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왜고너
'''George Richard "Rick" Wagoner Jr.'''
1953년 2월 9일 ~
1. 개요
조지 리처드 왜고너 쥬니어, 줄여서 릭 왜고너는 미국의 기업인이다.
2. 생애
1953년에 미국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서 태어난 왜고너는 버지니아의 리치몬드(Richmond)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존 랜들프 터커 고등학교(John Randolph Tucker High School)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1975년에 문학사(Bachelor of Arts)를 수여, 졸업했고, 델타 타우 델타 사교협회(Delta Tau Delta Fraternity)의 일원을 지냈다. 나아가 하버드 경영대학교(Harvard Business School)에 입학해 1977년에 MBA 학위를 따 냈다. 하버드 경영대를 졸업한 뒤 제너럴 모터스에 입사했다.
왜고너는 GM 재무부(treasurer's office)의 분석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1981년부터는 브라질 지부에 회계담당자(treasurer)로 임명되어 경영감독으로서 경력을 마무리했다. 1992년부터는 GM의 CFO[1] 로, 1994년부터는 GM 북미지부의 부회장으로 승진했으며 1998년에 잭 스미스(Jack Smith)의 후임으로서 회장 겸 CPO[2] 자리에 올랐다. 나아가 2000년 6월에는 GM의 회장 및 CEO로 승진했다.
왜고너는 GM 본부의 회장으로서 잭 스미스의 경영 방침을 이어받아, 1970년대 말부터 GM의 체력을 갉아먹어 온 재무부 주도의 방만한 숫자놀음식 회사 경영과 이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바로잡고자 노력해 왔다. 2001년에 자동차 전문 경영인이었던 밥 루츠[3][4] 를 부회장으로 스카웃한 행보가 단적인 예로, 밥 루츠의 회사 개혁을 밀어 주면서 "숫자놀음꾼" 성향의 임원들이 제품 개발에 지나치게 간섭하던 폐해를 줄여 나갔으며, 이를 토대로 고객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양질의 제품들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갔다. 한편, 북미 지부의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자 2005년 4월에는 북미 지부 회장이었던 밥 루츠,[5] 그리고 게리 카우거(Gary Cowger)로부터 북미 지부의 경영권을 되돌려받았고, 연이은 6월에는 2008년까지 당시 GM 북미지부 인력의 17%, 약 2만 5천명을 구조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의 미국 경제위기로 인해 회사 전반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고,[6] 릭 왜고너가 추진해온 회사 개혁도 회사가 몰락하는 속도에 비해 더뎠기 때문에 결국 2009년에 파산을 선언, 나아가 그 책임으로 2009년 3월 29일에 GM의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7][8]
영국 BBC에 따르면 당시 사내 임원들과 언론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하며, 전문가들도 왜고너가 추진한 각종 비용절감책과 경영 방식의 개선은 물론 제품들의 품질 개선까지 달성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파산선언 후 구조조정과 같은 큰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상당히 머뭇거리는 성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BBC에서도 GM 회생으로 나아나는 데 필요한 강한 결단력이 없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밥 루츠 역시 자서전들을 통해 왜고너를 높게 평가하며 자신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대대적으로 변호하고 지원해 준 장본인이라고 감사를 평했다.
가족으로는 배우자와 아들 셋을 두고 있으며, 제너럴 모터스의 경영진 경력 외에도 듀크 대학교와 디트로이트 컨트리 데이 스쿨(Detroit Country Day School) 신탁관리 이사회의 일원이자 하버드 경영대 자문단 이사 등을 비롯한 각종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지내고 있다.
3. 둘러보기
[1] 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재무관리자.[2] chief product officer.[3] 1970년대까지 GM에 있다가 BMW, 포드 유럽지부, 크라이슬러를 거쳐 간 경영인으로, '고객이 우선인 제품'을 구호로 외쳐 왔다.[4] 밥 루츠를 스카웃할 당시, 루츠는 당시 GM의 신차였던 폰티악 아즈텍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는데, 오히려 릭 왜고너가 본인도 아즈텍에 실망한 참이라고 루츠를 지지해주었다.# 이후에도 의견차이로 마찰이 있을지언정, 수치상의 목표에 집착하느라 신제품을 망치는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루츠의 회사 개혁을 밀어주며 제품개발부서를 서서히 바로잡을 수 있었다.[5] 대신 루츠는 2005년 안팎으로 전 세계 지부들 간의 긴밀한 협력관계와 양질의 부품 공용화 방식, 그리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개발에 집중했다.[6] 참고로 당시 GM의 금융사업부는 오래 전부터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대출에 참여하고 있었고, GM의 승용차 사업이 한동안 적자를 볼 때도 트럭 및 SUV 부서와 서브프라임 때문에 한동안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주택담보대출 사업도 흔들렸고, 트럭 부서도 SUV와 트럭 수요의 급감 때문에 흔들리면서 GM의 파산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7] 한편, 밥 루츠는 당시 GM을 자신이 회장이 되었다고 해도 몰락을 피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지해 준 왜고너를 대체로 높게 평가해 주었다.[8] 참고로 미국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러 갔을 때, 당시 미국 빅 3 메이커의 경영진이었던 앨런 멀럴리, 밥 나르델리와 함께 전용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밥 루츠는 디트로이트 공항 및 항공사의 서비스가 형편없어 어쩔 수 없이 고른 선택이었으며, 미국 정부에는 어떻게 오더라도 트집을 잡을 정부 인사들이 한 가득이었다며 자서전에서 왜고너를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