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텔루스 피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

'''생몰년도'''
기원전 130년 ~ 기원전 63년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지위'''
노빌레스
'''칭호'''
피우스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삼촌)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사촌)술라의 아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사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장인)
무키아 세쿤다(아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양자)
코르넬리아 메텔라(손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손녀사위)
'''참전'''
유구르타 전쟁
동맹시 전쟁
세르토리우스 전쟁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80년
'''전임'''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동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후임'''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아이사우리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로마 공화정 최고 사제'''
'''임기'''
기원전 81년 ~ 기원전 63년
'''전임'''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후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1. 개요
2. 생애


1. 개요


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109년에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유구르타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고 동맹시 전쟁, 세르토리우스 전쟁에 참전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2. 생애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했던 집정관 메텔루스는 투르필리우스의 처형 문제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불화가 생겼고 마리우스가 집정관 출마를 위해 귀국을 요구하자 메텔루스 피우스가 집정관 후보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며 마리우스를 조소하였다. 결국 집정관에 선출된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게 되자 아버지 메텔루스와 함께 귀국하였고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기원전 89년도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군단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마르시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적으로 이듬해인 기원전 88년에 법무관으로 선출되었고 마르시족의 지도자인 퀸투스 폼파이디우스 실로를 격퇴하면서 기원전 87년에 전직 법무관 권한으로 삼니움족을 상대하게 될 예정이었으나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라에 의해 북아프리카로 추방된 마리우스를 불러들이자 삼니움족과 평화 협정을 맺고 북아프리카로 피신한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킨나와 마리우스의 적수인 술라와 합류할 의도로 군단을 편성하고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끝낸 술라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아피아 가도에서 술라와 합류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메텔루스 피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했다.

기원전 82년, 메텔루스 피우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단을 이끌고 술라와 합류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피케눔에서 군단장 가이우스 카리나스와 집정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격퇴하면서 폼페이우스와 함께 술라 휘하에서 입지를 다져나갔고 마침내 기원전 80년, 술라와 함께 공동 집정관에 취임한다.
그 해에 마리우스의 장교였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민중파를 규합하자 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79년에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어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히스파니아의 총독인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메텔루스 휘하의 군단장 루키우스 토리우스 발부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전사하면서 기선이 꺾인 메텔루스는 세르토리우스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에트루리아에서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가 지원군을 이끌고 히스파니아 전선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도착했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레피두스의 군단장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벤토와 합류하면서 군세가 늘어난 세르토리우스가 라우론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자 메텔루스 피우스가 폼페이우스를 구출하기도 했고 기원전 75년에 폼페이우스가 발렌티아에서 페르페르나를,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탈리카에서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격퇴한 끝에 사군툼에서 벌어진 세르토리우스와의 결전에서 히르툴레이우스를 사살하는 등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결국 기원전 72년, 히스파니아의 원주민들을 중용하는 세르토리우스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페르페르나에 의해 세르토리우스가 사망하고 페르페르나가 폼페이우스에게 패사하면서 전쟁이 끝나자 기원전 71년 12월 30일에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로 개선하는 영예를 누린다.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는 원래는 나쁘지 않았지만 메텔루스 가문이 골수 원로원파였던 것에 비해 폼페이우스는 명성이 지나칠 정도로 드높았고 수많은 초법적 군사령관 직위까지 역임했기에 말년에는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한다.
친자녀가 없었기에 스키피오 가문에서 들인 양자로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있지만 메텔루스 피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스키피오 가문원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메텔루스 피우스가 죽은 후에야 그 재산이 스키피오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사후 그가 맡고 있던 최고 제사장 자리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선되었다.
술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적인 면모 때문에 트위터 등 여성형 팬덤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끝까지 한 사람에게 충성했고 변함 없는 충절을 보였다는 점, 개인적으로 신뢰하여 술라가 함께 집정관에 지명하고 최고 제사장직을 주었다는 점을 보면 삼국지의 심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심배는 조조에게 잡혀 죽었지만, 메텔루스 피우스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는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