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미니 계획

 



[image]
미국의 유인 우주계획.
머큐리 계획으로 막 인간을 우주로 보낸 직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NASA아폴로 계획을 수립하는데...
1. 개요
2. 배경
3. 머큐리 계획 종료 후 소강기
4. 미션
4.1. 제미니 1호
4.2. 제미니 2호
4.3. 제미니 3호
4.4. 제미니 4호
4.5. 제미니 5호
4.6. 제미니 6A호
4.7. 제미니 7호
4.8. 제미니 8호
4.9. 제미니 9A호
4.10. 제미니 10호
4.11. 제미니 11호
4.12. 제미니 12호


1. 개요


제미니 계획(Project Gemini)은 1964년 부터 1966년까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의해 이루어진 미국의 유인 우주 진출 계획이다.
아폴로 계획을 성공하려면, 우주선의 사령선과 달 착륙선이 우주에서 여러차례 도킹과 분리를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1960년대 초의 미국 우주 기술로는 과연 우주에서 우주선이 어떻게 움직여야 서로 근접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소련은 이미 보스토크 계획에서 두 우주선의 근접까지는 성공한 상황이었다.
사실 인간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세간에서 진지하게 고려되던 방안은 인간을 식량과 함께 먼저 달에 보낸 후 몇 년 후에 귀환 기술이 개발되면 그때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던 60년대 중반에 언론에서 가장 진지하게 얘기되고 있던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기술로도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까지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NASA는 인간을 귀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게 개발될 때까지는 인간을 달로 보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인간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기 위한 아폴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해결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 범주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3인승에다가 달착륙선까지 포함된 엄청난 무게를 지구 궤도로 올릴 수 있는 막강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이와 더불어 우주 공간에서 랑데뷰, 도킹, 분리 등의 갖가지 비행 기술을 실행, 발전시킬 필요도 있었다. 이 두 가지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에는 존 F. 케네디가 제시한 60년대 안이라는 기간은 너무나 촉박했다. 이에 NASA는 투 트랙 전략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아폴로 계획 실현을 위한 새턴 로켓 개발을 진행함과 동시에 선결조건인 우주에서의 도킹과 분리를 실제로 실행해 볼 프로그램을 병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시된 것이 제미니 계획이다.
[image]
제미니 우주선은 2인승으로 제작되었다. 명칭인 제미니(쌍둥이자리)도 2인승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전의 머큐리 계획 및 이후의 아폴로 계획에서는 로켓이 발사대에서 폭발할 경우 사령선 위에 달린 탈출로켓이 점화되어 사령선을 폭발 반경에서 멀찍이 떼어놓는 구조였으나, 제미니 우주선은 비용 절감을 위해 탈출로켓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전투기용 사출좌석을 설치하여 로켓 폭발시 우주비행사가 사출좌석으로 탈출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 사출 시스템도 실제 쓸 일이 다행히 없었기에 망정이지 문제가 좀 많은게 아니었다. 탈출을 결정하면 우주선의 해치가 열리고 승무원이 튕겨나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 같다면 그것은 오산이었다. 두 승무원이 동시에 탈출해야 하는 순간에 한 명이라도 어정쩡하게 된다면 그 남은 사람은 '''바베큐'''가 되고, 만약 사출은 제대로 되는데 그 순간 해치가 안 열리면(...) 제미니의 유인 초도비행 임무를 수행했던 존 영의 회고에 따르면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마네킹이 머리에서부터 통째로 개발살나는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 많았다고.
[image]
제미니는 앞선 머큐리와 달리 2인승이었는데다가 여러 추가적인 여러 장비를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큰 중량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NASA는 발사체 개발역량을 모조리 3인승 아폴로 계획을 위한 새턴 로켓 개발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제미니를 위한 별도의 발사체를 개발하는 대신 미 공군의 ICBM타이탄을 이용하여 발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록 타이탄이 미국의 ICBM 중 가장 큰 로켓이었지만[1] 2인승 우주선을 발사시키기엔 다소 부족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미니 우주선은 불필요한 중량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로 제작되었다. 탈출용 로켓이 부착되지 못한 것도 발사 중량 문제 때문이었다.

