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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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몬테벨로 공작이자 초대 시에베르 대공.[1]
루이 니콜라 다부, 앙드레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 중 가장 뛰어난 원수들 중 한 명. 전략, 전술에 대한 이해와 응용이 탁월했으며 늘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이 명확하여 수많은 공을 세운 명장이다. 마부의 아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말단 병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제국의 원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며, 조아킴 뮈라와 더불어 나폴레옹한테 '너'라고 말을 놓아도 될 정도로 인정받은[2] 몇 안되는 친구였다.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제르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럭저럭 먹고 사는 형편의 마부 집안이었으나 란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농사일만 했다. 그래도 수도사였던 맏형이 란에게 기초교육을 가르쳐줬기에, 란은 문맹은 벗어날 수 있었다.
란은 염색공의 도제로 들어가서 염색업을 직업으로 선택하려 했으나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터지자 23세의 나이로 제르 제2자원병 대대에 자원 입대한다. 그 군대는 란의 지방 의용 연대였는데, 란은 거기서 장교가 되었다. 그때부터 란은 휘하 대대를 이끌고 남프랑스에서 스페인군과 싸우면서 경험치(...)를 쌓기 시작, 거기서 그는 뛰어난 활약으로 불과 3개월 만에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했다. 그 기간 동안 란은 전투, 전술, 지휘 등을 빠르게 익혔다. 란의 재능은 매우 탁월했기 때문에, 그는 불과 1년 만인 1795년에 대령이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상관이었으며 군 총참모장 피에르 오주로 장군이 란에 대해 언급한 평을 읽어보면 '''"개전 초부터 계속 보여준 그의 능력과 자질은 그의 모든 전우들에게 최고의 귀감이 되었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도 그가 가진 진짜 자질에 못 미친다."'''고 할 정도였다. 훗날 란이 원수가 된 뒤에도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1796년 3월 이탈리아 전쟁#s-2 중 배치되어 있던 이탈리아 군(Armee de Italia)에 배속되어 사령관으로 임명된 남자와 운명적인 만남(...) 을 겪게 된다.
1796년 4월 14~15일 동안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데고 근처에서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과 격돌했다. 이때 란은 총검 돌격을 이끌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다. 이를 본 나폴레옹은 그를 여단장[3] 으로 임명한다.
1796년 5월 10일 로디 전투에서 란은 정예 척탄병#s-1 부대를 지휘하여 교량을 탈취해 적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그리고 바사노에서도 그는 앞장서서 적을 돌격하여 대승을 일궈냈으나 부상을 당해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요양 중이던 그는 나폴레옹이 칼디에로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전선으로 달려갔다. 란은 아르콜에서 나폴레옹과 합류하여 부대를 지휘하였다. 이 전투 와중에 그는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하고 후송용 마차에 실려갔다. 그런데 이때, 아군이 아르콜 다리를 점거하지 못하고 연이어 패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란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나폴레옹에게 달려갔다. 그가 전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강습의 실패로 인해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의 총격으로 위기에 처해있었다. 란은 흐트러진 전열을 수습하여 신속하게 공세를 감행, 적의 마을을 탈취하여 최악의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구원해냈다.
이탈리아 전역이 끝날 기미를 보일 무렵, 란은 제노바와 교황령으로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거기서 그는 성과를 거뒀다고 하지만 그 성과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798년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종군해 클레베르 장군 휘하 연대중 하나를 맡아 지휘했는데, 카이로 함락작전, 시리아 가자 포위전, 생장다르크 포위전 등을 이끌어 모두 승전을 거둔다. 그러다가 아크레 공성전에서 그는 너무 앞장서서 성벽을 향해 돌격하다가 '''목에 관통상을 입고''' 거의 죽을 뻔했지만 부하 한 명이 그를 구출해 끝내 살아남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승전 이후, 카이로에 입성했지만 넬슨 제독에 의해 프랑스 원정군이 고립의 위기에 처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의 실수를 통렬히 비난했다. 이런 불평이 나폴레옹에게 전해지자, 다급해진 뮈라는 란이 한 말이라며 그를 모함한다. 이때부터 란은 뮈라와 죽을 때까지 서로 반목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란의 아내가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때문에 란은 매우 우울해졌고, 정서불안의 기미마저 보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최측근들만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때 란도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갔다. 얼마 뒤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란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의원들을 모조리 의사당에서 내쫓았다. 이 덕분에 나폴레옹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쿠데타를 달성한 직후 사생아를 낳은 아내와 이혼했다.
