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렝고 전투

 


1. 개요
2. 전개
3. 절정
4.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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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Battle of Marengo
프랑스어: Bataille de Marengo
제2차 이탈리아 전쟁 중이던 180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오스트리아의 멜라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군을 기습하면서 벌어진 전투.
쿠데타 집권 이후 아직 권력이 불안정했던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하마터면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뻔 했다.

2. 전개


나폴레옹의 계획은 마세나가 제노아에서 멜라스의 군대에 저항하는 사이,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 군의 뒤를 치는 것이었으나, 1800년 6월 4일, 마세나는 항복했고, 이제 멜라스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군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9일 나폴레옹의 선봉을 지휘하던 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몬테벨로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분견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이 이 시점에서 가장 걱정한건 오스트리아군과의 정면승부가 아닌 멜라스가 군대를 제노바로 후퇴시킨 뒤 제노바를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과연 멜라스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 앞에 단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멜라스가 제노바로 후퇴하고 있다고 판단, 드제와 부뎃에게 각자 한개 사단을 맡기고 빅토르 휘하 부대를 지원하는 동시에 제노바를 차단해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그의 소중한 병력을 분산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멜라스의 함정이었다. 부뎃과 드제의 병력이 출발하자 갑자기 튀어나온 멜라스가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미 전투는 시작부터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1] 또한 나폴레옹이 받은 쇼크 또한 컸는데 과거 본인이 지휘했던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자신이 오스트리아의 병력이 분산된 틈을 타 분쇄하던 기술을 구사했는데 자신이 반대로 분산된 상태로 분쇄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
결국 프랑스군의 중앙이 붕괴되었고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이 발로 지휘해도 이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최대한 전투를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더이상 어찌할 수 없었고 대대적인 후퇴를 개시하여 인근의 포도밭으로 후퇴하며 버티지만 결국 통령근위대까지 괴멸되고 만다. 후에 이 전투에 참가했던 군인의 증언을 통하면 나폴레옹은 포탄이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역시 영웅은 이런 상황에서도 대담함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2] [3]
그렇게 혁명 프랑스가 망하기 직전에 몰린 그때...

3. 절정


그런데 느닷없이 제노바를 차단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드제 장군과 기병포병을 비롯한 병력들이 도착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참담한 심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고 드제는 다음과 같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귀관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명히 이 전투는 패배했습니다. 이젠 우리가 이길 차례입니다.

그가 전열을 정비해 마르몽, 켈레르만 등을 내세워 대포로 기습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고, 느닷없이 등장한 지원군과 전의를 회복한 프랑스군에 압도된 멜라스가 후퇴를 결정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전투가 마무리된다. 여기서 멜라스를 변호하자면 멜라스 본인은 백발이 무성할 정도로 늙은 노장이었고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때문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해 부하에게 지휘권을 맡긴후 승전보를 기다리며 쉬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드제의 합류에 대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승리의 주역 드제는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4] 전투 후에도 드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사상자들의 옷을 뒤져 귀중품을 빼앗은 뒤 시체를 쌓아두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드제가 사라진걸 확인하고 급하게 수색했는데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옷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그의 장례는 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뤄지고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끝마쳐지게 된다.
그런데 드제가 죽은 바로 그 날,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이 버려두고 온 이집트 주둔군을 지휘하던 클레베르 장군(1753~1800)이 무슬림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떠난 후 지휘권을 넘겨받고 흔들리던 이집트 주둔군을 바로잡은 후 오스만 제국군을 두 차례에 걸쳐[5] 궤멸시켰던 유능한 장군이었기에 이 손실은 뼈아팠다. 이후 클레베르의 지휘권은 무능한 므누 장군(1750~1810)[6]이 이어받게 되었고, 고립된 이집트 주둔군은 1801년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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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검
흔히 마렝고 전투는 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선전효과로 인해 많이 과장된 것이고, 사실 마렝고 전투의 군사적 업적은 그의 여러 전투들에 비해 군사적 재능을 빛낸 전투는 아니다.[7]
어찌보면 순간적인 판단으로 별동대를 끌고 와 역전시킨 드제의 능력이 나폴레옹 이상으로 돋보이는 전투이기도 하다. 마렝고 전투는 바그람 전투아우스터리츠 전투처럼 적군을 섬멸한, 나폴레옹 본인이 흔히 말하는 '완벽한 승리'가 아니었다. 마렝고 이후로도 사실 오스트리아군은 충분히 전쟁을 계속할 수 있던 상태였으며 오히려 프랑스군은 죽다 살아난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즉, 마렝고 전투의 업적은 상당수가 과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나폴레옹의 실수로 1개 군단이 박살날 뻔한, 만약 졌다면 그대로 나폴레옹의 흑역사로 치부될 전투였던 것. 그러나 전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생길 때까지 통솔을 유지했던 나폴레옹의 지구력과 이후 상황을 반전시킨 능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전략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활용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프랑스에 적대하는 제국들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 나폴레옹의 실각을 노리던 불만세력들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권력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원하던 완벽한 승리는 그의 손이 아닌 모로의 손에 의해 호엔린덴 전투에서 이루어지게 된다.[8]
훗날 거의 정확히 15년 후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와 비교되는 부분이 있는데, 에마뉘엘 그루시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와 비슷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결정적 판단을 함으로써 전황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의 운명 자체를 결정지어 놓았다.

4. 기타


이 전투를 마치고 나서 지친 나폴레옹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의 요리사가 만들어 올린 닭고기 요리가 '치킨 마렝고' 이다.[9]
[1] 당시 오스트리아군에겐 대포가 무려 100문이나 있었던 반면 나폴레옹에겐 고작 24문뿐이었다.[2] 실제로 나폴레옹은 군인답게 전쟁터에서 죽기를 바라기도 했다.[3] 전쟁터에서 죽어서 위대한 정복자로 역사에 남으려면 승전에서 죽어야 한다.[4] 나중에 워털루 전투가 마렝고와 약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아쉽게도 이미 드제가 죽어버려서 황제가 위급할 때 그루시는 3만이라는 예비병력을 들고 숲속탐험을 하고 있었다.[5] 타보르 산 전투, 헬리오폴리스 전투.[6] 1795년 당시 나폴레옹이 바라스에 의해 파리반정부폭동 진압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 전임자가 바로 므누였다. 므누의 우유부단함과 무능에 지친 바라스가 므누를 경질하고 나폴레옹을 임명한 것. 이후는 다들 알다시피 '포도탄'으로 왕당파 폭동 일망타진.[7] 위인전이 많이 읽히던 시절, 나폴레옹 위인전에서는 알프스를 멋지게 넘은 나폴레옹이 방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완벽하게 기습해 말 그대로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나온다. 위의 문단에서처럼 이는 당연히 나폴레옹을 띄우기 위해 전투의 개요를 엄청나게 과장한 서술이었고, 정작 급습당해 대위기에 처했던 쪽은 프랑스군이었다.[8] 그리고 강한 견제를 받고 거의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9] 치킨 마렝고가 이 때 나왔다는 것은 만들어진 이야기란 설도 있다. 마렝고 치킨을 만들었다는 뒤낭이란 요리사는 마렝고 전투가 끝난 후 5년 후에 나폴레옹의 요리사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학자들은 치킨 마렝고에 들어가는 토마토도 6월의 이탈리아 북부에서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본다. 자세한 것은 마렝고 전투 부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