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1. 개요
'''Subprime Mortgage Crisis'''경제 후퇴를 극복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이자율을 그때그때 조정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며, 침체된 기업 투자를 상쇄할 만한 가계지출 증가를 유도하기 위해서 앨런 그린스펀 FED 의장이 나스닥 버블 대신 '''주택 버블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CDO 시장의 확대와 그에 따른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대출의 확대, 미국 부동산 버블로부터 시작된 2007년에 발생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최대, 최악의 금융 위기.'''[1] 대침체, 양극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2010년대의 모든 경제 위기와 관련된 일들이 이 사태에서 비롯되었다.'''
서브프라임(Subprime)은 은행의 고객 분류 등급 중 비우량 대출자(영어에서 'Sub'는 보통 '아래'라는 의미를 갖는 접사이고 'Prime이 '우수한'의 뜻으로 신용도가 높은 고객을 뜻한다)를 뜻하며, 모기지(Mortgage)는 주택담보대출을 뜻한다.[2]
2. 발생 과정
경제학 용어가 생소한 사람이 본 문서를 읽으면 약간 읽기 힘들 수도 있어 미리 간단하고 피상적으로만 요약하였다.
더 쉽게 말해서 이렇다.닷컴버블 붕괴와 아프간/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저금리 정책을 편다. 그로 인해 대출이 늘고 주택 가격이 급상승했다. 주택 가격의 인상 속도가 이자율보다 높아지자, 사람들은 '''"대출을 못 갚는 일이 생기더라도 담보인 주택을 팔아버리면 돈을 벌 수 있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은행도 돈을 갚을 능력이 거의 없는 신용불량자에 가까운 사람들까지 대출을 해줘서 집을 사게 만들었다. 하지만 '''집을 살 사람(대출할 사람)이 줄어들자 집값은 폭락했다.''' 집으로 대출을 갚을 수 없자,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파산한다.[3]
이를 시작으로 돈을 빌려준 은행과 대출 증서를 기초로 한 투자 상품도 전부 망했고, 그로 인해 달러화의 가치와 미국 경제가 망하여, 연쇄적으로 세계 경제가 망했다.
대한민국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에서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규제를 대폭 완화하자, 카드 회사들이 심지어 신용불량자한테까지 신용카드를 발급하였고, 이후 카드 사용액을 갚지 못한 개인 파산이 급증하면서 2004년 카드대란이 터지고, 경제 위기가 엄습한 것과 똑같은 과정이다. 단지 아이템이 달랐을 뿐.빚이 집값보다 낮자, 사람들이 빚을 내서 집을 사기 시작했고 집값이 폭락하자 다 망했다.
2.1. 연준의 저금리 정책
2001년에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약자 Fed. '''미국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의 금융정책기구)의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의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투자자는 안전하면서도 수익이 보장된 투자처로서 미국 국채를 이용해 수익을 얻었다. 그러나 Fed, 특히 그린스펀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이 말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린스펀이 미국 국채에 대한 정책을 바꿀 것을 시사한 것이었고 쉽게 말해서 이런 거다.연방 공개 시장 위원회는 충분한 경제적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는 이상, 매우 협조적인/'''조절적인''' 정책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The FOMC[4]
stands prepared to maintain a highly accommodative stance of policy for as long as needed to promote satisfactory economic performance.
'''이제는 여러분이 미국 국채로 돈 따먹는 거를 못 봐주니까, 다른 데로 가시오.'''
2.2. 부채담보부증권
이 발언 직후, 전 세계의 투자은행과 펀드매니저들은 새로운 저위험 고소득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CDO(부채담보부증권)이었다. 당시 CDO는 40% 정도의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있었고, 90% 이상의 채무자들은 성실하게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CDO는 매우 이상적인 투자처였다. 애초에 집을 담보로 삼는 모기지는 갚지 않으면 곧바로 노숙자가 되기에 모기지를 갚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CDO는 간단하게 말하면 여러 사람의 주택담보대출을 모아서 만든 증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은행은 당신의 저당권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함과 동시에 유동성을 확보한다. 은행은 손쉽게 원금을 확보하게 된다. 당신이 대출금을 은행에 갚으면, 그 이자가 투자자에게 가는 구조였다. 은행은 더욱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다른 파생에 투자하고, 투자자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5]
당시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은 '프라임(Prime)' 대출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Verified Income, Verified Assets(확실한 수입, 확실한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주택담보대출로서, 회수율이 매우 높지만, 새로운 고객은 매우 적은 타입의 대출 방식이었다.
잠시 미국의 대출 등급을 이야기하자면
등급이 낮을수록 파산 위험이 커지나, 대신 높은 이율을 적용한다.
