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암스트롱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우주 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딛은 인간'''이자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내딛으며.[2]
[3]
2. 생애
2.1. 우주인이 되기 전
미국 오하이오 주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는 의외로 항공우주공학자의 꿈을 꿨다. 즉, 켈리 존슨처럼 기술자로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만들다보면 결국은 조종사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가용 조종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가 17살이던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Holloway Plan으로 미 해군에서 학비를 지원받아 MIT와 Purdue 대학에 합격하였고,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옛의 퍼듀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한다.
암스트롱은 장학금 조건에 따라 1949년 휴학하고 미 해군 항공대 조종장교로 임관하여 1950년에는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시 일대를 정찰하던 중 대공포에 격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4] 3년간 의무복무를 한 뒤 1952년 8월 21일 예비역 중위로 예편하여 1955년 항공공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그는 NACA[5] 와 노스 아메리칸 등 여러 항공우주산업체에서 테스트 파일럿 겸 항공공학자로서 활약했다. 당시 이야기가 좀 있는데, 척 예거가 최초의 초음속 비행을 성공시킨 뒤 그 뒤를 이어 마하 2를 돌파한 테스트 파일럿 스캇 크로스필드가 X-15 프로그램이 발족하자 평소에 상업용 기체만 대량생산하던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게 이걸 맡기는 것이 영 못미덥다고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에 파견근무를 하려던 차에 X-15 엔지니어에게 파견근무 지원을 거절당하자 아예 리 앳우드 사장[6] 의 허락을 받아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으로 이직[7] 해버리자 NACA의 전속 테스트 파일럿 자리가 비어서 뽑힌 것이 20대 중반의 암스트롱이었다.
사실 이 시절의 커리어를 감안하면 초창기 우주 비행사들 중 테스트 파일럿 경력으로는 최고였다.[9][10] 1958년 이미 NACA/미합중국 공군/노스아메리칸/더글러스 등의 군수산업체에서 뽑은 '''Man in Space Soonest, 이른바 MISS''' 프로젝트에서 최연소로 뽑힌 바 있으며, 이전에 노스 아메리칸 사에서 X-15의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수십 km의 고도까지 초음속으로 비행하며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는 등 X 실험기 시리즈 연구 등에서 자주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었다.
또한 X-20 다이나 소어 프로그램에서 선발되기도 했으며, 이때 X-20의 탈출 절차로 RTLS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도 암스트롱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도움을 주었다.이 시절의 공로 덕에 STS-51-L 챌린저 참사에서도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로저스 위원회의 부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했고, 2014년에는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파입된 NASA 드라이든 비행시험센터가 암스트롱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2.2.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
1962년에 NASA의 우주 비행사가 되어[11] 1966년에는 제미니 8호의 사령관으로서 '''인류 최초의 지구 궤도상 우주선 도킹'''에 성공했으며 그 이후 갑자기 심한 스핀에 빠지며 NASA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의 인명사고 위기에 빠졌던 제미니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귀환시켰다.[12] 이후 제미니 11호의 백업 멤버가 되기도 했다.
한편 암스트롱은 우주개발 역사에서 달 착륙이 아니더라도 작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NASA에 소속된 '민간인' 신분으로서 지구 궤도에 올라간 기록은 암스트롱이 최초이기 때문. 당장 버즈 올드린만 해도 공군 현역이었고,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미션의 군인들은 별을 단 인물도 꽤 있다.[13] 6.25 전쟁 이후 예비역 중위가 되었지만 그나마도 곧 때려치고 민간 테스트 파일럿이 된 케이스다.
그리고 1969년, 39세의 나이에 아폴로 11호의 사령관 자격으로 동료 우주비행사인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달을 향한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대망의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한국 시각), '고요의 바다'로 명명된 달 표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달 착륙을 다룬 다큐멘터리 Rocketmen에 의하면, 달 착륙 전에 착륙 예정지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하고 코드 1201 에러가 반복해서 일어났는데 이때 휴스턴에서는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료가 1분치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때 닐 암스트롱이 실력[14] 을 발휘, '''착륙선을 수동으로 제어하여''' 무사히 안착한다. 그는 달에 첫 발을 내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아폴로 계획 항목에 자세히 적혀져 있지만, 아폴로 11호는 지금 우리가 잡고 있는 컴퓨터는커녕 1세대 iPhone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컴퓨터와 계산기를 갖고 우주공간을 며칠이나 돌아서 결국 달 착륙에 성공하였다. 1969년 당시에는 그 정도 기술조차 미국이란 나라가 국가 예산의 몇 %를 때려박아가며, 전국에서 최고의 영재들을 갈아서 에밀레종 만들 기세로 퍼부어야만[15] 우주선 1대의 공간 안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달 착륙 장면은 지금처럼 인터넷 같은것이 막 보급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5억 명 이상이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으며, 중미 국가인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벌이던 전쟁도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잠시 휴전을 맺고 전투를 중단할 정도였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소련에 뒤처져 있던 미국의 우주개척 분야에서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아폴로 계획 문서의 '아폴로 11호' 문단을 참고바란다.
