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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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크리스토프 켈레르만 (François-Christophe Kellermann, 1735.5.28 ~ 1820.9.23)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발미 공작.[1]

2. 생애


그의 가계는 색슨 계열이며, 스트라스부르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귀족이 되었다. 켈레르만은 1735년 그곳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자원병으로 입대했으며, 1752년 프랑스군 장교가 되었다. 7년 전쟁프로이센군에 맞서 훌륭히 싸웠고 외교임무로 동유럽에 파견되기도 했다. 1788년 사령관에 진급하여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다.
1792년 3월 중장으로 임명되어 북부군 사령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 함께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승리했다. 1792년 11월 알프스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793년 가을에 사르데냐 왕국을 무찌르고 사보이를 탈환했으나 1793년 11월 자코뱅파에 의해 불충성 혐의로 투옥되었다.
1794년 7월 자코뱅 정권 몰락 이후 석방되어 1795년에서 1797년 알프스 주둔군을 다시 지휘했고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1804년, 프랑스군 최초의 제국 원수 18명중 한명에 뽑혔고, 1808년에는 발미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는 것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1809년에는 스페인 방면과 라인방면에 종군하였고, 러시아 원정 때는 나이도 있고 해서 후방 전선 유지 임무를 맡았다. 그의 역할은 예비군들의 물자를 관리하고 무장시키는 행보관과 비슷한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개발살이 난 나폴레옹이 독일로 돌아와서 그에게 내린 명령 또한 '신병들의 교육과 물자의 재편성'이었다. 켈레르만은 묵묵히 이 일을 수행했으나 수많은 프랑스 장병들이 서쪽에서 와서 자신 밑에 있다가 동쪽으로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광경을 여러번 봐야만 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에는 수많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1814년 대불연합군이 프랑스로 몰려들자 그는 나폴레옹의 퇴위를 논하는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부르봉 왕가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왔을 때 이때 일을 두고 불려가 변명을 해야만 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변명을 무시했지만, 별다른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백일천하 기간 동안 자택에 머무르며 세상을 관망했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자 이후 군복을 벗었다. 이 시기 미셸 네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그의 사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지기도 했다. 가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그는 부르봉 왕정 하에서 충실하게 살아갔고, 루이 18세로 부터 명예 원수로 임명 되었다. 그리고 1820년 9월 13일 파리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3. 기타


  • 그의 아들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도 기병으로 복무하였으며, 백일천하때는 나폴레옹을 따라 카트르 브라 전투에 종군하였다.
[1] 정식명칭은 1er Duc de Val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