물론 프라임 대출을 모아 만든 CDO는 매우 견실했고, 꾸준한 수입과 안정성을 동시에 약속하고 있었다. 더 이상 프라임 대출을 할 만한 사람이 고갈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2.3. 재앙의 시작
2003년이 되자, 거의 모든 프라임 대출 대상자는 이미 모기지를 쓰고 있거나 쓸 생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은행은 새로운 CDO를 새로운 투자자에게 발급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객이 필요했다.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은행은 프라임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대출인 'Subprime' 대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모든 재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서브프라임 대출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때, 은행들은 "Verified Income, Verified Assets(수입 증명, 자산 증명)"를 조금 완화해, "Stated Income, Verified Assets(수입 명시, 자산 증명)"로 완화했다가, "'''Stated Income, Stated Assets(수입 명시, 자산 명시)'''"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바뀐 규정에 따르면, 새 고객은 자신의 금융 재산을 증명할 엄청난 양의 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는 빚을 갚을 만한 충분한 수입이 있다고 서류에 명시하기만 하면 되었고, 은행은 고객의 재산 목록을 조사하지 않고서도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신흥 국가들의 자금들마저 CDO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이제는 완화된 기준으로도 부족하게 되었다. 더욱 많은 모기지가 필요했다. 그러자 새로운 모기지가 절실히 필요했던 은행들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다. 그 여파는 생각지도 않고... 마침내 No Income, No Asset(NINA) 대출이 시장에 나왔다. 이 대출 상품은 고객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신청만 하면 재산이 없어도, 수입이 없어도 은행은 대출을 해주었다.''' 물론 은행이 미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배짱을 부려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부의 한 가구 한 주택 정책[6] 기조 하에 연준은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하고 있었고, 은행들도 계속 저금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한 가구 한 주택의 기조 때문에 주택 시장에 붐이 일어서 주택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이 집을 사는데, 그 사는 집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집값은 계속 상승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현재 집값의 100%까지 빌려준다 하더라도 집값이 오른다면 담보 가치가 더 높은 것이므로 은행들은 미친 듯이 돈을 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은행들이 얼마나 대출 심사를 대충 했는지 보여주는 일화 중에 기절초풍할 게 하나 있다. 한창 NINA 대출이 성행할 때, 오하이오에서는 죽은 사람 23명이 대출을 받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도용한 것인데, 은행은 상대방이 본인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 빅쇼트에서도 기르는 애완견 이름으로 돈을 빌린 케이스가 나온다.
또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상품의 또 다른 복병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이자. 계약 체결 이후 처음 1-2년간은 비교적 합리적인 6% 정도의 금리로 상환을 하다가, 티저 기간이 만료되면 갑자기 복리 12~20%급으로 폭등한다. 6%와 20%의 차이가 얼마 안 될 것 같지만 억 단위의 담보 대출인 만큼 한 달에 내야 하는 돈이 몇 배로 뛰니 채무를 이행하던 사람들도 튈 수밖에 없었던 것.
버블이 터지기 얼마 전에 나와서 크게 주목 받진 못했지만 마이너스 대출 상품[7] 도 나왔었다! 이건 월 납입금이 이자보다도 작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잔금이 늘어나는 미친 물건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수어사이드 모기지(suicide mortgage). 당연히 단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에게나 적합한 상품이었고, 은행들도 “집값은 항상 오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품들을 팔 수 있었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은행원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CDO 자체가 워낙 새로운 투자법이라는 문제였다. 아직 깊게 연구되지 않은 투자법이었고, 은행원들이 가지고 있던 컴퓨터 모델은 모두 오래된 자료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Prime 시절에 모은 데이터에 근거해 작성되었다.
당연히 그런 모델이 서브프라임을 이용한 CDO에는 맞지 않았지만, 은행원은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계속 믿었다. 시뮬레이션은 CDO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투자자들의 심리적 근거가 되었고, 실제로도 서브프라임의 성적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서브프라임 계층의 고객들도 프라임 계층 같이 그럭저럭 돈을 갚아나가서, 프라임만큼은 아니지만 60~80%의 서브프라임 고객들은 돈을 성실히 갚고 있었다.[8][9]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1차 기초 자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MBS를 기초 자산으로 CDO-0를 만들고, CDO-0과 CDO-0의 기초 자산인 MBS를 기초로 CDO-1을, 그리고 이런 식으로 CDO-2, CDO-3... 같이 기초 자산의 족보가 뒤엉킨 파생 상품에 대한 위험 분석과 관리가 슈퍼컴퓨터로도 불가능할 지경에 다다랐다는 걸 말이다.[10]
2.4. 전조
연준에서도 이러한 상황으로 주택 가격이 이례적인 속도로 오르고 있음을 미리 인식하긴 하였다. 2004년 1월 그린스펀은 투자자들이 리스크를 과소 평가하고 있는 현 상황을 언급하며 자산 가격이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고 언급하였으나, 아직은 버블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이미 버블은 커지고 있었지만.