2.3. 우주복을 벗은 이후
달 착륙 이후 닐 암스트롱은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 교수로 재직하는 등 꾸준히 우주개발 분야에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달 착륙에 성공한 뒤인 1969년 11월에 당시 비행을 같이한 두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바 있으며, 이어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것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대학 교수로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암스트롱은 2011년 ~ 2012년 사이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경제위기 등의 이유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우주개발 관련 예산을 축소했던 것과 관련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비판하는 등 미국 정부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2.4. 사망
2012년 8월 25일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외신에 따르면 닐 암스트롱은 관상동맥 협착 증세가 발견돼 수술했지만, 노환으로 인해 몸이 버티지 못하여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다.
[image]
장례식은 9월 13일 워싱턴 국립 대성당(성공회 성당)[16] 에서 치러졌다.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봉분을 만들어 매장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하여 미국 해군에 의해서 대서양 바다에 유골이 뿌려졌다. 산골은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필리핀 시'함이 담당하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수십차례 소티를 기록했던 참전용사이기도 했기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역시 유족에게 성조기를 보내며 조의를 표했다. 2010년 한국 전쟁 발발 60주기에 맞춰 한국에 초청할 계획도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무산되었다.
3. 기타
- 두 번째로 달에 내린 사람은 버즈 올드린이다. 해당 문서 참고.
- 닐 암스트롱의 모습이라며 떠돌고 있는 달에 서 있는 우주인은 사실 버즈 올드린이다.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암스트롱이라는 것에 주의할 것. 버즈 올드린은 이 걸 가지고 코난 쇼에서 직접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해당 문서 참조.
-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음모론은 이미 수없는 검증을 통해, 그리고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였던 본인들의 증언을 통해 논파된 지(?) 오래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 이후 43년을 더 살았으며, 동료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는 아직 살아 있다. 사실 음모론자들은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끝나는 줄 아는데,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13호를 제외하고는 총 12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을 밟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버즈 올드린은 자기 바로 앞에서 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정당방위로 판결받았다.(...) 다만 이쪽은 그냥 음모론을 주장했다고 피해를 당한 게 아니라, 올드린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욕을 퍼부은 탓에 폭행을 당한 것. -
- 달에 외계인의 기지가 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나, 영화 등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약...'이란 가정을 하게 하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달 뒷면에 외계인이 산다는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의 경우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과 그 동료 일행들이 달 착륙 직후 달을 탐사하다가 달에 거주하는 외계인과 마주쳤으며 그 외계인이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인간들이 보아하니 이젠 우리 나와바리에(달) 올 정도로 많이 큰(기술력이 발달한) 모양인데 그래봐야 니들보다 더 앞선 기술력을 가진 우리한테 디지기 싫으면 좋은 말 할때 달에서 빨리 나가라 응?" 이런 협박을 듣고 외계인들의 UFO와 수정(크리스탈)구조물 등 외계인들의 문명을 일부 보게 되고 겁을 먹어서 허둥지둥 급하게 지구로 귀환으며 암스트롱 본인도 그 충격때문에 이후 죽을때까지 달에 갔다온건 얘기해도 그 다음에 달에서 있었던 자세한 얘기는 꺼려한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물론 믿으면 골룸. 어디까지나 음모론이다. 일단 달이 여러 묘사나 지구와의 비교 때문에 작아보여도 둘레가 11000km나 되는 대형 위성이며 최고속도가 약 13km/h정도인 월면차를 타고 달에 착륙한 사이에 달의 뒷면에 갔다 오는건 불가능하다. 영화 트랜스포머 3에서는 그와 버즈 올드린이 사실 불시착한 오토봇의 잔해를 찾으러 달에 간 것이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광수생각 1권의 첫편을 보면 알 수 있듯, 달에 갔다가 거기 사는 달토끼와 조우한 뒤 달토끼가 닐 암스트롱으로 둔갑해 지구로 내려왔고 진짜 닐 암스트롱은 달에 살고 있다는 유머도 있다.