2. 배경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 성공시키면서 촉발된 우주 경쟁은 이후에도 소련이 최초로 개를 우주 비행하는데 성공시킴으로써 일찌감치 미국을 크게 따돌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은 급히 미 항공우주국 NASA를 출범시키고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을 소련보다 먼저 성공시키기 위해 머큐리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역시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성공하고 말았다. 미국도 뒤늦게 머큐리 계획을 성공시켰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1960년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 안에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선언으로 NASA는 본격적으로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3. 머큐리 계획 종료 후 소강기


NASA는 아폴로 계획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기로 하고 1963년 5월 머큐리 계획을 조기 종료하였다. 이후 제미니 계획이 시작된 1965년 3월까지 2년간 미국은 아폴로 계획과 제미니 계획을 병행 준비하느라 아무런 우주선도 발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기간 중에 소련은 보스토크, 보스호드 계획을 연이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최초로 여성을 우주로 보냈고, 3인승 우주선을 발사를 성공시켰고, 우주유영(EVA)을 성공하는 등 미국과의 격차를 크게 벌려나가고 있었다.
소련이 눈에 보이는 여러 업적 등을 달성하며 앞서나가는 동안, 미국도 착실히 다음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언론에서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폰 브라운과 NASA는 여론과 언론의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60년대 안에 달에 갔다온다는 목표에 집중하면서 이러한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고 나서도 대중들의 흥미를 끌만한 미션 구성을 배격하고 오로지 달 착륙을 위한 선결 기술 습득이라는 목표에 따라 미션을 구성하고 준비가 완료되자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이 제미니 계획 미션들을 연이어 추진했다.

4. 미션


머큐리 계획 종료 이후 2년간의 공백 끝에 1965년 제미니 계획이 일단 시작되자 숨돌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미션들이 진행되었다.
승무원들의 배정을 보면 대체로 이후의 아폴로 미션들과 싱크로가 맞는 편인데, 이는 디크 슬레이튼이 제시한 3+3교대 로테이션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제미니에서 함께 활동한 우주비행사들은 아폴로에서도 같이 활동하거나 비록 다른 미션이라도 정규팀/백업으로 한 훈련을 거치며 호흡을 맞추게 된다.

4.1. 제미니 1호


우주선 시험을 위해 무인으로 발사되었으며, 1964년 4월 8일 발사되어 4일간 궤도를 돈 후 대기권에 재진입 시 열차폐 시스템 고장으로 파괴되었다.

4.2. 제미니 2호


제미니 1호의 실패를 반영하여 열차폐 시스템을 개량하여 시험용으로 1965년 1월 19일 무인 발사되어 탄도비행 후 재진입에 성공하였다.

4.3. 제미니 3호


제미니 3호는 인간이 처음으로 탑승한 유인 제미니 계획으로, 앞서 두번의 무인 비행은 시험적인 성격이었고, 3호부터 제미니 계획의 본격적인 시작에 해당한다. NASA는 1965년 3월 23일 이후에 유인 제미니 우주선(제미니 3호)이 발사될 것이라 미리 예고했는데, 역시 우려대로 소련은 제미니 3호 발사 일주일 전에 보스호드 2호를 발사시켰다. 이 비행에서 소련의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개발사에 길이 남은 최초의 우주유영(EVA)을 성공시켜 전세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당시 레오노프의 우주유영 모습은 TV로 전세계로 중계되며 세계인을 열광시켰다. 보스호드 2호의 우주유영 성공으로 제미니 계획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미니 3호에는 머큐리 계획에서 리버티벨 7호의 조종사였던 거스 그리섬과, 신입 우주비행사 존 영이 탑승했다. 제미니 3호는 1965년 3월 23일 발사되어 지구를 3바퀴 돌면서 각종 기능 테스트 후 당일 귀환하였다. 비행 자체는 나무랄 데 없었다.
거스 그리섬은 후일 아폴로 1호의 사령관이 되나 화재사고로 순직하였다.
존 영은 후일 아폴로 16호 사령관으로 달 착륙에 성공하였고, 우주왕복선의 시대를 여는 STS-1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제미니 시절의 멤버들 중 가장 오랫동안 NASA에서 근무했다.
예정대로라면 앨런 셰퍼드토머스 스태퍼드가 올라가야 했지만, 셰퍼드의 귓병크리가 뜨며 셰퍼드는 물론 스태퍼드도 함께 잘렸다. 지못미. 그래도 스태퍼드는 팀을 바꿔서나마 계속 참여할 수 있었지만 셰퍼드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정직을 전전하며 마음고생을 하다 시험적인 수술을 받은 것이 성공하여 아폴로 14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가게 된다.