2005년 6월, 이제는 주택 가격의 버블이 존재한다고 보는 측과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버블이 있더라도 리스크가 관리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 양쪽으로 나누어졌다. 버블이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주택 가격이 임대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음을 지적했지만 반대로 그런 상승에 입지 등의 이유가 있으며, 주택 가격이 설령 잘못되었더라도 연준의 정책으로 충격을 조절할 수 있음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리스크를 과소평가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동년, 잭슨 홀 컨퍼런스에서 모기지 리스크를 주장한 학자들이 몇 명 있었으나 시장은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주택 가격은 2004년에 16%, 2005년에 15% 상승했다.
그러나 2007년,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2006년에 미국 주택 시장의 거품은 최고조에 도달했다. 거품 규모는 약 2조 달러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언제, 어떻게 정확히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주택 가격이 너무 높다는 것을 차차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당시 서브프라임 계층의 사람들은 '''만약 일이 없다면, 집을 팔아서 돈을 갚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빚을 갚았다. 원래 미국의 담보 시스템은, 대출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힌 해당 부동산만 포기하면 된다. 즉 집만 날리면 되고 설령 대출금이 남아도 마저 갚을 필요 없다. 은행이 고객의 다른 자산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는 시스템이므로, 어느 정도는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주택담보대출의 기본이 그런 것이기도 하고...
2.5. 망했어요
그러나 거품이 꺼지고 나자 그게 불가능하게 되었고, 다수의 서브프라임 고객이 채무불이행, 즉 디폴트를 선언했다. 거품이 꺼지자 경제도 서서히 불황에 빠지기 시작했고, 일자리도 줄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집을 산 사람들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애초에 자산 시장의 특성이 그렇다. 갑자기 매물이 늘어나면 매도세가 급물살을 타며, 매물이 늘어남에 따라 가격도 미친 듯이 꺼진다.[11] 때문에 반대의 경우도 맞지만 이미 반대의 경우가 끝나고 매물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모든 일이 도미노처럼 진행되었다.
즉, 서브프라임 계층이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 또는 일부러 안 갚게 되었다.[12]
→ CDO의 수익률이 떨어지다 못해 마이너스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 서브프라임에 투자되었던 수조 달러의 돈이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투자자들이 다급히 자신들의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 CDO들은 우량자산에서 부실자산으로 변모, 대부분의 자산을 CDO로 가지고 있던 투자은행과 금융기관은 공황에 빠졌다.
마침내 2008년 9월, 다량의 CDO를 가지고 있던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점으로, 미국의 경제에 크게 의존하던 몇몇 나라는 아예 경제가 자빠지기도 하면서 전 세계적인 불황이 시작된다.
2.6. 근본적인 원인
2000년대 초반의 9.11 테러와 닷컴버블의 붕괴로 인한 통화정책[13] 과 정부 정책의 실패, 그리고 그 뒤의 시장의 붕괴[14] 까지 초래하는 상황을 본다면,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상황이 비슷하고 실제로 작은 공황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다만 수요와 공급의 조절 실패가 아닌 부동산의 무분별한 대출로 말미암은 사태라는 점에서 경제적 파장은 경제대공황에 비하면 매우 약한 편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각국의 여러 금융이나 건축 회사가 박살나거나 큰 타격을 입고, 세계 경제 불황의 원인이기도 한 만큼 절대적인 사건의 타격이 '약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대공황처럼 세계 단위로 모두 다 함께 쫄딱 망한 건 아니니 말이다.
2.6.1. 라구람 라잔의 빈부격차의 심화 주장
라구람 라잔은 폴트라인에서 빈부격차의 심화가 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빈부 격차의 원인에 관해서 레이건 시절의 규제 완화[15] 등 여러 원인을 이야기 했으나 가장 큰 것은 미국의 교육 불평등 내지는 숙련 편향적 기술 진보(Skill-biased technical change)라고 주장했다.[16]
이에 더해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부동산 대출을 쉽게 해주는 식의 땜질 처방에만 의존한 게 문제였다고 평한다.
이 부동산 대출은 빌 클린턴 정부의 '서민용 주택 확대' 정책과 부시 정부의 '한 가정 한 집' 정책의 이름으로 2008년 거품 붕괴 때까지 계속됐다. 똑같은 정책을 이름만 다르게 붙여 시행해왔던 것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이처럼 양당이 아무 불협화음 없이 추진한 정책은 주택 정책이 유일한데, 이는 근본적으로 빈부 격차에서 촉발되었다. 금융규제법처럼 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정책도 근시안적이다. 이 문제에 한해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둘 다 공범이라고 책에서 거론한 바 있다.
