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
1. 개요
고대 로마에 존재하던 명문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가문 이름 중 하나. 많은 집정관을 배출하는 등 고대 로마의 유력 가문 중의 하나였으며 카르타고와 대대로 싸웠다.
그러나 스키피오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에니 전쟁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밖에 모르고 보통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닌 스키피오라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게 이름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스키피오는 군사 지휘관의 지휘봉 또는 권장을 의미한다. 기원전 396년 로마 제2의 건국자로 불리는 독재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휘하의 기병대장[1] 으로 선임되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시조이다.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서는 집정관을 자주 배출하는 명문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포에니 전쟁 시기에는 적극적 주전파로 나서 한니발에게 자주 깨지기도 했지만 결국 여러 장군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후대까지 이어지는 명성을 얻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과 밀접한 동맹 및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바로 이 가문에서 스키피오 가문으로 입양된 인물이다.
스키피오 씨족은 오직 3개(그나이우스, 루키우스, 푸블리우스)의 프라이노멘(개인 이름)만을 사용하였으며 그마저도 공화정 말기로 가면 본가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분가는 루키우스로 통일된다.
아프리카누스의 경우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고 후원하는 등 당시로서는 개방적인 성향이었으나 후에 스키피오 가문이 공화정 최고의 명문귀족으로 자리잡으면서 골수 원로원파 가문이 되었다.[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살해를 주도한 것이 당시 최고 제사장이었던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였을 정도.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원로원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폼페이우스가 사망한 뒤에도 북아프리카까지 도망쳐 탑수스 전투까지 싸웠다.
2. 스키피오 가문의 인물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아프리카누스의 증조할아버지, 아시나의 아버지. 기원전 298년의 집정관으로 제3차 삼니움 전쟁에서 삼니움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을 무찔렀다.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의 형제, 그나이우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의 삼촌.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칼부스의 동생. 제2차 포에니 전쟁 첫 해인 기원전 218년의 집정관이었다. 원래 스페인 전선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자 형 그나이우스에게 휘하 군단을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와 본토의 예비군을 이끌고 한니발을 상대했다. 티키누스(티치노)에서의 기병전과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패했다. 이후 지원군을 이끌고 스페인에 파견되어 카르타고군의 하스드루발, 마고 바르카 형제와 맞섰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칼부스는 대머리를 의미한다. 아프리카누스의 삼촌.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전쟁 첫 해인 기원전 218년에는 집정관이었던 동생 푸블리우스를 수행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향함이 분명해지자 푸블리우스의 군단을 받아 대신 스페인으로 향했으며, 이후 스페인으로 파견된 푸블리우스와 함께 하스드루발, 마고 형제의 카르타고군을 상대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으로 기원전 190년의 집정관. 마그네시아 전투의 승리자로 아시아의 정복자라는 아시아티쿠스 칭호를 얻었다. 스키피오 가문의 분가격인 아시아티쿠스 가문의 시조이다. 아프리카누스의 사망 이후 셀레우코스 원정 당시 공금횡령이 있었다며 정적들로부터 공격당해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의해 사면되었지만 국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명예가 저하되었다. 벌금을 내는 과정에서 친구들의 어떤 도움도 거절했다고 한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3]
나시카는 뾰족한 코를 의미한다. 첫 번째 스키피오 나시카는 기원전 191년의 집정관이었으며, 그나이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의 아들로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이다. 그의 아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아프리카누스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두 핏줄이 합쳐져 이후의 스키피오 본가인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이 되었다. 위의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집정관직을 경쟁하는 등 아프리카누스와는 아주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저명한 법학자였다고 한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아들의 양자.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4] : 위의 나시카의 아들로 아프리카누스의 사위이자 5촌 조카. 집정관을 2회 역임하고 감찰관, 프린켑스 세나투스, 최고 제사장을 지내는 등 당대의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법학자이자 키케로가 인정한 웅변가였다고 한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 분견대를 지휘했고 이후 본군에 합류해 피드나 전투에도 참전했다. 첫 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된 기원전 162년에는 이전해의 집정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의 선거 절차 실수로 당선되자마자 사퇴해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로마에 퍼지는 헬레니즘 문화를 반대했으며, 아프리카누스의 정적이었던 대 카토와 달리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코르쿨룸의 아들. 기원전 138년의 집정관과 최고 제사장을 지냈다. 사촌이기도 한[5]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살해 주동자였고 이후 로마에서 쫓겨나 페르가몬에서 사망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도 사이가 껄끄러워 스키피오 가문의 무덤 관련으로 치졸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의 증손자, 코르쿨룸의 고손자.