1800년, 2차 이탈리아 전쟁 때는 사단장[4] 에 임명되어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선봉으로 진격하여 나폴레옹의 알프스 횡단에 기여했다. 그리고 1800년 6월 9일에 란은 이탈리아 몬테벨로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전을 치룬다. 이때 란의 군단은 8천여 명이었다. 반면에 란을 상대하는 오스트리아군은 1만 8천 명이었으니... 란의 군단은 빅토르 장군이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서 돌격을 거듭한다. 란은 적의 반격을 훌륭히 막았다. 결국 빅토르 장군의 6천여 명의 지원군이 도착하며 승리를 거두게 된다.[5] 훗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란의 공적을 기리면서 란에게 몬테벨로 공작의 칭호를 부여한다. 몬테벨로에서 격전을 치룬지 5일 뒤, 란은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그는 하루 동안이나 완강히 저항하여 적군을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진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나폴레옹의 구원군이 도착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란은 나폴레옹의 반격 명령이 내려지자 앞장서서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몰아내버렸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투의 종결 후, 란을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처세를 잘못했다. 근위대 예산 가운데 60만 프랑을 유용하여 부하들의 처우 개선 및 새 군복을 맞추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개인 재산에 착복하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는 공금을 임의대로 남용한 것. 그러나 이 일은 이런 종류의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란에게 전권을 맡긴 나폴레옹에게도 책임이 있다. 장 란에게 앙심을 품었던 뮈라와 회계 감시를 하던 베시에르는 이를 눈치채고 나폴레옹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고 그래서 베시에르와 사이가 나빠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은 장 란이 보고를 할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시에르와 란의 사이가 나빠졌던 건 둘의 성격 차이가 크다. 이에 격분한 나폴레옹은 란에게 당장 사재를 털어 공금을 채워넣지 않으면 군사 재판정에 서야 할 거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란의 친구인 오주로가 돈을 꿔줘서 재판만은 면할 수 있었다.
란은 같은 해 8월 15일에 루이즈 앙투와네트 게누라는 여자와 결혼한다. 루이즈 앙투와네트는 란을 매우 사랑했고, 다섯 명의 아들, 딸들을 낳는다.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보내던 란은 1801년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보내져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란은 수많은 무역 특혜를 얻는 한편 오주로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뇌물 혹은 선물을 열심히 받아챙겼고 그 덕분에 그는 부자가 됐다고(...).
1804년, 국민 투표로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18명의 장군을 제국 원수로 승진시키는데 란도 그 중 한 명으로 입대한지 12년 만에 일개 병사에서 원수가 되는 초고속 승진을 한다. 나폴레옹의 즉위식에 참석한 뒤 새로 창설된 제5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그는 제5군단을 이끌고 참전한다. 이때 뮈라가 베르팅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함정에 몰아넣고는 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뮈라에 대해선 좋게 여겨질 리 없을 그였지만, 최선을 다해 뮈라를 지원하여 대승을 일궈내는 데 큰 기여를 해줬다. 또, 뮈라가 엉뚱한 길로 가버려서 도나우 강의 다리를 탈취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란은 기발한 계책을 세웠다. 뮈라와 란이 화려한 복장을 갖춘 채 오스트리아 초병들의 시선을 끌며 휴전이 성립되었다고 낚시를 하는 동안 일부 병력을 빼서 강을 몰래 건너게 한 것이었다. 작전은 대성공하여, 어렵지 않게 다리를 탈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뮈라가 제대로 해주질 않는다. 오스트리아군을 원조하기 위해 파견된 러시아군을 무찌르기 위해 뮈라와 란은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군과 맞붙었다. 싸움은 프랑스군에 유리했고, 어쩌면 러시아군의 후위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뮈라는 뛰어난 장군인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거짓 시한부 휴전 계략에 홀짝 넘어가서 추격하질 않았다. 란은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반발했지만 혼자서 거대한 러시아군을 추격할 수는 없었기에 양측은 전투 재개 4시간 전에 이를 사전 통보하기로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투 재개를 명령했지만, 쿠투조프는 이 틈을 이용해 부대를 철수시킨다. 결국 러시아군은 안전하게 철수하고 말았다.
얼마 뒤,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적지 깊숙히 들어와 병력면에서 우세한 동맹군과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니콜라 장드듀 술트는 란, 뮈라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후퇴를 설득하기로 합의했는데, 나폴레옹을 직접 설득하는 건 가장 나폴레옹과 친한 란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란에게 후퇴를 제안받고 몹시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라고 묻자 란은 "우리 모두의 의견입니다, 폐하" 라고 말했다. 그런데 술트는 분위기를 대충 훑고 "저라면 절대로 후퇴를 건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통수를 쳤다(...). 빡친 란이 결투를 신청하자 나폴레옹이 직접 중재를 나서긴 했지만 이 일로 술트와도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다.[6]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스군 좌익을 지휘하여 리히텐슈타인 대공이 이끄는 러시아 기병대를 보병 사단 하나로 견뎌내고 뮈라의 2개 기병 사단의 지원을 받아 패주시켰다. 용맹한 러시아 왕자 바그라티온이 다시 한번 전세를 뒤집자 란은 몸소 군단을 지휘하여 역습을 시도했지만 러시아 포병의 화력에 저지당했다. 군단 포병을 동원해 간신히 러시아 포병을 물리친 란은 기병대를 동원해 바그라티온의 병사들을 쫓았지만 구역의 책임자인 뮈라가 그를 제지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의 핵심 전투부대는 무사히 살아서 철수한다.