4.4. 제미니 4호


제임스 맥디비트, 에드워드 화이트 탑승.
1965년 6월 3일 발사되어 6월 7일 귀환했다.
[image]
이 비행 도중 에드워드 화이트는 미국 최초의 우주유영(EVA)을 22분간 시행했다. 인류 전체로도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에 이어서 2번째 우주유영(EVA)이었다. 사실 미국의 우주비행사들도 레오노프의 EVA가 성공하기 전부터 우주유영(EVA)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NASA는 1966년경 실제로 우주유영을 실시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이 이에 먼저 성공한 후 제미니 4호의 승무원들이 자신들도 우주유영을 시도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결국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계획에 포함되게 되었다.
제미니 4호의 우주유영(EVA)은 이동 보조 기구인 '우주 총'을 사용하여 레오노프보다 더 원활한 EVA이 가능했다...만 화이트가 '''얼쑤 좋다'''면서 일찍 다 써버렸다(...) 그리고 레오노프의 기록을 넘어섰으니 그만 들어오라고 휴스턴에서 잔소리를 하자 '''두 사람 모두 수신이 안되는 척하면서 우주유영(EVA)을 즐겼다.''' 다시 통신을 재개하고 나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으려다가 결국 들어왔는데, 그때 화이트가 남긴 말이 "평생 제일 슬픈 순간이구만..." 이 말은 정지위성의 생중계를 타고 전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이 EVA의 성공으로 제미니 4호는 제미니 계획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미션이 되었다.
제미니 4호의 또다른 중요한 임무는 랑데부였다. EVA가 큰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곁다리 계획이었고 랑데부가 제미니 4호의 본 목적이었다. 랑데부는 도킹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선결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제미니 4호는 발사되어 타이탄 로켓에서 분리된 직후 자신을 궤도에 올려놓은 타이탄의 2단계 로켓과 랑데부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미니 4호의 랑데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종사 맥디비트는 타이탄 2단계 로켓과 접근을 시도했지만 약1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후 어찌된 영문인지 더이상의 접근은 커녕 오히려 멀어져만 갔다. 비록 제미니 4호는 랑데부에 실패했지만 이어진 인상적인 우주유영(EVA) 미션에 성공하면서 그 실패는 쉽게 잊혀지게 되었다.
제미니 4호의 랑데부 실패에 대해 언론은 제미니에 더 강력한 추진로켓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NASA의 한 공학자가 궤도역학에서 실패의 원인을 밝혀내었다. 즉 궤도상에서 앞선 물체를 따라 잡기 위해 속도를 높이면 궤도가 높아지게 되고 그 결과 저궤도의 표적보다 더 느려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 발견은 향후 NASA의 우주궤도 비행에 큰 교훈을 주었다.
제미니 4호 발사 전인 4월에 세계최초의 상업 정지위성인 인텔셋 1호(Intelsat I, 별칭은 얼리버드(Early Bird))가 소어-델타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이로써 영국의 SF 작가 아서 C. 클라크가 상상했던 구상이 현실화되었다. 인텔셋 1호 덕분에 제미니 4호의 발사 및 우주유영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제임스 맥디비트는 후일 아폴로 9호 사령관이 되어 달착륙선을 테스트했다.
에드워드 화이트는 아폴로 1호 승무원으로 선발되었다가, 거스 그리섬과 함께 화재사고로 순직하였다.

