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마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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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프레데리크 루이 비셰 드마르몽[1]
Auguste Frédé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07.20 ~ 1852.07.20)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라구사 공작.[2]
특이 사항으로는 다부드제처럼 귀족 출신[3] 장군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원쑤 2호.'''[4]
1. 생애
1.1. 마르몽과 나폴레옹의 인연이 있기까지
1.2.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마르몽
1.3. 배신, 그리고 그 후


1. 생애



1.1. 마르몽과 나폴레옹의 인연이 있기까지


샤티용수르세인에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몽은 군인다운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군인이 되고 싶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마르몽을 디종으로 데려갔고 마르몽은 거기서 수학을 배워 포병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면식을 가지게 되었고, 툴롱 공방전에 나폴레옹을 따라 참전했다.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점점 친밀해졌고,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보좌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그 가운데 남들과는 달리 승리를 거둠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더니 여단장으로 승진했다. 1799년 이집트에서 발이 묶였을 때 나폴레옹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돌아왔고, 나폴레옹이 브뤼마르의 18일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에 동참, 그 후엔 포병대를 조직해서 제2차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특히 마렝고 전투때에는 마르몽이 지휘한 포병대가 승리에 일조했다.[5]
그리고 1801년에는 포병대 감찰관이 되었고, 1804년에는 상급장교로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지만 나폴레옹이 원수 명단을 만들때 집어넣는 것을 빠뜨려서 나폴레옹에게 제대로 삐졌다(...). 하긴, 남들 다 원수봉 받는데 나만 못받으면 서운하니까(...)[6]
...그러나 잠시, '''잘''' 생각해보면, 원수목록에 빠진 사람 중 마르몽 만큼이나 나폴레옹과 매우 친했던 '''앙도슈 쥐노'''가 있었다(...) 마르몽이 삐진 것은 어떻게 보면 그냥 땡깡부린 것이다.[7]

1.2.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마르몽


1805년에는 군단을 맡아 울름 전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고, 1806년에는 나폴레옹을 따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라구사의 포위를 풀어냈다. '''그랬다가''' 1808년에 라구사 공화국(1358~1808)을 갈아엎어버렸고, 스스로 라구사 공작이 되었다. 그 후 5년간을 달마티아의 행정관으로서 군사, 행정권을 행사했으며, 마르몽의 집권기간 동안에 벌였던 커다란 공공 사업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고 한다.
1809년에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향해 공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마르몽을 소환했고, 이제야 마르몽이 빠진 것을 알아챘는지 나폴레옹이 직접 원수봉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전쟁의 한 부분을 담당시키기 위해서 일리리아 영토 전역을 마르몽에게 맡겼다.
마르몽은 1810년에 급히 소환되어 마세나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따라갔다. 그러나 살라망카 전투에서 웰링턴군과의 교전 중에 오른쪽 팔과 갈비뼈 두개가 나가는 부상을 당하고 베르트랑 클로셀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마르몽은 프랑스에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물러났고, 아직도 한참 낫기 어려운 상태에서 1813년 4월, 나폴레옹이 다시 군단 지휘권을 맡겼다. 마르몽은 뤼첸과 바우첸, 드레스덴의 일련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엔 나폴레옹에게 2만의 병력을 받아 파리의 방어를 맡았는대 이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장 배신이 일어나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난 내 천막에서 자란 아들이나 다름없는 마르몽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혹시 파리는 배신하게 만드는 오라라도 발산하는게 아닐까(…).

