argent, a taijitu Gules and Sable)라고 되어 있다.[4] 원자핵 주변을 태양계처럼 전자 입자가 도는 형태.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 '구름'처럼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원자의 기본 구조로 자리잡았다.[5]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이고 그녀와 함께 핵분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6] 교과서에서 원자 모형을 제시한 공로만 나오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잘 모르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비견할 만한 물리학의 거장이다.[7] 정작 파인만 본인은 보어 부자(父子)와 아이디어를 논의하면서 아니다 싶으면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라고 말해서 이 위대한 신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흠좀무. 보어는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저 친구를 눈여겨 봐 둬라. 내 말에 '네, 네.'밖에 할 줄 모르는 얼간이들은 신경쓰지 말고."[8] 이 문답은 드라마 《카이스트》에도 나온다.[9] 당시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짐이 바로 유대인이다!"라는 패기 넘치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자국 내 유대인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나라가 점령당하여 모든 실권을 잃은 상황이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일국의 왕이 나섰다고 해서 귀담아 들을 인간들도 아니고.[10] "Indeed, one contributor to this summer's newspaper debates in Denmark has ever claimed ... that, in particular, he was extremely bad at mathematics."[11] "He displayed great abilities in mathematics and science.", "During his last two years at school Niels specialised in mathematics and physics."[12] 의심된다면 지금 "bohr taijitu" 를 구글링 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