4.5. 제미니 5호


고든 쿠퍼, 피트 콘래드 탑승.
1965년 8월 21일 발사, 8월 27일 귀환했다.
함께 발사된 표적 위성과의 랑데부를 시도했으나 기기 고장으로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
고든 쿠퍼는 머큐리 계획의 'Faith 7' 조종사였던 고참으로, 이 비행이 마지막 비행이었다. 원래 아폴로 13호(짐 러블의 14호 팀과 교체되는 앨런 셰퍼드의 팀)의 사령관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훈련 불성실을 이유로 잘렸다(...)
피트 콘래드는 제미니 11호, 아폴로 12호, 스카이랩 2호 등 이후 3회에 걸쳐 성공적인 미션을 수행하였다.

4.6. 제미니 6A호


1965년 12월 15일 발사, 12월 16일 귀환했다. 월리 시라, 토머스 스태퍼드 탑승.
[image]
아제나 위성
제미니 6호 미션의 목표는 표적 위성인 ATV(아제나) 위성과 랑데부를 하는 것이었다. 1965년 10월 26일 발사 예정이었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제나가 먼저 발사되어 궤도에 진입한 직후 제미니 6호가 발사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먼저 발사된 아제나는 발사 도중 폭발해 버렸고, 이미 발사 준비에 들어갔던 제미니 6호는 긴급히 카운트 다운을 중단하였고 발사는 잠정 연기되었다.
아제나 위성은 이미 여러 차례 발사되어 안정성이 검증된 위성이었지만 제미니 계획을 위해 추가적인 개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그것이 폭발의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NASA의 거듭된 회의 끝에 아제나를 또 발사시켜 랑데부하는 대신 아예 다음에 발사될 제미니 7호와 함께 랑데부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미션 명칭도 제미니 6A로 변경되었다. 우주에서 장기 체류를 테스트하는 미션을 수행하기로 되어있는 제미니 7호가 먼저 발사되고 나서 며칠 후에 제미니 6A호가 뒤이어 발사되어 두 우주선간에 랑데부를 시행하기로 했다.
제미니 7호가 1965년 12월 4일 먼저 발사되었고, 제미니 6A호는 12일에 발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발사 당일 카운트 다운 10초에서 제로까지 쫙 세고도 엔진이 발사 직전 꺼져버리는 바람에 발사가 연기되었다.[2] 다행히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파악되었고 이를 해결하고 사흘 후인 15일에 발사에 성공했다.
제미니 7호는 우주에서 14일간이나 지나야했기 때문에 연료를 아껴야 해서 궤도를 도는 표적 역할을 했고 실질적인 랑데부 임무는 제미니 6A가 수행했다. 제미니 6A호의 조종사들은 제미니 7호 주위에서 선체를 이리저리 조종해가면서 랑데부 임무를 수행했고, 최대 30cm 거리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제미니 6A호는 제미니 7호와의 랑데부 미션을 성공 후 바로 지구로 귀환하였다. 아제나가 없으니 딱히 더 할 일도 없었으니... 대신 이 미션에서 월리 시라는 뭐라도 해보려는 생각이었는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다고 '''하모니카'''를 들고가서 캐럴을 연주했다. '''올ㅋ 북극에서 뭐가 지나간다'''는 말을 하더니...
이 때의 하모니카는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 연주된 악기'''로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미니 6A호의 성공적인 랑데부 임무 수행으로, NASA는 우주에서 도킹이 가능한 수준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제미니 8호에서 도킹 미션을 테스트하게 된다.
월리 시라는 아폴로 계획의 첫 유인비행인 아폴로 7호 사령관으로 비행하고 은퇴했다. 다만 마지막 미션에서 우주에서 감기에 걸리는 충공깽한 쫑파티를 치렀고, 그것이 동료 돈 아이즐리와 월터 커닝햄에게 옮아서 셋 다 콜록콜록...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해져 관제팀과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지구로 귀환한 뒤 은퇴하는 시라는 물론 나머지 둘까지 비행자격이 박탈당했다(...)
토머스 스태퍼드는 이후 아폴로 10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의 아폴로 측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4.7. 제미니 7호