2.6.2. 국제적 불균형
이 외에도 일본, 독일, 나아가 한국, 중국 등 신흥국들이 수출 증대를 꾀하면서[17] 미국과의 무역 관계에서 오랫동안 흑자국이 된 것 역시 문제로 본 바 있다.[18] 이러한 국제적 문제는 90년대 후반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더 심화되었는데 한국, 중국 등 여러 국가들이 오랫동안 달러를 비축해두고 자본을 미국에 과잉 공급하게 되면서 미국 경제의 가해자가 되었다고 한 바 있다.[19]
이러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라구람 라잔은 이러한 국가들, 특히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에서 지나치게 흑자를 보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자국 내의 내수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6.3. 닷컴 버블과 연준의 잘못된 통화정책
보통 자본이 유입되는 것이 이론적으로 볼 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자본이 유입되더라도 특정 분야로 지나치게 집중되어 해당국의 경제를 비교적 교란하지 않고 그것이 기술 발전이나 산업화 등에 쓰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경제 성장에 기여하므로 그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경우, 유입된 해외 자본이 부동산 등의 분야에만 몰려서 자국 경제를 교란한 바 있다.
그 원인으로 거론된 것이 닷컴 버블이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닷컴 버블로 인해 제조업, 서비스업 시장의 이자율이 하락해 해당 산업에 투자를 많이 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연준의 금리 하락에 따라 시장에 풀린 돈이 고스란히 부동산으로 몰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금리 하락 시 다시 해당 시장이 투자를 늘리게 될 거라는 것과 90~2000년대 내내 시중에 돈을 풀다가 금리를 재인상하기 시작한 시점을 잘못 잡은 연준, 마지막으로 그러한 위험을 무시하고 부동산 시장 광풍을 즐긴 금융계 역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20][21]
다만 이 경우에서 연준이 금리를 인상한 것을 비판하는 건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비판이다. 당시 연준은 이러한 리스크를 거의 인식하지 못 하고 있거나, 인식하고 있더라도 금융 시장 안에서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리스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연준에게 더 가시적인 위협은 적정 수준을 지나치게 넘어선 인플레이션율이었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모기지론의 위협은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일어나더라도 충분히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보였다. 하지만 계속된 인플레이션은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험 수위에 있었으며, 만약 연준이 금리를 끌어올리지 않았으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문제가 터졌을 가능성도 있다.
연준이 위험을 과소평가한 것이 잘못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그 시스템을 직접 만든 투자은행들조차 어느 정도의 위협인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연준이 어느 수로 그 리스크를 제대로 평가하겠는가? 그 상황에서는 좀 더 급해보이는 위험에 손을 쓰는 것이 합리적인[22] 선택이었다.
2.6.4. 잘못된 금융시장의 시스템
거기에 더해 금융 기관의 잘못된 인센티브와 시스템 역시 지적하고 있다. 가령 금융 기관의 경우 지나치게 고수익 고위험 수익을 추구하도록 보수 구조가 짜여졌으며, 투명성이나 기타 구조적 요인 역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 라잔 교수는 그렇다고 금융시장을 정부의 힘으로 제한해서는 안 되고 보다 시장 자유를 유지하면서[23] 금융 기관에 대한 특권이나 보조금 폐지,[24] 온건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해서 책임성 문제도 들 수 있다. 이는 정확히는 금융 시장 상품 구조와 관련된 것이다.
부동산 시장의 각종 금융 상품은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1. 사람들이 부동산 대출을 위해서 자금을 빌린다. 원칙적으로 여기서만 끝난다면 은행이 대출 상환 여부 감시에 책임이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다만 아래와 같은 파생 상품이 일을 키웠다.
2. 은행 등 금융사는 이런 대출 자금을 가지고 얻은 담보나 채권을 근거로 증권을 발행한다(MBS ; Mortgage Backed Securities).
3. MBS는 위험도 등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그리고 금융사는 이런 MBS를 수익, 위험 등등 취향에 따라 선별하여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이렇게 대출채권 등등으로 이루어진 포트폴리오를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이라 한다.
4. 그리고 그런 CDO를 근거로 또 채권, 즉 파생 상품이 발행된다. 그 중에는 아예 대놓고 위험만 떼어서 거래하는 CDS라는 상품도 있다. 즉, 부동산 담보 대출과 관해서 특정인의 채권채무 관계와 엮였고, 그 채무 이행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관련 금융사들은 여럿이 된다.