- 찰스 다윈처럼 죽기 전에 '달 착륙은 거짓이었다'라고 고백했다는 얘기가 있다. 여러분 이런 고인드립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그리고 이 음모론은 닐 암스트롱이 생존중일 때 돌아다녔다.
- 그는 중년 무렵 1980년대에 챌린저호 참사가 터지자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와 함께 NASA를 대표하여 진상조사위원회에 포함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영화
에서는 역시 최고의 물리학자 로 이름을 날리던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택시 기사에게 듣보잡 취급을 받으면서 택시 기사가 암스트롱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며, 파인만은 그런 사소한 부탁을 기억해서는 사인을 받고[17] 택시 기사를 끝끝내 찾아내서 사인을 전해준다.
- 미 해군은 차기 해양관측선 시리즈의 이름을 닐 암스트롱급(Neil Armstrong-class oceanographic research ship)으로 이름지어 1번함 R/V Neil Armstrong을 진수했다.[18]
- 닐 암스트롱이 독실한 기독교도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는 이신론자였다. 독실한 기독교도 기믹은 오히려 올드린에 해당되는 편. 오히려 이슬람권에서는 암스트롱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는 사실과 다른 설이 불거지며 미 국무부가 공식 부인하기도 했다.
- 평생 우주에서의 경험이나 자신이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일부러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암스트롱이지만, 베트남 전쟁기에 미군 포로들이 북베트남군의 회유와 구타, 세뇌를 견뎌낸 것이 자신 덕분이라는 일화를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미국으로 오고가는 월남전 미군 포로와 가족의 서신 중 북베트남군이 미군 포로들에게 전해준 것은 당연히 '미국은 포로들을 버렸고 오히려 학살자로 취급한다', '미국은 끝내 패배할 것이다' 등의 내용으로 조작 내지 검열삭제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검열에서 발각되지 않고 전해진 아폴로 11호 달 착륙 우표가 포로들에게 전해지자 미처 문 레이스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잡혔던 포로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 때문에 달에 갔다온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은 대통령이나 국무부의 특사로 활동하며 자주 베트남에 파견되어 포로 교환에도 큰 수고를 했다. 물론 비행사들이 포로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달에 갔다온 우주인들이 온다는 소식은 달 탐사 경쟁의 결말을 알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던 포로들에게도 여러 경로로 전해지며 큰 희망을 주었다.
- 전자 악기인 테레민을 아주 좋아 했다. 국내에는 연주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암스트롱은 취미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폴로 11호에 테레민 연주곡 테이프를 갖고 가 달 탐사 여정 동안에 들었다. 이를 반영해 영화 퍼스트맨에서 테레민 음악이 사용되었다.
- 그와 관련된 도시전설로 "Good Luck, Mr. Gorsky" 이야기가 있다. 내용인 즉슨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가 "행운을 빕니다, 고르스키 씨(Good Luck, Mr. Gorsky)"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닐이 왜 이러한 말을 남겼는가 궁금해했고 몇 가지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가 문득 러시아 우주 비행사들이 떠올라 농담을 했다고 여겼으나 러시아 우주 비행사들 중에 고르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닐은 해당 발언에 대한 해석을 오랫동안 내놓지 않았으나 26년이나 지난[19] 1995년 7월 5일 플로리다 템파베이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고르스키 씨가 세상에 없을 테니 말할 수 있겠다며 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가 어릴 적에 동생과 고르스키 씨네 뒷마당에서 야구를 하다 그만 공이 앞마당까지 날아가버렸고 공을 주우러 가다가 고르스키 부부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고르스키 부인이 말하길 "입으로 해달라고? 옆집 꼬마발이 달에 닿으면 그때 가서 해주지!"(“Oral sex? Oral sex you want? You'll get oral sex when the kid next door walks on the moon!”)