프랭크 보먼, 짐 러블 탑승.
1965년 12월 4일 발사, 12월 18일 귀환했다.
제미니 7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폴로 계획에서 요구되는 1주일 이상의 우주 체류가 가능한지 실험하는 것이었다. 제미니 7호는 총 14일간 우주에 체류하였다. 중간에 제미니 6A호와의 랑데부 임무도 추가되었다. 또한 경량형 신형 우주복의 시험 임무도 있었으나 이 미션에서 사용한 결과가 기대에 못미쳐 신형 우주복 계획은 폐기되었다.
[image]
제미니 6A호에서 바라본 제미니 7호
[image]
2주간 우주에서 버티는 미션은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미션이었다. 당시 의료계와 생리학계에서는 4일 이상의 장기 우주 체류는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주일의 우주 체류도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사흘로 줄여야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에 제미니 7호가 실시한 2주간의 우주 체류는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제미니 7호가 세운 2주간의 우주 비행 기록은 1970년 러시아의 소유즈 9호가 18일 동안 비행을 하고 나서야 깨졌다.
12월 15일 제미니 6A호와 랑데부를 시도하여 최근접거리 30c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하였다. 랑데부 임무에서 제미니 7호는 14일간의 우주 체류를 위해 연료를 아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표적 임무를 맡았고, 제미니 6A호가 7호 주변에서 선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랑데부 임무를 수행했다. 임무 도중 제미니 6A는 최대 0.3미터의 가까운 거리까지 제미니 7호에 접근하기도 했고, 제미니 7호와 기수를 마주하도록 하며 두 우주선의 조종사들이 서로 육안으로 얼굴을 마주하기도 했다. 랑데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제미니 6A호는 제미니 7호를 뒤로 남겨둔 채 곧바로 지구로 귀환했고, 제미니 7호는 이후로도 사흘을 우주에서 더 머물다가 귀환해야 했다.
먼저 우주에 갔던 조종사들이 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책을 가져갈 것을 권유했지만 표지만 슬적 보는 정도에 그쳤다고. 귀환시 제미니 7호 비행사들은 2주 동안 씼지도 못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꾀죄죄한 모습으로 지구로 귀환했다. 제미니 7호 미션의 성공으로 아폴로 계획에 필요한 일주일 이상의 장기 우주체류에 대한 우려는 불식되었다.
프랭크 보먼과 짐 러블은 이후 처음으로 달을 돌고 온 아폴로 8호에서 함께 했으며, 짐 러블은 이후 아폴로 13호의 사령관으로 다시 달로 향하나...