그런데 원래 책임자가 여럿이면 대체로 그런 의무 수행은 남들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방관하는 책임성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부동산 대부자금 채무 이행에 대해서도 채권자인 금융사들은 책임자가 여럿이니 방관하게 된다. 더군다나 많은 금융사들은 기업이나 가계에도 대출을 함은 물론 자기들끼리도 서로 대출을 해주고 있어 서로 얽혀있으므로, 어느 한 쪽이 터지면 공동으로 피해를 본다. 즉, 각종 파생 상품은 개인의 위험을 제거하는 데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구조적 위험은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의 고려는 이런 금융 시장의 기술적 구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고.
2.6.5. 결론
라구람 라잔 교수는 시장과 정부 양 측 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모든 문제의 흑막은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데 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을 확립하자는 정공법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교육 개혁을 이룩하여 빈부 격차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하며 중국, 한국, 일본, 독일 같은 나라들, 특히 중국의 경우 이제는 경제 규모도 크니만큼 더 이상 미국 수요에 의존하기보다 어느 정도 내수를 키워야 한다고 한 바 있다. 2018년 현재 이젠 중국이 너무 내수 위주라 미국과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고, 관련된 주변국들은 휩쓸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눈치 싸움하는 추세.
3. 반응
미 하원에서 공화당이 구제금융을 부결시켰을 때, 시카고 대학교를 비롯해 6개 대학의 교수진들은 구제 금융을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이 외에도 가령 하버드 대학교의 로버트 배로 교수[25] 는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적자 재정을 반대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를 '''진지하게''' 따르는 사람들은 확실히 신자유주의 원칙에 충실했다는 걸 본다면 신자유주의 전체의 도덕적 해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긴 하다. 더불어 간혹 엉뚱한 사람이 신자유주의자라 오명을 쓰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런 학자들이나 평소 신념이 투철한 사람들 외에 비교적 신념이 덜 투철하고 대세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들이 재계에 적지 않았다. 가령 서브프라임 사태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들은 정작 '''죽은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서 돈을 빌리려고 해도 조사도 똑바로 안 하고 빌려주는 등 삽질을 알아서 한 주제에''' 신자유주의 원리대로라면 파산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이들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연명했다.'''
유명 철학가인 슬라보이 지제크는 자신의 저서인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이러한 행태에 대해, 호황일 때는 자본의 사회화와 규제를 미친 듯이 까며 저항하던 자본가들이 막상 위기에 닥치자 그토록 질색을 하던 구제금융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사회화'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비꼬았다.[26]
3.1. 변명
그런데 간혹 일부 엉뚱한 인물들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까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오해다. 가령 맨큐는 비록 공화당 시절에 부시 밑에서 벼슬을 얻었지만 연방 정부가 서브프라임 사태의 촉발에 관여한 정황은 없었으며[27] , 정작 맨큐 본인은 케인즈를 부활시켰다는 평을 받는 새케인지언이다.[28]
또한 자본가들에게 구제금융을 허가해준 연준이나 정부, 의회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이들 입장에서도 달리 선택지가 없는 게, 구제금융을 내주지 않았다간 '''미국이 망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당시 분산되어 있었던 위험이 점점 증폭되면서 모인 타격이 덮친 기업들은 금융 뿐만 아니라 제조업, 민간 금융 등에도 막대한 영향력이 있는 회사들이었다.
이런 회사들이 그냥 무너지게 방치하다간 금융을 넘어서 미국의 근간산업들에게 숨통을 끊어놓는 일격이 될 수 있었고, 대공황기에 비해 훨씬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 경제 체계 하에서 그런 대타격은 전 세계를 다 같이 망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9] 따라서 정부와 연준 입장에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제금융이기도 했다. 아주 좋은 예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20년, 30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이 사건에 대해 "금융 교육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니 일반인들이 무지해졌고, 그에 따라 이런 위기도 발생했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다만 이 양반도 저서가 전형적으로 주택 거품으로 돈 벌던 인간이고, 빚을 계열사 파산으로 무마하려고 하는 등 영 설득력이 부족하다.
4. 영향
금융 시장이 얼어붙고 주택 가치가 폭락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달러화의 가치가 급락, 미국 경제가 전체적으로 불경기가 되면서 미국을 상대로 무역을 해서 큰 이익을 얻던 국가들이 타격을 입었다. 후에 세계금융위기를 비롯한 여러 경제 문제들의 근본 배경이 되었다.