그런데 란은 자신의 전공이 술트보다 못한 걸로 평가된 것을 발견했다. 이에 울분을 느낀 란은 '''군대를 무단이탈했다!''' 누구도 '군대에서 뛰쳐나간' 이 인물을 복귀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에게 "전장에서라면 그의 명령에 따르겠지만, 난 지금 휴가 중이다"라는 구두 답변과 함께 거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군대가 그리워진 란은 1806년 10월 7일에 프로이센 원정이 계획된 자신의 군단으로 되돌아갔다. 다부의 제3군단과 최강을 다투던 그의 제5군단을 이끌고 선봉을 맡아, 잘펠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자랑이라 불리던 루트비히 왕자와 대결해 전사시키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4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무려 6,000명 이상이 전열을 이탈해 달아나 한나절만에 1개 군단이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예나 전투에서, 란은 하루 종일 최전선에서 싸웠고, 그와 그의 군단은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패잔병들을 모조리 소탕하였으며. 한겨울 추위에도 추격은 계속되어 마침내 폴란드 영토에까지 이어졌다. 러시아군이 란을 저지하기 위해 푸투스크에서 전병력을 동원했지만, 란은 '''그 군대마저도 돌파하였다!''' 하지만 너무 자신을 혹사시킨 나머지 피곤에 지쳐 쓰러져 바르샤바로 물러났다.
1807년 6월에 복귀한 란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뮈라와 함께 프랑스군의 한축을 담당하여 러시아군의 공세를 격퇴시켜 나폴레옹의 승리에 기여한다. 1808년에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가담하여 란은 처음으로 개별 지휘권을 받아 이듬해 11월, 투델라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한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와 에두아르 모르티에의 뒤를 이어 1809년 1월부터 사라고사 공략에 들어가는데, 다른 이들은 실패한 이 처절하게 피비린내나는 사라고사를 포위전, 나아가 시가전 끝에 승리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흔히 비견되곤 하는 이 사라고사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가 그나마 적을 수 있었던 것은 란의 공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온갖 잔혹한 전투에 기가 질렸고, 나폴레옹의 전쟁 자체를 의심케 했다. 그는 사라고사 전투 후 '''"저 빌어먹을 보나파르트가 우리를 다 죽게 만들고 말거야."'''라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예언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나폴레옹을 따르고 있었고, 1809년에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원정을 위해 란을 호출하자, 그는 단 말 한필을 이끌고 달려가 자신의 군단에 합류한다. 이어진 1809년 4월 23일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때 벌어진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는데, 레겐스부르크 성벽에 가로막힌 부하들이 머뭇거리자 란은 '''"이 몸도 원수이기 전에는 척탄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Je vais vous faire voir qu'avant d'être maréchal, j'étais grenadier et je le suis encore !")라고 외친 뒤 '''정말로 원수의 신분으로 직접 사다리를 들고 돌진해 성벽에 오르려 했지만''', 부관들이 말렸고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휘하 장병들은 그를 따라 다시금 돌격에 나섰고, 요새는 곧 함락되었다.[7]
2.2. 최후
1809년 5월 22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란의 군단은 마세나와 함께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전장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란은 친분이 두터웠던 푸제 장군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강 상황에서도 전장을 곧잘 날아다니던 눈 먼 포탄 하나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쳐서 그런 푸제의 머리를 박살내버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초 전만 해도 바로 앞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친구가 충격적인 모습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니 산전수전 다 겪어왔던 란조차도 큰 충격을 받았던지 자리를 살짝 옮긴 뒤, 다리를 꼰 채로 주저앉아 잠시 고뇌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침 이 때, 지지리 운 없게도 오스트리아 군 포대에서 날아온 포탄 하나가 땅바닥에 부딪혀 튕겨 오르며[8] 하필이면 란의 꼬여 있던 두 다리 한가운데에 명중하여 양 다리뼈를 으스러뜨려 놓았다. 깜짝 놀라서 달려온 부관들한테 쓰러진 란은 '''"별거 아냐. 나 좀 일으켜 주게."''' 라고 말하며 일으켜 달라고 했으나, 그는 끝내 부러진 다리로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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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를 위해 즉시 후방으로 이송되었지만 당시 페니실린이나 알코올 소독 개념도 없었던 열악한 의료 기술과 비위생적 환경에서 완전하게 박살난 그의 두 다리를[9] 살려낼 방법은 커녕, 상처의 세균 감염조차 통제할 수 없었던 만큼 의무총감 도미니크장 라레[10] 는 한쪽 다리를 도려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고 그의 다리가 잘리는 동안 황제 나폴레옹은 그 곁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상태가 조금 호전되었을 때는 나폴레옹한테 어서 회복되어 의족을 낀 채로 군에 복귀할 것이며 마차 위에 탄 채로 돌격을 지휘하겠다고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였지만, 일주일 후에 결국 란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나폴레옹은 그가 죽자 대성통곡을 하며 '''"모든 건 이렇게 끝나는구나."'''라고 '친구'이자 명장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란을 기려 '''"처음 봤을 때는 난쟁이였으나, 죽을 때는 거인이었다."'''라고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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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슬링 전투 두 달 전에 그려진 란의 초상화.