4.8. 제미니 8호


1966년 3월 16일 발사, 3월 17일 귀환했다. 닐 암스트롱, 데이비드 스콧 탑승.
닐 암스트롱은 우주에 간 미국인 중 두번째의 민간인(현역/예비역 군인이 아닌 제대군인) 우주비행사였으며[3], 머큐리 계획 이전부터 MISS 등 여러 우주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제미니 8호 미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상에서 우주선끼리 도킹'''(이는 소련도 아직 못했던 것이었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제미니 계획 자체의 목적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제미니 8호는 아제나 표적 위성과의 도킹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그 밖에도 부조종사인 스콧이 우주 유영을 실시하면서 선체의 표면에 붙어 후미까지 이동하고 우주상에서 직접 선체를 가상 수리하는 미션이 실행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스콧은 우주에서 스핀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나사를 돌리기 위한 훈련을 지상에서 수개월 동안 반복해서 수행했다. 또 새로 개발된 우주 총이 스콧의 우주 유영에 사용될 계획이었다. 우주총이란 간단한 형태의 추진 기관으로, 총의 반동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원리이다.
1966년 3월 16일 아제나 위성이 먼저 발사되었고, 41분 후 제미니 8호가 뒤이어 발사되었다. 약 5시간 43분간의 조종 끝에 발사 6시간 33분 후 제미니 8호는 아제나 표적 위성에 도달하였다. 36분 후 지상 관제센터로 부터 도킹 명령이 떨어졌고, 암스트롱은 아제나와 도킹을 수행했다. 암스트롱이 미동도 느끼기 힘들었다고 보고할 정도로 성공적인 도킹이었다. 문 레이스 역사상 손꼽힐 만한 역사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통제센터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도킹 성공의 기쁨도 잠시였다. 아제나의 선체를 90도 회전 시키는 프로그램이 자동적으로 실행되었고 선체가 90도 회전되자 제미니의 8번 OAMS[4] 자세제어 로켓이 켜진 상태로 고정되었다. 곧 스콧은 선체가 회전하는 것을 감지하였고 암스트롱은 수동으로 우주선을 조작하여 회전을 멈추어 봤으나 다시 곧 우주선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은 더 빨라져 곧 우주선이 스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자세제어 로켓의 고장이 원인이었지만, 당시 제미니는 후면을 살펴볼 수 없었기 때문에 스핀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5] 게다가 당시 제미니는 음영 지역에 있었기에 관제소와 통신이 불가했다. 아제나 위성의 제어 문제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또한 아제나는 거대한 연료 탱크였기에 폭발을 우려하여 사령관 암스트롱은 도킹 27분만에 결국 도킹을 해제했으나, 우주선의 스핀은 더 심해졌다. 이제 스핀의 원인이 아제나가 아닌 제미니 8호 자체에 있는 것이 명백해졌으나 여전히 구체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주선의 빠른 회전으로[6] 조종사들은 시야가 흐려지고 어지러움을 겪었다. 머큐리-제미니 계획을 통털어서 유인 우주 계획에서 NASA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사령관 암스트롱은 결국 미션 중단을 결정하고 OAMS를 끄고 귀환선에 별도로 부착 되어있는 재진입 자세제어 로켓을 이용하여 스핀을 멈췄다.[7] 스콧이 열심히 연습했던 화려한 우주 유영 시범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제미니 8호는 비상귀환 절차에 따라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원래 카리브해에 떨어지기로 했던 것이 며칠이나 일찍 급히 재돌입하다보니 서태평양 남중국해 오키나와 동부 800km 요코스카 남부 1000km 해상(즉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근방''')에 착수하고 말았다.[8]
아무튼 엘리엇 시, 찰스 바셋의 사망 외에는 거침없이 순항하던 미국의 우주 계획은 이 제미니 8호에서 처음으로 우주에서 중대한 사고를 겪었고, 제미니 8호는 우주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들을 해결하는 노하우의 밑바탕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미션이 인명사고로 이어졌더라면 발사 몇주 전 발생한 9호 팀의 사망사고까지 겹치며 미국의 문 레이스는 끝장날 수 있었는데, 이런 사고가 터졌음에도 기민한 대처로 미션을 적절히 마무리한 것이었다.
이때의 위기대처 능력을 인정받아 닐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 되어 달에 맨 처음 내린 사람이 된다.
데이비드 스콧은 아폴로 9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활동하고 아폴로 15호 사령관이 되어 역시 달에 가게 된다.
이 사건은 영화 인터스텔라 중 인듀어런스 도킹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
영화 퍼스트맨에서 닐 암스트롱의 중대한 사건 중에 대부분 보여준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장갑과 헬멧이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4.9. 제미니 9A호