그 외에도 대공황 때는 대통령부터 펀더멘털만 외치다가 결국 대통령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교체된 이후에야 제대로 대응한 것과는 달리 이미 비슷한 사태를 한 번 겪어봐서 초기 대응도 대공황에 비해 신속했으며, 1차대전 이후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직 미국에만 집중되었던 대공황 시기와는 달리 상당한 경제 호황 이후에 처음부터 전 세계에 어느 정도 충격을 분산시키면서 발생했다는 점 등 변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타격이 줄어서 3차대전으로 안 갔다는 평도 있다.
'시장에 맡겨놓으면 된다'는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또 한 번 큰 충격을 가한 변환점이 된다. 은행은 잘 나갈 때는 "국가 규제 따위는 다 없어도 된다. 그런 거 없이도 시장은 잘 굴러간다(laissez faire)"라고 주장하더니만, 정작 서브프라임 폭탄이 터지자 "우리 망하면 경제도 다 망하니까 국회님 돈 좀 지원해주세요!"했다. 애초에 이 사태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투자 모델을 소위 최고급 엘리트 집단이라 불리는 거대은행에서 어떤 의문도 없이 받아들인 시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런 작자들이 평소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타인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서 혼자서 생존하도록 노력하라고 하던지, 네가 망하는 것은 100% 너의 책임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원흉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여러 금융 기업은 미국 정부에서 준 어마어마한 수준의 지원금으로 임원들 보너스를 줬다.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월가 점령 시위. 그러나 별로 변한 것도 없고, 피해는 보통 사람들이 당하면서 금융 엘리트들과 부자들은 몇 명의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냥 좀 힘들었군" 이 정도로 넘어갔다.[30]
이 외에도 다들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경제학계에서는 다른 식으로 영향을 받았다. 시카고 학파는 새케인즈 학파 등이 주시하는 금융 부문을 다소 경시하고 실물 부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는 금융 부문이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친 반면, 실물 부문에서는 경제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은 바 있다. 따라서 금융부문에 대해 이전보다 경제학자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얻게 되었고, 특히 부동산 같은 자산 시장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소리가 커졌다.
게다가 화폐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실물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비상식적 통화정책[31] 이나 금융 가속도 효과[32] 등이 재조명되었다는 점 역시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이다.
미국 내 공무원직의 인식도 바뀌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경험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도 이 위기를 겪기 전까지는 공무원직이 그리 선호도가 높은 직업이 아니었다. 대놓고 "나는 공무원 따위는 안해"라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공무원으로 뽑히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2006년 전에는 회사들도 버블로 번창하고 이런 회사들에 취직하면 공무원직보다 수입이 더 좋았었다.
하지만 버블이 터진 뒤,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직원 해고로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버티려고 하면서[33]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고용할 수 있는 회사는 없었다. 이로 인해 어디서 구직을 하면 한 자리에 몇 백명씩 지원을 하는 현상이 일어닜다.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말하자면, 입문 단계의 프로그래머를 구하는데 지원한 사람들의 반 이상이 그 분야에서 매니저급 경험자였다. 워낙 일자리가 없으니, 자기가 해고되기 전의 월급의 반도 못 받는 일이라도 닥치고 해야 할 지경이었고, 그나마도 워낙 경쟁률이 높아서 구직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2006년 후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너도나도 월급은 적지만 안정적인 공무원을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현재에도 공무원 시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경쟁률도 꽤 높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역으로 공무원 선호 풍조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와 월가 점령 시위의 교훈을 잊고 2021년 1월 27일에 '''금융가들이 또 장난질을 하다 딱 걸리다 못해 개미들한테 역공당하고 만다.'''
5. 관련 서적 및 만화
- 세스 토보크먼,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원제 Understanding the Crash), ISBN 9788994142159
- (2ch 번역) 쉽게 배우는 서브프라임 문제
- DC인사이드 주식갤러리에서 연재되었던 12의 연작 만화
-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 (원제 Federal reserve and the financial crisis), ISBN 9788994142326
- 티모시 가이트너, 스트레스 테스트 (원제 Stress Test), ISBN 9791195275564[35]
6. 관련 영화
7. 관련 문서
- 경제학
- 대공황
- 부동산
- 신자유주의 - 가계부채 - 양극화 - 저소득층
- 대침체
- 마윈[36]
- No Income, No Asset
- CDO
- MBS
-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건 : 13년이 지나서 발생한 사건. 소위 개미들이 헤지펀드가 공매도한 주식을 대량 구매하여 역공하는 사건.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개미들이 손해를 각오하면서 공격하는 이유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쌓인 한으로 보고 있다.