이탈리아 전쟁 때부터 나폴레옹의 친구였으며 원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었던 란의 죽음은 가장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유능하나 제각기 치명적인 결점이 있어 결국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 대부분이었던[11] 나폴레옹의 원수들 사이에서 란은 다부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이 실수해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메워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고 충성심이 너무 강해 반대를 몰랐던 다부와 달리 친구로서 나폴레옹에게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2] 그 후 나폴레옹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란의 빈자리를 아쉬워했고 끝내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지 못했다.
어찌 보면 나폴레옹의 최전성기이자 그의 힘이 꺾이려는 시기에 사망하여, 죽을 떄를 잘 찾은 사나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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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테옹에 있는 란의 무덤.
3. 이야기거리
성격이 직설적이고 무뚝뚝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원수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앞서 말했듯이 뮈라와는 이집트 원정 시절부터 앙숙이었고, 술트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에, 베시에르와는 2차 오스트리아 전쟁 중에 결투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을 정도로 나쁜 관계였다(...).
위에 나왔듯이 나폴레옹과 매우 가깝고 격의없는 사이였기에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 'tu('너'라는 뜻의 2인칭 대명사)'라고 부르는 몇 안되는 인사였다. 즉 나폴레옹과 말을 놓고 지냈다는 뜻.
참고로 그의 직계손인 '필리프 란 드 몬테벨로'는 현재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을 지내고 있다.
[1] 정식명칭은 1st Duc de Montebello, 1st Sovereign Prince de Sievers.[2] 허나 뮈라는 나폴레옹의 몰락 즈음에 그를 배신해서 철천지 원수로 전락했다.[3] 준장에 해당.[4] 소장.[5]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6백여 명이라고 주장했으나, 학자들은 실제론 3천여 명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4천여 명에 이르렀다.[6] 출처: 그레고리 프리몬-반즈,토드 피셔 작, <나폴레옹 전쟁-근대 유럽의 탄생> p.81~82[7] 현실로 치면 최소 장성급 인사가 적의 참호에 가로막혀 겁에 질린 병사들을 "나도 지금은 장성이지만 현역 때는 너희들처럼 총을 든 현역병이었다!"라며 직접 총을 들고 참호로 달려들려했던 거나 다름없다.[8] 당시 에슬링의 날씨는 비 때문에 진흙밭이 될 정도로 습기가 절여진 날씨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때문에 포탄이 바닥에 통통 튀기는 만큼 어디에 한 번 부딪혀도 여전히 살상력을 유지했다고 하는 수준이었다니 부상 악화를 겸하여 란한테는 재수가 배로 좋지 않았던 셈이다.[9] 당시 포는 철구나 다름없는 살인 둔기들을 무식한 화력으로 날려보내는 방식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살짝 맞더라도 최소 복합골절이거나 푸제처럼 어디 하나 날아갈 각오를 할 수 밖에 없었다.[10] 구급차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자, 트리아지를 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11] 이 문제는 나폴레옹의 독선적인 성격이 부추긴 점이 크다. 베르나도트나 뮈라 같이 누가 봐도 중책은 맡기면 안 되는 사람들을 지인, 인척이라고 키워주고 우디노나 뮈라의 우둔함을 탓하면서도 제대로 참모대학을 설립해 원수들의 시야를 넓히고 지휘를 보좌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채 개개인의 자질에만 의지하게 두었다.[12] 란은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제국이 절대군주제임을 감안하면 중죄에 처해질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란을 처벌하지 않고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