토머스 스태퍼드, 유진 서넌 탑승.
1966년 6월 3일 발사, 6월 6일 귀환했다.
원래 엘리엇 시, 찰스 바셋이 탑승할 승무원이었고, 스태퍼드와 서넌은 백업 승무원이었으나, 발사를 앞둔 1966년 2월 28일에 비행 훈련 중이던 시와 바셋이 T-38 훈련기 추락사고[9]로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백업팀이 탑승하게 되었고 미션 번호도 9호에서 9A호로 변경되었다.
원래 임무는 제미니 8호에서 고장으로 인해 제대로 테스트되지 않은 아제나 표적 로켓과의 도킹-분리-재도킹 시험이었으나...
[image]
아제나 표적의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아 도킹을 할수 없는 상태였다. 우주비행사들은 '마치 성난 악어같군!'하고 외쳤다.
대신 유진 서넌이 2시간 동안의 EVA를 실시하는 등 다른 테스트 후 귀환했다. 다만 이 당시 서넌은 (하술할) 공군의 유인 우주 프로그램 MOL에서 써먹을 '''무선 EVA 장치(Astronaut Maneuvering Unit, AMU)를 테스트할 예정'''이었지만 피곤에 쩔어있었고 고열 증세도 보였던지라 테스트가 미뤄졌는데, AMU는 제미니 12호에도 탑승하지 못한 뒤 MOL이 끝내 취소되며 우주에서 써먹지 못했다.[10][11]
유진 서넌은 이후 아폴로 10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배정되어 스태퍼드와 함께 달 궤도에서의 달 착륙선 비행을 테스트했다. 후일 마지막 달 착륙 미션인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 되어 마지막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된다.

4.10. 제미니 10호


존 영, 마이클 콜린스 탑승.
1966년 6월 18일 발사, 6월 21일 귀환했다.
제미니 8호가 도킹했었던 아제나 표적과 랑데부 후 도킹 시도를 했으나 도킹에는 실패하였으며, 콜린스는 비행 중 2회의 EVA를 수행했다.[12]
마이클 콜린스는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조종사가 된다.
존 영은 후에 아폴로 16호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에 탑승하게 된다

4.11. 제미니 11호


피트 콘래드, 리처드 고든 탑승.
1966년 9월 12일 발사, 9월 15일 귀환했다.
아제나 표적 로켓과 랑데부 및 도킹에 성공하였으며, 제미니와 아제나를 로프로 연결한 후 회전시켜 인공 중력을 만드는 실험에도 성공했다.
콘래드와 고든은 아폴로 12호에서도 다시 한 팀이 된다.(콘래드-사령관, 고든-사령선 조종사)

4.12. 제미니 12호


짐 러블, 버즈 올드린 탑승.
1966년 11월 11일 발사, 11월 15일 귀환했다.
아제나 표적과 도킹한 후 궤도를 740 km 까지 올린 다음, 다시 300 km로 회복시켜 아폴로 계획에서 요구되는 궤도의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MIT에서 EVA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땄던 올드린은 자신의 첫 미션에서 3회에 걸쳐 EVA를 수행한 뒤 누적 최장시간 EVA 기록을 찍었으며, 러블은 최장시간 우주비행 기록을 썼다.
버즈 올드린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사진 중 하나를 남겼다.
아폴로 계획을 다룬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에서의 연출이 좀 약을 빨았는데, 버즈 올드린이 EVA를 하다가 우주선에 올라타(?)서 달을 바라보고 우주선의 비행 방향은 달이 보이는 쪽(...)