[1]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최악의 경제 위기는 매우 유명한 1929년의 대공황이었지만...[2] 여담으로, mortgage라는 단어는 옛 프랑스어 mort(죽음)+gage(맹세)에서 유래된 단어다. 즉, 직역하면 '''죽음의 맹세'''라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대출의 담보가 자기 자신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3] 미국은 담보의 매각액이 대출액보다 적더라도, 담보만 넘기면 상환의 의무가 사라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제도는 대공황 이후 서민들을 위해 혹시나 대공황이 와서 집을 잃더라도 채무 관계가 종결되도록 만들어진 제도라는 것이다.[4]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5] 지금도 보통 P2P금융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신용대출을 모아 일정 금액을 모집한 다음, 은행이 빌려주는 형식의 투자가 그렇다.[6] 이 시기가 부시 정부 때긴 하지만, 클린턴 때도 그랬다. 사실 공화당과 민주당 상관 없이 국민이 백야드와 차고가 있는 집을 가지는 것은 공인된 아메리칸 드림이고, 그것을 가능하도록 정책을 펴는 것은 정부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부채질을 너무 해서 결국 활활 다 타버렸다.[7] Negative amortization이라고 한다.[8] 비극적이게도 서브프라임 사태로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이 성실한 중산층 고객들이었다. 은행의 권유로 대출 받아서 겨우 내 집 마련했는데, 한순간에 집은 뺏기고 빚더미만을 떠안은 채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경제 불황으로 실직까지 하는 경우도 많은지라, 피해자들이 바닥 없는 막장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9]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가장 성업 중인 곳 중 2개를 꼽으라면 전당포와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업이 꼽히는 것을 보면, 미국 중산층이 받은 타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0] 이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빅 쇼트 에서는 이런 n차 CDO를 카지노에서 블랙잭 카드 게임을 직접 하는 플레이어와 딜러 중 누가 이길지 내기하는 주변의 구경꾼들의 내기에 또 다른 사람들이 내기를 하는 방법으로 예를 들어 실감나게 설명하였다.[11] 매물(공급)이 늘어나서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면 돈을 모아놓고 집을 사려던 사람들(즉 예비 구매자)도 '앞으로 집값 떨어질 거 같은데 좀 기다려볼까?'하는 생각에 렌트를 하며 구매를 미루기 때문에 수요가 싹 말라버린다. 특히 집처럼 평범한 사람이 평생 벌어야 사는 물건은 더더욱 구매자 입장에선 신중할 수밖에... 때문에 부동산은 주식이나 채권보다는 폭락의 속도가 훨씬 더디지만, 대신에 모멘텀이 엄청나서 한 번 꺼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12] 담보인 집이 갚을 대출액보다 싸졌기 때문. 위에 서술했듯이 미국은 집 담보 대출을 받은 후에 디폴트 선언을 하면 집을 은행이 가져간다. 다만 다른 자산들은 건들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10억 원의 집 담보로 7억 원을 대출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집값이 1억이 되었다면 집을 팔아 1억을 갚고 남은 6억을 직접 일해서 갚는 것보다 디폴트 선언하고 집만 압류 당하고 끝내는 게 훨씬 싸다. 디폴트 선언시 집만 가져가고 그 이외에는 건들지 못하므로.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이라도 디폴트 선언을 해버리고 집만 압류 당하고 끝. 하지만 은행이 대출해준 7억은 1억 원의 집으로 갚지 못한다. 결국 은행은 6억 손실. 그런데 이런 게 한둘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래버리니 결국 은행은 파산한 것이다.[13] 덤으로 밀턴 프리드먼은 평소에는 그린스펀의 재량적 통화정책을 깠는데, 죽기 직전에 그린스펀의 통화정책을 보고 '어쩌면 그린스펀이 옳았을지도...'라고 하다 죽었다. 그런데 정작 프리드먼이 죽고 난 뒤 일이 터졌다.[14] 여기서 나온 것이 금융 가속도 효과다.[15] 다만 레이건 시기의 규제 완화가 오늘날 불평등이 발생한 원인의 1/3, 1/4 정도라고 했다. 원인 중 하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 라구람 라잔 교수의 견해다.[16] 빈부 격차 심화가 주로 저소득층의 인적 자본 축적을 절대적으로건 상대적으로건 저해하여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레고리 맨큐, 밀턴 프리드먼 등의 학자들도 인정한다.[17] 경제학에서 순수출은 순자본유출과 동치로 여겨진다. 즉 한국이 미국에 수출해서 얻은 금액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자본이 빠져나간 것과 거의 동일한 금액이라는 이야기.[18] 특히 한, 중, 일은 팔아도 팔아도 끝이 없는 블랙홀이나 다름없는 미국 소비 시장에 어마어마한 공산품을 수출해 급성장한 나라들이다.[19] 단, 한국 등이 달러를 잔뜩 비축해둔 건 한국의 1997년 외환 위기의 피에 사무친 경험과, 그걸 보고 덩달아 겁 먹은 중국 등이 외환 보유고를 끌어올리는 데 목숨을 걸어서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을 만든 건 IMF의 내정 간섭에 가까운 경제 개입 탓도 있다. 