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앤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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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Alison "Bill" Anders
1933년 10월 17일에 태어난 미국의 군인, 우주 비행사. 아폴로 계획 시절 활동했다.
태어난 곳이 홍콩이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미 해군 함정을 타고 다니던 해군이라서 홍콩에서 태어난 것. 이 때문에 중국의 양리웨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일지언정 최초의 중국 태생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달 수 없다(...)[1] 미국에 와서는 보이스카웃을 하다가 1951년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55년에 미 공군으로 임관했다. 토머스 스태퍼드도 같은 코스를 밟았다. 공군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총 비행시간은 6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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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NASA의 우주 비행사 선발에 뽑혔다. 1968년 크리스마스에는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 착륙선을 완성하고 로켓 개발에 착수한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달 착륙선이 완성되기도 전에 최신형이지만 유인 우주 개발에서 단 한번도 테스트된적 없던 새턴 V 로켓으로 발사된 아폴로 8호를 타고 달을 갔다왔다. 직위는 달 착륙선 조종사였지만 정작 달 착륙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에[2] 실질적으로 달 착륙선을 만질 일은 없었다. 게다가 8호에서는 안그래도 테스트된적 없는 새턴 V 로켓을 써야 했고, 달에서 지구 쪽으로 쓸 수 있는 부스터도 딱 하나 뿐이라 실패하면 망했어요가 되는 몹시 위험한 미션이었지만 무사히 귀환했고,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되고 68운동이 벌어지고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며 혼란스러운 사회상이 빚어지던 미국과 세계의 1968년을 훈훈하게 마무리하였다.
당시 지구돋이(Earthrise)[3] 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지구에서 달까지 드라마에서 이 장면이 매우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명장면으로 연출된다. 위 영상의 제목은 Moon Rise지만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 올린 이가 혼동한 모양. 또한 성경 창세기를 프랭크 보먼, 짐 러블과 돌아가며 읽으며 전 지구의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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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에서 달 착륙에 대비해 지질학 교육을 받던 시절의 사진. 1967년에 찍힌 것이다. 2010년대에 찍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패션센스들이 두드러진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백업 사령선 조종사로서 근무[4] 한 뒤 NASA에서 대통령과 내각에게 자문을 하는 항공우주평의회(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Council)[5] 로 전속되었다. 아무래도 원자력 관련 전공[6] 을 가진 인물이며 국민적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백악관에서 가까이 두려고 했던 듯. 사실 본인도 달을 한 번 비행했는데 이번에도 착륙할 기회가 없다는 점에 대해 섭섭하게 여겨서 디크 슬레이튼에게 로테이션 제외를 요청했던 모양.[7][8] 노르웨이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고 1977년에 공직을 떠났다. 최종 계급은 공군 소장이었다.
최초로 달 궤도에 진입했던 아폴로 8호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달의 한 크레이터에 이름이 남겨졌고, 오늘날에도 NASA의 각종 행사에 함께하고 있다. 2003년 STS-107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폭발사고에서 사후대책 마련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각종 에어쇼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이며 밀덕후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중.
[1] 이외에 NASA에는 대만 태생이거나 중국계 혼혈인 우주비행사들도 역대 여럿 있다보니...[2] 착륙선의 테스트는 9호에서 처음 이뤄졌다. 9호는 착륙선 테스트를 지구 궤도에서 하느라 달에 가지 않았고, 10호는 착륙선을 달 궤도에서 분리하여 달 상공에 접근하는 테스트를 실시하였으며(아직 월면에서의 이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착륙하지 못했다), 11호가 달에 진짜 착륙한 미션이 되었다.[3]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일을 말한다. 이는 정작 지구와 한 면만 바라보고 있는 달 표면에 착륙해서는 목격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아폴로 8호가 달 뒷면에서 앞면으로 넘어오면서 생생히 목격되었다. 이 광경은 NASA의 역사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남게 되며, 1968년 말에도 소련한테 지는거 아닌가, 존 F. 케네디의 유훈이 실천되지 못하는가 하며 초조해하던 미국인들에게 달 착륙이 머지 않았음을 체감하게 하였다. [4] 아폴로 8호의 백업이 암스트롱의 팀이었고 11호의 백업이 아폴로 8호 사령선 조종사 짐 러블의 팀이었다. 이런저런 인원 교체가 있기야 했다만, 대체로 n회 미션의 백업은 n+3회 미션의 정규 팀이 되는 시스템이 이 시절 NASA의 일반적인 로테이션이었다.[5] 1973년 이후로는 이름이 우주평의회(National Space Council)로 바뀌었다.[6] 다른 우주비행사들은 대부분 항공공학 석사학위를 가졌지만 앤더스의 공군과학기술원(Air Force Institute of Technology) 시절 전공은 원자력공학이었다.[7]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아폴로 우주선의 인원 서열은 사령선 조종사가 달 착륙선 조종사보다 위였다. 때문에 n회의 사령관은 이후 새 팀원을 받거나 차기 프로그램으로 전속되고, n+3회 백업 겸 n+6회 사령관은 사령선 조종사가 되며 달 착륙선 조종사는 그 미션의 사령선 조종사가 되는 식이었다. 이런 로테이션은 제미니 시절부터 이어진 것을 적절히 수정한 것이라 웬만큼 잘 돌아갔으나 앤더스처럼 달에 두번이나 갔는데 왜 착륙을 안 시켜주냐는 불만을 갖게 되는 사례가 나올 수 있었다. 비슷한 사례는 아폴로 16호 사령선 조종사 자리를 거절했다가 마이클 콜린스에게 17호 사령관 자리를 양보받은 유진 서넌이 있다.[8] 이 때 앤더스의 자리에 대신 들어온 우주비행사는 켄 매팅리였다. 물론 매팅리는 홍역 소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