...라는 얘기이다. 보다시피 세세하게도 정확한 날짜까지 있고 실제로 닐에게는 형제[20] 가 있기 때문에 꾀나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물론 이는 실화가 아니다. 당사자인 닐은 1995년 11월에야 이 처음으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NASA는 인류 최초 달착륙 같은 세기의 기록을 낱낱이 녹음했으나 역시 Mr. Gorsky같은 발언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유머가 탄생한 것은 많은 여성들이 오랄 섹스를 꺼리고 고르스키라는 이름이 유대인스럽고 "Oral sex you want?"같은 말 역시 지극히 유대인스러운 어휘로서 유대인과 섹스를 한 번에 엮는 농담인 셈이다. 상당히 유명한 유머이기에 미국 대중문화에서 달 착률을 묘사할 때 간혹 등장한다. 왓치멘 인트로에 등장하는 Mr, Gorsky 드립
...라는 얘기이다. 보다시피 세세하게도 정확한 날짜까지 있고 실제로 닐에게는 형제[20] 가 있기 때문에 꾀나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물론 이는 실화가 아니다. 당사자인 닐은 1995년 11월에야 이 처음으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NASA는 인류 최초 달착륙 같은 세기의 기록을 낱낱이 녹음했으나 역시 Mr. Gorsky같은 발언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유머가 탄생한 것은 많은 여성들이 오랄 섹스를 꺼리고 고르스키라는 이름이 유대인스럽고 "Oral sex you want?"같은 말 역시 지극히 유대인스러운 어휘로서 유대인과 섹스를 한 번에 엮는 농담인 셈이다. 상당히 유명한 유머이기에 미국 대중문화에서 달 착률을 묘사할 때 간혹 등장한다. 왓치멘 인트로에 등장하는 Mr, Gorsky 드립
- 20세기에 들어 한때 그가 실은 외계인이 아니냐라는 의혹이 있었다. 밈 형태로 퍼진 것인데, 그의 이름 'Neil Alden Armstrong'에서 첫번째 A 이후로 모두 지워서 'Neil A'으로 만들고 철자순서를 뒤집으면 'Alien'이 되기 때문이다. 나사 극비로 감추되 단서로서 이름을 저렇게 했다는 내용이 주요 주장의 골자다.
4. 대중매체에서
- 영화 아폴로 13에서도 살짝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폴로 13호의 급박한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며 핫이슈가 되자 올드린과 함께 짐 러블의 치매 투병 중인 노모를 찾아가 힘이 되어드리는 역할. 며느리가 "이쪽은 암스트롱씨고 이쪽은 올드린씨에요. 짐의 직장동료에요." 하는데 러블의 어머니는 이들이 누군지 못 알아보고 "댁들도 우주 다녀왔수?" 하고 암스트롱은 급 당황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 유리의 복수에서 그의 명대사를 소련의 서기장님께서 다시 발언하였다.
- Fate/EXTRA에서 마토 신지가 '서번트 암스트롱을 소환한 마스터를 봤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EXTRA의 세계관에서는 인류가 물리적으로 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황상 아폴로 계획은 취소되거나 실패했을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소환했을 지는 불명. 만약 평행세계의 암스트롱이 소환되었다 가정한다면 신지가 알아볼 수 없다. 이후 애니판 라스트 앙코르에서 우주복을 입은 서번트가 신지에 의해 쓰러지는 모습이 나왔는데 정황상 닐 암스트롱으로 추정된다. 이후 Fate/Requiem에도 언급됨.
- 하우스키퍼에서도 1화에서도 등장하지만 안드로이드가 발달돼서 사람 대신 안드로이드로 나온다.
[1] USC 졸업논문 주제가 무려 달 착륙 테크닉[2] 한때 이 말에서 'a'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음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약하게나마 'a'가 발음된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한 단어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영어 문법상으로는 인간인가, 한 남자인가 하는 중요한 의미상 차이점이 발생하므로 명확히 밝혀낼 필요가 있다. a가 없이 그냥 man이었다면 뒤의 mankind와 사실상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3] 암스트롱은 처음에 a를 말했다고 주장했지만, 녹음된 것을 듣고 본인도 말하지 않았나라며 갸웃거렸다고 한다.[4] 한국전쟁 참전 닐 암스트롱 이야기(잇빨중사 번역). 참고로 당시 비상탈출에 성공해서 무사히 착지한 곳이 K-Site 코드로 K-3인 현재의 포항공항이다.[5]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스푸트니크 쇼크 이전 NASA의 전신[6] 이 사람은 훗날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7] 노스 아메리칸은 이 시절부터 초고고도, 초음속 항공기 개발 노하우를 쌓아가며 XB-70을 만들고 아폴로 사령선, 새턴 2단 로켓, 그리고 우주비행기의 상징이 된 우주왕복선 오비터 제작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8] 다른 이들은 전부 이 시기에 30대 이상의 나이였으며, 이후 NASA가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도 너무 나이가 많다고 지원이 반려되었다.