일방적으로 한국이 가해자라고 볼 수는 없다.[20] 사실 경제학자들이 전부 위기를 예측 못한 것은 아니다. 로버트 실러 같은 경우가 이런 위기를 예측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리고 라잔 역시 그린스펀을 까면서 금리 인하로 시중에 돈을 푸는 것이 미국경제에 사망 플래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한 바 있다.[21]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부동산 시장이 거품인지 아닌지 여부는 당시의 경제학 수준에서도 예측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당시의 경제학자들이 놓친 것은 그 부동산 거품이 복잡한 파생 상품이라는 도화선을 타고 세계 경제에 얼마나 큰 폭발을 가져올지였다.[22] 이용 가능한 정보를 모두 사용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기지론의 리스크에 대한 올바른 정보는 당시 상황으로선 '합리적 선택'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23] 정부 역시 막연히 선한 존재라 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정부와 금융기관이 이를 이용해 서로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24] 과보호는 시장경제를 위협하므로 망할 기관은 망하게 해야 한다.[25] 리카도 대등정리로 유명하며, 이 양반의 포지션은 대략 경상도 출신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 내지 전라도 출신 새누리당 정치인마냥 케인지언의 본거지인 하버드 대학에서 시카고 학파 계열인 새고전학파(New classical)(신고전학파(Neo classical)와 전혀 다르다.)에 속한 사실상 유일한 교수다.[26] 밀턴 프리드먼은 "사기업은 자유시장 경제의 위험한 존재들이며 자유에 찬성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정부 개입을 원한다."라고 비꼰 바 있다. 애초에 자본가들은 이익집단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다. 자본가들이 무조건 시장 친화적이라면 툭하면 "수입품 때문에 우리 산업 다 망해요" 징징거리며 "관세 올려주세요" 이런 말들을 할 리가 없다. 이건 프리드먼까지 갈 필요도 없고, 자유방임주의의 근거 이론을 제창한 '''애덤 스미스'''부터가 지적한 내용이다. 다들 한번 쯤은 들어본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가장 먼저 보여준 그 당사자조차도 '국가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역할'은 무시하지 않았다. 즉 정부의 역할은 이런 사악하고 욕심 많은 이익집단이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하여 사회를 경직시키는 것을 막는 것이다.[27] 물론 그걸 막으려 개입한 정황도 없으므로 이런 측면에서는 까여도 무방하다.[28] 다만 성향은 온건 공화당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시카고 학파 사람들보다는 케인지언들이 연방 정부에 더 잘 들어갔다. 그게 소위 시장친화적이라는 공화당 시절에도 그랬다.[29] 그리고 만약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30] 허나 신용도 없는 상황에서 은행의 꼬드김에 넘어가 막무가내로 대출을 받은 사람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간의 탐욕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존재다. 다만 사채업자들에게 잔뜩 빚을 지고 인생 망치는 것도 본인 선택에 따른 누구 탓할 수 없는 자초한 결과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예방하려고 사회 운동을 하고 구제 정책을 펴는 것처럼, 이 역시 대다수의 소시민이 금융권의 감언이설에 놀아나지 않도록 정부가 미리 대비하고 알리기는 커녕 전부 다 잘 될 것처럼 위험성을 감추며 대출받아서 집을 사라고 부추겼다는 점에서 분명히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부동산이 깊게 개입되어 있다는 점까지 일본 버블 경제가 꺼질 때와 정말 여러 관점으로 똑같다.[31] 이 개념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계기로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버냉키의 무제한적 양적 완화나 아베노믹스가 해당된다.[32] 경기 침체로 인해 은행이 망할 경우 다른 은행이나 기업에 악영향을 줌으로써 경기 침체를 가속화.[33] 그리고 이래봤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한 회사들도 부지기수다.[34]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였던 벤 버냉키의 회고록이다. 아래의 책과 함께 읽으면 좋다.[35] 금융위기 당시 뉴욕Fed의 행장이었고, 오바마 1기 정부의 재무장관을 지닌 티모시 가이트너의 회고록이다. 금융위기 당시 구제금융에 대해 비판의 말들이 상당했는데, 이에 대해 연대기 순으로 자세히 구성되어있고 흡입력도 있는 책이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볼 만 하다(664페이지).[36] 2010년대 후반에 앤트그룹으로 비슷한 짓을 하려다가 중국 공산당에게 제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