5. 공군


NASA가 제미니 계획을 종료하고 아폴로 계획으로 넘어갈 무렵, 미국은 소련이 살류트 우주 정거장을 계획 중이며 이는 군사적 목적(알마즈 프로그램)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펜타곤이 내린 결론은 미국이 먼저 군사용 우주 정거장을 발사하자는 것이었고, 여기에 NASA에서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제미니 우주선을 사용하자는 결론이 났다.
[image]
'블루 제미니'라는 별명은 실제로 우주선이 청색이어서가 아니라 미 공군의 상징색인 청색을 일컫는 것이다.
펜타곤과 미 공군은 최종적으로 '키홀-10 유인 궤도 실험실(Manned Orbiting Laboratory)'이라는 군사용 우주 정거장을 계획했고, 제미니 우주선은 이 정거장까지의 왕복 수단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image]
[image]
[image]
미 공군은 1966년 11월 3일 이 우주 정거장의 목업을 실제로 발사하고, 여기에 탑승할 공군 자체의 우주비행사까지 선발[13]하고 전용 우주복[14]까지 개발했을 정도로 계획이 구체화되었지만, 결국 예산 문제로 백지화되었고, 공군이 선발했던 우주비행사 일부는 NASA로 파견되어 NASA 우주인단에 합류, 나머지는 원대 복귀 되었다.[15]
[image]
심지어는 12인승 '빅 제미니'라는 것도 제안되었을 정도였다고...
[1] ICBM 기준 전장 31.4m 지름 3.05m, 무게 154t. 머큐리 계획에 사용된 아틀라스랑 비교해봐도 거의 1.5배의 중량을 가진 로켓이다. 출력 차이는 그보다 좀 적어서 아틀라스는 부스터단계에서 1600kN, 타이탄 II는 1단에서 1900kN.[2] 3일을 더 미룬 것은 안자랑. 그래도 불붙고 땅에서 뜨기 전에 일찍 꺼져서 가만히 있었던 터라 사출좌석 억지로 쓸 일도 없었다는게 자랑. 만약 떠오르다가 갑자기 꺼졌다면 더 큰일날 뻔했다.[3] X-15를 타고 고도 100km를 돌파한 MISS 시절의 테스트 파일럿 조셉 워커가 첫째.[4] 궤도 이동 및 자세제어 시스템, 기계선에 부착되어 있으며 기계선 분리 전까지 자세 제어와 궤도 이동에 사용된다.[5] 사실 관제 센터에서는 이미 자세제어 장치 프로그램의 이상을 인지하였고 문제가 생길 경우 도킹을 취소하라고 당부하긴 하였다.[6] 당시 회전 속도가 초당 300도에 근접하였다![7] 이 회전을 멈추기 위해 무려 75%의 연료가 소모되었다.[8] 결국 베트남 전쟁 뛰던 공군 항공구조대를 부랴부랴 불러와서 구조했다.[9] 맥도널의 공장을 방문하려고 T-38에 탑승하여 함께 비행하다가 활주로를 잘못 보고 헤매다가 추락했는데, 둘이 방문하려던 우주선 만들던 공장(!) 지붕에 떨어졌다.[10] 대신 이런 무선 EVA라는 아이디어는 NASA에서 받아들여서 Manned Maneuvering Unit(MMU)를 개발하고, 이는 우주왕복선 미션에서 몇번 써먹는다.[11] 디크 슬레이튼은 자서전에서 이 무선 EVA 장치에 대해 언급하며 공군 측에서는 AMU가 적국의 인공위성을 관찰/감시하는 데에 용이할거라 여겨서 개발했을 것이라 회고했다.[12] 콜린스는 이 우주유영 중 카메라를 분실했다.[13]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계획한 것은 펜타곤이었기 때문에 공군 뿐만 아니라 해군에서도 적지 않은 인원을 데려왔다.[14] 영화 아폴로 13에서 살짝 등장한다. 우주선 내에 있는 물건들만으로 휴스턴에서 이산화탄소 필터를 만드는 장면에서 웬놈의 푸른색 우주복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다.[15] 이때 원대복귀한 인원 중 로버트 헤레스는 공군에서 4성을 달고 NORAD사령관과 합동참모차장까지 지낸다. 그리고 제임스 앨런 에이브러햄슨우주왕복선 개발의 책임자로 활약한 뒤 SDI 을 주도했다. 그리고 NASA로 편입된 인원 중에는 최초의 우주왕복선 미션에서 조종사로 우주에 올라갔던 로버트 크리펜(위 사진의 인물)과 NASA 국장을 지낸 리처드 트룰리가 있다. 이들을 포함해 공군에서 보내진 인원들은 아폴로 시절 선발된 인원들과 함께 아폴로 이후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과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