1.3. '''배신''', 그리고 그 후


1814년의 대규모 방위 전역에서 파리 방어전에 참가, 결국 이기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나폴레옹을 배신'''[8],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쑤가 되어 나폴레옹의 앞에 나타났다.
이러한 배신행위 때문에 마르몽은 나폴레옹에게 대차게 까였고, 죽을 때까지도 계속 비난했다고 한다(...). 그 때 Raguade라고 동전에 새겨넣었는데, 이 일 이후로 Raguser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 말은 "배신"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9]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당하고 제1차 왕정복고로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서자 마르몽은 루이 18세를 섬겨 지위를 잘 보존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는 겉치레가 아니야!"'''를 외치며 다시 부활하자 루이 18세와 함께 벨기에로 도망갔다.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가 끝나자, 마르몽은 다시 돌아와서 귀족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근위대 소장이 되었고, 1820년에는 생 에스프리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 루이의 상급장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마르몽은 '''어느 누구로부터 신뢰받는 일이 없었다.'''[10]
1821년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유서에서 "마르몽을 용서한다"고 써 놓았다. 참으로 대인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30년 7월 아직 근위대 소장으로 복무할 때에 마르몽은 왕명에 불복하는 어떤 저항세력도 짓밟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나마 현실감각이 아직은 남아 있던 마르몽은 그 정책에 반대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아예 혁명세력을 분쇄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이 행동으로 인해 마르몽은 귀족들에게 대차게 까였고, 앙굴렘 공작[11]에 의해 체포되었을 당시 앙굴렘 공작은 마르몽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네가 '''그'''를 배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배신하려 드는 건가?"

그러나 정작 남들 다 배신할 때 이번에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을 배신한 것에 대한 마지막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났을 때 마르몽은 샤를 10세를 배신하지 않고 같이 국외망명을 갔다. 프랑스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프랑스는 절대로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르몽은 중부와 동부 유럽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빈에 정착하게 된 마르몽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서 잠시 뿐이지만 라이히슈타트 공 나폴레옹 2세의 가정교사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회상록을 출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자의 신세는 면할 수가 없었다고(...).
1852년 7월 베네치아에서 사망했으며,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죽었다. 향년 78세로, 정확히 78세 생일 날 삶을 마감했다. 생일날이 제삿날(...).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정식명칭은 1st Duc de Raguse.[3] 더 정확하게는, 다부처럼 군인 귀족 가문이다.[4] 1호는 당연히 '''그분(...)''', 3호는 미셸 네 원수, 4호는 조아킴 뮈라 원수.[5] 그때 일시적으로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그 이후 쾌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러나...[6] 게다가 나폴레옹과 '''아주 친한 사이'''였는데 말이다.[7] 쥐노는 나폴레옹이 장군이던 시절 참모로써는 유능한 편이었지만, 지휘관으로써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반면 마르몽은 이미 지휘관이자 포병 전문가로써 명성이 높아, 이 일이 있은 직후인 1805년에는 군단장으로 임명될 정도(당시 다른 군단장들은 모두 원수)였으니, 쥐노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정치적 목적으로 원수를 임명하는 경우는 있어도 사적 친분에 의해 원수를 임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르몽이 가장 젊은 축에 드는 다른 원수후보들보다도 네댓살이나 더 젊었다는 점이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결국 5년 후에 원수로 임명됐다)[8] 이 때 동맹군 측과 비밀 협약을 맺었는데, 이 일은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그의 동향 사람들에게까지 까였다.[9] 마르몽은 라구사 공작이었다.[10] 사실 당연하다(...). 마르몽을 일개 하사관에서 발견해 훌륭한 포병장교로 키우고 원수까지 진급시킨 형제나 다름없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배신을 때려버렸으니.''' 루이 18세가 애초에 배신 안 하고 막판 답이 안나왔을 때 항복한 원수들도 어지간해서는 죽이지 않은데다 당대에는 주인을 대놓고 배신하지만 않으면 중간에 떠나는 정도는 문제가 안 됐기 때문에 오히려 배신을 하지 않고 싸우다가 안되니 손들거나 나폴레옹에게 정중히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모든 관계를 청산한 뒤 루이 18세에게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더 신뢰받았을 것이다.[11] 샤를 10세의 아들. 흔히 루이 19세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