보통 메텔루스 스키피오라고 불린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로,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의 마지막 후예이다. 가문의 세가 기울고 같은 이름의 아버지가 법무관까지만 지내고 사망하여 메텔루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지만 파트리키 귀족 신분을 유지했으며 계속 스키피오라고 불렸다. 친가는 공화정 역대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스키피오 가문, 입양된 가문은 공화정 후기를 지배하다시피 한 당대 최고의 평민귀족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으로 당대 로마에서 가장 화려한 혈통이었다. 출신답게 골수 원로원파로, 딸 코르넬리아가[6] 폼페이우스와 결혼하면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와 가까워진 것이 카이사르의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혼의 도움으로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와 공동으로 집정관이 되었으며, 귀족 세력의 중심으로 카이사르 반대파에 힘을 실었다.[7] 기원전 49년 초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보내도록 설득하여 내전 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에 시리아 총독으로서 속주를 착취하며 카이사르에게 대항할 전력을 긁어모았고, 파르살루스 전투의 지휘관 중 하나였지만 결국 패배했다. 이집트로 도망친 끝에 암살당한 폼페이우스와는 달리 북아프리카로 도망쳐 상당한 전력을 재건했지만 탑수스 전투에서 다시 카이사르에게 패했다. 끝까지 카이사르에게 저항하려 히스파니아로 향했으나 카이사르파 용병 함대에게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무능한 지휘관이자 속주민 착취자로 후세의 평가가 박한 편이며, 조상들의 능력이나 고귀함을 전혀 이어받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로마사의 권위자 로널드 사임은 그를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마지막 스키피오'라고 언급했다.
무능한 지휘관이자 속주민 착취자로 후세의 평가가 박한 편이며, 조상들의 능력이나 고귀함을 전혀 이어받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로마사의 권위자 로널드 사임은 그를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마지막 스키피오'라고 언급했다.
3. 기타
스키피오라는 이름의 가문이 로마: 토탈 워에 로마 삼돌이 중 한 팩션으로 출연한다. 자세한 내용은 스키피오 가문(로마: 토탈 워) 문서로.
이 가문의 이름을 따서 속명이 지어진 스키피오닉스라는 이름의 공룡이 있다.
[1]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독재관에 이은 2인자로 부독재관으로 번역하기도 한다.[2] 그나이우스 칼부스의 후손인 보수적 성향의 나시카 가문과 친헬레니즘적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계열이 가문 내에서 서로 경쟁했는데, 아프리카누스의 아들들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나시카 가문이 본가가 되었다.[3] 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이름이 모두 같은 인물이 있다.[4] 코르쿨룸은 '영리한' 정도의 뜻을 가지는 라틴어 고어로, 이 별명은 코르쿨룸 사후에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당대의 그는 스키피오 나시카로 불렸다.[5]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가 아프리카누스의 막내딸이다.[6] 원래 크라수스의 아들인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결혼했으나 푸블리우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되었다.[7]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의 핵심인 메텔루스 가문은 100년 동안 집정관 역임자만 10명을 훌쩍 넘게 배출한 번성한 가문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남계 후손이 없어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유일한 구심점으로 남은 상황이었다.