[9] 미군이 테스트 파일럿을 많이 양성하고 써먹는다고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전투비행대에 순환배치되는 원칙이 상존하기 때문에 전업 테스트 파일럿만큼의 기량과 경력을 쌓기엔 힘들다. 오늘날에는 민간 산업체에서도 공군 경력 꽤 있는 베테랑을 선호하기 때문에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이 시절에는 암스트롱처럼 큰 전쟁의 참전 경력으로 검증된 경우 군생활을 그만두고 일찍 전업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도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10] F-4의 개발과정에서 크게 활약했던 존 영과 짐 러블 역시 제미니를 앞두고 함께 선발된 9인 중에서도 특히 암스트롱이 최고라고 여겼을 정도이다.[11]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도 전인 1958년에 조직된 MISS의 멤버들 중 유일하게 NASA의 35세 이하라는 우주 비행사 지원 자격을 만족하였다. MISS에서 함께 활약했던 동료들은 암스트롱보다 최소 6살은 많은 이들이었던지라 암스트롱을 제외한 이들은 1961년 머큐리 계획이 발표될 적에 이미 35세가 지났다. 이들은 테스트 파일럿으로 계속 활약하다 XB-70 사진 촬영 후 허무하게 사망한 조셉 워커처럼 젊은 나이에 창공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우주에 나가지 못한 채 연구에 전념하다 은퇴한 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채로 작고하였다. 결국 2010년 사망한 로버트 화이트에 이어 마지막 생존자였던 암스트롱마저 2012년 타계하며 MISS의 멤버들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12] 이 미션 직전에 제미니 9호 승무원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이 T-38 사고로 순직하여 여론이 뒤집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암스트롱은 자신과 데이비드 스콧의 목숨을 구한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주계획 전체가 좌초될 위기에서 NASA를 구해낸 것이다.[13] 우주에 올라간 기록으로는 MISS 시절의 동료 조셉 워커가 앞선다. 소련의 민간인 여성 발렌티나 테레시코바(후일 소련 공군 장성이 되긴 하지만 당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다.)의 우주 비행 한 달 후에 X-15의 플라이트 90, 플라이트 91에서 고도 100km를 돌파하며 미국에서 인정하는 '우주 비행사'의 자격을 만족하였다. 사실 살짝 만족한 것이긴 하나, 어쨌든 우주 비행을 여러 번 다녀온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MISS의 멤버들 중 암스트롱을 제외하면 우주를 실제로 경험한 유일한 인물. [14] 암스트롱은 그간 여러 차례 있었던 임무 도중의 급박한 위기 극복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돌발 사태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15] 당시의 코딩과 컴퓨터를 보고 싶다면 다음의 영상을 참고하자. #코딩, #컴퓨터. 코딩 부분 영상은 자기 코어 메모리에 프로그램을 이식하는 장면이다. 자기 코어 메모리는 1960년대 당시 내구성과 집적도가 가장 우수했지만 프로그램의 1비트마다 전자석의 극성을 맞추고 (극성을 반대로 맞추면 비트가 반전되므로 당연히 오작동을 일으킨다.) 전선으로 꿰는 노가다를 통해서 제작되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SRAM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다.[16]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 달 착륙 5주년에 맞춰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 월석을 기증하였고, 그 월석이 중앙에 놓인 남쪽 방향 스테인드 글라스는 스페이스 윈도우로 불리고 있다.[17] 조사위원들은 파인만이 딸에게 전해주려는 거라고 생각하며 허허허 웃기만 했다.[18] 미군은 병참선이나 관측선 같은 비전투 함정들에는 역사적/영웅적 탐험가나 선지자, 개척자들의 이름을 따오고 있다. 예를들어 루이스 앤 클락급 병참선의 루이스와 클락은 아메리카 서부를 처음 탐험했던 이들이며 해당 클래스의 2번함은 여성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이들의 가이드를 맡았던 사카자위아다. 3번함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이고, 7번함은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심해잠수사로서 영화 맨 오브 오너의 실제 주인공인 칼 브래시어 원사의 이름을 땄으며, 9번함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 에도 막부의 개항을 이끌어낸 매튜 페리 제독의 이름을 땄다. 심지어 5번함에는 로버트 피어리까지 있다. 그리고, 닐 암스트롱급 해양 관측선 2번함은 당연히 샐리 라이드.[19]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이 1969년의 일이다.[20] 닐이 장남이고 여동생 준과 남동생 딘 암스트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