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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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Collins (1930.10.31 -)
1. 개요
2. 상세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미국우주비행사. 아폴로 11호의 멤버로 유명하다.

2. 상세


마이클 콜린스는 미국의 군인 제임스 콜린스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1930년 10월 31일 로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돌아다니며 성장하였다.1948년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1] 1952년 기계공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공군 조종장교로 임관하였다. 가족들이 미국 육군 장교 출신인 군인집안[2]이라 그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지만 졸업 후 공군 임관을 선택했을 때 시력검사 결과가 안 좋게 나와서 애태우기도 했다.
아폴로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인 달 착륙을 이룬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3명의 우주비행사 중 한 사람이다. 다만 그는 달에 내리지 않았다. 그는 사령선 조종사였기에 닐 암스트롱버즈 올드린이 달착륙선(LM; Lunar Module)에 타고 달에 착륙하는 동안, 사령선과 기계선(CSM; Command and Service Module)을 타고 혼자서 궤도를 주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계획에서는 대체로 사령선 조종사 자리에 베테랑을 배치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능력이 딸려서 달에 착륙하지 못한 것이 절대 아니다. 아폴로 11호 승무원들 중 그는 우주비행 서열 2위여서 달착륙을 할 자격이 있었지만 서열 3위였던 버즈 올드린이 사령선 단독 조종을 할 경력이 되지 않아 그가 사령선에 남기로 한 것이다.
원래 마이클 콜린즈는 제미니 10호에서 EVA도 수행하는등 실력과 경험을 겸비했지만, 원래 정규팀원이었던 아폴로 8호 사령선 조종사 보직이 때아닌 척추 수술 크리[3]짐 러블[4]에게 돌아가면서 콜린스는 8호 미션에서는 캡콤으로 근무한 뒤 11호 정규 사령선 조종사로 옮겼고, 연쇄적으로 사령선 조종사였던 올드린이 달 착륙선 조종사로, 원래 그 자리였던 프레드 헤이즈는 백업으로 밀렸다.
달까지 가고도 착륙하지 못했기에 주변의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지만, 본인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마이클 콜린스의 회고록 <Carrying the Fire>와 에세이인 <플라이 투 더 문>을 읽어보면 좋다. 20세기 소년에서도 언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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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었거나, 살아있거나, 곧 태어날 모든 인류를 담은 사진. 단 한 사람을 빼고.
그가 현재까지 인지도가 있는 이유는 바로 위 사진 때문이다. 이 사진에는 달에서 이륙해 사령선과 도킹하기 위해 접근하는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그리고 그 뒤의 지구에 당시 살아있었거나 살아있거나 곧 태어날 모든 인류가 담겨 있다. 사진을 찍은 '''마이클 콜린스 본인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 사진은 우주 공간에 혼자 남겨진 인물의 고독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종 초중고 교과서나 전공서적, 여러 매체에서 자주 우려먹는 NASA의 리즈시절 갤러리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예를 들면 엔지니어링 전공서적 중 궤도역학 교과서 중에 미국공군사관학교 로저 베이트 교수(준장 예편) 등이 저술한 클래식 명저인 Fundamentals of Astrodynamics는 이 사진이 표지 그 자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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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NASA의 우주 미션 교대 순번[6]상 11호의 사령선 조종사는 17호의 사령관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사양하였으며 더 이상 우주로 나가지 않고 공군으로 복귀하였다. 콜린스는 베테랑 조종사로서 여러 작전에 참여했던 경력 덕에 중령 대령 시절을 NASA에서 보냈음에도 준장까지 진급했고[7] 예편한 뒤에는 아폴로 11호의 동료들과 함께 홍보 활동이나 강연을 다니다가 예비역 소장으로 특진하기도 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 이후에 콜린스는 암스트롱, 올드윈과 함께 미국과 전 세계를 순회하며 환영 행사에 참석했는데, 우리나라도 당연히 방문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8])을 수여받았으며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등 국가적 차원의 환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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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수받는 마이클 콜린스.[9] 1969년 11월 3일
201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성공 5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는 마이클 콜린스가 화려하게 재조명되고 있다. 그에 대한 좋은 기사가 나와있다. 관련기사 또 7월 19일 아폴로 11호 50주년을 기념한 구글 두들에 마이클 콜린스의 육성이 담긴 유튜브 영상이 링크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아폴로 계획을 다룬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에서는 캐리 엘위스가 연기했다. 프랭크 보먼아폴로 8호 팀이 달 궤도를 처음 비행할 때 캡콤으로 초조하게 승무원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모습이 묘사되며, 보먼이 암스트롱과 올드린과 술을 먹으면서 나중에 너네 달에 착륙했을 때 뭔 명언을 남겨보시겠냐며 생각해두라고 할 때 옆에서 당구 한 판 하면서 "'''뭐야 저거! 으아아아악!''' 비명 지르고 통신 꺼봐ㅋㅋㅋ"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1] 버즈 올드린이 47학번으로 그의 1년 선배이다.[2] 그의 아버지는 1946년 소장으로 퇴역하였고, 그의 삼촌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인물이며, 그의 형도 육군 준장까지 올랐다.[3] 프랭크 보먼-콜린스-윌리엄 앤더스 팀이 아폴로 9호 정규팀으로 결성된 뒤 호흡을 맞추다 말고 추간판 탈출증 진단 크리가 터져서 콜린스는 수술대에 오른 뒤 몇달간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결국 당초 백업으로 내정되었던 러블이 정규팀원으로 배정되었고, 이후 달 착륙선 개발이 지체되며 8호와 9호 팀은 순번을 바꾸게 된다.[4] 제미니 계획에서 7호 팀원으로 프랭크 보먼과 활동했지만, 이후 12호 사령관으로 올드린과 함께 활동했던 사령관 경력자다. 이렇게 사령관 경력자를 둘이나 써먹는 것 자체가 좀 파격적이었다.[5] 다만 2015년 개정판에서는 우주왕복선 시대의 사진으로 대체.[6] 3회 뒤의 미션에서 예비팀으로 활동하고, 다시 그 다음 3회째의 미션에서 우주에 올라가는 체계. 실제로는 큰 틀 정도의 성격일 뿐 매번 제대로 굴러가지는 못했다. [7] 우주비행사들은 최고의 엘리트이긴 하지만 군에서의 지휘/참모 경력은 우주비행사로 활동할 동안엔 공백이 발생하기 때문에 대령까지 프리패스로 진급시켜주는 것 외에는 장성 진급에 있어 딱히 유리한 점이 없다.[8]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무궁화장은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이다.[9] 마이클 콜린스 오른쪽에 이미 훈장을 받은 사람이 닐 암스트롱, 왼쪽이 에드윈 올드린 이다. 박정희 대통령 얼굴 너머로 보이는 여성들은 우주비행사의 부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